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이 끝난 뒤 내 어릴 적 시골마을은 여자들의 세상이었다. 여자들의 마을. 남자 목소리를 나는 기억하지 못한다. 그때의 풍경은, 마을 여자들이 전쟁을 이야기하고, 흐느껴 울고, 흐느끼듯 노래하던 모습으로내 기억 속에 남아 있다. - P15
여자들의 이야기는 전혀 다른 것이고, 또여자들은 다른 것을 이야기한다. ‘여자‘의 전쟁에는 여자만의 색깔과 냄새, 여자만의 해석과 여자만이 느끼는 공간이 있다. 그리고 여자만의 언어가 있다. 그곳엔 영웅도, 허무맹랑한 무용담도 없으며, 다만 사람들 때론 비인간적인 짓을 저지르고 때론 지극히 인간적인 사람들만이 있다. 그리고 그곳에서는 사람들만이 아니라 땅도 새도 나무도 고통을 당한다. - P17
우리는 고통스러워할 줄도, 고통에 대해 이야기할 줄도 안다. 고통은 남루하고 힘겨운 우리네 삶에 의미와 가치를 부여한다. 아픔, 그건 우리에게 하나의 예술이다. - P20
사람은 참으로 오랜 시간이 흘러서야 지나온 세월이 바로 자신의 삶이었으며, 이제 그 삶을 받아들이고 떠날 준비를 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하지만 상처받은 채 떠나고 싶지는 않은 법. 그렇게 아무렇지도 않은 척, 그렇게 쫓기듯 황망히는 지난 삶을 돌아보는 사람의 마음속엔 자신의 이야기를들려주고 싶은 욕구뿐만 아니라 풀지 못한 삶의 비밀까지 알아내고픈 욕구도 숨어 있다. - P21
사람들은 나에게 회상은 역사도 문학도 아니라고 말한다. 회상은 예술로 승화되지 못한 추레한 인생의 한 모습일 뿐이라고 이야기의 사원을 쌓아갈 원료들, 그건 언제나 넘쳐난다. 도처에 이 벽돌들이 굴러다닌다. 벽돌이 사원은 아니지 않느냐고? 하지만 나에게는 전혀 그렇지 않다……… 바로 그곳, 따스한 사람의 목소리, 과거가 생생히 반추되는 그목소리 속에 원초적인 삶의 기쁨이 감춰져 있고 누구도 피해갈 수 없는삶의 비극이 담겨 있다. 삶의 혼돈과 욕망이 삶의 유일함과 불가해함이. 목소리 속에 이 모든 것들이 다듬어지지 않은 날것 그대로의 모습으로 남아 있다. 진짜 원본들이. - P26
역사는 거리에 있다. 군중 속에 나는 우리 한 사람한 사람이 역사의 조각들을 가지고 있다고 믿는다. 어떤 사람은 반 페이지만큼의 역사를, 또 어떤 사람은 두세 페이지만큼의 역사를 우리는 함께 시간의 책을 써내려간다. 저마다 자신의 진실을 소리 높여 외친다. 하지만 뉘앙스의 함정. 그래서 이 모든 진실의 외침을 명확히 들어야만한다. 이 모든 것 안에 녹아들고 이 모든 것과 하나가 되어야 한다. 하지만 동시에 자신을 잃어버려선 안 된다. 거리의 언어와 문학의 언어를 하나로 잘 버무려내야 한다. - P26
전쟁이라면 토할 것 같고 전쟁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역겨운, 그런책을 쓸 수만 있다면, 미치도록 쓰고 싶다. 장군들조차 전쟁이라면 고개를 돌리게 만드는 그런 책을⋯⋯⋯⋯남자동료들은 (여자동료들과는 달리) 그런 ‘여자‘의 논리에 기겁한다. 그리고 나는 곧바로 ‘넌 전쟁터에 없었잖아‘라는 ‘남성‘의 논리를 듣게 된다. 어쩌면 내가 전쟁터에 없었던 건 잘된 일인지도 모른다. 덕분에 ‘불같은 증오심‘은 나에게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감정이 될 수 있었고, 나는 군인의 관점도 남자의 관점도 아닌 보통 사람의 관점을 가지게되었으니까…… - P28
"남편은 내가 걱정됐나봐. 지금도 내가 엉뚱한 이야기를 할까봐 속으로 끙끙 앓고 있을걸 해야 할 말만 해야 되는데 그러지 않을까봐서." 그런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고, 그런 집이 한두 집이 아니었다. - P31
나는 ‘하찮은 이야기 따위는 필요 없소……… 우리의 위대한 승리에 대해 쓰시오.‘ 라는 추신이 덧붙여진 편지를 여러번 받았다. 하지만나에겐 바로 이 ‘하찮은 것‘들이 중요하다. 이 하찮은 것들이야말로 삶의 온기이자 빛이므로, 긴 머리 대신 뭉툭하게 잘려나간 짧은 앞머리, 뜨거운 죽냄비와 국그릇들이 돌아오지 않는 주인들을 기다리고 전투에나갔다 무사히 돌아오는 사람은 백명중에 일곱 명 정도였다는 이야기, 혹은 전쟁터에 다녀온 후로는 줄줄이 걸린 붉은 살점의 고기를 볼 수가없어서 시장에도 못 다니고, 심지어 붉은색이라면 사라사 천도 쳐다볼수가 없었다는 사연들・・・・・・ " - P32
이들은 여전히 그 시절에 애정을 느낀다. 이들에게 그 시절은단지 전쟁만이 아니었다. 그들의 젊음이었고 첫사랑이었다. - P34
내게 보내온 편지들마다 한결같은 내용이 쓰여 있다. "당신을 만났을 때 다 털어놓지 못했어요. 그때는 모든 걸 다 말할 수 있는 시대가아니었으니까. 우리는 많은 것을 알고도 침묵하는 데 익숙해져 있었어요…………." "당신을 다 믿을 수가 없었어요.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 일을 입에 담아선 안 됐으니까요. 부끄럽기도 했고요." "의사한테 들었어요. 내가 무서운 병에 걸렸다는 걸………… 모든 걸 털어놓고싶어요....." - P39
나도 그네들처럼 오랫동안 우리의 승리가 두 얼굴을 가졌다는 사실을 믿지 못했다. 하나는 아주 멋진 얼굴, 다른 하나는 무시무시한 얼굴. 하지만 둘 다 흉측한 상처투성이라 봐줄 수가 없다. "육탄전에서는 상대방을 죽일 때 상대의 눈을 보게 돼. 그건 폭탄을 떨어뜨리거나 참호에 숨어서 총을 쏘는 것과는 다른 일이지." 그네들이 들려준 말이다. - P59
나를 이 집으로 이끈 건, ‘얼마 전 민스크에 있는 ‘돌격대‘라는 이름의도로장비 생산공장에서 선임회계원 마리야 이바노브나 모로조바의 은퇴식이 있었다‘는, 지역 일간지에 난 짤막한 기사였다. 그 기사에는 그녀가 전쟁중에 저격병이었으며 무공훈장을 11개나 받았다고 쓰여 있었다. 그녀의 총에 죽어나간 적병의 수만 75명이라고도 했다. 이 여인이전쟁 때 맡았던 일과 현재의 평온한 직업을 일치시키는 건 어려운 일이었다. 신문에 실린 그녀의 사진을 봐도 그랬다. 아무리 봐도 평범한 보통 여인네였다. - P64
우리에게 ‘총도 쏠 줄 모르면서 어떻게 전선으로 가겠다는 건가?‘라고 묻더군. 그래서 우리는 기다렸다는 듯, 한목소리로 ‘이미 배웠다‘고 대답했지…… 그러자 다시 ‘어디서? 어떻게 배웠다는 건가? 붕대는 감을 줄 아나?‘라고 물었어. 오호, 붕대 감는 일이라면 자신 있었지. 군정치위원회 프로그램에서 우리 지역 의사한테 이미 배웠거든. 그제야 더이상 질문은 거두고 우리를 진지하게 대하기 시작하더군. 게다가 우리에겐 숨겨둔 카드가 한 장 더 있었어. 그건 바로 우리가 한두 명이 아닌 무려 40명이나 된다는 점, 그뿐 아니라 모두 총을 쏠 줄 아는데다 응급처치까지 할 줄 안다는 것이었지. 마침내 ‘가서들 기다리시오. 당신들의 요청을 긍정적으로 검토해보겠 ‘소‘라는 답을 받아냈어. 아, 집으로 돌아오는데 얼마나 행복하던지! 결코 잊지 못할 거야・・・・・・ 그래, 그래... - P68
지금 기억으로 대령 이름이 브로트킨인가 그랬는데, 아무튼 지휘관인 그 대령이 우릴 보더니 버럭 화를 내는 거야. ‘성가시게 꼬맹이들이 달라붙었군. 이건 뭐, 여성무용단이라도 온 거야? 무슨 발레단이 온 거냐 말이야! 여긴 전쟁터지, 무도회장이 아니라고! - P70
우리의 사격 실력은 훌륭했어. 남자저격병들보다 더 뛰어날 정도였으니까. 최전선에서 불려와 고작 이틀간 훈련받은 게 다인 남자저격병들은 우리가 자기들의 임무를 거뜬히 해내는걸 보고는 깜짝 놀랐지. 우리 같은 여자저격병들은 아마 평생 처음 보았을걸. 사격 시범에 이어위장술을 해 보였어………… 대령이 숲속 빈터로와서 주위를 살피며 서성이다가 앞이 잘 보이지 않았는지 작은 둔덕에올라섰어. 그런데 갑자기 ‘작은 둔덕‘이 발밑에서 애처로운 소리를 내는거야. ‘아, 대령 동지, 더이상 못 버티겠어요. 너무 무거워요.‘ 와, 웃음이터졌어! 대령은 그렇게 감쪽같은 위장이 어떻게 가능한지, 보고도 믿질못했어. 그러고는 ‘이제 이 꼬맹이들에 대한 내 말은 모두 취소한다‘고했지.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령은 여전히 우리 때문에 힘들어했어……… 오래도록 우리에게 익숙해지지 못했지.. - P71
결국 그를 쓰기로 마음먹었지. 그래서 마음을 다지는데,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드는 거야. ‘사람이잖아. 비록 적이지만 저자도 사람이야.‘ 그러자 손이 덜덜 떨리고, 온몸에전율이 흐르면서 오한이 나기 시작했어. 무섭고………… 가끔 꿈속에서 그느낌이 되살아나. 말하는 지금 이 순간도 그렇고………… - P72
완전히 타버려서 새까만돌만 남아 있었지. 건물 터만 ……… 다들 근처에 가기를 꺼렸는데, 나는 왠지 가까이 가보고 싶은 거야………… 가서 보니잿더미 속에 사람 뼈들이 있고, 그 뼈들 사이로 까맣게 탄 별모양이 보이는데. 그건 거기서 불타 죽은 사람들이 바로 우리 부상병들이나포로들이었다는 의미였지. 그 일을 겪고 난 후로는 아무리 적병을 죽여도 더이상 괴롭지 않았어. 새까맣게 탄 별모양을 본 후로는…………..... - P74
나는 자다가도 ‘쿵‘ 하는 폭발음이 들리면 침대에서 뛰쳐나와 외투를 움켜쥐고는 문으로 달려갔어. 어서 어디로든 도망쳐야 했으니까. 그러면 엄마가 나를 붙잡아 꼭 끌어안고는 달래주셨어. ‘정신 차려, 제발 정신 차려. 전쟁은 끝났어. 너는 지금 집에 있잖아.‘ 엄마의 말에 정신이 들곤 했지. ‘그리고 엄마가 여기 있잖아. 엄마가 네 옆에………… 엄마는 조용조용히 말씀하셨어. 아주 작은 소리로… 큰소리로 이야기하면 내가 깜짝깜짝 놀랐거든………" - P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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