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철학사 -상 - 완역판 까치글방 154
풍우란 지음, 박성규 옮김 / 까치 / 199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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꽤 오랜동안 역사를 읽어오면서 자국의 역사 뿐 아니라 이웃 나라인 중국과 일본에 대한 역사를 공부해야겠다 마음먹었던 기억이 난다. 구체적인 계기는 생각이 안나지만 아마도 차곡차곡 필요성이 누적된 것이라 여겨진다. 

이 책을 도전하기로 했던 이유는 결국 그것에서 출발한다. 중국의 역사를 들여다보면 결국 사상가들, 즉 철학자들에 주목할 수 밖에 없다. 그들이 중국사, 나아가 한반도와 일본 등지에 끼친 영향이 크고 심지어 이들은 동양 사상을 대표한다 여겨지기도 한다. 때문에 이들을 공부하는 것은 어쩌면 자연스럽다 할 수 있을 것이다.


저자인 풍우란은 20세기 중국을 대표하는 철학자로 특히 이 책을 펴냄으로 인해 큰 족적을 남겼다 할 수 있다. 무려 27쇄다. 지금은 더 추가됐을 수도 있겠다. 한 권의 책이 20쇄가 넘어가도록 꾸준히 읽힌다는 것은 정말 가히 놀라운 일이다. 


저자가 사료를 선택한 기준은 다음과 같다. 

- 토론한 내용이 철학에 존재하는 문제들의 범위 내에 있는 것

- 새로운 “소견”이 들어있는 저술

- 철학자의 소견, 즉 중심 관념이 있는 것

- 이지적 논변으로 표출된 것

- 한 철학자에 관한 서술 가운데 인격을 드러내는 것

이렇게 선택한 자료를 헤겔의 정반합 관점과 연결시켰다는 것이 흥미로웠다. 정은 전통적 견해, 반은 실증을 찾을 수 없는 경우, 합은 실증은 찾을 수 없지만 상당수 발생원인이 있다고 여겨지는 경우다. 

이 책에 등장하는 여러 사상의 기초 저작을 싣고 저자의 견해를 밝힌 것이 대부분이다. 때문에 그대로 수용하지 않고 독자가 비판적으로 읽는 지혜가 필요하다. 관심이 가는 저작이 있다면 원전(또는 번역본)을 찾아 읽는 것이 필요하리라 생각된다.


철학이라는 용어는 서양에서 온 것이다. 중국 철학은 논증의 측면에서 서양 철학에 비하여 뒤떨어진다고 이야기한다. 하지만 중국 철학자들은 지식을 위한 지식 추구를 하지 않았을 뿐 철학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중국인의 사상 속에는 한번도 "아"에 대한 뚜렷한 자각이 없었기 때문에 역시 한번도 "아"와 "비아"가 뚜렷이 분리된 적도 없었고, 따라서 인식의 문제(협의의)는 중국철학에서 한번도 큰문제가 되지 못했던 것이다. 철학자는 논변하지 않으면 몰라도 변한다면 반드시 논리학을사용해야 한다고 이미 말했다. 그러나 중국철학자들은 대체로 주장을 수립하는 데에 진력하지 않았기 때문에, 일어났다가 금방 사라진이른바 명가(名家)를 제외하고는, 사상과 논변의 과정 및 방법 자체를 의식적으로 문제시하거나 연구한 사람이 드물었다.

중국철학자는 또 인간사를 특별히 중시한 까닭에, 우주론에 대한 연구 역시 매우 간략했다. - P11


춘추시대부터 한나라 초에 이르기까지 중국역사는 정치, 경제, 사회 모두에 근본적인 변화를 맞이하며 해방의 시대(자학시대)를 맞았다. 봉록의 세습과 정전제가 무너지면서 서민이 사유재산을 획득하면서 부호가 될 수 있는 길이 열린 것이다. 공자는 이전 제도가 무너져 가던 시기 등장하여 구제도를 옹호하기 위해 나선다. 이후 유가 학파가 공자의 사상을 계승한다. 자학시대는 전국시대 말이 되면 끝난다. 한 무제(140-87B.C.) 때 재상인 동중서는 공자를 숭상하며 유학을 제도권의 학문으로 끌어올리게 된다. 이 때부터 공자는 신이 되고 유가는 유교가 되었다. 


공자(551-479B.C.)는 중국 역사에 있어서 어떤 위치에 자리할까. 공자는 서양 철학으로 말하면 소크라테스와 비견되는 인물이라 할 것이다. 제자가 그의 사상을 정리하여 출판했다는 것도 비슷하고 사상 면에서도 유사성을 엿볼 수 있다. 공자는 주의 문화를 추종하여 주례를 잘 알았고 또 깊이 이해한 사람이기도 했다.


공자는 소크라테스와 흡사했다. 소크라테스도 원래 "소피스트였지만, 그들과 다른 점은 학생들에게 학비를 받지 않았고 지식을 팔지 않았다는 점이다.

소크라테스는(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귀납법으로써 정의(定義)를 구했고, 정의로써 우리 행위의 기준으로 삼았다. 공자 역시 정명(正名)을 주장했고, 명(名)에 대한 정의로써 우리 행위의 기준으로 삼았다. 소크라테스는 인간의 도덕성을 강조했다. 공자도 인간의 "인(仁)"이 "정치담당(從政)" 능력보다 더욱 중요하다고 보았다. - P92

소크라테스 사후에 그의 학파는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선양, 발전 과정을 거쳐 마침내 서양철학의 정통이 되었다. 공자의 학파도 맹자와 순자의 선양, 발전 과정을 거쳐 마침내 중국철학의 정통이 되었다. - P93


공자는 각각의 이름들에 정의가 있고 정의가 뜻하는 바는 이름이 지칭하는 사물의 본질이라고 보았다(정명론). 공자는 정명론을 통해서 당시의 혼란상을 바로잡으려 했다.


공자는 당시에 이름이 바르지 못해서 어지러워졌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이름을 바룸으로써 당시의 폐단을 구제하고자 했다.  - P103


공자의 직, 인, 충, 서, 의, 리, 성 또한 밝혔다. 공자의 철학은 인간의 심리(마음의 도리와 이치) 측면을 매우 중시했다. 그래서 그후 유가는 모두 심리학을 중시했다.


정직이란 안으로 자신을 속이지 않고 밖으로 남을 기만하지 않고, 심중의 좋고 싫음을 그대로 나타내는 것을 말한다. - P113

인이란 우리 마음의 진실되고도 예에 맞는 발로로서, 동정심을 바탕으로 자기 마음을 미루어 남을 헤아리는 것을 말한다. - P117

"자기가 서고 싶으면 남도 세워주고 자기가 통하고 싶으면 남도 통해주는 것"이니 곧 충이다. "자기가 싫어하는 것은 남에게 강요하지 않는 것"이니 곧 서이다. 충과 서를 실행한다고 함은 인을 실행한다는 말이다. - P121

공자는 다섯 가지를 세상에 실천할 수 있으면 인이다고 했는데, 공손하면 남에게 모욕당하지 않고, 관대하면 많은 사람의 지지를 얻을 수 있고, 미더우면 남의 신임을 받고, 기민하면 공을 이룰 수 있고, 은혜로우면 남을 부릴 수 있다’는 것이다. - P124

"군자가 벼슬함은 자기의 의를 행하는 것일 따름인즉", "그 옳은 도리를 바룰 따름"이며, "그 도를 밝힐 따름"이다. 도가 과연 행해질지의 여부는 결과로서, "이익"이고 "공(성과)"이니, 반드시 "꾀하고" 반드시 "계산할" 필요는 없다. - P127

군자는 의리에 밝고 소인은 잇속에 밝다.

이것이 공자와 맹자의 일관된 주장이고 묵가와의 근본적인 차이점이다. - P127


묵자(475?-396B.C.)는 묵가 사상의 중심 인물로 귀족을 반대했고 주의 문물제도를 반대했기 때문에 당연히 유가와 대척점에 있는 입장이었다. 그의 사상의 핵심은 공리주의와 겸애 사상이라고 할 수 있다.


"모든 주장에는 반드시 세 표준이 있다.

첫째, 그것의 근거; 둘째, 그것의 실증성; 셋째, 그것의 응용성이다. 어디에 근거해야 하는가? 위로 옛 성왕의 사적(事: 과거에 경험한 역사적 교훈)에 근거해야 한다. 어디에서 실증되어야 하는가? 아래로 뭇 사람의 이목의 실제 경험에서 실증되어야 한다. 어디에 응용할 수 있어야 하는가? 정치제도에 응용하여 국가와 모든 이익에 적중할지를 살펴야 한다."

"국가와 모든 인민의 이익"은 바로 묵자가 모든 가치를 평가하는 표준이다. 모든 사물은 반드시 쓸모가 있고, 주장(言論 : 학설)은 반드시 행할 수 있어야만 가치가 있게 된다. - P144

겸애의 도는 타인에게 유리할 뿐더러겸애의 도를 행하는 사람 자신에게도 유리하다. 즉 "타인에게 이로울" 뿐더러 "자신에게도 이롭다." 즉 순전히 공리적인 측면에서 겸애의 필요성을 증명했다. 이것이 묵가의 겸애설이 유가가 주장한 인(仁)과 다른 까닭이다. 천하의 큰 이익은 사람들이 겸애하는 데에 있고, 천하의 큰 해악은 사람들이 서로 투쟁하는 데에 있기 때문에 우리는 전쟁을 배격해야 한다. - P157


맹자(371-289B.C.)는 인간의 본성이 선하다 생각했고 호연지기를 통해 덕을 함양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는 공자의 사상을 계승했으나 기존의 귀족을 위한 제도를 넘어서 백성을 위한 정치/경제 제도를 시행하려 했다는 점이 다르다. 모든 정책은 인민을 위한 것이어야 한다는 생각이 마음에 들었다. 내가 공자를 읽을 때와 맹자를 읽을 때 태도가 달랐던 이유가 이것에서 온 게 아닌가 생각한다


인이란 "사람"이면 지녀야 할 마음이요, 의란 "사람"이면 따라야 할 길이다. 만약 "인에 거하지 않고 의를 따르지 않으면" 곧 사람이 아니다. - P204

"임금이 신하를 자신의 수족처럼 여긴다면 신하는 임금을 자신의 몸처럼받들 것입니다. 임금이 신하를 개나 말처럼 대한다면 신하는 임금을 일반인처럼 대할 것입니다. 임금이 신하를 초개처럼 취급한다면 신하는 임금을 원수처럼 여길 것입니다." - P206

인간에게 4단이 있는 까닭과 그리고 성이 선한 까닭은, 바로 성이 "하늘이 내게 부여한 것", 즉 인간이 하늘로부터 얻은 것이기 때문이다. 이는 성선설의 형이상학적근거이다.

마음이 인간의 "대체(大體)"이므로 "자기의 마음을 다 발휘한 사람"은 "인간의 본성을 알게 된다." 이 본성은 바로 "하늘이 내게 부여한 것이기" 때문에 "자신의 마음을 다 발휘하고" "인간의 본성을 아는 것"은 또한 "하늘을 아는 것"이다. - P210


양주는 맹자와 동시대 인물로 위아 사상을 주장하며 자신을 존중하자 말하였다. 맹자는 양주가 일신을 께끗하게 하기 위해대륜을 어지럽혔다며 비판하였다. 하지만 노장은 양주의 사상을 계승함으로써 그의 사상은 이어질 수 있었다.


양주(일파)가 말한 것은 주로 우리 스스로 자신의 생을 손상시키지 않을 방법(道)이다. 그러나 이 세계에서 살면서 스스로 자신의 생은 손상시키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나를 손상시키는 다른 사람과 다른 사물은 항상 있는 것이다. 우리는 진실로 자신을 손상시켜서도 안 되지만 또한 나를 손상시키는 다른 사람과 다른 사물에도 대처해야 한다. 이 측면에서의 양주의 방책은 오직 피(避 :도피)라는 한 글자의 비법이있었을 뿐인 듯하다. 예컨대 "은자"의 "피세(避世)"가 그 예이다. 그러나 인간사는 변화 무궁해서 피하지 못할 해는 늘 있는 것이다. - P231


‘노자’라는 책은 초나라 사람인 이이가 쓴 전국시대의 저작으로 알려져 있다. 사마천은 이이를 전설 속의 노담으로 병치시켰는데 노담의 모습은 신령과도 같아 전설 속 인물의 모습이다. 이이가 쓴 기록에 노담의 전설이 더해진 후 순자, 장자 이후에는 노자학을 노담의 학문으로 자리하게 된다. 노자학과 장자학의 학설은 같은 듯 다르다. 노자가 말하는 이상적인 사회는 원시 사회가 아니라 소박함을 지키는 사회이다. 야만을 함유한 문명의 경지로 오래 지속 가능한 문명이었다. 노자는 도에 형이상학적 의미를 부여하며 만물의 생성에는 원리가 있는데 그것을 도라 한다 했다.


"초연히 홀로 신명과 더불어 거했다"는 말과 "홀로 천지의 정신과 더불어 교류했다"는 말만이 같은 의미이다. 이외에, 『노자』학은 여전히 선후(先後), 자웅(雌雄), 영욕(榮辱), 허실(虛實) 따위의 분별에 주목하여, "단단하면 깨지고 예리하면 꺾임"을 인식하고, 깨지지 않고 꺾이지 않을 술(術)에 주목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장자학은 "사생을 도외시하고 시종을 무시한다." 『노자』학에서 주목한 내용은 장자학에서 주목할 가치가 없다고 여긴 것들이었다." - P279

도가라는 명칭은 한나라 사람이 수립했다. 그들이 노장을 같은 도가로 여긴 것은, 『노자』학과 장자학이 서로 다르기는 하지만 다같이 당시의 모든 전통적인 사상과 제도에 대한 반대파였기 때문이고, 또『노자』학과 장자학이 논한 도·덕의 두 근본 관념도 같았기 때문이다. 이것이 한나라 사람이 그들을 도가로 통칭한 이유였다. - P281

사물은 유(有)라고 이름할 수 있지만, 도는 사물이 아니므로 다만 무(無)라고만 일컬을 수 있다. 그러나 도는 천지만물을 생성할 수 있기 때문에 유라고도 일컬을 수 있다. 따라서도는 유무를 겸한 말인데, 무는 도의 체(體)를, 유는 도의 용(用)을일컫는다. - P285


“변자”는 당시의 “유명 학파”로 “유명 학파”를 통칭하는 말이기도 했다. 변자 학설은 명리(이름에 근거한 판단, 논리학)에 근거를 둔 것이다. 혜시(350?-260B.C.)는 변자 중 하나로 그리스로 따지면 소피스트와도 같았다고 생각할 수 있다. 장자의 학설은 “말”과 “지식”의 측면에서는 혜시와 일치한다. 그러나 장자는 혜시가 논변으로 명성을 추구하여 끝내 아무것도 성취하지 못하였기에 재능이 아깝다고 평했다. 


혜시는 단지 지식(知識)으로써 "만물은 어느 면에서는 모두 같고, 어느 면에서는 모두 다르다", "천지는 한몸이다"는 설을 증명했지만, 우리가 어떻게 해야 실제로 "천지와 한몸인" 경지를 경험할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다. 그러나 장자는 말(言) 외에 또 "무언(무言)"을 말했고, 지식(知) 외에 또 부지(不知)를 말했고, 이른바 "심제(心齋)", "좌망(坐忘)"을 통하여 실제로 망인아(我), 제사생(齊死生), 만물일체(萬物一體), 절대소요(絶對逍遙)의 경지에 도달했다. 따라서 「천하편」은 장자를 일컬어 "위로는 조물자와 더불어 노닐었으며 아래로는 사생을 도외시하고 시작과 끝을 무시하는 자와 더불어 벗했다"고 한 반면, 혜시는 "도덕수양이 빈약하고 사물의 해설 따위에 뛰어났은즉 매우 협착한 길이었다"고 평했다. 이로써 보건대 장자의 학문은 참으로 혜시에서 다시 진일보한 것이었다. - P324

혜시의 관점은 개체를 강조한 것임을 알 수 있다. 개체는 항상 변한다. 따라서 혜시의 철학은 변화의 철학이라고 할 수 있다.- P353


장자학은 전통적 사상과 제도에 반대하는 태도를 견지했는데 유묵을 공박했으나, 노담은 우러러 공경했다. 맹자와 장자(369?-286?B.C.)는 동시대인이었다. 장자의 학문은 양주의 학문이 진일보한 것으로 맹자의 관점에서 보면 장자도 양주의 추종자였고 장자 역시 맹자를 공자의 추종자로 보았다. 장자학이 논한 도와 덕은 노자와 같았으나 그는 천지만물이 변화 가운데 존재한다고 보았다. 본성을 따르는 것이 행복이고 사물은 모두 동등하므로 도와 합일할 수 있다면 하나의 경지에 이를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의 우주론이 신비주의로 여겨지는 것은 우주와 합일하는 경지에 이르는 것을 최고의 경지라 보았고 그곳에 이른 이를 지인이라 여겼기 때문이다.


만물의 생성은 마치 말이 질주하는 것과 같다. 움직여 변하지 않는 것은없고, 잠시도 변천하지 않는 것은 없다. - P363

정치적, 사회적 각종 제도는 장자학의 관점에서 보면 모두 다만 인간에게 고통을 주기에 충분한 것일 뿐이다. 사물의 본성은 지극히 상이하여 사물마다의 취향(所認爲之好)이 존재하기 때문에, 꼭 같을 필요도 없고 강제로 같게 해서도 안 된다. 사물이 한결같지 않으니, 한결같지 않은 대로 맡겨두어야 한다. 이른바 한결같게 하지 않음으로써 한결같게 한다(以不齊齊之)는 말이다. 정치적, 사회적 각종 제도는 모두 하나의 취향(一好)을 정하여 행위의 기준으로 삼아 사람들로 하여금 따르게 한 것이므로, 한결같지 않은 것을 강제로 한결같게 만든 것으로서 사랑이 오히려 해가 된 경우이다. - P366

맹자의 철학 속에 존재하는 신비주의의 경우, 신비주의적 경지에 도달하는 맹자의 방법은 "자강불식 서를 실천하여(強恕)" "인을 구함(求仁)"으로써, "만물이 다 내게 구비되어 있으니, 자신을 돌이켜 참될(誠) 수 있으면 그보다 더 큰 기쁨은 없다")는 경지에 이르는 것이라고 말했다. 장자학이 사용한 방법은 인식의 측면에서 모든 분별을 없애고, "천지는 나와 더불어 생겼고 만물은 나와 더불어 하나이다"는 경지에 이르는 것이다. 이 두 방법은 중국철학사상 분파하여 나란히 대치하여 상당한 이채를 띠었다. 그러나 장자학의 방법은 위진(魏晉) 이래로 다시 거론한 사람이 없게 된 반면, 맹자의 방법은 송명(宋明)의 여러 철학자들에 의해서 발전되고 제창되었으니, 두 파의 운명은 이렇게 달랐다. - P391


묵가의 묵경은 유가의 순자, 정명편처럼 변자의 학설을 논박한 것이다. 묵가는 유가보다 더욱 논변을 중시했고 묵가의 제자는 4개의 파로 나뉘었다(상리씨 유파, 상부씨 유파, 등릉씨 유파, 송견과 윤문 일파).각 파들은 서로 달랐고 상대를 별묵이라고 부를 정도로 자기들이 정통이라 주장했다. 묵경에서도 공리주의를 논하면서 이익이 행위의 기준이 되어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또한 묵경은 인간의 인식 능력을 인간 생명의 본질로 여겼다.


욕망사항은 항상 그 이익을 놓고 올바로 가늠(正權)해야 하고, 혐오사항은 항상 그 손해를 놓고 올바로 가늠해야 한다. 「경설」 : 권이란 두 가지 이익과 손해를 치우침 없이 고려하는 것이다." - P400


순자(298?-238?B.C.)는 공자를 존숭한 반면 맹자에 대해서는 비판적 태도를 견지했다. 손자는 맹자와 기질적으로도 학문적으로도 차이가 있었다.


공자는 어질고 슬기로웠으며 가로막히지 않았다. 따라서 천하통치에 대한 그의 학술은 선왕(先王)에 비해서 손색이 없었다. 일가(一家)의 언설로서주도(周道:周의 정치철학)의 핵심을 파악했고, 나아가 그것이 널리 앙양되고 통용되게 된 것은 그가 어떠한 기성의 잡설에도 가로막히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공자의 덕은 주공에 비견되었으며, 이름은 삼왕(하의 우왕, 은의 탕왕, 주의 문왕 또는 무왕)과 더불어 드날리게 되었으니, 이것이 바로 편견 없는(가려막히지 않은) 인식 체계의 복이다. - P451

단지 선왕(先王)의 지엽적인(피상적인 것만 본받고 선왕의 근본정신을모르면서도, 오히려 재주를 과시하고 뜻만 커서 견문은 잡다하고 해박했기에, 옛것에 빗대어 새 학설을 조작하여 오행(五行:五常)이라고 했다. 그들의 견해는 기묘하고 모순되어 기준이 없고, 불분명하여 논리적 근거가 없고, 난삽하여 해명할 수 없는 것들이었다. 그런데도 그 말들을 수식하고 찬양하면서 "이야말로 진정한 선배 군자(즉 공자의 말씀이다"고 말한다. [이 사조는] 자사(子思)가 창도했고 맹가(孟軻)가 동조했다. 세속의 어리석고 눈먼 유생들은 그저 떠들고 있지만 그것의 그릇됨을 모르고 있다. 드디어 서로 전수하면서 공자와 중궁이 그들 덕분에 후세에 더욱 추존되었다고 주장한다. - P452


순자는 자연지천을 주장했고 이는 노장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순자는 공맹과는 다르게 성악설을 주장했다. 또한 왕도정치와 패도정치를 구분한 맹자와는 달리 순자는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종류의 차이가 없다고 여겼다. 공맹의 정명은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관점에 치우쳐 있었으나 순자의 정명론은 묵자의 관점과 오히려 비슷했다(인간이 가진 인식능력이 지이고, 지가 외물과 접촉하는 것이 인식이며 이름을 통해서 실제 사물에 지위를 부여하는 것이다.).


배울 수 없고 도모할 수 없는 천성적인 것을 성이라고 한다. 배워서 얻을 수 있고 도모하여 성취할 수 있는 인위적인 것을 위라고 한다. 이것이 바로 본성과 인위의 분별이다. - P461

우리는 무엇으로써 도를 인식하는가(知道)? 그것은 바로 심(心)이다. 심은어떻게 하여 [도를] 인식하는가? 허일이정(虛壹而靜 : 허심, 전일, 평정)함으로써 인식한다. 심은 잠시도 [생각을] 저장하지 않을 때가 없지만 거기에는 이른바 허(虛: 비어 있음)가 존재한다. 심은 대립적인 것들이 없을 때가 없지만 거기에는 이른바 전일함(一:專一)이 존재한다. 심은 잠시도 활동하지 않을 때가 없지만 거기에는 이른바 평정(靜)이 존재한다. - P468

성취하는 데에 재능을 다 발휘하여 도야된 성품을 지속시켜 처음 상태로 되돌아가지 않으면 교화된 것이다. - P471

○ 임금이란 공동체(사회)를 잘 경영하는 사람이다. 공동체의 도리가 정당하면 만물은 각기 그 적합성을 획득하고, 육축이 잘 자랄 수 있고, 뭇 생물이제 명을 다할 수 있게 된다. 따라서 제때에 기르면 육축은 잘 자라고, 제때에벌목하고 식목하면 초목은 번성하고, 제때에 정령이 발해지면 백성들은 단결하고 어진 인재들은 복종하는데, 이것이 바로 성왕의 제도이다. - P480


법가의 학설은 제나라와 삼진(한, 위, 조)에서 성행했다. 당시 현실은 귀족정에서 군주정으로 가던 때였는데 인민은 독립하고 자유로워지고 국가 범위는 넓어지고 조직이 복잡해지면서 사람 간의 관계가 이전보다 친밀하지 않게 되면서 인물로 사람을 다스리는 정치는 먹히지 않게 되었다. 법가는 한대에 와서 사상으로 자리하게 된다. 법가하면 한비자만 있는 줄 알았는데 그 전에 세 파가 존재했다. 신도(395?-315?B.C.), 신불해(385?-337B.C.), 상앙(390?-338B.C.)이 그 중심 인물이다. 세 파는 각각 세(임금은 위세가 있어야 신하를 부릴 수 있다)와 술(군주가 신하를 제어해야 한다), 법(신하가 준수할 법규가 있다)을 중시하는 점이 달랐다. 이 세 파를 하나로 집대성한 사람이 한비자(279?-233B.C.)다. 


법이 통일되지 않으면 군주에게 불길하다.…………즉 법이란 고정불변적이지않으면 안 된다는 말이다. 법이란 존망(存亡)과 치란(亂)이 갈라지는 근원이요, 성군(聖君)이 천하의 대(大)의표가 되는 수단이기 때문이다.……………만사만물은 법에 규정된 것이 아니면 행해서는 안 된다. 따라서 법이란 천하의지극한 도술(道)이요, 성군에게 가장 실용적인 기물이다.………법을 만드는이가 있고, 법을 수호하는 이가 있고, 법에 복종하는 이가 있다. 무릇 법을만드는 이는 군주요, 법을 수호하는 이는 신하요, 법에 복종하는 이는 일반백성이다. 군신(君臣), 상하(上下), 귀천(貴賤)을 막론하고 모두가 법을 따르는것, 이것이 바로 태평성세(大治:太平)이다. - P511

일은 사방에 있지만 관건은 중앙에 있다. 성인(聖人 : 명철한 군주)이 관건을 쥐고 있으면 사방의 신하들이 저마다 공력을 바친다. 군주가 허심한 태도로 신하를 대하면 신하들은 각자의 능력을 운용한다. 군주는 이미 온 천하를 품에 안았으면 은밀한 가운데서 신하들의 동태를 관찰한다. 좌우에 보필하는 신하가 세워졌으면 문을 열고 모든 것을 맞아들이기만 하면 그만이다. 군주가 변경하거나 바꾸지 않고 오직 두 가지(二: 形, 名)를 바탕으로 행하여, 중단 없이 행하는 것이 바로 "법도의 실천(履理)"이다. - P525


진한 무렵 예기, 효경, 대학, 중용을 통해서 이론을 뒷받침하는 저작이 정리된다. 예기에는 주로 예를 논하고 있는데 사람과 사람 간의 충돌을 막기 위해 든 예라는 이론은 차별을 낳고 분리를 낳아 구조적 폐쇄성을 낳는다고 보인다. 오랜동안 이것이 고착화되었고 이는 오늘날로 보면 고리타분한 이론으로 느껴질 수 밖에 없을 것 같다. 


예란 인간의 성정(人之情)에 의거하여 그것을 절제하고(節) 격식화하여(文) 인민의 단속(民坊)을 도모하는 것을 말한다. 예의 기능(禮之用)에는 두 측면이 있는데, 하나는 "인간의 성정"을 "절제하는" 측면이고, 하나는 "인간의 성정"을 "격식화하는" 측면이다. 먼저 "인간의 성정"을 "절제하는" 측면에 대해서 논한다. 인간의 정욕의 발로(情欲之流露)는 적당한 절도와 본분(分限)에 맞아야 한다. 절도와 본분에 맞는 것이 곧 중도(中)에 맞는 것이다. 중도란 인간의 정욕발로의 적절한 한 지점으로서, 이 지점을 넘으면 남혹은 자기 자신의 다른 측면과 충돌이 생긴다. 예란 인간에게 중도를 얻게 하는 표준적인 외부규범이다. - P538


전국시대 말이 되면 유가의 육예인 시, 서, 예, 악, 춘추, 역이 정립된다. 진한은 통일 후 정치나 사회상으로 각종 제도를 정립할 때 유자의 힘을 빌렸는데 유자는 이전의 제도에 밝았고 공자 이래 기존 제도에 부여한 각종 이론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또 여러 사람의 사상이 포함된 유가의 사상은 탄력성이 있어 흡수할 수 있는 범위가 넓었던 이유도 있다. 따라서 진한 통일 이후에는 유가에 필적할 수 있었던 사상은 없었다.


○음양이 교대로 작용하는 것이 도(道)이다(一陰一陽之謂道). 도를 이어받은 것이 선(善)이고, 도에 의해서 성취된 것이 성(性)이다. [이 도는 어진 이가 보면 어질다고 하고, 지혜로운 이가 보면 지혜롭다고 하며, 또 백성들은 날마다 도를 사용하면서도 인식하지 못한다. 따라서 군자의 도를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 [도는 만물을 생육하는 인(仁)에 드러나 있지만, 그 작용은 은밀하여 감추어져 있다. 만물을 약동시키지만 즉 만물에 생명을 불어넣음] 성인처럼 걱정하지 않는다. 그 도의 성덕(盛德 : 왕성한 능력)과 대업(大業 : 즉 만물)은 지극하다. 우주간의 모든 존재가 대업이고, 끊임없는 혁신(日新)이 성덕이고, 끝임없이 낳고 또 낳는 것이 "역(易)"이다. - P607

고인은 얼마나 완벽했던가(備)! 신명(神明)에 짝하고 천지를 본받아 만물을 양육하고 천하를 화평시켰다. 그 은택은 모든 백성에 미쳤고, 본수(本數:본질적인 법도)에 밝았고, 그것들을 말도(度 : 말단적인 제도)와도 연계시켰다. 상하 사방 모든 곳과 대소(大小), 정조(精粗: 심오한 것과 조잡한 것)를 막론하고 그들의 영향은 무소부재했다. 그 가운데 명확히 본수와 말도(數度)에 해당되는 것들은 옛날의 법도와 사관들의 기록 속에 아직 많이 보존되어 있다. 그리고 『시』, 『서』, 『예』, 『악』속에 기록된 가르침들은 추노의 선비(鄒魯之士)와 진신선생(搢紳先生)들 대부분이 통달하고 있다. - P642


중국철학사 상권은 자학시대의 사상을 역사적 흐름에 따라 고찰하였다. 하권은 경학시대로 청나라 시대까지를 다룬다. 

사실 철학사 책이 재밌을 수는 없다. 읽다가 졸기도 하고 정리하느라 애를 먹었으나 이렇게 한 번 훓고 나니 유가, 도가, 법가 사상 등의 등장 배경과 이론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앞으로 중국 문학과 역사를 읽을 때도 이해의 깊이를 넓힐 수 있는 기회가 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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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ni74 2022-07-30 19:16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우와 화가님!!👍변자 혜시 새로운 걸 많이 알아갑니다 ㅎㅎ 전 묵자가 좋더라고요. 실제 얼굴이 검었다고 노동자계급이었을거란 글 생각납니다. 잘 읽고 갑니다 화가님 *^^*

거리의화가 2022-07-30 20:02   좋아요 1 | URL
미니님 저는 묵자 하면 겸애만 떠올렸는데 공리주의를 주장한 것이 흥미롭더라구요. 저는 노자가 이야기한 이상 사회가 가장 마음에 와 닿았어요. 안분지족? 소박함을 지키는 것이 중요하다라는 생각이 들어서요. 변자, 혜시 저도 이번에 처음 알았답니다^^ 이리도 다양한 학파들이 나와서 오늘날까지 전해지는 걸 보면 당시 사람들도 세상을 개혁하고자 하는 꿈과 이상이 있었던거겠죠. 감사합니다^^

희선 2022-08-01 02:0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오래전 사람이어도 지금까지 책이 읽히기도 하는군요 제대로 읽어본 건 하나도 없지만... 공자나 노자는 여러 사람이 말하기도 한 듯합니다 장자도... 이 책 보기 쉽지 않았겠습니다 상권 다 보셔서 뿌듯하시겠습니다 거리의화가 님 남은 하권도 끝까지 보시기 바랍니다


희선

거리의화가 2022-08-01 15:26   좋아요 2 | URL
몇 천년전의 학자와 철학자들의 사상이 지금까지 영향력을 미치는 것을 보면 놀랍죠^^ 아마도 여기 나온 사상가들의 철학을 제대로 공부한 이들은 드물 듯 싶습니다. 각 저작들의 부피도 상당하고 일단 한문이라 쉽지 않죠. 상권을 읽은 김에 하권도 이어서 보려고 계획은 잡았는데 상권보다는 덜 어려웠음 좋겠습니다ㅎㅎ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