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전역의많은 관찰자가 주장하듯이 ‘미국의 세기‘가 끝났다면, 그 이유는 무엇일까? 미국의 군사력과 경제력으로 만들어진 세계가 근본적으로 변해 미국이 더는과거와 같은 방식으로는 변화의 동력을 이끌지 못하기 때문일까? 아니면 전략이나 경제와는 무관한 발전들이 인류의 운명을 결정하는 데 더 중요해졌기때문일까? - P17
분명히 이 초국가적인 연계와 사유가 모두 평화나 정의와 일치하지는 않는다. 1945년 이후의 역사는 낯선 사람과 대상에 대한 몰이해, 심지어 자기생각을 따르지 않는 사람들에 대한 적대의 무수한 예를 보여 준다. 그럼에도불구하고 이 6권은 (아울러 이 하버드-C.H베크 세계사 시리즈의 다른 책들은) 남성과 여성, 어린이, 그들의 주거 공간, 그리고 동물과 새, 물고기, 식물들이 모두서로 의존하는 존재라는 사실에 관한 자각이 증대했다는 것을 알려 준다. - P19
미국은 채권국이자 전쟁 물자 공급국이라는 역할을 활용해 미국 상품을위한 새로운 시장과 미국의 영향력이 미칠 새로운 영역의 확대라는 목표를 더욱 적극적으로 추진할 수 있었다. - P27
미국과 소련은 경제체제와 정치 질서가 서로 달랐지만, 애초에 구체적인경제 이익의 여러 차원에서는 상호 보완적이었다. 미국은 전쟁 수요에 의한 생산 확대가 끝난 뒤 실업 증가와 경기후퇴를 초래할 과잉생산을 피하기 위해새로운 시장을 개척해야 했다. 반면에 소련은 전쟁으로 인한 파괴의 결과를 - P32
극복하고 전후 주민들의 기대를 소비 상승으로 충족해 주기 위해 더 많은 공업 제품을 공급할 필요가 있었다. - P33
합의를 통해 전후 질서를 만들 수 있는 여지는 계속 활용되지 못했고, 그대신에 냉전이 개시되면서 유럽은 분열되었다. 그것은 우선 매우 특별한 무능력의 결과였다. 공산주의 지도자들은 자신들의 협력 제안을 신뢰할 수 있도록 만들 줄 몰랐다. 마찬가지로 서구 사회도 그와 같은 협력에 필요한 통찰력을 갖기가 쉽지 않았다. 그로 인해 다음 상황, 즉 쌍방 간의 인지 오류가 발생했다. 양측은 점점 더 상대방을 침략자로 간주하기 시작했다. 아울러 그런 인식이 확산될수록 다음 상황, 즉 적대 세력 간 경쟁 상황에서 항상 발생하는안보 딜레마가 점점 더 강력히 작동했다. 양측은 모두 혹시라도 있을 상대방의 침략에 대한 대책을 강구했다. 그런데 그것은 상대방에 의해 공격 의도를가진 증거로 해석되었고, 계속 또 다른 대책을 필요하게 했다. 이중적 악순환이었고, 그것에서 쉽게 벗어날 수가 없었다. - P37
1947년 3월 12일에 그리스와 터키를 원조하기 위한 기금을 요청하고자 대통령이 의회에서 발표했던 ‘트루먼 독트린‘은 소련과 미국의 갈등을 이제 ‘테러와 압제‘ 대 ‘자유‘ 체제의 세계적 투쟁으로 규정했다. 트루먼은 세계 도처에서 이 자유를 지키는 것이 미국의 사명이라 밝혔다. 이제 국무부 정책 기획관이 된 케넌과 국무 장관조지 C. 마셜George C. Marsall은 유럽 각국을 위한 개별 원조 계획을 하나의 다 - P45
자적 재건 프로그램으로 포괄함으로써 프랑스의 저항을 극복했다. 그것은 동시에 프로그램 참여국의 통합을 위한 길을 열어 주었다. 이제 원조가 다시 수포로 돌아가지 않도록 보장되었을 뿐만 아니라, 프랑스를 비롯한 여러 서유럽국가에 유럽 통합이라는 새로운 형식으로 독일의 부활을 통제할 수 있음을보여 주었다. 1947년 6월 5일에 국무부 장관이 프로그램을 설명한 뒤 그것은 ‘마셜플랜‘으로 알려졌다. 공산주의와 사회주의의 세력이 강한 서유럽 국가에서 마셜 플랜을 관철하기 위해 동유럽 국가들과 소련에도 참여가 제안되었다. 그리하여 이미 시작된 유럽 분열을 다시 돌릴 기회가 (적어도 이론상으로는)생겼다. - P46
서유럽 공산당 지도부는 종전 후 계속 쌓인 사회적 불만을 지지자들이자유롭게 폭발시키도록 내버려 두었다. 그 결과 프랑스와 이탈리아에서는1947년과 1948년의 겨울에 대규모 파업 운동이 일었다. 그것은 때로 폭동의양상을 띠었다. 물론 그것은 서유럽에서 미국의 정책 목표가 관철되는 것을저지하기는커녕 오히려 정반대로 촉진했다. 지금까지 소련이 서유럽으로 팽창할 것이라는 미국의 공포를 근거 없다고 무시했던 대다수 서유럽인은 대규모 파업 행동과 이른바 제국주의자들을 겨냥한 전투적 공세를 보면서 서유 - P47
럽 공산당들이 현존 질서의 전복을 획책하고 소련이 유럽 전역을 자기 통제하에 장악하려고 한다는 확신을 얻었다. 그리하여 이제 공산주의자들이 다시 내각에 참여하는 일은 사실상 배제되었다. 공산주의자들은 ‘대항문화‘의게토로 추방당했다. 정치의 무게 추는 뚜렷이 우파로 기울었다. 마셜플랜을통한 재건은 반공주의라는 광범위한 동의를 토대로 수행되었다. - P48
1949년 말에 유럽의 세력균형 체제가 붕괴한 자리에 이렇게 서로 대립하는 두 개의 권력 블록이 만들어졌다. 그 블록은 제2차 세계대전의 두 승전 주역에 의해 지배를 받았고, 유럽은 동반구와 서반구로 나뉘었다. - P51
내전 발발 여부를 결정한 것은 결국 중국 내부의 당파투쟁이었다. - P54
1951년 6월에 중국군과 북한군의 지도부는 휴전협정을 제안했다. 하지만 그것은 상당 기간 별 성과를 내지 못했다. 무엇보다도 스탈린이 동맹국들에 서둘러 양보하지는 말라고 경고했기 때문이다. 미군을 한국에 묶어두는 것은 철저히 스탈린의 이익에 맞았다. 1953년 3월에 스탈린이 사망하자비로소 후임자들은 "가능한 한 빨리 한국에서 평화를 이끌 수 있는 방안을강구했다. - P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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