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자신이 상호작용하는 영향력을 구성하는 모자이크 중 하나라는사실을 알고 있다. 어리석게도 우리는 성공하면 그 이유를 하나만 지목하지만 실패하면 수많은 원인과 고려할 만한 사정을 든다. 우리가 적대하는 사람에게는 그 반대다. 여전히 이 모자이크는 우연의 산물이 아니라 당사자가놓인 환경을 보여주고 좀더 큰 분야나 구조 안에 존재하며, 인간은 모자이크 같은 존재지만 좀더 큰 분야나 구조에 부과된 원칙은 인간과 관련해 정확한 예측을 할 수 있게 해주는 경우가 많다. 좀더 넓은 차원에서 나타나는인간의 상호작용인 역사 또한 그런 모자이크와 외부적 한계, 불확정성과 규칙성을 갖고 있다. - P38
1945년은 미국에게도 기초가 마련되는 "첫 상황"이었지만 그렇게 인식되지 않았으며, 1947년이 냉전의 시작으로 받아들여졌다. 게다가 한국전쟁은결코 미국에게 결말이 아니었다. 그 대신 한국전쟁은 내정 개입주의자의 대외 정책과 그것을 국내에 적용하기 위한 국가기구가 탄생하는 분명한 계기가 됐다. - P43
정치적 갈등은 세 집단의 갈등을 거쳐 해결되는 경우가 많다고 아리스토텔레스는 말했다. 중도파를 둘러싸고 두 "극단파‘가 생겨나거나 두 "극단파"를 둘러싸고 중도파가 생겨난다는 것이다. 관료 정치에서 이런 대립을 보여주는 가장 진부한 형태는 A안과 C안을 받아들일 수 없는 극단적 방안으로 간주한 뒤 자연히 B안을 선택하는 것이다. 미국 대통령 가운데 리처드 닉슨은 이렇게 생각하는 방법에 가장 능숙했는데, 이런 삼단논법을 사용했다. "음, 오늘이라도 베트남에서 철수하기를 바라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들을 폭격해 석기시대로 되돌리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제 나는 그 중간을 선택하겠습니다. 내일 우리는 캄보디아를 침공할 것입니다." 1949~1951년의 위기 그 뒤 전개된 외교정책은 이 혼란기에서 배태됐다—에서도 세 가지 방안이 충돌했다. - P62
국제협력주의·봉쇄· 반격이라는 일반적 범주는 한·미 관계를정리하는 새로운 방법을 제공한다. 최초의 공식적 한국 정책, 곧 1943년부터 1947년 초반까지 다국적 신탁통치를 추진한 것은 국제협력주의적 단계를 보여준다. 신탁통치는 한국인이 좋아하지 않았고, 일본 패망 이후 몇 주또는 몇 달 동안 고심한 끝에 봉쇄 정책을 선택한 미 점령군도 마찬가지였기 때문에 제대로 기능하지 못했다. 봉쇄정책은 1947년 봄 공식적으로 승인돼 유엔의 집단 안전보장이라는 국제협력주의의 의상을 걸쳤지만, 그리스와 터키에서 나타난 것 같은 현실 정치로서 봉쇄라는 성질을 지녔다. 그 단계는 1949년 여름, 미군이 한국에서 철수할 때까지 지속됐지만, 미군이 떠나자마자 반격이라는 대안이 탁자 위에 놓였다. 반격 정책은 전후인 1950년가을에야 실시됐지만 그 전조는 1949년에 나타났으며, 얼핏 보기에 기묘한세력의 지원을 받아 태어났다. 반격 관련 초기 문서 가운데 하나는 1949년늦여름 국무부(농지 개혁을 지지한 중국 전문가들이 점령한 악의 소굴이었던)에서 모습을 드러냈는데, 다름 아닌 존 페이턴 데이비스(그의 경력과 생활은 곧조지프 매카시에 의해 파괴됐다가 작성했다. - P72
세계경제에 사회주의 국가들을 끌어들이려는 루스벨트의 원래계획은 두 가지 중요한 요인으로 인해 실패했다. 미국 정치에서 자유무역에입각한 국제협력주의를 지지하는 세력은 적고 스탈린이 통치하는 소련이 상대적으로 허약하고 불안했기 때문이었다. 소련은 가장 거대한 자본주의 세력이 자국의 영역에 들어오는 것을 허용하는 위험보다는 신중상주의적 산업화(일국사회주의가 완성되면 그다음에는 사회주의 연합을 건설하는 방안)의 안정성을 선호했다. 그 뒤 마오쩌둥이 말한 대로, 동구권 내에 있는 위성국들을 통합해 가까운 지역부터 자국의 힘을 극대화한다는 소련의 계획은 세계규모의 경쟁과는 별개인 두 개의 시장과 두 개의 세계경제, 두 개의 대안이있는 또 다른 세계 체제를 건설하는 것이었다. 국민국가 제도의 수준에서 두 강대국 사이에 전개된 대립의 변증법은 모든 곳에서 민족주의적 해결을 강요했으며, 군사·정치·이념적 갈등의 전선을 강화했다. 전후 양극의 첨예한 대립이 전개된 기간은 패권국의 통제와 동맹을 강화시키고 국내 모든 분야의 동원을 촉진했으며, 그 영향을 받은 정치제도의 정치적 통합과 억압을 조장한 것으로 여겨진다. 달리 말하면 통합을 강화한 두 개의 연합이 국제 정치와 국내 정치를 동시에 양극화한 것이다. 해빙과 화해의 기간에 동맹은 약화됐고, 동맹국들은 다른 세력과 교섭하기 시작했으며, 초강대국의 갈등에 따라 만들어진 국내의 정치적 연합은 약화되거나 무너졌다. - P78
한국을 봉쇄해야 한다는 논리는 두 가지 전제로부터 펼쳐졌다. 봉쇄는 미국의 위신을 높일 것이며, 남한을 일본 산업의 배후 지역이자 일본방어의 앞마당으로 만들어 일본에서는 반대 경로로 나아간다는 것이었다. 1940년대 초반 대체로 "일본에 우호적 성향을 지니고 있는 것으로 파악되던 국무부 관료들은 죄를 묻지 않는 점령 정책을 주장하면서 전후 일본의 안보를 한국의 안보와 연결시켰다. 일본에 우호적인 세력은언제나 한국을 "작은 일본"이라고 희화화했으며, 중국 국민당 지지자와 반대자들은 이승만에 대한 호불호가 갈렸음에도 모두 그를 "작은 장제스"라고봤다. 휴보턴은 초기 계획과 1947년 문서를 입안하는 데 힘을 보탰지만, 앞서와 다른 점은 그와 몇몇 인물들이 해리먼, 후버, 조지프 그루 같은 중량급의 일본 우호 인사들에게 조언했다는 사실이다. - P97
동아시아에서는 일본만이 케넌의 관심을 끌었다. 1947년 그는 혹평을 받고 새로운 전략을 수립해 "역진 정책" 또는 케넌의 복고주의라고 부를 수 있는 정책을 고안했다그는 맥스 비숍과 일본 로비의 큰 도움을 받았다. 애치슨은 일본이 미국에 버금가는 산업국으로 부흥해 세계경제를 증진시키는동력으로 자리 잡기를 바랐다면, 케넌은 일본을 그 지역에서 미국에 버금가는 강대국으로 회복시켜 패권국을 견제하되 이전에 장악했던 세력권을 자유롭게 지배하기를 바랐다. 애치슨과 그 밖의 국제협력주의자들은 태동하고있는 아시아 대륙에서 한국을 포함한 여러 지역을 일본의 부흥과 연결시키는 문제를 세계경제의 관점으로 바라봤다. 케넌은 일본을 다시 소련의 대항세력으로 만들어 20세기 초반과 같은 세력 균형을 확립하고 미국인의 피와재산을 쓸데없이 유출하지 않기를 바랐다. - P105
단독정부는 통일된 한국으로가는 첫걸음이라고 존 스태거스는 생각했다. 1946년 말 그는 "이 정부(원문그대로)를 승인한 뒤 남한의 한국인들에게 [공산주의자의] 문제를 처리하게하자"고 말했다. 미국은 소련을 신경 쓰지 말고 남한 정부를 승인해야 했다. "그런 뒤 우리는 북한 상황을 처리할 것이다."88이 계획의 중심에는 1946년 12월부터 1947년 3월까지 이어진 이승만의미국 방문이 있었다. 이승만도 자신의 위상을 만들어내던 시점이었다. 이승만은 자신의 로비스트와 측근들이 지닌 작은 영향력을 최대한 활용해 고위관료와 접촉했다. 이승만은 로버트 패터슨 육군 장관이 자신을 이미 "한국의 대통령"으로 생각하도록 만들기까지 했다. 조지 메인스는 자신이 태어난 주의 상원의원 아서 반덴버그와의 친분을 이용해, 두 당을 오가며 활동하는 이 중요한 인물의 발언을 이승만이 들을 수 있도록 했다. 해리스 목사는 반덴버그에게 편지를 써서 이승만이 허버트 후버와 헨리 루스의 지지를받았다고 말하면서 굿펠로를 "한국의 고위 책임자로 추천했다. 올리버 · 굿펠로 윌리엄스·임영신(루이스 임) 등은 미국 의회 주위를 돌아다니면서활동했다. - P115
미국은 소련이 1차 미소공위에서 비타협적이었다고 생각했으며, 1947년 초에는 세계 어느 지역에서도 소련과는 합의할 수 있다고 기대하지 않았지만, 사안을 유엔으로 넘기려는 움직임의 실질적 속셈은 다른 데 있었다. 사실 그것은 미국의 정책 내 근본적 대립-서울의 군정청과 워싱턴의 미국 정부, 미국 정부 부처 사이의 의견 차이-을 홀륭하게 통합한 것이었다. 유엔의 보호 아래 한국 정책을 맡김으로써 국무부는 비용을 들이지 않은 채 국제협력주의의 장점을 재주장하고, 다시 말해모스크바와 실제로 협상하지 않으면서 다국간 공동 정책과 합리성의 인상을 얻음으로써 서울을 현상유지할 수 있었다. 미국은 봉쇄를 시행하고 그것을 국제협력주의라고 부를 수 있었다. - P118
유엔한국임시위원단이 서울에 도착했을 때 미국 국무부 대표 조지프 제이컵스는 미국이 임시위원단의 심의에 어떤 방식으로든 영향을 미치려는 의사가 없다고 언론에 말했다. 그러나 유엔한국임시위원단은 시설・통신・교통을 미 점령군에게 완전히 의존했다. 미 점령군은 대표단을 보호하고 회유하는 데 온 힘을 기울였으며, 휘하의 모든 조직과 수단을 이용해 자유롭고 공정하게 "감시된 선거를 선전·지지 · 후원했다. 앞서 미소공위와 마찬가지로 대표단은 서울에서 오랜 시간을 머무르면서 다양한 정치 세력의 증언을 들었다. 대표단이 지방을 순회할 때는 미국과 한국 관료들이 세심하게 안내했다. • 그 밖의 "감시원들은 임시위원단 감시단을 미행하면서 그들이 어떻게 행동하고 무엇을 봤으며 어떤 태도를 드러냈는지 미 점령군 사령부에 날마다 보고했다. 군정청 경무부는 한국인들이 임시위원단에 보내는 편지를 검열했다. - P128
외교정책을 둘러싼 트루먼-맥아더의 충돌과 국내의 매카시즘은 국가와사회의 심연에서 싸우는 고래 두 마리가 수면으로 나와 내뿜는 물줄기였다. 그 두 세력은 개인·관료·이해관계자 · 정당을 놓고 서로 대립했으며, 정치·경제와 세계에서 미국이 행사하는 역할에서 대안적 개념을 만들어내면서 다퉜다. 이런 갈등은 19세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 흔적과 향수鄕愁는 1980년대까지 이어졌지만 절정은 1930~1950년에 이르는 20년이었다. 근본적으로그 갈등은 자본가와 관료 조직의 서로 다른 이해관계에 뿌리를 두고 있었으며, 상반된 세계관과 정치적 연합을 만들어냈다. 이런 적대 관계는 외교정책에서 중국인이 두 노선이라고 불렀으며, 여기서는 국제협력주의와 반격이라고 부른 노선의 투쟁으로 표출됐다. - P136
"이 시대의 주요 역설 가운데 하나는 자유주의 세력이 미국의 좌익을 거부한 새로운 자유주의를 구축하고 적색공포라는 근본적 전제와 전술을 수용하는 데 예상외로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것"이라는 메리 매컬리프의 지적은 매우 타당하다. 대외정책에서 그 효과는 수용을 중시하는 국제협력주의자의 생각을 결박하고 마비시키며, 반격이라는 대안을 허용하도록 밀어붙였다는 것이다―이것은 한국전쟁이 시작되기 바로 몇 주 전의 일이었다. - P186
정치적 영역에서 활동하는 인물들은 기록을 그만큼 존중하지 않으며, 정보활동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대체로 기록을 전혀 존중하지 않으면서사실과 자신의 양심)을 절대 개봉될 리 없는 역사의 쓰레기통 속에 던져버린다. 삭제는 보존만큼이나 일반적인 일이다. 신성한 학문의 세계에서도 어떤결정을 내린 까닭을 적어놓지 않는 경우가 때로 있지만, 학자들은 흔히 일어나는 이런 일상사를 그리 크게 의식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용할수 있는 자료에만 집중해야 하며 우리 자신의 추론으로 그것을 질식시켜서는 안 된다. - P198
미국인은 1945년 이후 운산금광의 금이대부분 채굴됐다고 생각해 거기에 더 이상 관심을 두지 않았다고 말한다2그러나 1945년 이후에도 광산은 이용할 가치가 있었던 게 분명하다. 북한의금 생산량은 상당했으며, 그 광산은 소련인이 직접 경영할 정도로 중요했다. 1940년대 후반 북한은 금을 대량 수출했고, 그 뒤 북한 정부는 시장 가격보다 낮게 금을 대량으로 사간다며 소련을 비난했다. 물론 텅스텐과 특정 방사능 물질이 금광 주변에서 발견되는 경향이 있다는 지질학적 사실도 덧붙일 만하다. - P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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