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농 김가진은 1846년에 태어나 20세기 전후 시간대까지 76세 일생을 살며 관료, 외교관, 계몽운동가, 독립운동가 등 다양한 이력을 경험한 인물이다. 서예가로도 이름이 나 있지만 시에도 조예가 깊었다고 한다.
그는 서자 출신이었으나 1886년 문과에 급제하여 주천진종사관 직함으로 5개월간 톈진에서 근무하고 주일본외교관으로 4년간 일본에서 근무하기까지 했다. 특히 4년 간의 일본 근무는 그에게 큰 영향을 미쳤던 것으로 보인다. 이토 히로부미를 비롯한 다양한 명사들과 교류하며 탈중국 개화론자로 변화한다. 조선에 돌아와서는 교육 사업에 뛰어들기도 하고 대한자강회에 동참하는 등 여러 계몽 운동을 펼쳤으며 1908년 관직을 떠날 무렵 대한협회 회장에 오르기도 했다. 대한협회는 동아시아 삼국의 평화 체제를 구호로 표방하였고 조선의 실력을 키워야 한다는 주장을 했다.
일본에서의 생활 때 그는 아시아주의에 매료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토 히로부미는 대표적인 동양평화론자인데 그를 비롯해 동농이 시적으로 교류한 명사들은 아시아주의자들이 많았다. 일본은 아시아 근대화의 선두주자였다. 그가 본 일본의 모습은 근대 그 자체였을 것이다. 한일 강제병합 이전까지 그는 여러 계몽운동과 실력 양성운동을 펼쳤으나 결과적으로 실패했다.
망망한 우주에 인종이 허다하거늘
이 나라 이 시대에 이 몸이 태어났단 말이냐?
우리 2천만 동포를 어찌 차마 바라보랴!
하루아침에 타는 불가마 속의 물고기 신세 된 것을
강제병합이 이루어진 뒤 그는 복잡한 심경을 시로 표현했다. '인종'이라는 단어가 눈에 띈다. 불가마 속의 물고기라... 결과적으로 본인이 실패했음을 자인하는 셈이기도 한 것 같다.
그의 이력 중 논란이 되는 부분이 있다. 일제로부터 남작 작위를 받은 것 때문이다. 작위를 받은 고관 대작이 해외로 망명을 결행함으로써 일제의 강제병합의 합법성을 반증하는 것이겠으나 그럼에도 그가 작위를 받은 것에 대해서 정당성이 부여될 수는 없을 것 같다.
어쨌든 1919년 그는 아들인 김의한과 상해로 떠난다.
연로하신 시아버님을 모시고자 하는 소박한 뜻에서 물불을 안 가리고 뛰어든 상해는 임시정부 정청에 나가 일선에서 직접 일을 하진 않더라도 나는 이미 그 현장의 일원이 되었다. 단신으로 서울을 떠난 것은 망명이라고 불리기에 충분했으며, 웃어른을 모신다는 것은 곧 일종의 독립운동을 의미하기도 했다.
정정화는 상해로 떠난 시아버지와 남편을 찾아 망명길에 올랐다(정정화의 용단이 대단하다). 개인적인 동기에서 떠난 일은 민족을 위한 독립운동의 길이 되었다. 그는 시아버지인 동농 김가진이 3년 만에 세상을 떠난 뒤에도 남편인 김의한과 중국 땅에 남아 임시정부의 여정을 같이 했다.
나 무릉도원 찾은 것 아니요 포악한 세상 피해 여기 왔노라.
팔순의 늙은 몸을 털끝처럼 가벼이 여기고서
동아의 평화는 씻은 듯 사라졌고
청구의 우리 강토 살기가 하늘 끝에 닿는다.
(...)
죽기를 각오한 우리 국민, 오직 혈전이 있을 뿐
어찌 백만의 군대라 겁을 내리오.
이는 상해에 도착한 이듬해 지은 시로 그가 소망하던 자주독립과 동양평화에 대한 소망이 수포로 돌아간 것에 대한 회한과 마지막에는 일제에 대한 전투적 자세까지 엿보인다. 이로써 그가 일본(에 대한 희망)과 완전히 결별했다고 느껴진다.
동농 김가진 전집에는 그의 시들이 많이 수록되어 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