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전문화는 이제는 돌이킬 수 없는 흐름이다. 그 결과 역사는 크게 보아 사회과학의 범주 안에 자리 잡았다. 시간의 깊이와 공간의 광대함에 관심을 갖고 있는 사회학자와 정치 이론가들이 역사 연구의 주류를 떠맡았다. 역사가들에게는 훈련을 통해 습득한 직업적 특성 때문에 거친 일반화나, 단선적인 인과론적 설명이나, 모든 것을 포용하는 멋진 공식을 달갑게 기지 않는 경향이 있다. 포스트모더니즘적 사유의 영향을 받아 일부에서는 ‘거대서사’ 또는 장기 과정에 대한 해석은 가능하지도 논리적이지도 않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세계사 서술은 전문분야의 상세한 연구를 대중이 보고 느낄 수 있도록 설명하는 권위와 능력을 전문가들로부터 회수해 오려는 시도이다. - P29
19세기는 더 이상 주관적 추억의 대상이 아니라 객관적으로 서술되어야 하는 그 무엇이 되었다. 19세기 이전의 시대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문명의 표현방식의 역사에서 19세기는 이미 18세기와는 확연하게 구분되는 자리를 차지했다. 그 표현방식과 메커니즘은 대부분의 19세기 자신이 발명한 것들로부터 나왔다. 우리에게 19세기를 연구하고 이해하는 자료들을 제공해주는 박물과, 국가기록보관소, 국가도서관, 촬영기술, 사획통계학, 영화 등은 19세기의 발명품이다. 19세기는 기억이 체계화된 시대이고 기억이 자기관찰로 승화된 시대이다. - P72
19세기는 과거의 역사와 모순으로 가득 찬 관계를 형성했다. 그런 관계는 오늘날의 인류의 입장에서 봐도 전혀 이상하지 않다. 미래에 대한 낙관의 개방성, 혁신에 대한 호감, 기술적 도덕적 진보에 대한 믿음이 19세기만큼 높았던 때는 없었다. 19세기는 동시에 역사주의가 성행한 시대였다. 역사주의의 조류가 모방과 재현을 강조하면서 동시에 수장과 보존을 중시한 시대였다. 19세기는 박물관과 기록보관소의 시대이자 고고학과 고증학의 시대였다. 100년 동안에 인류의 초기 역사에 관한 기록된 지식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고 그 속도도 과거의 어떤 세기보다도 비교할 수 없이 빨랐다. 엄격하게 말하면 위에서 서술한 특징은 서방에만 해당된다. - P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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