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공은 「자재梓材」라는 시를 지어 군자가 지켜야 할 법과 원칙을 알려주었다. 따라서 그에게 「강고康誥」, 「주고酒誥」, 「자재」라고 이름을 지어 가르쳐 주었다. 강숙이 봉국에 이르러 이러한 주공의 명을 잘 따랐으므로, 그곳 백성들을 화목하게 하고 안정시키니백성들은 크게 기뻐하였다. 성왕이 어른이 되어 정사를 처리하게 되자, 강숙을 천거하여 주나라의 사구司憲사공의 다른 이름로 삼고, 위衛나라의 보배로운 제기祭器를 내려 주어 그에게 덕이 있음을 널리 알렸다. - P216
선공은 [제나라 여자를 얻어] 아들 수와 삭朔을 낳았으며, 좌공자左소로 하여금 그들을 보좌하게 했다. 태자 급의 어머니가죽자 선공의 정부인夫人은 삭과 함께 태자 급을 헐뜯고 미워했다. 선공은 스스로도 그가 태자의 아내될 여자를 빼앗은 일이 있은 후로 마음속으로 태자를 미워하여 그를 폐위하려고 했다. 그에 관한악평을 듣고 선공은 크게 노여워하여 태자 급을 제나라에 보냈다. 떠나보내면서 태자에게 백모(경대부가 제후에게 초빙되어 갈 때 몸에지니고 가는 일종의 신표)를 주고는 도적에게 백모를 들고 가는 자를 보거든 국경에서 그를 죽여 버리라고 일렀다. - P220
의공은 자리에 오르고 나서 학을 기르는 것을 좋아하였으며, 음탕한 것을 즐기고 사치스러웠다. 의공 9년, 적나라가 위나라를 치자 의공은 군대를 일으켜 막으려하였으나 군사들 중 일부가 모반했다. 대신들이 말했다. 1964 "당신께서 학을 좋아하시니 학을 보내어 적나라를 치도록 명령하십시오." 적나라는 이에 마침내 쳐들어와서 의공을 죽였다. - P222
[군각] 21년, 진나라] 이세가 군각을 폐위하여 평민이 되게 하자 위나라의 제사가 끊어지게 되었다.
태사공은 말한다. "내가 「세가」에 기재된 것들을 읽다가 선공의 태자가 부인 문제로주살되었고, 그의 동생 수가 죽음을 다투어 서로 양보하는 대목에이르렀는데, 이는 진나라 태자 신생申生이 여희驪姫의 과실을 거론하지 않은 것과 같은 것이니 이 모두가 아버지의 뜻을 심하게 손상하는 것을 두려워한 것이다. 그러나 결국 죽음에 이르렀으니찌 슬프지 아니한가! 어떤 때는 아버지와 아들이 죽이고, 형과동생이 서로 없애려 하니 이 또한 어찌된 일인가?" - P235
미자가 말했다. "아버지와 아들 간에는 골육의 감정이 있고, 임금과 신하 사 - P241
이에는 도의道義로 묶여 있다. 그러므로 아버지에게 잘못이 있으면아들이 세 차례 간할 것이나, 그래도 듣지 않는다면 그를 따라다니며 외치면 되지만, 신하된 자가 세 차례 간하여도 군주가 듣지 않는다면 신하는 그 도의상 떠나면 될 것이다." 이에 태사와 소사들이 미자에게 떠날 것을 권하니, 미자는 마침내떠나 버렸다. 주나라 무왕이 주왕을 정벌하여 은나라를 무너뜨리자, 미자는 종묘의 제기를 가지고 [무왕의] 군문軍門으로 가 윗옷을 벗고 손을 등뒤로 묶고는, 사람을 시켜] 왼쪽으로는 양을 끌도록 하고 오른쪽으로는 띠〔茅]를 쥐게 하고는 무릎으로 기어가면서 무왕의 앞으로나아가 아뢰었다. 이에 무왕은 미자를 즉시 풀어 주고 그의 작위를이전과 같이 회복시켜 주었다. - P242
무왕은 즉시 기자를 조선에 봉했으나, 그를 신하로 대우하지는 않았다. 그 뒤 기자가 주왕을 조회하기 위하여 옛 은나라의도읍지를 지나가다가, 궁실이 훼손되어 벼와 기장이 자라고 있는 것을 보았다. 기자는 상심하여 소리 내어 울고 싶었으나 그럴 수 없고, 울먹이려니 아녀자들 같아서, 「맥」라는 시를 지어 노래했다. 그 시에서 말했다. "보리 이삭은 점점 끝이 뾰족해지고, 벼와 기장은 싹이 올라 밝디밝구나. 저 교활한 아이가 나에게 친하게 대하지도 않네!" 여기서 말하는 교활한 아이는 주왕을 가리킨다. 은나라 백성들이듣고는 모두가 눈물을 흘렸다. - P249
가을, 초나라가 송나라를 치면서 정나라를 구하려고 했다. 양공이싸우려 하자, 자어가 간하여 말했다. "하늘이 상 왕조를 버린 지 오래되었으니 맞서서는 안 됩니다." 겨울 11월, 양공은 초나라 성왕과 홍수에서 싸움을 벌였다. 초나라 군사가 미처 강을 다 건너지 못하였을 때, 목이가 말했다. "저들은 많고 우리는 적으니 그들이 아직 건너지 못했을 때 그들을 칩시다." 그러나 양공은 듣지 않았다. 그들이 이미 건너기는 했으나 전열을 - P256
갖추지 못했을 때, 목이가 다시 말했다. "지금이라도 공격하면 됩니다." 양공이 말했다. "그들이 전열을 갖출 때까지 기다립시다." 초나라 군사가 전열을 갖추고 나서야, 송나라 사람들은 그들을 공격했다. 송나라 군대는 크게 패하였고 양공은 넓적다리에 상처를 입었다. 송나라 사람들은 모두 양공을 원망했다. 양공은 말했다. "군자는 다른 사람이 어려움에 빠져 있을 때 그를 곤궁에 빠뜨리지 않고, 다른 사람이 전열을 갖추지 못했을 때 북을 두드리지 않는법이다.". 12자어가 말했다. "전쟁이란 승리하는 것을 공으로 삼아야 하거늘, 어찌 일상적인말을 하십니까? 당신 말대로 하면 [틀림없이] 노예가 되어 다른 사람을 섬기게 될 뿐이니, 또한 무엇 때문에 전쟁을 하십니까?" - P257
"송나라 왕은 주왕이 했던 만행을 다시 저지르고 있으니, 죽이지않을 수가 없습니다." 모두들 제나라가 송나라를 정벌해야 한다고 말했다. 송나라 왕언이 왕의 자리에 오른지 사십칠 년 만에, 제나라 민왕은 위魏나라, 초나라와 함께 송나라를 정벌하여 송나라 왕언을 죽이고 마침내 송나라를 멸망시키고는 그 땅을 세 나라가 나누어 가졌다. F태사공은 말한다. "공자가 일컫기를 ‘미자는 [은나라 주왕을 떠났고 기자는 노예가 되었으며 비간은 간언하다가 죽었으니, 은나라에는 어진 세 사람이 있었다.‘ 라고 했다. 『춘추』에서는 송나라의 내란은 선공이 태자를 자리에서 내쫓고 동생을 내세워 군주가 되게 한 것으로부터 시작하여, 나라가 편안함을 얻지 못한 것이 십 대나 된다고 풍자했다. 그러나 양공 때는 인의仁義를 닦아 맹주盟主가 되고자 했다. 그의 대부 - P264
大夫 정고보正考父는 그를 찬미하여, 설契, 탕湯, 고종高宗7 시대를거슬러 서술하였고, 은 왕조가 일어난 것을 바탕으로 「상송商頌」을지었다. 양공이 홍수에서 패하기는 하였으나, 군자들 중에 어떤 이는 칭찬할 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였으니, 당시 중원의 나라들이예의가 없는 것을 슬퍼하면서, 그를 기린 것은 송나라 양공에게는양보의 예의가 있었기 때문이다." - P265
헌공은 몰래 여희에게 말했다. "나는 태자를 폐하고 해제로 그를 대신하고자 한다." 여희가 흐느끼며 말했다. "태자를 세운다는 것은 제후들 모두 이미 그것에 대해 알고 있으 - P278
며, 그는 여러 차례나 군대를 거느렸고 백성들이 그에게 의지하고있는데 어떻게 천첩 때문에 적자를 폐하고 서자를 세울 수 있겠습니까? 주군께서 꼭 그렇게 하시겠다면 천첩은 스스로 목숨을 끊겠습니다." 여희가 태자를 추켜세우는 척하였으나 몰래 사람들로 하여금 태자를 비난하게 하여 자기 자식을 태자로 세우려고 한 것이었다. [헌공] 21년, 여희가 태자에게 일러 말했다. "군왕께서 꿈에 제강을 보았사온데 태자께서는 빨리 곡옥으로 가서 제사를 올리고 그 음식은 군왕께 보내시오." 태자는 이에 곡옥으로 가서 그의 어머니 제강에게 제사지내고 제육祭肉제사 고기 헌공에게 바쳤다. 헌공은 이때 밖으로 사냥을 나갔으므로 제육을 궁중에 놓아 두었다. 여희는 사람을 시켜 고기 속에독을 넣었다. 이틀이 지나 헌공이 사냥에서 돌아오자 주방장이 제육을 헌공에게 바쳤다. - P279
어떤 사람이 태자에게 말했다. "이 독약을 만든 사람은 여희이거늘 태자는 어찌하여 스스로 해명하는 말을 하지 않으십니까?" 태자가 말했다. "우리의 군왕께서는 늙으셔서 여희가 아니면 잠도 편안히 주무시지 못하고 식사도 달게 드시지 못하오. 만약에 그것을 해명하면 군왕께서 여희에게 노여워하실 테니, 그리 할 수 없습니다." 어떤 사람이 태자에게 일러 말했다. "다른 나라로 달아나는 것이 괜찮겠습니다." 태자가 말했다. "이 더러운 이름을 뒤집어쓰고 밖으로 도망친다면 그 누가 나를용납하겠소? 나는 스스로 목숨을 끊을 뿐이오." - P280
혜공 7년, 중이를 두려워하여 환관 이제로 하여금 장사들과 함께가서 중이를 죽이라고 했다. 중이는 이 소식을 듣고 조최 등과 의논하여 말했다. "처음 내가 적나라로 달아났으나 적나라가 내가 일어나는 것을도와줄 거라 생각지 않았소. 다만 거리가 가까워 쉽게 도달할 수 있었기 때문에 잠시 머문 것이오. 이만하면 오래 머물렀으니 정녕 큰나라로 옮겨 가기를 원하오. 제나라 환공은 선한 일을 좋아하고 패왕이 되는 데에 뜻을 두고 있으며 제후들을 구휼하는 데 뜻이 있소. 지금 관중과 습붕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으니 이때 또한 현명하고 능력 있는 선비의 보좌를 얻고자 한다는데 [내] 어찌 가지 않겠는가?" 드디어 제나라로 떠났다. - P297
중이가 제나라에 머문 지 대략오 년이 흘렀다. 중이는 제나라 여자를 사랑하게 되어 제나라를 떠날 마음이 없어졌다. 조최와 구범이 뽕나무 아래에서 어떻게 처신해야 할지 상의하고 있는데, 제나라 여인의 시종이 뽕나무 위에서 그들의 계획을 듣고 그녀의 주인에게 알렸다. 그 여인은 시종을 죽이고 즉시 행동에 옮기기를 권했다. 중이가 말했다. "사람이 태어나 편안하고 즐거우면 누가 그 다른 것을 알려고 하겠소? 반드시 이곳에서 죽을 것이니 떠날 수는 없소." 제나라 여인이 말했다. "당신은 한 나라의 공자로서 곤궁하여 이곳에 오셨지만 저 몇 분의 선비들은 당신에 의해서 운명이 결정됩니다. 당신께서는 빨리 나라로 돌아가서 수고로운 신하들에게 보답하지는 않고 여색만을 마음에 품고 있으니 저는 당신이 이 점을 부끄러워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만약 추구하는 바가 없다면 언제 공을 이루시겠습니까?" - P298
문공은 처음 귀국하여 즉위할 때, 나라 사람들이 자신을 거스를까 봐 평상복 차림으로 다녔고, 왕성王城에서진나라 목공을 만났으므로 나라 사람들은 아무도 그 사실을 몰랐다. 3월 기축일, 여성과 극예는 과연 배반하여 궁성을 불태웠으나, 문공을 찾아내지는 못했다. 문공의 호위병들이 그들과 싸웠다. 여성과극예 등이 군대를 이끌고 달아나려 하자 진나라 목공이 여성과 예등을 꾀어내어 황하 가에서 죽이고 진나라가 회복되어 문공은 귀국할 수 있었다. - P305
도공 주의 조부는 첩으로 진양공의 작은아들이라 왕의자리에 설 수 없어서 환숙이라고 불렀는데 환숙은 [양공에게]가장 총애를 받았다. 환숙이 혜백伯 담談을 낳았고, 담은 도공 주를 낳았다. 도공 주가 자리에 올랐을 때의 나이는 열넷이었다. 도공이 말했다.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모두 임금의 자리에 서지 못하였기 때문에주나라에서 난을 피하다가 객사하였소. 인도 스스로 진나라와는거리감이 있다고 생각되어 왕이 된다는 희망을 거의 갖지 않았소. 지금 대부들이 문공과 양공의 뜻을 잊지 않고 은혜롭게 환숙의 후예를 세웠으니 종묘와 대부들의 영령들에게 의지하여 진나라의 제사를 받들어 어찌 감히 조심하고 삼가지 않겠소? 대부들은 정녕 과인을 잘 보좌해 주시오!" 이에 신하 노릇을 제대로 못하는 자 일곱 명을 내쫓고 옛 공을 닦으며 덕을 베풀고 문공이 나라 안으로 들어올 때의 공신들의 후손을거두었다. 가을에 정나라를 정벌했다. 정나라 군대가 패배하자, 〔애공은] 드디어 진나라까지 쳐들어갔다. - P334
[도공] 3년, 진나라가 제후들을 모이게 했다. 도공은 여러 신하에게 쓸 만한 인재를 물어보니 기혜자는 황양이며 진나라 헌후默侯의 후예가 해호解狐를 추천했다. 해호는 기혜와 원수지간이었다. 도공이 다시 〔인재를〕 물어보니 기혜는 자신의 아들 기오를 천거했다. 군자가 말했다. - P334
"기혜는 당파를 만들지 않는다고 할 수 있구나! 밖으로는 원수임을 숨기지 않고 추천하였고, 안으로는 자식임을 숨기지 않고 추천하였구나." - P335
[평공] 14년, 오나라 연릉계자가 [진나라] 사신으로 와 조문자, 한선자, 위헌자와 이야기를 나누면서 말했다. "진나라 정권은 결국 이 세 사람에게 돌아갈 것이다." [평공] 19년, 제나라가 안영으로 하여금 진나라에 가게 하여 숙향叔向과 이야기했다. 숙향이 말했다. "진나라는 쇠락하는 시기에 이르렀습니다. 군주는 세금을 무겁게하여 누대나 연못을 만들면서 정사를 돌보지 않아서 개별 가문에 의해 좌지우지되니 어떻게 오래갈 수 있겠습니까?", - P337
이때 진나라 정치는 모두 지백에 의해서 결정되었고, 진나라 애공은 그에게 어떠한 제재도 가할 수 없었다. 지백이 마침내범씨와 중항씨의 봉토를 차지하게 되어 [세력이] 가장 강성해졌다. 애공 4년, 조양자, 한강자, 위환자가 함께 지백을 죽이고 그의 봉토를 다 차지하였다. - P340
정공 2년, 위나라 무후, 한나라 애侯문후侯의 아들, 조나라경후敬侯열후烈侯의 아들가진나라를 멸망시키고 그 땅을 셋으로 나누었다. 정공은 강등되어 평민이 되었고 진나라는 제사가 끊어졌다. 태사공은 말한다. "진나라 문공은 옛날에 현명한 군주로서 나라 밖으로 망명하여십구 년이나 지내면서 지극히 곤궁하였으니 군주의 자리에 오르고서 [공신들에게 상을 내리면서 오히려 개자추를 잊어버리기도 하였으나 하물며 교만한 군주이겠는가? 영공은 이미 시해되었고 그녀의후예 성공과 경공은 엄격하였으며 여공에 이르러 매우 자비하여 대 - P341
부들이 모두 주살 당할까 두려워하였으므로 화가 일어나게 된 것이다. 도공 이후 [진나라는 나날이 쇠약해져 육경들이 권력을 휘둘렀다. 따라서 군주가 된 자가 그의 신하를 부리는 것은 정녕 쉽지 않구나!" - P3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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