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지구적 냉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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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식민화가 냉전의 틀로 해석되면서 유럽의 블록 형성은 더욱 수월해졌다. 1949년에 유럽에서 만들어진 여러 제도는 애초에는 임시적인 성격을 지녔다. 트루먼 행정부와 미국 여론은 북대서양조약으로 인해 미군이 유럽에서계속 주둔하는 것이 확정되었다고 보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들은 독일과 오스트리아에서 점령 기간이 끝나면 군대를 철수하게 될 것으로 생각했다. 독일연방공화국Bundesrepublik Deutschland: BRD(이하 서독)의 헌법도 다만 "이행기 동안" 서독에서 국가의 틀을 마련해 "새로운 질서를 부여하는 "기본법"으로 구상되었을 뿐임을 강조했다. 다른 한편 스탈린에게 독일민주공화국DeutscheDemokratische Republik: DDR(이하 동독)은 "평화 지향의 민주 독일로 가는 첫걸음이었지만, 사실은 내키지 않는 방식이었다. 스탈린이 그 신생국가의 지도부에보낸 경축 메시지에 독일 사회주의라고는 일언반구도 없었다.
물론 그 임시 조치들은 곧 굳어졌다. 하지만 유럽 분단이 영속될 위험이생기자마자 곳곳에서 저항이 일었다. 유럽의 블록 형성을 둘러싸고 격렬한 대결이 전개되었다. 그 결말은 1950년대 중반에야 비로소 뚜렷해졌다. - P82

서독의 나토 가입을 막으려는 소련의 노력은 모두 실패로 끝났다. 소련 지도부의 새 권력자 니키타 흐루쇼프Nikita Khrushchev는 유럽 정책을 점차 사통당의 동독 지배를 안정시키는 방향으로 바꾸었다. 1955년 5월 14일에 바르샤바에서 동유럽 블록의 정부 수반들이 "우호와 협력 및 상호 지원 협정"에 서명했을 때 동독 총리도 그 자리에 함께했다. 애초에 동독은 바르샤바 조약에 참관국으로만 참여했지만, 곧 정회원국이 되었다. 흐루쇼프는 1955년 7월의 제네바 정상회담에서 마지막으로 탐색한 뒤 그런 것이 아무 소용없음을 확인하고 동베를린의 한 집회에서 "독일민주공화국의 이익을 희생하면서 독일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으며 "동독의 정치적·사회적 성과를 모두" 없애는 것은 불 - P90

가능하다고 밝혔다. 두 달 뒤인 1955년 9월 20일에 소련은 동독과 상호 관계 조약을 맺었다. 조약은 동독이 내정과 외정의 문제에 대해 "자유롭게 결정"한다고 규정하며 다만 "독일 전체에 미치는 4대 열강 협약에 대해서만 유예를 둔다고 밝혔다. 1956년 초에 동독의 병영 주둔 인민 경찰은 국가 인민군Nationale Volksarmee: NVA으로 바뀌었다. 1956년 1월 28일에 바르샤바 조약국 이사회의 결정에 따라 국가 인민군은 소련 최고사령부 휘하의 바르샤바 조약 군사 기구로 통합되었다. 이제 동쪽의 블록 형성도 완결되었다. - P91

핵전쟁 위협 체제로 인해 동유럽 국가들의 공산당 간부들은 지배를 수월하게 유지했고, 소련은 동맹국들에 대해 계속 손쉽게 헤게모니를 행사할 수 - P92

있었다. 바르샤바 조약은 탄생 때부터 그런 지배 유지의 도구임이 확인되었다. 이때 그것은 외부로부터 오는 위험뿐만 아니라 자기 진영 내부의 해방운동에 대해 더 맞서는 것이었다. 그동안 서구에서 노동운동과 지식인 자본주의 비판가들 사이에서 상당히 먹히던 소련 모델은 헝가리 봉기가 진압되면서매력을 크게 잃었다. 공산주의 지배를 유지하기 위한 폭정은 서유럽의 경제재건 성공과 민주주의의 안정적 발전에 확연히 대비되었다. - P93

1966년 3월 7일에 드골은 대서양 간 통합에 맞서 자신이 추진했던 유럽적 대안이 점차 눈앞에서 멀어지자 나토의 군사 조직에서 프랑스는 탈퇴한다고 선언했다. 프랑스는 대서양 동맹 회원국 지위를 유지했지만, 나토 사령부의통제권에서 자국 군대를 뺐고, 동맹국들에 프랑스 영토에서 군사기지를 철수하라고 요구했다. 동맹국들은 그 요구를 따랐다. 나토 본부는 파리에서 브뤼셀로 옮겼다. 그렇게 함으로써 드골은 핵 열강으로서 프랑스의 독립을 지켰지만, 6개국 정치 공동체는 이제 저 먼 곳으로 날아가 버렸다. 유럽 국가들은 드 - P101

골이 일방적인 공세로 자신들을 함부로 대했다고 간주했고, 그 결과 다시 미국과 협력할 방안을 더욱 강력히 찾아 나갔다. 1967년 말에 잔존 나토 회원국들은 "유연한 대응"이라는 공동 전략을 통과시켰다. - P102

서구 열강과 동유럽 블록 국가 모두 재정적인 이유로 재래식 군비 계획을1950년대 초에 계획했던 규모대로 이행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미국과 소련의지도부는 모두 점차 핵 억지력에 의존했다. 핵폭탄 투입을 경고하면서 재래식군비의 결함을 보충하거나 고비용이 드는 재래식무기고의 감축을 가능하게만들 수 있었다. 물론 핵 억지 체제로 넘어가니 핵무기로 인한 절멸 공포가생겨났다. 그래서 핵무기를 보유한 양대 열강 지도부는 대화를 지속해야 한다 - P106

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데올로기 때문에 생긴 인지 오류와 핵무기 대치 상태에 대한 경험 부족으로 인해 대화가 지속되기는 극히 어려웠고, 그 결과 동서준비관계에서 새로운 긴장이 계속 발생했다. - P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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