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부 이주와 소속감

3~5장

인구와 경제가 조화롭게 성장하지 않는 이른바 인구학적 변이가 계속되면 가족과 미혼의 젊은 남녀들은 살던 곳을 떠나게 된다. 영아 생존율과 성인의 기대 수명이 늘고 출생률도 떨어지지 않는데 노동시장은 제자리걸음을 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것을 ‘이동성 변이‘로 부를 수 있다면 몇 세기 전에는 이동성이 낮았으나 이후에는 이동성이 높아졌다는 의미가 된다. 이동성은 이동 경로와 속도에 일어난 발전에 의해서도 촉진된다. 이동 경로와 속도의 발전이 일부 지역들을 막연하게 ‘현대화‘했다기보다 이동성을 촉진한 면이더 컸음은 최근의 연구 결과에도 나타난다. - P560

아메리카 대륙으로의 이주와 그곳에 대한 유럽의 지배권 확립은 백인을흑인의 우위에 두고 북아메리카 원주민을 소멸시키거나 강제 이동시키는 방식으로 논의되었다. 백인을 최상층에 위치시키는 인종적 위계의 부과를 주요목표로 삼은 것인데, 그 결과로 폭력과 성적 매력으로 표현된 비대칭적 성비性t가 야기되어 새로운 혼혈 인종이 탄생했다. 북부의 자칭 ‘백인‘ 지역들을 포함해 아메리카 대륙의 모든 곳에서 인종적 혼합이 일어나 새로운 생태적 환경에서 새로운 메스티소 인종이 출현하는 민족 발생의 결과가 초래된 것이다. - P576

아시아 내의 이주 지역에는 버마, 시암, 해협식민지가 포함된 말라야, 태평양의 몇몇 섬, 그리고 ‘백색 아시아‘ 지역인 오스트레일리아와 뉴질랜드가포함된다. 이주민들은 그 밖에 인도양 너머 서쪽의 동아프리카와 남아프리카, 특히 나탈로도 갔다. 태평양을 넘거나 아프리카의 곳을 도는 항해를 하여 아메리카 대륙의 서부 해안과 카리브해 지역으로 간 이주민도 있었다. 동아프리카에 있던 구자라트 상인들의 유서 깊은 교역 공동체와 시암 및 말레이반도에 있던 말라바르 해안 지대의 상인 공동체를 이용한 이주민도 있었다. 자본가들은 자본가들대로 범세계적으로 일어난 단기적 변화를 이용했다. 모리셔스의 플랜테이션 농장 소유주들만 해도 19세기 초에 일어난 노예 폭동과노예제 폐지로 카리브해의 앤틸리스 제도에서 사탕수수 재배가 불가능해진상황을 눈여겨보고, 유럽에서 마케팅 기회를 잡아, 인도인 강제 노동력을 들여와 사탕수수 생산을 늘렸다. 그런 식으로 이주, 교역, 투자가 대양적·반구적·범세계적 규모로 진행되는 가운데, 이주민 끼워 넣기의 전형이 되었던 곳들이 바로 모리셔스, 남아프리카의 나탈,말레이반도였다. - P585

1890년 이후에는 중국뿐 아니라 미국의 일본인 공동체도 덩치가 커졌으며, 필리핀인과 동부 인도인들도 북아메리카 이주의 일원이 되었다. 이런 식으로 1850~1920년의 기간에 아시아권에서 태평양권으로 이주하여 미국에거주한 사람을 지역별로 나누면 중국인 32만 명, 일본인 24만 명, ‘여타 아시아인‘ 3만 명, 태평양 섬 주민 1만 명, 오스트레일리아인과 뉴질랜드인 4만4000명이었다. 따라서 총계가 말해 주듯 다양한 이주가 포함되었다. 캐나다도 1921년의 인구조사에 중국인 3만9600명, 일본인 1만 5900명, ‘동부 인도인‘ 1만 500명이 거주했던 것으로 나타났다. 태평양 이주 체계는 이렇듯 대서양 이주 체계에 비해서는 이주민이 많지 않았다. - P601

다른 곳들에 비해 규모가 어마어마하게 컸던 만주로의 이주는 랴오허강계곡에 정착한 북중국인들이 선양과 하얼빈 이북 지역들로 재이주하면서 시작되었다.
그렇게 이주민이 답지함에 따라 1911년에 1500만 명이던 만주 인구는 1931년에는 곱절로 불어나 3000만명이 되었다. 1920년대까지는 중국 정부가 이주를 장려하고 지원했으며, 사기업이나 행정 조직이 토지를 보유했다가 매각한 것도 이주율을 높이는 데 한몫했다. 1920년대 중엽에는 계절노동자 50만 명의 4분의 3이 가족이 있는 산둥성이나 즈리성으로 해마다 돌아오는 상황이 되었다. 철도로 촉진된 역내이주는 그때부터 매년 100만 명씩 늘어났으며, 가족 이주를 통한 영구 정착도 그와 더불어 증가했다. 그들 대부분이 가뭄, 기아, 내전이 끊이지 않는 상황에서 자발적으로 이주한 산둥성 사람들이었다. 1932년 3월 1일부터는 (만주사변을 일으켜) 만주를 점령한 일본에 의해 만주가 ‘만주국‘이 됨에 따라 만주로의 대량 이주도 다롄-선양-지린-하얼빈 간의 철도 노선, 즉 일본이 세운남만주철도의 본선 구간을 통해 일본이 운영하는 탄광, 철도 건설지, 도시들 - P606

에 노동력을 공급해 주는 것으로 성격이 바뀌었다.
몽골에서는 문화적 상호작용이 중요했던 반면 만주에서는 수가 중요했던것도 만주 이주의 특징이었다. 중국 이주민이 현지의 만주족을 수적으로 압도한 것이다. - P607

생태 환경이 열악한 아프리카에서는 가뭄과 여타 자연재해로 궁핍해진지역 사람들이 제일 먼저 이주했다. 그리하여 처음에는 임금을 가로채는 토착민 지배자와 노동을 착취하는 식민주의자 간 권력 관계의 올가미 속에서허우적거렸으나, 1920년대 무렵부터는 이들도 노동자계급 특유의 호전성과 - P618

집단행동을 발현시키기 시작했다. 도착지들에 대한 정보가 전해짐에 따라 더욱 먼 지역으로의 알선과 이주도 증가했다. - P619

신체와 젠더가 정치, 전쟁, 이주의 과정에서 전략으로 사용된 것이다. 남성성은 이렇듯 식민지 국가들 안팎에서 인간성이 아닌 자기 권력의 확대와 약자에 대한 억압의 측면으로 발현되었다. 남성다움이 허약한 타자를 제압할 수있는 능력과 같은 의미를 갖게 된 것이다.
백인 식민주의 국가들의 중산층과 지배층 엘리트들도 내적으로 분화돼있었다. ‘국가‘ 공직 및 특정한 문화적 관행에의 접근 방식으로 민족성 및 인종의 위계와 더불어 계급과 젠더의 위계마저 ‘모국‘ 혹은 ‘조국‘으로 불리는 ‘민주주의‘국가의 필수 요소가 되다 보니 그렇게 된 것이다. - P620

일본 통치자들은 서구식민주의자들과 달리 그곳에 플랜테이션 생산방식을 도입하지 않고 소유지보증제를 수립함으로써 소농과 중농들이 혜택을 보게 만들었다. 한편 경제적잠재력이 큰 분쟁지였던 극동의 사할린으로는 러시아 이주민들이 새롭게 들어와 중국, 조선, 일본의 이주민들과 경쟁을 벌였다. 하지만 자국 땅임에도 본국의 중심지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다 보니 러시아인들은 일본 어부 및 중국상인들과의 경쟁에서 뒤졌다. - P632

종전 뒤에 체결된 평화협정은 전쟁 전의 제국적 지배와 대비되는 민족자결주의를 옹호했다. 실제의 국경도 그렇게 그어졌을까? 아니었다. 동중부 유럽의 많은 지역과 서유럽의 일부 지역은 수세기에 걸친 이주와 민족들 간의상호작용으로 복잡한 정주지의 모자이크를 이루고 있었다. 그런 역사적 사실을 도외시한 채 국경선이 그어진 것이다. 따라서 단일 문화를 가진 신생국은 어디에도 없었다. 한자리에 머물러 있던 사람들도 민족이 다른 국가에 속하게 되었다. 오직 국가의 문지기들만이 역사성을 가진 민족의 영토, 그들에따르면 우연찮게 천연자원마저도 풍부한 영토의 확실성을 주장할 수 있었다.
결국 종전 뒤 그런 ‘민족국가들‘이 수립됨으로써 2000만명이상의 유럽인이사촌뻘 되는 민족문화 집단이 사는 국가의 외곽에 남겨졌다. - P637

전쟁이 끝난 1945년 무렵 도주하거나 강제수용소에 갇힌 사람만 해도 수십만 명이었다. 인구 계획자들이 사람들을 노동 집단 혹은 잉여 집단으로 만들어 ‘인간 재료로 전락시킨 탓이었다. 민주주의 국가들도 예외는 아니어서 전시의 특별한 동맹 구조와 국가에 대한 의무를 이유로 체제 반대자와 평화주의자들을 수용소에 들어가 마땅한 사람들로 박해했다. - P650

유럽 탈식민주의 이론가들은 1930년대부터 1950년대까지 식민지인과 식민주의자들 간의 계층화된 상호작용, 다시 말해 저항할 태세에 있던 식민지인들, 즉 종속 집단과 비전이나 도덕적 기반도 없고 1945년 - P661

이후에는 자신들의 우월한 지위를 지켜 줄 군사력도 없이 오직 제국적 체제만 물고 늘어진 식민주의자들 간의 상호작용을 경험할 수 있었던 것이다. - P662

사람들은 전쟁이 끝난 뒤에도 전쟁 당시의 이적 여부, 민족문화적 편견혹은 ‘국가‘ 영토의 재편성에 따라 각국 정부에 의해 추방되거나 이곳저곳으로 옮겨 다녔다. - P6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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