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장 유럽의 대마녀사냥

마법을 사형으로 처벌하기로 한 것은 찰스 5세가 1532년 제정한제국법규 <캐롤라이나> Carolina였다. 청교도 잉글랜드에서는 1542년과1563년, 그리고 1604년에 통과된 세 개의 의회법안을 통해 마녀박해가성문화되었는데, 이중 마지막 법안은 사람이나 사물에 대한 위해가 없더라도 사형에 처하도록 했다. 1550년 이후에는 스코틀랜드, 스위스, - P242

프랑스, 스페인령 네덜란드에서도 마녀의 사술을 중대 범죄로 규정하고 국민들에게 마녀로 의심되는 사람들을 규탄하도록 조장하는 법규와조례가 통과되었다. 이후 몇 년간 사형대상자의 범위를 확대하고, 마녀의 사술에 의한 것으로 추정되는 상해가 아니라 사술 그 자체를 중대 범죄로 규정하는 법규정들이 재차 만들어졌다. - P243

마녀사냥은 인구집단 내에 집단적인 정신질환을 유발하기 위해 멀티미디어 선동을 활용한 유럽 최초의 박해이기도 했다. 인쇄매체가 최초로 한 일은 마녀들의 세세한 악행과 가장 유명세를 탄 재판을 홍보하는 소책자를 통해 마녀로 인한 위험을 대중들에게 알리는 것이었다(Mandrou 1968 : 136). 이를 위해 예술가들을 모집했는데, 이중에 독일인 발둥Hans Baldung은 가장 지독한 마녀인물화를 많이 그렸다. 하지만 박해에 가장 큰 기여를 한 것은 법학자. 치안판사 · 악마연구자들이었는데, 이들은 종종 한 인물처럼 행동하곤 했다. 이들은 [마녀박해를 지지하는 주장을 체계화하고 비판에 답했으며, 법적인 장치를 완벽하게갖춰 놓음으로써 16세기 말엽에는 표준화된, 거의 관료적인 수준의 마녀재판 형식을 마련했다. 이는 국가 간에 자백의 형식이 유사한 이유를설명해 준다. 법과 관련된 일을 하는 사람들은 업무 중에 철학자나 과학자 같은 당대의 지식인이라 할 수 있을 만한 사람들의 협력을 구할수 있었다. - P245

마녀사냥은 여성에 대한 전쟁이었다. 이는 여성을 비하하고악마화하며 이들의 사회적 권력을 파괴하기 위한 집단적인 시도였다.
동시에 고문실에서, 그리고 마녀들이 죽어가던 화형대에서 여성성과가정에 대한 부르주아적 이상이 구축되었다.
여기에서도 마녀사냥은 당대의 사회적 흐름을 증폭시켰다. 실제로마녀사냥이 표적으로 삼았던 관습과 같은 시기 가족생활과 젠더, 소유관계를 규제하기 위해 도입된 새로운 입법이 금했던 행위들 간에는 틀림없는 연속성이 있다. 서유럽 전역에서 마녀사냥이 진행되는 동안 간통을 저지른 여성을 사형에 처하는 법률이 통과되었다(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에서는 대역죄인과 마찬가지로 화형에 처했다). 동시에 매춘과 혼외 출산이 불법화되었고, 영아살해는 중대범죄가 되었다. 33 동시에 여성의 우정은 의심의 대상이 되었고, 부부간의 동맹을 전복할 수있다며 교단의 비판을 받았다. 이는 마녀박해자들이, 여성들이 서로를범죄의 공범으로 비난하게 만들어서 여성간의 관계가 악마화된 것과견주어볼 만하다. 또한 중세에는 "[여성]친구"를 의미했던 "가십"이라는단어의 의미가 바뀌어 경멸적인 함의를 갖게 된 것도 바로 이 시기였다.
이는 여성의 권력과 공동체적 유대가 얼마나 침해되었는지를 보여 주는 또 다른 사례이기도 하다. - P275

마녀사냥은 악마와마녀 간의 권력관계를뒤집어 놓았다. 이제는여성이 하수인이자 노예이며 신체와 마음이모두 악령인 존재이고, 악마는 이런 여성의 소유주이자 주인이며, 뚜쟁이인 동시에 남편으로 기능한다. 예를 들어 "의도했던 마녀에게 다가가는 것은 악마이고, "여성이 먼저 악마를 불러내는 경우는 거의 없다"(Larner 1983 : 148). 악마는 마녀에게 몸을 드러낸 뒤 자신의 하수인이 되라고 요구하고, 그 뒤에는 전형적인 주인과 노예, 남편과 아내관계가 뒤따른다. 게다가 결혼생활에서 여성들이 짊어지고 갈 운명을정확하게 예시라도 하듯 마녀는 단 한 명의 악마를 맞아들인다. 하지만중세와 르네상스 시기에는 둘 이상의 악마를 맞아들이는 것이 가능했다. 또한 중세시대 지중해와 게르만 지역의 여성들 사이에서는 (헤라다이아나의 시장의 숙녀> la Signora del zogo처럼) 여성의 모습을 한악마를 추종하는 집단이 창궐했던 것과 대조적으로, 마녀사냥 시기 악마는 남성으로 그려졌다. - P277

여성의 섹슈얼리티를 모든 악의 근원이라며 비난했던 마녀사냥은,
새로운 자본주의적 노동규율에 순응하여 가족 내에서의 재산상속과 출산을 위협하거나, 노동에 들어갈 시간과 에너지를 다른 곳에 낭비하게만드는 모든 성적 활동을 범죄화하는 광범위한 성생활의 재구조화를위한 주요 수단이기도 했다. - P288

유럽 여성들의 운명과 아메리카 인디언 및 아프리카인들의 운명은아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어서 서로 상호적인 영향을 미쳤다. 마녀사냥과 우상숭배라는 비난은 아메리카 대륙으로 건너가 지역 주민들의저항을 궤멸시키고 세계인들 앞에서 식민화와 노예무역을 정당화했다.
파리네토에 따르면 유럽당국들은 아메리카에서의 경험을 통해 마녀의존재에 대한 믿음의 발판을 마련하고 아메리카에서 발달한 것과 동일한 대량살상 기술을 유럽에도 적용시키게 되었다(Parinetto 1998). - P294

합리주의와 기계론은 세상이 자연의 착취에 열을 올리게만드는 데 기여하긴 했지만 마녀박해의 직접적인 원인은 아니었다. 마녀사냥을 선동할 때 그보다 더 중요했던 것은 중세 말에 이르러 자신들의 정치경제적 권력을 위협하던 존재양식 전반을 뿌리 뽑아야 한다고느끼게 된 유럽 엘리트들의 필요였다. 이 과업이 완수된 시점에, 다시말해서 사회적 규율이 복원되고 지배계급이 자신의 헤게모니가 확립되었다고 느끼는 시점에서 마녀사냥이 중단된 것이다. 그 때부터는 마법에 대한 믿음이 조롱의 대상이 되어 미신으로 매도당하면서 기억에서사라져 가게 되었다.
17세기 말부터 유럽 전역에서 이 과정이 시작되었다. 단, 스코틀랜드에서는 30년 정도 더 오래 마녀사냥이 지속되었다. 마녀사냥의 중단 - P304

에 기여한 요인 중에는, 지배계급이 스스로 자신들이 동원한 억압기제의 불길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지배계급의 일원을 비난의 대상으로 삼게 되면서 마녀사냥에 대한 통제력을 상실하기 시작했다는 사실도 있다. - P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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