로켓 과학자인 이본 브릴이 2013년 88세로 사망했을 때 항공우주공학계는 그의 죽음을 애도했다. 그러나 뉴욕타임스의 부고 기사는 보는 사람들을 혼란스럽게 만든다.


그녀는 비프 스트로가노프를 맛있게 만들었고, 남편을 따라 직장을 옮겨 다니다가 세 자녀를 양육하기 위해 8년간 일을 쉬었다. "세계 최고의 엄마였어요." 아들 매튜가 말했다.

그러나 향년 88세로 뉴저지 프린스턴에서 수요일에 사망한 이본 브릴은 명석한 로켓 과학자이기도 했다.


자식을 키우기 위해 8년을 쉬고 엄마로서의 역할을 강조하는 등 전통적 여성성을 앞에 부각시키다보니 뒤에 그러나라는 표현이 너무 도드라져보인다.


이본 브릴은 우주선을 달과 화성으로 쏘아 올리는 데 몇 십년을 바쳤다. 로켓 엔진을 발명해 산업 전반에 그의 발명품이 표준으로 쓰였다고 한다. 30년간 나사에서 재능을 펼쳤던 그녀는 여자라는 이유로 마니토바대학교 공학과에 등록할 수 없어 화학과 수학을 전공했다고 한다. 그녀에게 나는 감사해야할 지 모르겠다. 몇 십년 뒤에 공학과에 무사히 입학할 수 있었으니까 말이다. 


어떤 사람은 젠더 평등을 원한다면 공공연히 '여성'이라는 단어를 쓰는 것을 되도록 피해야 한다고 말한다. 남성의 젠더를 언급하는 행위가 일어나지 않는 맥락 속에서 여성의 젠더를 언급하는 행위는 성차별적이라 보기 때문이다. - P72


여성의 젠더에 주의를 기울이는 게 나쁘다는 데 모두가 동의하지는 않는다. 남성의 젠더를 호출하지 않는 문맥에서조차 마찬가지다. 여성이 과학, 의학, 정치에서 성공하기가 힘들기 때문에, 그들의 젠더를 강조해야 해당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내는 여성을 더욱 잘 보이게 할 수 있다는 의견이 있다. 그들의 존재가 영감을 줄 수 있다는 것이다. - P73


둘 중 어떤 입장을 취해야 할지 나는 입장을 정하지 못했다. 원래 입장은 첫 번째 입장이라 생각했는데 두 번째 입장도 일면 이해되는 면이 있는 것이다. 


"젠더링하느냐 마느냐 그것이 문제로다"라는 논쟁의 또 다른 중요한 줄기 가운데 하나는 누군가를 '여성woman'이라고 할지 '여자female'라고 할지에 달려 있다. - P74


위와 관련해서 옥스퍼드 언어학자인 데버라 캐머런은 사람들이 '여자, -녀female'를 명사형으로 사용할 때, '여성woman'을 쓸 때와는 달리 부정적인 문맥에 쓴다는 것을 발견했다. female이라는 단어는 생물학적인 성의 여자, 암컷을 뜻하는 단어이지만 woman은 젠더와 관련하여 인간만을 가리키며 문화적인 개념이다. 

젠더 대 섹스라는 질문은 '여성 대 여자', 즉 'woman vs female'의 의미론 논쟁에서 가장 비판적인 부분을 차지한다. '여성'이 문화적이고 개념적인 젠더를 의미한다면 '여자'는 몸과 관련이 있는 섹스를 묘사할 때 쓰는 단어인가?


단어의 '진정한' 의미를 찾는 첫 번째 단계는 일반적으로 공식 정의를 찾는 것이다. (그러나 사전조차 성별 퍼즐에 대한 명확한 해결책을 제공하지 않는다.)

세계에서 가장 많이 참조되는 네 개의 사전에서 첫 번째로 '여성'은 '난자와 자손을 낳는 성인'으로 정의된다. 두 번째로는 '여자 하인 또는 가사도우미', '아내, 여주인 또는 여자 친구'라고 정의되어 있다. 사전적 정의와 실제 우리가 생각하는 '여성'의 개념의 괴리가 큰 것을 알 수 있다. 

사람들이 신체적인 의미에서의 남성성 혹은 여성성(sex)과 문화적 혹은 정체성적인 측면에서의 남성성 혹은 여성성(gender)을 여전히 헷갈리는 건 있을 수 있는 일이다. 500년 동안 두 용어가 같은 의미로 혼용되었기 때문이다. 누구도 1960년대까지 둘의 의미론적 구분을 하지 않았다.


젠더와 섹슈얼리티를 분류화하려는 시도는 19세기 독일의 마그누스 히르슈펠트에 의해 이루어졌다고 한다. 그는 섹슈얼리티와 젠더에 대해 64개의 유형을 만들었는데 남성적인 이성애 남성부터 여성적인 동성애 남성, 트랜스젠더에 이르기까지 모든 생물학적 정의를 만들려 노력했다. 오늘날 인간은 본성과 양육의 이론처럼 주어진 성으로만 젠더가 결정된다고 보지 않기 때문에 그의 이론으로 모든 것이 설명되지는 않는다.  


버틀러는 젠더가 당신이 '누구인가'를 말하는 게 아니라 당신이 무엇을 '하는가'를 말한다고 주장했다. 사람은 우리가 있도록 하는 일을 실천하기 전까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사용하는 단어들은 우리가 누구인지만이 아닌, 누구인지를 적극적으로 만들어낸다. 


우리 정체성 가운데 대부분은 고정적인 용어로 표현될 수 없고, 젠더도 이에 포함된다. - P92


사실 우리가 따를 수 있는 단일한 규칙은 존재하지 않는다. 매 순간 대화와 맥락에 의해서 좌우되는 것이다. - P93


저자는 대화가 젠더와 관련된 것일 때 단어를 더 구체적으로 선택하라고 조언한다. 예를 들어 "여성은 포궁경부암 검사에 접근할 수 있어야 한다"라고 말하는 대신에 "포궁을 가진 사람들은 포궁경부암 검사에 접근할 수 있어야 한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모든 여성이 "포궁"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또 우리의 언어를 바꾼다고 해서 우리의 사고를 바꾸지는 않는다고 하더라도 다른 사람들로부터 듣는 언어는 우리의 생각을 바꿀 수 있다. 개인적으로는 둘다 병행되어야하지 않나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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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3-09-08 09:5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어휴 너무 좋네요. 저는 완전히 적합한 사례는 아니지만 <히든 피겨스> 생각도 나고요. 공학에 재능이 있던 유색인종의 여성들이 지금 이 글을 읽으면서 퍼뜩 떠올랐습니다.
저는 아주 오랜 시간 성별 고정관념을 습득한 채 살고 있었어요. 이를테면 남자가 이성적이고 여자는 감성적이고 감성은 이성보다 열등한 것이고, 남자가 더 똑똑하고.. 하는 그런 것들이요. 그래서 대화하는 남자가 좀 멍청할 때도 ‘어쩌다 실수했나보군‘이란 생각을 하며 살았었어요. 페미니즘을 공부하고나서야 그 남자들이 멍청한 게 맞는데 제가 너무 그들을 추켜세우고 저 자신을 낮게 봤다는 걸 깨달았죠. 으.. 속상해라. ㅠㅠ

아 이 책을 읽으면서는 또 얼마나 많이 스스로를 돌아보게 될지 기대가 아주 큽니다.

거리의화가 2023-09-08 11:36   좋아요 1 | URL
저도 그런 편견과 고정관념에서 자랐기에 특히 여성이 감성적이라는 것에 대한 열등감 같은 것이 오랜동안 자리하고 있었어요. 그것이 저 자신을 비하하는 데까지 이르렀던 적이 있었고요^^; 젠더가 어느 하나로 규정지을 수 없는 복잡한 개념이라는 것을 배웠습니다.

독서괭 2023-09-08 13:2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사전정의 자체에 비하개념이 들어있다는 게 놀라운 지점이었어요!
포궁,이라고 불러야하는데 아직 입에 잘 안 붙네요. 포궁, 유아차, 시가...

거리의화가 2023-09-08 14:17   좋아요 2 | URL
맞아요. 저도 사전에 가부장적(?) 개념으로 그대로 정의되어 있다는 게 당황스러웠습니다(사전 업데이트는 어쩌면 가장 보수적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현실에서도 여전히 구시대적 사고에 의한 관념을 쓰고 있으니까요). ‘포궁‘ 저도 잘 안 붙네요. 이미 붙어버린 단어들, 머릿 속의 정체된 생각을 떨쳐내기란 요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