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나는 독립만세를 부르지 않았습니다. 식민지 노예교육을 철폐하라는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역사적 사실을 말했을뿐입니다. 당신네 일본은 일로전쟁 당시 대영제국과 동맹을 맺었습니다. 국력으로 볼 때 분명히 영국은 형의 나라였을 것입니다. 당신의 나라는 그 강대국에서 대가의 약속을 받고 선전포고를 한 것입니다. 그리하여 영국의 땅도 러시아의 땅도 아닌 우리 땅이 제물로 넘어갔습니다. 과거 우리 조선도 오랑캐로 모멸했던 청나라와 싸운 적이 있었습니다. 명나라와의 우의를 저버릴 수 없다는 명분 때문에 싸운 것입니다. 대가도 지원도 없는 외로운 싸움, 만일에 지금 말하듯 속국이거나 식민지였었다면 누가, 하라 하지도 않았던 전쟁을 왜합니까. 억압해온 힘에서 벗어난 기쁨 때문에 만세를 불렀음 불렀지, 검(劍)을싫어하기에 뺀 검이었고 야만을 싫어하는 검, 침략을 싫어하는검, 그래도 조선이 미개국(未開國)입니까?" - P123

어릴때 일을 기억하는데 외톨백이 아이 하나가 사탕을 가져와서 나누어주었지요. 그랬더니 사탕을 나누어준 아이하고 사이가 좋지 못했던 아이는 외톨이가 되더란 말입니다. 이번에는 외톨이가 과자를 가져와서 나누어주었지요. 사탕을 나누어준 아이는다시 외톨이가 됐어요. 얻어먹는 아이들은 항상 명령에 복종했어요. 명령에 복종하는 아이, 외톨이는 언제 없어지지요? 정말역사가 그렇게만 되풀이되는 거라면 무슨 희망이 있겠습니까."
연학은 말없이 따라 걷는다.
"마음속에서부터 우러나는 적개심, 분노, 슬픔, 그것이 순수하면 힘이지요. 순수한 힘은 우월감이 아닙니다. 우월감을 쳐부수는 것이지요. 우월감을 쳐부수는 이론을 가지고 스스로는우월감에 젖어 있다면 이편에 서든 저편에 서든, 친구가 되든원수가 되든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 P148

"솔직히 말하자면 패잔병들의 은신처가 결혼이라는 거지 뭐. 여자가 능력을 인정받으려면 요원해. 뭐 나야 별 재간도 없었던 여자지만 말이야. 결혼잘했구나 하고 생각하는 것은 그만큼 혼자서는 견디어 배기기어려웠다는 얘기가 될 게야. 배운 여자가 하면 그건 언제나 질책이었고 어떤 때는 숫제 화냥년 취급이니, 사방을 둘러보아도배운 여자가 나가야 할 문은 한 군데도 열려 있지 않으면서, 철저하지 철저해, 조선사람들 보수적인 것." - P160

하늘은 항상 먹구름이며 겨울바람에터져나간 나무껍질처럼 순수할 수가 없소. 만일 일본의 현실이 오늘 우리와 같은 것이라면 오가타 씨 당신의 순수함도 상당한 변형으로 나타나지 않았을까요? 지금 조선 이 땅에는 어설픈 자책감과 죄의식과 날로 잠식해오는 소리를 들으며, 인간존엄의 자리엔 의자가 하나, 네, 그래서 눈멀고 귀먹은 늙은이로 행세하는 무리가 있고 도금이 시시각각 벗겨져 나가니까 ㅇ에라 모르겠다! 짐승이 이빨을 드러내어 으르렁거리듯 속물근성을 유감없이 드러내어 미치광이 모양으로 웃고 화를 내고 과시벽을 휘두르는 광대의 무리, 이 두 개의 유형은 대체로 민족반역자 친일파의 낙인이 찍힌 부류로써 상부층을 구성하고 있소. 이들은 스스로 비웃거나 민중이 비웃어주는 말하자면 안일에 썩어가는 산송장들이오. 다음은 두 가지 얼굴을 가진 중간층입니다. 올려다보기도 하고 내려다보기도 하면서 열심히 자기 합리화를 꾀하는 이기주의자들이오. 한편을 향해선 민족의각성을 부르짖고 다른 한편을 향해선 물량을 따져 행복의 자와 저울을 휘두르며 민중을 설득하려는 냉랭한 현실주의, 그럼 - P184

에도 불구하고 소아병적인 것을 동반한, 그네들은 식자층이오.
전자나 후자는 모두 소수파며 한결같은 선택의식의 소유자들이오. 어쩌면 후자 쪽이 더 강할지 모르겠군요. 소위 신흥세력,
나라는 없어도 역사의 물결은 공평한 모양이오. 나머지의 전부, 조선 민족의 전부라 하여도 과언은 아닌 성싶소. 그들이야말로 조선 토종들이니까요. 민중들, 이들만은 생동하고 있소.
어떻게 생동해 있는가, 어떻게 가난과 공포의 생동이오. 아시겠소? 가난과 공포의.‘ - P185

벚꽃은 거짓이오. 죽음은 아름답고 깨끗한 것은 아니오. 죽음을 고통 없는 아름다운 것으로 길들여온 당신네 야마토 다마시는 거짓이오. 약자의 엄폐술이며……… 허위는, 껍데기는, 허위와 껍데기의 집단은 야만밖에 행할 것이 없고, 기계의 비정도 가능하고, 피가 물이라면 심장을 갈아제끼는데………… 모두 용감하오. 성실하게 용감하오.‘ - P194

"복잡하면 쳐내고 단순하면 덧붙인다는, 바꾸어서 말하자면 결핍과 잉여상태, 저는 얘기의결론을 지어야겠습니다. 결핍이 오늘 일본을 강국으로 만들었고 잉여상태로 하여 조선은 망했다."
"허참, 조선이 잉여상태? 야 그만두어라. 미친놈 취급당할게야."
"정신을 두고 한 말입니다. 물질적인 얘기는 아닙니다."
"그래서?"
"앞으로 일본은 더욱더 강국이 될 거란 말입니다. 계속하여뭉쳐질 거란 말이지요. 개개인의 결핍은 전체를 풍요하게 하고개개인의 풍요는 전체를 결핍으로 몰아넣고."
"결론이냐?"
"아닙니다. 강약의 척도를 양면에서 상반된 눈으로도 볼 수있다는 것, 또 강약의 형태가 물결같이 오고 사라진다는 것, 물질의 시대와 정신의 시대가 명멸한다는 것이 저의 결론입니다." - P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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