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일러 있습니다

 

 

영화 <고령화 가족>을 보고 나와서는 삼겹살 한 근과 소주를, <우아한 거짓말>을 보고 나와 우리 가족은 집에 와 짜장면을 시켜 먹었다. 내 눈에 영화 속 가족이 함께 둘러앉아 나누는 음식만큼 이 세상에 맛있어 보이는 건 없다.

 

그런데 신기하다. 존 웰스 감독의 <어거스트, 가족의 초상>에는 분명 만찬 장면이 있으나 내 눈에는 어떤 음식도 보이지 않았다.

영화는 T. S. 엘리엇의 시집과 한 줄의 시구와 함께 시작된다.

- 인생이 너무 길다.

 

바이올렛(메릴 스트립)의 남편 베벌리(샘 쉐퍼드)는 구강암에 걸린 아내의 시중을 위해 인디언 원주민 가정부를 구해놓곤 그 길로 집을 나가버리는데...

아버지의 실종소식에 그동안 코빼기도 비치지 않던 장녀와 막내딸이 각자 가족과 애인을 대동하고 한여름 무더위에 비지땀을 흘리며 나타난다.

장녀 바바라(줄리아 로버츠)와 이혼 직전인 남편(이완 맥그리거) 사이에 난 14세 소녀 진은 낯이 익다 했더니 영화 <리틀 미스 선샤인>(2006년)의 막내였던 올리브, 아비게일 브레슬린이다. 

<리틀 미스 선샤인>이 대표적인 '콩가루 집안' 영화 중 하나였다면, <어거스트, 가족의 초상>은 한술 더 떠 "싸이코 소굴"(바바라 남편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자매 중 혼자 고향에 남아 부모 집 가까이 살던 미혼의 둘째 딸 아이비(줄리엔  니콜슨)는 이모의 아들 '백수' 찰스(베네딕트 컴버베치)와 사랑에 빠졌다며 집을 떠나겠다고 선언하는데, 곧이어 더 놀라운 출생의 비밀이 밝혀진다.

꼬일 대로 꼬인 모녀간 자매간 부부간의 갈등과 악다구니의 대폭발을 보여주는데, 우울이나 센티멘털도 하루이틀이지, 사실은 각자 자신의 문제에 골몰하여 가족에게 관심과 애정을 줄 여건이 안 되는 것이다.

 

아버지의 장례식날 밤, 만찬에서 가족은 격돌한다.

간신히 버티며 살고 있는 각자의 비밀이 까발겨지고, 그것은 장례식의 주인공인 아버지도 예외는 아니다. 술에 억병으로 취해 바지에 실례를 하는 바람에 다시는 동창회에 초대받지 못한 그의 수치스러운 과거가 약물에 취한 아내의 입을 통해 드러난다.

"살다보면 이럴 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지. 코너에 몰리다보면..."

누군가 이렇게 중얼거리지만 공허하기 짝이 없는 독백이다.

 

장례식 만찬 기도를 제부(크리스 쿠퍼: 영화 <아메리칸 뷰티>의 옆집 그 싸이코)에게 시켜놓고 심술궂은 얼굴로 한 명 한 명 살펴보는 노년의 엄마를 맡은 메릴 스트립의 연기는 압권이다. 젊음이 딱 한 가닥 남아 있는 듯 뭔가 위태롭고 아슬아슬해 보이는 장녀 역 줄리아 로버츠의 얼굴에서도 도무지 눈을 뗄 수가 없다. 

 

'늙으면 여잔 추해진다. 너희들만 봐도 딱 알겠구만!"

"네 남편이 어린 여자랑 바람났다고? 젊은 년은 절대 못 당해!"

남편의 장례식 만찬에서 딸들에게 쏟아붓는 엄마의 선전포고다.

이 영화는 가족의 문제 외에도 점점 더 늙어가는, 혹은 자신에게서 젊음이 달아나는 것을 속절없이 지켜보는  여성들의 초조와 공포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한밤중에 집 안에서 일어난 있을 수 없는 일을 목격하고 몽둥이를 들고 뛰쳐나오는 건 다름 아닌 인디언 원주민 가정부다.

 

막장이나 콩가루 가족 드라마와 영화에 익숙해져 웬만한 사건에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 편인데도  이 영화는 정말 압도적이었다. 서로 잡아먹지 못해 으르렁대는, 영화 속 메릴 스트립과 줄리아 로버츠 모녀는 깜짝 놀랄 정도로 늙었지만 그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황홀했다. 오랜만에 보는 막내딸 역 줄리엣 루이스도 반가웠다.

알람을 제대로 못 맞춰 이모부의 장례식에도 참석 못하고 변명을 늘어놓는 청년 찰스(베네딕트 컴버베치)와 14세 소녀 역 아비게일 브레슬린도 뭐 젊다고 해서 눈부시거나 뾰족한 수가 있는 건 아니다.

극장 문을 나서는데 무엇인가 내 속의 꽉 막혀 있던 것이 빠져나가는 기분을 느꼈다. 지독하게 삭힌 홍어에 막힌 코가 뻥 뚫리듯...

 

'지긋지긋한 집구석'이라는 황지우의 시구가 생각나 부리나케 책상 앞에 앉았다.

 

 

치열하게 싸운 자는

적(敵)이 내 속에 있다는 것을 안다.

지긋지긋한 집구석

 

    - 황지우 <나는 너다> 시집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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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4-10 01:2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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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4-10 10:20   URL
비밀 댓글입니다.

정은 2014-04-10 22: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언니 서재 오랜만이네요^^
화욜 얘기듣고 꼭 극장에서 보고싶어 수욜 오전에 열일 제치고 가서 봤어요.
역시나 명품 배우들의 연기는 명불허전입니다.
특히 메릴 스트립이 아니었다면 누가 이 엄마역을 이렇게 잘 연기할수 있을까 싶은 생각이 들 정도로...
늘 좋은 책과 영화 소개해 주는 언니 덕분에 간신히 교양의 실 줄기를 이어갑니다.
행복하시고 짧은 봄날 가기전에 꽃단장한 안산에도 산책겸 놀러오세요

로드무비 2014-04-10 23:24   좋아요 0 | URL
무의도 정말 좋았어.
거기 안 갔으면 이 봄이 허무할 뻔했지.

책과 영화라도 있어서 다행이야.
비로소 그런 생각이 드네.
안산이라면 이대 후문 쪽 거기를 말하는 거야?
(서재 없는 거지? 댓글 오픈해야겠네. 하나 만들어.)

2014-04-14 14:5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04-14 16:12   URL
비밀 댓글입니다.

밤섬 2014-04-15 14: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늘 인터파크 이용하다 언니 생각나서 오늘은 알라딘에서 3년만에 책주문해보네요^___^
언니 덕분에 고객이 한명 늘었다는걸 알라딘이 알아줘야 하는데 아쉽네요. ㅋㅋ
행복한 하루 되세염~~!

로드무비 2014-04-15 16:03   좋아요 0 | URL
봉원사도 하루 가고 싶은데...
서재 만들었네? 반가워라.
자주 글 올릴게.^^

2014-05-27 13:4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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