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한국인이 방황하고 자신이 없는 것은 어떤 ‘연속‘의 체계 속에 자기를 자리매김하지 못하고 있으며 또 사실상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 P126
그는 당증을 집어들었다. 자유에의 여권, 그는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사진 속의 약간 우울한 미남자는 의얼굴을 지켜보고 있었다. 이 사진을 품고 남자가 있는 나라로 가는 배를 타려던 여자. 폭격이 한창인 도시. 어두운 방공호 속에서소년을 애무하던 여자. 먼나라, 먼 옛날의 이방인의 이야기를 들려주기 위하여 집집을 찾아다니는 하얀 목덜미와 풍부한 입술의여자. 세 사람의 여자가 그에게 손짓하고 있었다. - P143
인생의 두 가지 길. 투쟁과 체념 사이의 조화를 얻지 못하고 있는 우리들의 생활. 격식도 없고 믿음도 없는 시대. 도시에 나가 소란한 장바닥에서 부대끼다가 고향에 돌아오면 모든 것이 작아 보이고 무지스러워 보이는 그러한 마음. 그것을 이겨내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것을 이겨내는 길은 한두 가지에 손을 대는 것으로써는 되지 않는다. 갑이을과 얽히고 을이 병과 얽히고 그런 식으로 모든 것이 얽혀 있으므로 그 속에서 사는 어떤 개인이 아무리 절박한 위기를 느낀다 해도일은 조금도 달라지지 않는다. 그래서 결국 신경만 갉아먹는 결과가 되고 마는 것이 아닌가. 세상은 저 갈 데로 간다. - P163
세계에는 왜 아름다움과 더러움이 함께 있는 것일까. - P163
김학이 독고준을 좋아하고 그에게 끌리는 데는 그러한 자유에 대한 부러움이 섞여 있었는지도 모른다. 독고준을 생각할 때 다른 것은 생각지 않아도 좋았다. 여자를 볼 때마다 그녀의집안은? 가족은? 하고 생각해야 할 그런 필요가 없었다. 책에서배운 추상적인 논리와 동인들과 같이 있을 때의 미묘한 기쁨과 집에와서 몸으로 실감하는 혈연의 유대와, 이 세 개의 자리를 김학의 정신은 헤매고 있었다. - P164
1959년은 이른바 2.4 파동의 떠들썩한 소문을 안고 시작되었다. 크리스마스이브에 한 무리의 무인들이 국회에 나타나서 눈부신 활약을 한 이 사건은 분명히 한국의 정치사에 길이 남을 만한큰일임에는 틀림없었으나 그렇다고 해서 2천만 국민이 모두 다 이일에 비분강개해서 인심이 흉흉해 있었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고 사실 그렇지도 않았다. 신정은 도시에서 여전히 축하되었으며, 여전히 새해의 태양(조금도 다르지 않은 싱싱한)은 솟아올랐고, 사람들은 열심히 사랑을 하고, 사무실에 나갔다. - P175
그 여름날은, 그가 언제든지 돌아갈 수 있는 마음의 성지였다. 순례의 길에서 본 수많은 여자를 그 성지의 여신상과 비교할 때, 그것들은 어림도 없었다. 어떤 사람이든 자기의 신을 가지고 있다. 그것이 등록이 된 신인가 아닌가에 차이는 있을망정, 그 사람의 얼을 가장 확실하게 움직이는 힘을 가지는 한에서 그것은 신이다. - P197
학은 첫눈에 이 사람에게 반해버렸다. 학에게는 묘한 버릇이 있다. 사람의 얼굴에 대한 어떤 도박 같은 것이다. 학이 독고준을 대할 때에도 그 얼굴의 분위기가 미치는 힘이 컸다. 독고준의 입에서 나오면 억지소리도 자연스러워 보였다. 이 세상에는 타락할 권리를 가진 사람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닐까, 하고 학은 가끔생각하는 것이었다. 황 선생의 경우는 바로 그 정반대였다. - P202
혁명은 사상과 엘리트와 대중의삼중주라고 할 수 있어. 이 셋 가운데 어느 하나가 빠져도 혁명은성공하기 어려워. - P208
현호성과 독고준. 그러니까 그들은 공범으로 잘 처신한 것이 된다. 독고준 자신에 대해서 말한다면, 그는 이 집에 오고부터어떤 투묘의 감정을 느낀다. 그가 닻을 내린 곳이 어떤 곳이어떤 곳이며 어떻게 해서 그렇게 되었는가에는 관계없다. 사회에서 발붙일 데가 없던 한 청년이, 생활의 수단과 부단히 반응하고대결해야 할 ‘가족‘을 한꺼번에 새로 얻은 것이다. 어떤 좌표에 자기를 얽어맨다는 안도감이다. 그러면서도 독고준은 자기가 소속한이 좌표의 체계에 대해서 조금도 사랑은 가지지 않기로 작정한 것이다. 그는 그와 같은 인정사정없는 윤리를 지니기 위해서 ‘가족‘의 이론을 그는 만들어냈었다. - P233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규칙을따라서 경기하는 운동선수 같은 거죠. 본바탕 같은 멋, 본고장 같은 진지함을 나타낼 수 있겠어요? 우린 가려운 제 다리는 놓아두고 남의 다리만 긁고 있는 희극 배우 같은 거죠. 그러나 바로 긁기나 하겠어요? 관중은 웃고 자기도 겸연쩍어서 히이 웃지요. 한국문학에서 휴머니즘이 몸에 배지 않는 것이라든지, 한국 현대 영화의 인물들의 액션이 차마 눈 뜨고 못 볼 처절한 것이라든지, 다 그런 까닭이 아니겠어요? 우린 그걸 보고 웃지요. 그러나 그게 자신의 얼굴이라는 걸 깨닫는다면 그의 웃음은 순간에 굳어지겠지요. 그나마 역사극에 나오는 인물들의 연기가 얼마나 자연스러워요. 혹은 자연스럽게 보여요. 자기 룰에 따라 움직이는 때문이죠. - P239
친구도 여러 가지다. 한쪽이 끌고 다른 편이 끌리는 그런 사이도 있고, 두 사람 다 덤덤한 그런 친구도 있다. 얼핏 보아도 독고준과 현의 그것은, 성의 없는 여자에게 매달리는남자의 그것을 닮은 데가 있었으나, 학이 그런 미묘한 데는 신경을 안 쓰는 편이고 준이 또한 그런 식이어서 그들의 사귐은 잘 맞는 편이었다. 사람과 사람의 관계는 겉으로 보아서는 잘 모르는그런 묘한 데가 있다. - P2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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