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국의 소녀들 - 경성제일공립고등여학교생의 식민지 경험
히로세 레이코 지음, 서재길.송혜경 옮김 / 소명출판 / 202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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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가하라 요코는 '식민지 책임론'을 "식민지주의의 역사에 대해 그 유산이자 지속을 극복하려는 입장에서 다루게 될 문제 영역"이라고 명확히 정의했다. 나아가 '평시의 식민지주의'라는 개념도 제기했다. '평시의 식민지주의'에 대응하는 것이 무엇인지는 명확하지 않지만, 아마도 '전시의 식민지주의'가 아닐까 한다. 어쨌든 그 함의는 '일상화한 체제로서의 식민지주의'라는 말로 명확히 드러나고 있다(P17).

여성사 연구는 '전쟁 책임'을 바라보는 관점을 일국적 시야에서 벗어나도록 하여 식민지에서의 전쟁 책임, 그리고 식민지 책임이라는 관점, 방법을 스스로 찾을 수 있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P22).

여성의 '식민지 책임' 특히 일본 여성의 '식민지 책임'을 논의함에 있어 저자의 생각을 말하려 한다. 첫 번째로, 남성과 여성의 차이를 지적할 필요가 있다. 두 번째로, '식민지 책임'과 관련하여 개개의 여성이 같은 무게의 죄를 짊어지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를 생각해야 한다(P23).

엘리트 여성이 어떤 논리로 식민지 지배에 가담하게 되는가에 대해서는 연구성과가 발표되고 있다. 그러나 식민지로 건너가 식민자로서 그곳에서 생활한 여성이나 식민지에서 태어나고 자란 식민자 2세에 대해서는 많은 공백이 남아 있다. 여성단체나 식민자의 일상생활에 관한 연구는 이제 시작 단계에 불과하다(P24).

그동안 식민지 지배에 대한 연구는 많은 진전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식민 남성 주체 권력의 입장에서 쓰여진 책은 많으나 그 밖의 책은 여전히 부족한 실정이다. 이 책은 식민자들의 관점에서 식민지가 어떠했는지 개인의 경험을 확인할 수 있는 책이다. 특히 식민지에서 살았던 여성을 상대로 한 설문조사와 인터뷰, 이들의 저작을 자료를 기반으로 쓰여졌다. 특이한 점은 식민지에서만의 경험이 아니라 이들이 일본으로 귀환하고 현재까지의 시점을 역추적한다는 점이다.
설문조사에 응한 사람 21명, 인터뷰를 실시한 사람은 16명으로 식민지 시기 경성제일공립고등여학교에 재학했던 이들이 그 대상이다. 이들은 대부분 조부모나 부모를 따라 경성에 들어왔다.

이들 대부분은 식민지 조선에서 풍요롭게 생활한 경우가 많았다. 부모가 식민지 관리인 경우 수당이 따로 있어서 내지에 비해 수입이 월등히 좋았고 자영업을 하는 경우에도 저렴한 임금으로 조선인을 고용하여 생활했기 때문이다. 고용인을 고유명사로 부르는 경우는 거의 없었고, 기혼 여성은 오모니, 미혼 여성은 기지배라고 불렀다. '하나짱', '하나양'처럼 일본식 호칭을 부르는 경우도 있었다. 조선인 고용인들의 생활이 어떠했을지 짐작이 간다. 물론 소수의 고용인은 주인과 그 자녀들과 잘 지내는 경우도 있었다고는 하나 대부분은 그렇지 않았을 것이다.

경성제일공립고등여학교는 "청결, 정돈, 운동, 우애, 공검, 순종"등의 덕목을 강조했고(내지 교육의 연장) "그대들에게는 신부의 동포를 지도해야 할 큰 책임이 있다"라고 지도했다(피식민자 지도 역할). 불평등의 구조가 스멀스멀 올라온다.
수신 시간에는 숙녀로서의 지성과 품격 있는 현모양처가 될 것, 정조관념을 가질 것 등에 대한 설명을 들었다(A씨). "따분한 시간(M씨)"이었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고, 친구가 "천손강림 이야기에 대한 의문"을 교사에게 질문했던 것을 기억하는 사람도 있었다(S씨). 중일전쟁이 발발한 이후인 1938년에 입학한 35회 졸업생부터는 전쟁에 대한 협력, 필승의 신념(L씨), 국가에 진력할 것(U씨) 등이 강조되었다. 다만 개인이 받아들이는 방법에는 차이가 있어서 10명은 내용을 거의 기억하지 못하고 있었다. (P71~72)
역사와 지리 시간에 배운 것은 일본 신화를 시작으로 한 역사, 조선반도 지도를 중심으로 학습했다고 한다. 중일전쟁 이후에는 교실에 커다란 중국 지도가 걸려 있었고, 일본군이 점령한 지명에 히노마루 깃발을 세웠다고 한다(I, J씨). ...
여학교에서는 매일 일기를 써서 제출하는 것이 의무였다. 일기장은 「매일의 발걸음」이라는 제목이었는데, 1학년 때는 붓으로 쓰도록 지도받았다(P84). J씨는 이때의 교장에 대해 "군대에 물들어 있었다고 평가했다. 또한 M씨는 다른 어떤 교장에 대해 "자기 딸에게는 권하지 않으면서 생도에게는 종군간호부를 권했다"라고 기억했다(P85). 참으로 어처구니가 없는 일들이다.

교육 내용에서도 짐작이 되지만 이들이 받은 교육은 식민지 지배와 밀접한 관계를 맺으며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애초부터 식민지민들의 지도를 주문받고 시작한 곳이었으니 말이다.
3.1운동 후 일본은 내선일체를 강조하며 일본인 여학생과 조선인 여학생 합동음악회 등이 열렸고, 만주사변 후에는 음악회에 <기미가요> 등 황국찬미의 색채가 강화되는 음악들과 고사기 신화 등을 기반으로 한 <조국> 음악이 울려퍼졌다. 전쟁이 심화될수록 군사 훈련 등이 강화된 것은 말할 것도 없다. 1942년 부여신궁 조영을 위해서 근로봉사가 할당되고 비행기 등에 들어가는 운모 깍기 작업에도 참여했다고 한다.

이들이 사는 곳은 조선인들이 사는 주거 지역과 엄연히 분리되어 있었다. 식민지에서 일본인의 격리된 집단주거=피식민자인 주민과의 거주지 구분에 의한 공간의 분할, 지배 언어와 피지배 언어라고 하는 언어의 분할 및 식민자의 모노링구얼한 언어상황은 타자와의 만남을 곤란하게 하는 것이었고, 황민화 정책은 만나야 할 타자 그 자체를 말살하려는 기획 그 자체였다(P124).
인포먼트(설문자+인터뷰인)는 조선인을 종속자의 입장으로 바라보았고, 일본어의 강제는 당연한 풍경으로 여겼으며 창씨 개명을 하는 상황에 대해서도 특별한 의문을 가지지 않았다. 이처럼 그들은 분명 조선이 식민지라는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그 의미를 깊이 생각한 일은 없었다.

그런 그들은 1945년 일본이 항복을 선언한 뒤 충격과 혼란을 겪는다.
"학교는 청진에서 온 피난민과 군인들로 가득차 있었고 직원실은 몹시 혼잡했다. (...) 재학증명서를 받고 마지막으로 교장실과 직원실의 당번을 했다. 그 다음에 각 교실에 걸려 있는 '청소년 학생에게 내리는 칙어' 및 '황국신민의 서사', 후지산 액자, 그 외 전쟁에 관한 이러저러한 사진, 그리고 '특공혼으로 임무완수'라 적힌 종이 등을 모두 불살라 버렸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교장실에 있는, 행사 때마다 봉독되던 여러 종류의 칙어도 일동이 큰절을 하는 가운데 소각해 드렸다. 선생님들과도 이루 다할 수 없는 이별을 고하고, 마지막으로 정말 마지막으로 봉안전을 받들어 깊고도 깊게 길고도 길게 큰절을 한 뒤 하교했다(P156).

한반도에 미군이 들어오고 위험을 인지한 이들은 인양(=일본으로의 귀환)을 재촉하게 된다. 그러나 식민자 2세로서 조선에서 태어난 이들은 인양이라는 말의 의미를 이해하는 일에 곤란을 느꼈던 것 같다. 일본은 다른 나라였던 것이다. 이들은 조선에서 나고 자랐기 때문에 일본에 가본 적이 거의 없다. "어째서 인양해야 하는 걸까, 어디로 인양해야 하는 걸까"라고 생각했던 Q씨. "조선인이 되어도 좋으니까 경성에 남고 싶었다"는 O씨. 그러나 이들은 인양을 받아들여야만 했다. 식민지 지배에 대한 원망과 분노가 조선인들 사이에서 폭발했기 때문이다. 막상 일본에 도착한 이들은 "침략자인 너희들이 돌아와서 우리가 굶주린다"라고 쓰인 벽보를 맞닥뜨린다(T씨).

인양을 했더니 이번에는 '인양자'라는 꼬리표가 붙어 있었다. 이 말은 규슈의 치쿠고 부근에서는 차별어에 가까운 표현이었다. 입장이 뒤바뀌어 이번에는 조국의 사람들로부터 '인양자'라고 차별을 당하는 처지가 된 것이다. 집이 없고, 땅이 없다는 두 가지 이유로 '인양자, 인양자'라고 불렸다. 견뎌내기 힘든 어려움을 겪었다. 이처럼 '인양자'라는 차별어 속에서 살아왔기 때문에 그 이후 내 속에는 늘 일본인이면서도 '재일 일본인'이라는 의식이 있었다(P174~175). 이들은 기존에 자신들이 가졌던 인식을 전환할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다.
나는 이들의 인양자로서의 차별의 경험을 지켜보면서 조선인이 식민지에서 겪었던 차별, 그리고 재일조선인이 일본에서 겪었던 차별(ex: 파친코) 등을 떠올렸다.

일본에 우여곡절 끝에 정착한 뒤 1965년 한일국교 수립이 이루어지고 나서 이들은 여러 가지로 자신들의 생각을 정리하게 된다. 대부분은 조선에 대한 향수와 그리움을 느끼는 경우가 많았고, 일부는 불편한 마음, 아무 것도 몰랐던 것에 대한 고통과 미안함을 느꼈고 소수지만 식민지 책임에 대한 자각까지 이어진 경우도 있었다. 자신의 체험을 수기로 남기기도 하고 소설을 쓰기도 하는 등 적극적인 표명을 하기도 했다.

L씨는 오랫동안 품어왔던 "조선인과 일본인 사이의 빈부의 차이는 왜 생겼을까?"라는 의문에 대해 한 권의 책(노로 에이타로의 『일본자본주의발달사』)과의 만남으로 해결되었다고 한다.

일본과 조선의 관계가 식민지 지배에 의한 부조리하고 불평등한 관계였다는 사실을 마치 구름 낀 하늘이 맑아지는 것처럼 점차 이해하게 되었다. (...) 식민지 지배라고 한마디로 말하지만, 그 내용은 정치, 경제, 교육, 문화, 군사, 경찰 등 다방면에 걸쳐 모든 분야에서 지배와 압력이 가해졌다는 것, 그 때문에 조선인은 35년 동안 말로 다할 수 없는 고통을 맛보아야만 했다는 것을 드디어 알게 되었다. (...) 우리 가족의 생활-그것이 자국의 이익만을 추구했던 조선에 대한 일본의 '식민지 지배'의 결과였음을 알게 되었을 때의 놀라움은 아주 컸다. 아버지와 오빠들이 범한 일본인의 죄를, 내가 어리고 또 아주 무지했다 하더라도, 아니 그렇기 때문에 더욱 일생 짊어지고 살아가야만 하지 않을까,라고."(P200)

이케다 마사에는 전후 앰네스티 회원으로 활동하면서 조선에서 성장한 것을 되돌아보게 되었다.
엠네스티 회원이 되어 남아프리카에서 자행되는 심각한 차별을 보고 아연실색했던 날, 생각해보니 우리들이 식민자로 같은 일을 해왔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어린아이를 집에 남겨둔 채 일하러 온 중년 부인에게, 그녀의 이름은 알려고 하지도 않고 그저 '오모니'라고 부르면서 아무렇지도 않게 허드렛일을 시켰던 일, 학교에서는 아이들에게 조선어를 금지하고 일본 역사를 가르치면서도 조선 역사에 대해 알고 싶어 하는 아이를 위험 아동이라고 낙인찍는, 그런 시대였습니다. 일본인에게는 6할의 수당이 붙었습니다. TV 화면을 통해서 "나는 흑인을 차별한 적은 없습니다"라고 외치는 백인 소녀의 모습, 그것은 우리들 그 자체였습니다. 무지했습니다. 과거 제자들이 서울에서 정신대, 즉 위안부였다는 사실 때문에 괴로워하고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제 얼마 남지 않은 인생입니다만, 종군위안부 문제에도 참여해야겠다고 결심했습니다. 지하갱도에서 일했던 사람도 강제 연행된 조선 분들입니다. 그 사실에 대한 목소리를 이제 겨우 내기 시작했습니다."(P202)

오다 미노루는 글에서 "자기 안에 있는 가해자 체험(혹은 그 가능성)을 자각하고 그것을 타자의 가해자 체험과 동시에 집요하게 고발해 가는 태도가 요구된다"라고 지적하고 있다. 소수지만 식민지 책임을 자각하고 올바르게 행동하는 이들이 있음에 다행이다.

하지만 이 책을 읽는 것은 역시 마음이 찜찜하고 불편하다. 이들의 다수는 여전히 당시의 조선을 모르고 조선인을 모르고 있으며 그들이 권력자인 동시에 가해자임을 제대로 깨닫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만약 그들이 식민지에서 겪은 체험만 이야기했다면 실망했을텐데 일본에 귀환한 후 그들의 생활이 어떻게 되었고, 어떤 감정을 겪었는지 알게 되어서 그래도 수확이 있었다. 그리고 식민자 2세, 그것도 여성의 이야기는 희소성이 있어서 더 의미가 있었다. 앞으로 더 많은 관련 연구가 나오길 희망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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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23-05-31 04:0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어릴 때는 잘 모르기도 할 것 같습니다 어쩐지... 일본 사람은 자기들이 전쟁에서 질 리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많았어요 전쟁을 반대한 사람이 많지 않았던 것 같아요 아주 없지 않았지만... 지금은 더 모르지 않을까 싶어요 독도 문제는 여전하고...


희선

거리의화가 2023-05-31 09:51   좋아요 0 | URL
아이들이었을텐데 뭘 알았겠습니까. 보고 배우는 환경이 그런 것도 있었고(부모, 국가의 영향 등) 갈수록 전쟁이 심화되면서 배우는 교육도 전쟁필패를 외치니 끌려들어갈 수 밖에 없었을 것 같아요. 하지만 그럼에도... 돌아가서라도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고민해보는 일은 필요했을텐데 대부분은 조선에 살았던 시기를 ‘좋았던 시기, 향수‘ 이런 식으로 생각하니 아쉽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