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5부

두만강 너머 하산, 그곳 동포들이 키우는 소는 하루에 세나라를 돌아다니며 풀을 뜯는다고 했다. 사냥꾼이 아침에 두만강을 넘어가면 저녁엔 그날 잡은 들새를 들고 돌아올 수 있었다. 그만큼 세 나라 국경은 바로 지척에 머리 맞대고 있었다. 조선과 중국과 러시아가 바로 한곳에 서서 휘둘러보이는 곳. 동포들은 여기에 터 닦고 농사짓고 사냥했다. - P42

그로부터 한인들의 노령 이주행렬은 늘어만 갔다. 1910년대에만 10만 명, 1920년대엔 20만 명. 이들이 건너가서 황폐한연해주 일대를 모두 개척했다. 신한촌(新韓村) 개척리, 수창 석인동 등지에는 제법 큼직한 한인마을이 생겨났다. 개척리(開拓里)는 블라디보스토크 항구의 변두리에 있던 한인마을이다. 수창은 수찬으로 불리던 지금의 파르티잔스크의 한국식 명칭이다. 당시 러시아 지명 카레이스카야 스라보카를 현지 동포들이일컫던 지명이다. 그곳으로 수많은 의병과 망명자들, 새 삶을찾아 떠나온 한인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 P43

딱 벌어진 가슴, 다부진 체격, 짙고 숱 많은 눈썹은활처럼 굽었고, 두 눈은 슬픈 코끼리를 닮았다. 턱수염이 점차돋아나고 굳게 꽉 다물린 입, 어느 틈에 소년은 차분하고 사려깊은 청년의 꼴을 갖추고 있었다. 낮고 무거운 목소리로 불의엔 냉정하고, 다른 사람의 슬픔에 마음 아파하는 다감한 청년이었다. 오랜 머슴살이의 고달픔은 범동이에게 땀과 슬기와 신의를 가르쳤다. 범동이는 미투리 삼다가 고개를 들고 물끄러미 오봉산 위의 저녁놀을 보았다. 노을은 이글이글 불타듯 한순간 서녘 하늘을 붉게 물들이더니 곧 가없이 깊은 어둠 속으로 잠기어 갔다. - P60

"나는 그동안 내 몸의 힘만 믿고 살아왔구나. 맑고 깨끗한 마음, 어질고 부드럽고 살뜰한 마음.… 이런 마음이 나에겐 너무나 부족했구나. 맑은 산골 물아. 너는 내 가슴으로 흘러라. 흐르고 흘러서 마음속 오물과 찌꺼기를 말끔히 씻어다오."
범동은 수계를 받고 지담 스님의 상좌가 되었다. 스님이 새법명을 지어주었다. 등불 등(燈), 밝을 명(明). 어두운 세상의밝은 등불이 되라는 뜻이다. 새 이름도 지어주었다. 광막한 세상에서 백성들에게 널리 도움을 주는 큰 그릇이란 뜻이 담겼다. 우주의 이치가 낱낱이 들어 있다는 홍범(洪範)의 그림과 구주(九縣)를 생각하다 문득 얻은 이름 홍범도!
‘아! 홍범도!‘ - P85

당시 대다수 포수들은 머리를 삼베로 감아 맨 노랑포수였다.
백두산 밀림 속에서 가시덤불을 헤쳐가며 달리는 그들은 한번나가면 몇날 며칠 머리를 못 감았다. 옷자락이 가시덤불에 걸리는 것보다 상투가 나무에 걸리는 것이 더 힘들었다. 이 때문에 상투는 진작 잘라버리고 대신 삼베노끈으로 망을 떠서 썼는데 그 땀에 절은 노란 빛깔 때문에 노랑포수라 했다. 포수들의 복장을 살펴보자. 미투리에 감발하고 바짓가랑이엔 끈으로행전(行纏)을 묶었다. 함경도식 긴 저고리는 허리띠로 동여매고 어깨에는 화승총을 메었다. 단도는 가죽집에 넣어서 허리에찼다. - P134

아무르강 어느 외진 숲 그 사방에 널브러진 어느 유망민(民) 일가의 백골을 생각한다. 낯선 타관을 정처 없이 떠돌다함박눈 내리던 날, 해저문 숲 계곡 틈에 쓰러진 채 고향 하늘그리며 숨져간 그들의 마지막 웅얼거림을 생각한다.
‘어머니‘라고 불렀을까.
사랑하는 애인의 이름을 불렀을까.
찬바람 맞으며 돌아가는 귀향 길 홍범도는 연추에서 훈춘으로 훈춘에서 밀강(密江)으로 한 바퀴 휘돌아 온성마을이 안개속에 묵묵히 바라다 보이는 국경 어구에서 두만강을 넘었다.
그토록 삼엄하던월강봉금령(越江封禁令)도 풀리어 이제는많은 이주민들이 일본군 국경수비대 분견소(分遣所) 앞을 길게장사진 이루어 초조한 얼굴로 기다리고 서 있다. 한 사람이 넘어온 두만강을 그들은 새삼스레 건너가려 하는구나.
범도는 이번에 러시아 땅 곳곳을 다녀와 커다란 깨달음을 얻었다. 언제나 겨레를 위해서 살아야겠다는 그 결심이 더욱 굳어졌다. - P202

일본군 토벌대는 말로는 폭도를 잡는다며 나섰으나 속으로는 홍범도와 만나는 것을 두려워했다. 혹시라도 접전하게 되면겁을 먹고 먼저 꽁무니 빼기가 일쑤였다. 혜산진 남쪽 30리 고거리 습격에서도 그런 일이 있었다. 수비대 진영을 기습하니일본군 병사들은 황급히 총을 버리고 숲으로 달아났다. 용맹하다는 제국군대의 꼬락서니는 이렇듯 가관이었다. 사정이 이런데도 불구하고 당시 적들의 보고서는 자신의 허점을 감추기에급급했다.
마을주민들은 원래 성품이 간악하여 폭도를 동정하는 자가 많고, 폭도를 위해 원조적 행위로 나가는 자가 있다. 이런 정황으로 금일에 이르러서는 설유(說) 및 기타 어떤 방어수단도 그 효과가 없고 형세는 날을 따라 나쁘다. - P274

"김원홍! 네 이놈! 네가 수년을 진위대의 참령(參領)으로 나랏돈을 수만 원씩 받아먹다가 나라 망하게 되면 벼슬자리 마땅히 내어놓고 시골로 들어가 감자농사나 지어 먹고 지내는 것이백성의 도리가 아닌가. 저 왜놈들 정미칠조약에 적극 참가해서인민의 반역자를 자청하니 너같은 놈은 열 번을 죽어도 시원치 않다."
홍 대장이 이어서 외친다.
"임재덕! 들어라! 네놈은 이놈보다 훨씬 악독한 도적놈이니내 너와 무슨 긴말을 나누겠는가. 그동안 네놈에게 억울히 당하여 목숨을 잃었던 백성의 이름으로 너희 두 놈을 즉각 사형에 처하노라! 다른 앞잡이 놈들도 내 말 똑똑히 들어라! 너희나내나 다 같은 동포로서 무슨 원한 그리도 많아 저런 천하 역적놈과 공모하여 나를 해치려 했느냐. 저 왜적 높은 남의 강토를제 땅으로 만들자 하니 그럴 수 있다 치자. 너희 놈들은 이 강토의 백성으로 태어나서 어찌 동족을 해치는 독사가 되었는가.
네 아비 네 어미 다 너와 같이 세상에서 아주 씨를 말려야겠다." - P303

온갖 위험을 무릅쓰고 구국사업에 기꺼이 온몸을 내던진 겨레의 별들. 그들의 죽음을 헛되게 해서는 안 된다. 잡혀간 부하들 소식을 들을 때마다 홍대장의 범 같은 눈에선 푸른 불꽃이튀었다.
그대들 원수를 내 기어이 갚아주리라. - P335

유인석은 이국 땅 호롱불 밑에서 평소 구상해오던‘의병규칙’(義兵規則)을 드디어 완성했다.
의병은 어떻게 만드는가.
의병은 어떻게 이끌어가는가.
의병은 어떻게 싸우는가.
이 세 가지 방법이 가장 중요한 골격이었다. - P348

현재 그대의 형세를 보건대 그것은 지혜가 아니라 다만 몽매함이며, 용기가 아니라 어리석음일 뿐입니다. 이제 일을 이루려 - P405

면 한두 사람의 지략이나 용기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반드시 여러 사람의 지혜와 용기를 합해서만 가능합니다. 나는 우리의 홍여천이 의도하는 바를 잘 알지 못하겠습니다. 만약 병사를 거느리고 가벼이 나아가는 것이라면 그것은 결코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그대가 비록 용감하다고 하나 어찌 옛날의 명장을 따를 수 있으리오. 지피지기(知彼知己)는 병서(兵書)의 상식이라 모든 사람이 늘 외우는 말입니다. 하지만 그대가 병사를 거느리고 여전히가벼이 나아갈 뜻을 갖고 있다면, 그것은 올바른 지피지기가 아닙니다. 그대는 이 점을 깊이 헤아려서 마음에 간직하기를 바랍니다.
이 편지를 받고 나서 홍 대장은 밤을 꼬박 새우며 생각에 잠겼다. 모든 악조건과 궁지에서 당장 벗어날 방책과 앞으로의투쟁방향을 헤아렸다. - P406

관일약이란 민중의 마음을 관통하여 하나를 이루기 위해서매우 필요한 약속이란 뜻이다. 구국의 꿈을 이루기 위해선 처음부터 끝까지 오직 관일약이었다. 약(約)이란 엽전을 꿰는 일과 같으니 비록 만금(金)이 있다 하여도 그것이 낙엽처럼 흩어져 있으면 아무런 소용이 없는 것이다. 그러니 한마음으로관일, 흔들리지 않는 신념으로 관일, 한 사람을 얻어서 관일, 열사람을 얻어서 관일, 백천만 명을 얻어서 관일, 한 나라의 모든 - P411

백성이 오직 관일을 실천한다면 국권회복의 길은 뜻밖에도 수월히 열릴 것이라 생각했다.
유인석은 이 관일약 사상을 알리려고 사방으로 편지를 보내어 공지했다. - P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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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스 2023-09-04 10:4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읽고 계시군요
저도 사서 읽으려구요
도서관에도 희망도서 신청했어요

거리의화가 2023-09-04 11:00   좋아요 1 | URL
네 분량은 제법 되는데 마치 문학처럼 쑥쑥 읽히는 마법 같은 책이네요. 그레이스님께도 좋은 독서가 되시리란 생각이 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