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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듭 말하지만, 은은 기력이 쇠해서 망한 것이 아니라 여력이 충분히남아 있는 상태였다. 그 힘의 분산을 꾀하지 않으면 안 됐다.
일단 주의 아들인 녹보제후로 봉하기는 했지만, 무왕은 감시를
를 위해 자신의 동생인숙선(鮮)과 숙도(叔度)를 녹보에게 붙여 은의 옛영토를 다스리게 했다.
늑대의 재보를 나누고, 거교의 식량 창고를 열어 빈민을 구제하고, 일곱 개의 구멍을 보기 위해 주가 해부했다고 하는 비간의 무덤에 정중하게 흙을 쌓아 올리고, 주 때문에 감금되어 있던 기자를 석방했다.
이 일련의 일들은 주무왕의 이른바 ‘인정(仁政)‘이었다.
그런 다음 무왕은 서쪽으로 개선했는데 도중에 이곳저곳을 들렀다.
신정권의 성립을 알리고 선무공작(宣撫作)을 펼쳤다. - P234

말할 나위도 없이 논공행상이 있었다. 공신, 모사를 각지에 봉했는데수봉(首封), 즉 훈공 제1등은 태공망으로 그는 영구(營丘, 산동성)에 봉해졌으며 그 나라는 ‘제(齊)‘라 불렸다. 태공망에게 그곳은 고향땅이었으니 아내에게 쫓겨난 ‘축부‘가 금의환향한 것이다.
무왕의 동생인 주공 단은 곡부(산동성)에 봉해졌는데 그 나라는 ‘노(魯)‘라고 불렸다. 이 나라는 후에 공자를 낳은 것으로 유명하다. 소공 석(召公奭)은 연(燕, 하북성)에 봉해졌으며, 은의 녹보를 감시하던 숙선은 관(管, 하남성), 숙도는 채(蔡, 하남성)에 봉해졌다.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고대 성왕의 자손들도 각지에 봉했다. 신농, 황제, 요, 순 등의 자손이 그때까지도 남아 있었는지는 의심스럽지만, 무왕은 인정을 베풀지 않으면 안 되었다. 순의 자손은 하남성의 진(陳)에 봉해졌다. 우의 자손, 즉 하의 후예가 이때 기에 봉해졌다는 사실은 앞에서PE이야기했다. - P235

문왕은 서백창이라고 불린 것으로 봐서 서방의 빛나는 별이었다. 그의 인기를 따를 자가 없었다. 그의 덕을 흠모하여 각지에서 사람들이 몰 - P247

려들었다. 백이, 숙제도 그런 사람들이었다는 점은 앞에서 이야기했다.
소송도 그에게로 가지고 갔다. 소송을 가져갔던 우와 예도 문왕 진영에가담했을 것이다.
우와 예의 소송을 기점으로 서백이 왕을 칭했다는 설도 있으니, 이 양쪽 지방에 영향력을 행사하게 된 후부터 자신감을 얻은 것일지도 모른다.
목야의 싸움에서 대승을 거두고 결국 대혁명에 성공하여 주의 천하가되었다. 그리고 새로운 시대가 시작되었고, 새로운 문제가 생겨났다.
묻혀 있던 사소한 차이가 이젠 됐겠지 하며 지상으로 나왔다. 그것이점점 커져서 더 이상 사소한 차이라고는 말할 수 없게 되어 버리는 경우도 있었다. - P248

은의 도읍을 함락시켰지만 당시 주의 실력으로는 주를 죽이는 것이그 한계였다는 점은 앞에서도 이야기했다. 주의 아들인 녹보(무경(武庚)〕를 세워 은민(殷民)을 통치하게 하고 그 감시역으로 무왕의 세 동생을 붙였다. 『사기』에는 관숙선, 채숙도 두 사람의 이름밖에 실려 있지 않지만,
또 한 사람 곽숙(叔)이 있어서 이를 삼감일컬었다.
이라고그렇다면 삼감은 어떻게 되었을까?
무왕은 동벌 2년 뒤에 죽었고 정국은 아직 안정되지 않았다. 은나라의 군대는 목야에서 투항했기 때문에 거의 타격을 받지 않은 상태로 남아 있었다. 삼감은 자신들이 주나라 정권의 중심에서 소외되어 있다는느낌도 받았을 것이다.
주공에게 대적하기 위한 병력은 충분했다. 그것은 은나라의 군대였다.
아버지 주가 죽고 그 목이 깃발에 매달린 것을 본 녹보는 남 몰래 설욕의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은의 수장이었던 녹보는 자신을 감독해야 할 입장에 있는 삼감과 거꾸로 연합하여 주공에게 맞서게 되었다. 녹보는 서로 관계가 긴밀했던 회하 유역의 부족, 회이(夷)와도 남몰래 동맹을 맺었다. - P253

중앙에서 권세를 휘두르고 있는 주공에게 삼감이 불만을 품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녹보가 그들을 반란에 끌어들인 것이 진상이었을 것이라 여겨진다. - P254

어쨌든 은의 유민은 차가운 시선을 받고 있었으며 주어진 토지도 좁고그다지 비옥하지도 않았던 듯하다. 게다가 동족들은 분산되어 있었다.
그들은 농경과 목축 외에도 교역을 시작했다. 물자가 풍부하고 값이싼 곳에서 물건을 사들여 그것이 부족한 지방으로 가져가 이익을 얻었다. 각지에 분산된 동족이 있었기 때문에 그들에게 있어서 교역은 그다지 어려운 일도 아니었을 것이다. - P260

왕국유는 『은주제도론(殷周制度論)』에서 주의 제도 가운데 은의 제도와가장 커다란 차이를 보인 것은 ‘입자입적제(立嫡制)’와 ‘묘수제(廟數制)’와 ‘동성불혼제(同姓不婚制)‘였다고 말했다. 이것이 그 후 중국 윤리의 근본이 되었기 때문에 주에서 중국문화가 시작되었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
그러나 은의 그림자가 중국에서 완전히 사라졌다고 말할 수는 없다.
특히 주는 봉건제를 도입함으로써 각지에 여러 가지 문화가 병립하는을 허용했다. 주 시대에 여러 가지 요소가 움트고, 서로 섞이게 되었다.
신성왕조 시대는 귀신에 반하는 문화의 존재를 허용하지 않았기 때문에 다채로움을 기대할 수 없었다. 주가 성역을 해방한 것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주의 문화도 해방된 지역으로 흘러들었을 것이다. - P271

기원전 841년부터 기원전 828년까지 햇수로 14년 동안, 주나라에 제왕이 존재하지 않았던 기간이 있었다. 무장 반란이 일어나 여왕(國王)이도망을 갔기 때문이었다.
제왕이 존재하지 않았던 상태를 중국인이 역사상에서 찾을 때면 멀고 먼 옛날의 이 14년간의 일이 머릿속에 가장 먼저 떠오른다. 사서에서는 이 기간을 ‘공화‘라고 불렀다. 이에 근대의 중국인들은 제왕이 없다는의미에서 군주제가 아닌 정치체제에 공화라는 명칭을 부여했다.
지금 우리들은 별생각없이 쓰고 있지만, 근대적인 정치체제의 명칭으로 참으로 오래전의 말이 붙여진 것이다. - P279

경원(敬遠), 즉 공경하되 가까이 하지는 않는다.
신들이 멀어져 감으로 해서 인간은 신들의 주술에서 해방되어 보다인간적으로 살아갈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 인간 세계의 질서를 관장하 - P290

고 있던 신들을 대신할 무엇인가를 찾아내지 않으면 안 됐다. 그것이 바로 ‘하늘‘이었다. - P2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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