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辛丑】五十五年
秦左庶長王齕伐韓攻上黨拔之上黨民走趙趙廉頗軍於長平以按(遏)據上黨民王齕因伐趙趙軍戰數不勝廉頗堅壁不出趙王以頗失亡多而更怯不戰怒數讓之應侯使人反間曰秦之所畏獨畏馬服君之子趙括爲將爾廉頗易與且降矣趙王遂以趙括代頗將藺相如曰王以名使括若膠柱鼓瑟括徒能讀其父書傳不知合變也王不聽

왕흘이 조나라를 정벌하도록 시켰으나 승리하지 못하고 염파가 성벽을 지키면서 출전하지 않자 조왕은 화를 내었다. 이 때 진나라 응후(범저)가 간자를 보내 조왕이 조괄(趙括)을 염파 대신 쓰도록 만든다. 재상 인상여는 조괄을 써서는 안된다고 간언했으나 조왕이 듣지 않았다.

○ 初趙括自少時學兵法以天下莫能當嘗與其父奢言兵事奢不能難然不謂善括母問其故奢曰兵死地也而括易言之趙若將括破趙軍者必括也及括將行其母上書言括不可使王曰吾已決矣母曰卽有不稱妾請無隨坐王許之

○ 秦王聞括爲趙將乃陰使武安君爲上將而王齕爲裨將令軍中有敢泄武安君將者

○ 趙括至軍悉更約束易置軍吏出兵擊秦武安君佯敗而走張二奇兵以劫之趙括乘勝追造秦壁堅拒不得入奇兵絶趙軍之後趙軍食絶四十六日皆內陰相殺食趙括自出銳卒搏戰秦人射殺之趙師大敗卒四十萬人皆降武安君乃挾詐而盡坑殺之遺其小者二百四十人歸趙

조괄이 어린 나이에 자신이 잘났다 여겼다. 부모는 이를 알아보고 그를 장수로 써서는 안된다고 생각했으나 결국 조왕은 듣지 않았다. 진나라 왕은 조괄이 장수가 되었다는 말을 듣고 무안군을 상장군으로, 왕흘을 비장군으로 삼아 군을 이끌게 했다. 경험이 부족한 조괄은 무안군의 꾀에 제대로 넘어가 죽고 병졸들은 구덩이에 빠져 죽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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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23-01-27 21:3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장평대전에 대한 이야기인가요.

모친도 말린 조괄을 사령관으로
기용했다가 일패도지한 고사인
가 보네요.

수십만 포로를 학살한 무안군의
말로도 참 그렇네요.

거리의화가 2023-01-27 21:37   좋아요 0 | URL
맞아요 매냐님 딱 그 부분입니다^^ 무안군 말로는 내일 나오는 것 같네요. 병사들을 40만이나 학살한 것은 좀 그랬습니다. 그냥 돌려보내주지~ㅠㅠ

여울목 2023-01-28 00:0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조괄의 경우를 음미하면 서적을 읽어 공부한다는 의미를 깊이 생각하게합니다.
촉한의 제갈량과 전진의 왕맹은 많지 않은 나이에 출사하였으나, 중국사를 통틀어 위대한 정치가라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아마 출사당시의 나이가 장평대전에서 총대장이 된 조괄보다 나이가 많지는 않았으리라 생각합니다.

명장 조사가 아들인 조괄에 대해 몹시 우려한것에 대해 그 이유를 깊이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관료로 근무한 적이 없었던 제갈량이나 왕맹이 등용되자마자 능력을 인정받을 수있는 요인중 하나는 서적을 통한 공부를 할 때 매우 통찰력이 있게, 피상적이지 않게, 실제에 와닿게끔 독서를해서 그런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같은 재료를 갖고 있어도 이용하는 사람에 따라 결과는 전혀다릅니다.

독서를 제대로하는 것이 어떤것인지 설명할 수는 없으나, 조괄은 독서를 제대로 하지 못했고 제갈량이나 왕맹은 제대로 독서를 한 사람이라고 봅니다. 물론 좌전의 자산, 안영,숙향도 제대로 한 사람이고요.

거리의화가 2023-01-28 19:59   좋아요 0 | URL
조괄의 근자감은 같은 나이여도 독서 등을 통한 간접 경험의 부족이 있어서일수도 있겠지요. 어린 나이여서 사회 경험이 없지만 그럼에도 다른 결과가 나오는 것을 보니 흥미롭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