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자의 처우가 개선되고 노동 환경이 좋아진 것이 불과 얼마되지 않았다는 것을 새삼 느끼게 된다.
1960, 70년대 아동과 여성 노동자들이 먼지를 뒤집어쓰고 생산 압박에 쫓겨 저임금 노동에 시달리던 때가 얼마 되지 않았다.

① 마을은 행정단위다. 예컨대 마을은 정부의 징세 단위이며 심지어 법률적으로는 독립된 법인이 될 수 있다.
② 마을은 공동체가 공유하는 토지를 갖고 있으며 이 토지는 (러시아의 농촌 공동체 옵쉬나Obshchina처럼) 공동체의 결정에 의해서만분배되거나 재분배될 수 있다.

중국 남부지역에서 반드시는 아니지만 대체로 폐쇄적인 주민 거주지역과 맞물리는 (북부의 마을보다 좀더 확장된) 문중조직이 통합과조정의 기능을 담당하고 있었다. 이런 문중조직을 역사발전의 시각에서 본질적으로 낙후되었거나 나아가 ‘원시적이라고 평가하는 것은 온당치 못하다. 문중조직은 고도로 효율적인 농업을 창조하는 조건이었다. 유사한 기능을 공유재산을 보유한 사원(寺院) 공동체가 담당했다. 이런 상황은 중국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 P1827

서술하는 과정에 삽입되어 있는 중국과 인도의 대비에서 알 수 있듯이 세계의 양대 농업사회는 여러 면에서 유사했다. 농민은 원칙적으로 법률상 자유인이었다. 그들이 생산한 것은 일부는 시장에서 팔려나갔다. 경영의 가장 중요한 단위이자 원시 생산단위는 (때로는 소수의 하인과 고용 노동자의 도움을 받는) 가정이었다. 이 세 가지 특징은 인도/중국과 서유럽 —— 최소한 프랑스와 엘베강 서쪽의 독일의 공통점이면서 동시에 인도/중국이 19세기에 세계의 다른 지역에서 노예를 사용하거나 예속적인 노동에 의존하는 플랜테이션, 라티푼티움, 대형 농업기업과 대비되는 점이다. 그러므로 자유로운 서방과 노예노동에 의존하는 동방이란 이분법적 구분은 착오다. - P1832

19세기를 통틀어 세계의 거의 모든 지역에서 농업노동은 육체노동이었다. 유럽의 대부분 지역과 아시아,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 사이에는 별 차이가 없었다.26) 계층상황도 문화에 따른 차이는 없었다.
포메라니아(Pomerania)* 또는 폴란드 장원의 고용 농업노동자와 인도의 고용 농업노동자는 (각자 특유의 위계질서와 문화적 환경 안에놓여 있었지만) 본질적으로 차이가 없었다. 물질적인 불안정 때문에 일거리를 찾아 사방을 떠돌아야 한다는 것은 그들의 생활환경과경험의 기본적인 유사성이었다. - P1834

자유주의 경제학은 국제교역이 ‘봉건적 제도를 해체함으로사람들을 낡은 속박으로부터 해방시키고 노동의욕과 창의력을북돋울 것으로 예상했다.
예상은 실제로 현실이 되었다. 특히 외부의 이해관계가 개입되지않은 곳에서는 소농 경영자는 해외 판매망을 이용해 생산품의 판매처를 찾아냈다. 그러나 자국 정부(예컨대 일본)가 명확하게 수출을지지하고 이를 위한 법률제도와 필요한 사회기반시설을 건설했을때에만, 또는 식민정부가(정치적 안정을 위해 식민지 농민을 보호하려는 의도에서) 외국 플랜테이션 기업을 억제하는 상황에서만 장기적인 성공을 기대할 수 있었다. 대부분의 경우 이런 조건이 갖춰지지않았고 그 결과 외부의 이해관계가 우위를 차지했다. - P1835

식민지 플랜테이션은 전혀 새로운 형태가 아니라 구시대 노예제 플랜테이션이진화한 산물이었다. 플랜테이션은 글로벌 자본주의의 도구였으며하나의 예외도 없이 열대지역 국가에서 등장했다. 공업과는 달리 플랜테이션 경제는 국민경제 발전의 과정에 포함되지 않았다. - P1836

전체적으로 볼 때 19세기 라틴아메리카의 아시엔다는 폐쇄된 왕국이었다. 아시엔다 내부에서 농장주가 모든 일을 독단했다. 법률제도는 매우 선진적이었으나 경찰과 법원이 채무고용농의 이익을 보호하는 경우는 드물었고 그들의 생존을 보장해주던 마을 공동체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 P1839

19세기에 작업 장소는 새로운 모습을 갖추었다. 공장과 달리 조선소는 몇몇 문명에서 수천 년 동안 수공업노동 협업의 장소로서 알려져 왔다. 근대 초기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에서 조선업은 대기업 조직형식을 갖춘 가장 중요한 경제부문의 하나가 되어 있었다. 그 시절조선업은 목수들의 세계였고 그 뒤로 공업화를 주도하는 부문이 되었다. - P1843

19세기의 공장은 새로운 특성 - 이중성 - 을 지녔다. 공장은 대의 은형 생산 장소이면서 동시에 사회적 행위의 장소였다. 각종 협력의형태와 권력의 등급이 공장에서 먼저 나타난 후 사회의 다른 부문에확산되었다. 공장은 가정과는 완전히 분리된 순수한 생산의 장소였다. 공장에서는 새로운 작업 습관과 리듬이 필요했고, ‘자유로운 임금노동의 이념이 제한적으로만 적용되는 새로운 규범이 필요했다. 공장노동은 분업과 협력 - 노동자의 능력에 따라 분배되고 조정되는 이었다. 공장노동은 시발점에서부터 작업의 효율을 높이는 방식을 시험해왔고 마침내 1911년에 뛰어난 관리자문가 프레드릭 테일러(Frederick Winslow Taylor, 1856-1915)가 작업과정의 속도를이고 보다 과학적으로 작업과정을 통제하는 심리물리학적 최적화이론 — 이른바 ‘테일러주의‘(Taylorism) —을 창안해냈다. - P1844

공장에서 어린 여성노동자를 맞이한 것은 공포스러운 작업조건이었다. 그들은 감시받는 대형 숙사에 기거하면서 한 가지 채소 반찬만곁들인 쉰밥을 먹어가며 하루 15-17시간을 일했다. 중간 휴식시간은매우 짧았고 성폭력은 빈번했다. 작업은 단조로웠으나 온 신경을 집중해야 했다. 누에고치를 삶는 솥 주변에서는 수시로 사고가 발생했다. 이런 환경은 무서운 폐결핵의 온상이었다.
같은 시기에 번성기에 들어간 면방공업의 작업조건도 이보다 나을게 없었다. 일본의 면방공업은 머지않아 견사공업보다 더 중요한 고용주가 되었다. 면방공업의 특징은 작업자를 극도로 피곤에 빠트리는 야간작업이었다. 1916년 이전까지는 하루 14시간 노동이 보편적이었다. 귀가 멀 정도의 소음 속에서 섬유조각이 떠다니는 공기를 호흡하며 아무런 방호장치도 없이 기계 옆에서 작업하는 여성 노동자들이 기계에 말려들어가 목숨을 잃는 사고는 끊임없이 일어났다. - P1846

운하공사는 노동의 세계가 직면한 새롭고도 가혹한 경험이었다. 수공업 공방에서 공장으로 가는 길이 19세기의 유일한 길이 아니었다. 매우 다양한 배경의 비숙련 노동자 군단이 미국의 운하 건설공사장에 벌떼처럼 모여들었다. 이들은 농촌에서 일거리를 찾아 나선 사람들, 새로운 이민자, 노예, 자유인 신분의 흑인, 여성과 아동이었다. 이들은 권력도 지위도 갖지 못했고 작업조건을 선택할 힘도 없었다. 이들이 연대하고 상호 부조할 기회는 거의 없었다. 운하건설 작업에서는 조직적인 노동운동이 형성될 수 없었다. 지리적인 분포만 보더라도 운하건설 노동자의 작업 장소는 변방이었다. 그들의 세계는 공사 현장과 임시 숙소가 전부였다. - P1849

모든 대륙에서 철도건설 공사가 벌어지는 곳이면 지역의 경계를넘어선(흔히 국제적인) 새로운 노동시장이 형성되었다. 많은 대형 공사가 아시아 농촌사회라고 하는 거대한 노동력 비축기지로부터 비숙련 노동력을 조달했다. 반면 철도 운영에는 높은 수준의 기술인력 기관사, 열차장, 철도 순시원, 철도 수리공 등 ㅡ 이 필요했다. 가변적이기는 하지만 결코 사라진 적이 없는 인종차별의 벽 앞에서 멈추어야 했던 식민지 주민들에게 새로운 신분상승의 기회가 찾아왔다. 이 기회는 민족주의가 촉발한 권리요구와 관련성이 있었을것이다. 예컨대, 멕시코에서는 1910년의 혁명이 시작되기 전에 현지 노동자들이 미국이 출자한 철도회사에서 고위 기술직을 차지하기 위한 투쟁을 벌였다. 전 세계에서 철도종사자 특유의 행태가 형성되었다. 철도가 국유인 곳에서 철도인의 행태는 더 뚜렷했고 ‘철도인은 공공의 권위를 대표했다. - P1857

선박은 군대와 플랜테이션을 제외하면 가장 폭력적인 작업 장소였다. 미국은 1850년이 되어서야 선상에서 행해지는 채찍 형벌을 폐지했다. 19세기 70년대까지도 영국 해군은 아주 잔혹한 형벌 도구인 끝부분이 ‘아홉 갈래로 갈라진 채찍을 사용하고 있었다. 장교가 수병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현상은 상선에서도 모방하는 완고한 관습이었다. - P1858

‘자유로운‘ 노동은 형식상으로나 법률상으로 어느 정도 모호하게정의될 수밖에 없다. 자유로운 노동이란 직접적인 외부의 압력이 없는 상태에서 맺어진 계약관계이며, 이 계약을 근거로 고용인이 자기노동력의 사용권을 고용주에게 제공하고 그 반대급부로서 금전적보상을 받는다. 원칙적으로 이 관계는 쌍방 모두에 의해 해제될 수 있으며 고용주에게는 고용인을 지배할 수 있는 어떤 권리도 주어지지 않는다. - P1866

노예는 다른 어떤 방식으로도 자신을 정의할 수 없고, 노예제 덕분에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사치스러운 생활을 유지할 수 있는노예주 역시 다른 어떤 방식으로도 자신을 정의할 수 없다. 본질적으로 대서양 세계의 노예제는 일종의 노동착취 관계였고, 논의는 그런관점에서 진행되어야 한다. - P1869

노예해방의 경험으로부터 배울 수 있는 교훈은 자유란 전부가 아니면 전무의 문제도 아니라는 점이다. 자유는 다양한 모습과 다양한정도로 찾아왔다. 한 사람이 자유로운지의 여부는 학술상의 질문이고 한 사람이 얼마나 자유로운가, 무엇을 할 수 있을 만큼 자유로운가, 지금까지 어떤 권리를 박탈당해왔는가, 최근에 또 어떤 권리를박탈당했는가 하는 것은 현실적인 문제이다. 브라질처럼 물질적 생존을 위한 사전조처도 전혀 없이 ‘노예에게 자유를 주는 것’과 노예에 대한 사심 없는 배려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었다. 해방노예는 사회와 자연스런 유대를 형성하지 못한 취약하고 상처받기 쉬운 존재였다. 그들이 시장경제의 생존경쟁에서 살아남으려면 초기의 완충장치가 있어야 했다. - P1871

1861년의 농노해방은 문화적 혁명이 아니었다. 전혀 목가적이지않은 농촌 상황에 아무런 변화도 일어나지 않았다. 거칠고 저속한 농촌사회의 기풍은 개선되지 않았으며, 농촌의 교육수준을 높이고 보드카 소비량을 줄이겠다는 계획도 별 성과를 내지 못했다. 해방‘은(서유럽 계몽주의의 관점을 엄격하게 적용한다면) 일어난 일들의 실상을 묘사하기에는 지나치게 과장된 용어이다. 미국 남부에서 해방노예는 ‘재건‘ 이후에도 학교 교육을 받을 수 있는 어떤 도움도 받지 못했다. - P1875

미국법원이 1821년에 처음으로 노동의 의무는 자발성을 바탕으로해야 하며, 노동자가 작업장을 떠나기로 결정했을 때 물리적인 제재를 받는다면 자유로운 노동이 아니라고 판결했다. 이런 해석은 노예제를 둘러싼 논쟁에도 영향을 미쳤다. 미국 북부의 주가 남부의 연방탈퇴를 반대하는 전쟁에서 ‘자유로운 노동‘은 전투구호가 되었다.
이와 함께 노동자에 대한 신체적 폭력의 사용은 본질적으로 불법으로 규정되었다. 미국 법원의 판례는 독자적인 가정을 가진 노동자와주인으로부터 부양받는 예속노동자·하녀 하인 사이의 구분을 없앴다는 점에서 이것은 중요한 의미를 지녔다. 이 방면의 법운용에서 미국이 영국보다 앞섰다. - P1882

노예제와 (특히 러시아의) 농노제가 그랬듯이 일종의 과도적 단계가 있었다. 영국에서도 비금전적 강제에 의한 노동은 하룻밤 사이에 사라지지 않았다. 성문법과 실제 사법판결 모두 기업주와 농업 고용주에게 노동관계를 지속적으로 유지할 수 있는 각종의 강제적인 수단 - 오늘날 우리가 ‘강제구류‘라 부르는 법절차와 유사한 —을 인정해 주었다. 수십 년 동안 강제노동의 잔재가 자유로운 임금노동의 관계 속에 은폐되어 있었다. - P1883

세기 말에 등장한 새로운 요소는 조직적인 노동운동이었다. 집단으로서의 노동자가 강대한 자본소유자에게 도전할 수 있는 조건이점차 형성되어갔을 때 노동시장의 불균형이 교정되었다. 그러나 국가입법으로 노동자와 자본가의 담판(단체교섭, Collective bargaining)이 가능해졌을 때 노동운동은 비로소 돌파구를 찾았다. 여기서여러 장애를 넘어온 자유로운 노동의 발전은 하나의 역설과 마주쳤다. 노동자 쪽에서 담판을 독점하는 조직을 형성하여 시장의 자유를제한해야만 노동자 개인은 노동력을 구매하는 쪽이 갖고 있는 통제수단 - 일자리를 찾는 노동자를 서로 경쟁시키고 언제든지 해고할수 있는 힘 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었다. - P18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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