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를 더 좋아한다.
고양이를 더 좋아한다.
바르타 강가의 떡갈나무를 더 좋아한다.
도스토옙스키보다 디킨스를 더 좋아한다.
인간을 좋아하는 자신보다
인간다움 그 자체를 사랑하는 나 자신을 더 좋아한다.
초록색을 더 좋아한다.
모든 잘못은 이성이나 논리에 있다고
단언하지 않는 편을 더 좋아한다.
예외적인 것들을 더 좋아한다.
집을 일찍 나서는 것을 더 좋아한다.
의사들과 병이 아닌 다른 일에 관해서 이야기 나누는 것을 더 좋아한다.
줄무늬의 오래된 도안을 더 좋아한다.
시를 안 쓰고 웃음거리가 되는 것보다
시를 써서 웃음거리가 되는 편을 더 좋아한다.
명확하지 않은 기념일에 집착하는 것보다
하루하루를 기념일처럼 소중히 챙기는 것을 더 좋아한다.
나에게 아무것도 섣불리 약속하지 않는
도덕군자들을 더 좋아한다.
지나치게 쉽게 믿는 것보다 영리한 선량함을 더 좋아한다.
정복하는 나라보다 정복당한 나라를 더 좋아한다.
만일에 대비하여 뭔가를 비축해 놓는 것을 더 좋아한다.
신문의 제1면보다 그림형제의 동화를 더 좋아한다.
잎이 없는 꽃보다 꽃이 없는 잎을 더 좋아한다.
품종이 우수한 개보다 길들지 않은 똥개를 더 좋아한다.
내 눈이 짙은 색이므로 밝은 색 눈동자를 더 좋아한다.
책상서랍들을 더 좋아한다.
여기에 열거하지 않은 많은 것들을
마찬가지로 여기에 열거하지 않은 다른 많은 것들보다 더 좋아한다.
숫자의 대열에 합류하지 않은
자유로운 제로(0)를 더 좋아한다.
기나긴 별들의 시간보다 하루살이 풀벌레의 시간을 더 좋아한다.
불운을 떨치기 위해 나무를 두드리는 것을 더 좋아한다.
존재, 그 자체가 당위성을 지니고 있다는
일말의 가능성에 주목하는 것을 더 좋아한다.
 
  - 비스와바 쉼보르스카 시선집 <끝과 시작> 중 '선택의 가능성' 전문 (문지 刊, 200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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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오후, '전쟁반대, 평화실현 10만 네티즌 시국 서명운동을 제안합니다'라는
이정희 의원의 서명운동 제안을 메일로 받았다.
몇 명이 참여했는지, 무엇이라고 한마디 남겼는지 궁금해서
풀방구리에 쥐 드나들 듯 들락거렸다.

'안됩니다. 모내기해야 되는데 뭔 소리여!'

2만 몇천 명의 사람들의 발언보다
한 농부(아마도!)가 서명과 함께 남긴 저 한 마디가
마음속으로 파고들었다.
그의 말은 몇 개월 전 비스와바 쉼보르스카의 시선집에서 내가 밑줄을 그어놓은
다음의 시구를 떠올리게 한다.

그에게 물었다. 때로는 행복하냐고.

아직도 일을 합니다.
- 그가 대답했다.

'때로'는 행복하냐는 물음.
'아직도' 라는 대답의 간명함과 솔직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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