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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이 힘들고 고단할 때 하늘에서 돌이 비처럼 쏟아지는 것 같다.
오직 내게만......'(영화 <레이닝 스톤>에서, 켄 로치))
켄 로치 감독은 영화 <자유로운 세계>의 개봉을 앞두고 한 영화잡지와 가진 인터뷰에서
"(이 세상에) 희망이 남아 있다고 생각하나?"라는 질문에 이렇게 대답했다.
"짧게는 낙관적이라고 보기 힘들겠지만 길게 보면 희망이 있다고 생각한다."
영화를 보고 돌아오는 차 안에서 논현동 고시원 묻지마 방화살인사건 소식을 들었다.
경제적인 사정이든 개인적인 문제이든 뭐든 갈 데까지 간, 더이상 버틸 힘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자기와 아무 상관이 없는, 불특정다수를 향해 분노를 폭발시키고 있다.
문제는 그런 사람들이 자꾸 늘어간다는 것이다.
고시원 사건의 희생자들은 대부분이 중국에서 온 여성 이주노동자들이었다.
<자유로운 세계>에서 한달치 임금을 떼이고 별로 미안한 기색도 없는 인력알선업체의
고용주 앤지에게, 양 같이 순하던 이주노동자들은 분노를 폭발시킨다.
그러고 보면 현실과 영화가 하나도 다를 것이 없다.
앤지는 30대의 싱글맘으로 말썽꾸러기 아들을 부모님께 맡기고 있다.
인력알선업체의 계약직 사원이었는데 직장내 성희롱 사건에 엮이며
직장을 그만둘 수밖에 없었다.
호구지책으로 친구 로즈와 함께 차린 것이 인력알선업체.
그런데 이주노동자들을 일터와 연결시켜 주는 이 일도 쉽지 않다.
여권이 없는 상태로 불법체류중인 이주노동자들에게서는
알선 수수료를 더 받아낼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데......
카메라는 이주노동자들의 시선과 입장을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계약직 사원에서 고용주로 변신한 앤지의 뒤를 따라다닌다.
그런데 악덕고용주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아무리 제 코가 석자라지만,
앤지는 자신보다 더 딱한 처지에 있는 이주노동자들을 착취하고 등쳐먹는다.
이른바 '먹고살려고 보니 어쩔 수 없다'는 논리다.
층층의 먹이사슬 구조.
앤지를 통해 값싼 노동력을 제공받은 거래처 사람은 부도가 나자
앤지에게 지급해야 할 노동자들의 임금을 떼먹고 나자빠진다.
피해자가 자기도 모르게 가해자로 변한다.
나라고 예외일 수 없다는 사실, 그것이 무섭다.
그의 전작들 중 <빵과 장미>나 <레이닝 스톤>만 해도
희망이라든가 삶의 의욕을 느낄 수 있었다.
청소인부들의 노조 결성과 노동쟁의 과정(<빵과 장미>)이나,
성찬식에 입을 딸의 드레스를 마련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실직가장의
이야기(<레이닝 스톤)가 뭐 그리 신통할 리가 없는데,
이상하게 화면 밖으로 유머와 여유가 배어나왔다.
그런데 <자유로운 세계>를 보고 오는 길은 발걸음이 너무 무거웠다.
한편으로 생각해 보면 우리나라나 영국이나 가릴 것 없이
이주노동자들이 이렇게 많아진 것도 신자유주의와 세계화의 여파가 아닌가.
우리의 어깨 위에는 언제부턴지 세상 시름이 천근 같은 무게로 얹혀졌다.
켄 로치의 영화는 살얼음판 같은 세상을 보여준다.
얼음장은 너무 얇고 여기저기 금이 가 있다.
조마조마해서 외면하고 싶을 때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리를 뜰 수는 없으니,
70대의 노감독이 저렇게 긴 막대기를 들고 지켜보고 있는데 어쩌란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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