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음이여 오래 거기 남아 있거라 - 시대의 격랑을 헤쳐나간 젊은 영혼들의 기록
황광우 지음 / 창비 / 200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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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마지막 주, 광주항쟁 마지막 수배자였던 윤한봉 씨의 부음을 접하고
10여 년 전에 나온 그의 저서 <운동화와 똥가방>을 검색했더니 절판이다.
마침 한 서점에 재고가 있다는 기록.
부랴부랴, 황광우의 신간과 함께 주문했다.


'젊음이여, 오래 거기 남아 있거라'는 윤동주의 시 '사랑스런 추억'에서
가져왔다고 한다.
그런데 어쩌자고 원고를 넘기자마자 쓰러져 병상에 누웠다는 소식이 들려온다.
솔직히 말하면 나는 큰형 혜당 스님(황승우)과 세째형 황지우 시인과의
재미있고 소소한 일화들을 기대했다.
소년기와 청년기의 황씨네 형제들은 어땠을까?
(김훈은 오래 전 황광우의 결혼식장에서 그들 형제를 보고
"가히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이로군"이라고 한마디 던졌다고 한다.)
아무튼 이 책은 그 소박한 기대를 보기좋게 배반했으니,
80년 5월과 87년 6월을 그럴 수 없이 담담한 어조로,
사실에 의거하여 기록하고 있다.

1979년 8월 나는 광주의 현대문화연구소에 출입하였다.
윤한봉 형은 감옥에 간 후배들 옥바라지를 하기 위해 책들을 수집하고 있었다.
나도 내 징역살이에서 본 책을 다 내놓았다.
윤한봉은 수도사였다. 지산동 어느 켠에 골방 하나를 쓰고 있었다.
가서 보니 빈방이었다.
'나의 재산목록'이라고 쓰인 편지지가 있었다.
팬티, 양말, 칫솔, 이쑤시개, 손톱깎이 등
50여 종이 그의 총재산이었다.(67쪽)

광주의 윤한봉, 윤상원, 박관현, 들불야학, 전남여고 앞에서 책과 튀김을
함께 팔았다는  카프카서점 주인 김남주, 용접기술사 2급 자격증을 따고
독산동 귀뚜라미보일러에서 일한 노회찬, 박병태, 거름출판사, 권인숙, 박종철......
한마디로 이 땅의 민주화에 바친 눈부신 젊음의 기록.

위장취업 여대생 박상옥(고대 83학번)의 일화가 특히 인상 깊었다.
온 집안의 희망이었던 명문대생 동생이 어느 날 자신처럼 공원이 되었다.
"상옥아, 세상이 얼마나 더러운지는 너보다 내가 더 잘 안다.
엄마아빠 걱정하시니 가끔 집에나 들러라."(127쪽)
동생을 말리기는커녕 그로부터 20년간 생활비를 보내주었다는 언니.
세상이 얼마나 더러운지 잘 안다는 말이 가슴을 친다.
그나마 세상이 요만큼이라도 바뀐 건 그들 덕분이라 생각한다.
살아 있는 에피소드들을 읽고 있자니 안재성의 소설 <경성 트로이카>를 읽을 때 
느꼈던 감동과 흥분이 고스란히 되살아났다.
(경성 트로이카의 주역 중 한 명인 '걸어다니는 자본론' 이재유 이야기도 나온다.)

황광우는 이 책에서 윤한봉의 자필 재산목록을 소개하고 있는데,
사실 그의 재산 목록 1, 2호는 손목시계와 만년필이었다.(<운동화와 똥가방>)
10년 전에 윤한봉의 책을 도서관에서 빌려 읽으며
일체의 감상을 배제한 이런 기록이 어떻게 가능한지 궁금했는데
엊그제 황광우의 글을 읽으며 절로 고개가 끄덕여졌다.
5월광주와 6월항쟁은 사실의 기록만으로도 충분하다.
아아, 오오 하는 감
탄이나 기교, 과장은 필요가 없는 것이다.

신문지에 둘둘 만 시루떡 같은 글의 구수함과 찰짐이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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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7-09 13:1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7-07-10 00:49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드무비 2007-07-14 04: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불사른 청춘은 재가 되었나 님, 황씨네 형제에 관심이 있어 오래 전
혜당 스님의 책도 사보고 했습니다.
이 책이 좋았던 건 전혀 멋을 부리지 않았다는 겁니다.
그냥 객관적인 진술. 달리 보면 그게 좀 오만한 태돈가요?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촉촉하게 글을 쓸 수 있을 것 같은데
드라이한 진술로 일관한 게 전 좋았어요.
저 혼자 먼저 도취한 태도를 무지 싫어하다 보니 그 반동으로.^^
그래봤자 윤한봉 님과는 또 다른 면모를 보이긴 하더군요.
그건 그렇고 곧 개봉되는 영화 '화려한 휴가'가 어떤 기폭제가
되어주기를 바라는 은밀한 마음이 있습니다.
영화 속에 카프카서점이 나왔으면 좋겠어요.
한쪽 옆에서 튀김을 만드는 시인을 보고 싶어요.^^

조용히 님, 아이고 고맙습니다.(_ _)

2007-07-13 19:50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드무비 2007-07-14 05:01   좋아요 0 | URL
씽긋 님, 아이고, 그 사실을 깜빡했어요.
자는데 이상하게 뒤통수가 간지러워 일어났더니......는 괜히 하는 말이고,
일 때문에 일어나 컴 앞에 앉았는데 메일을 확인하고 싶더라고요.ㅎㅎ
혜당스님 책에도 버젓이 나와 있고 시인의 글을 통해 알고 있었던 사실인데
그리고 그분의 삶을 멋지다 생각해 놓고 이럴 수가.....
책이나 좋아하는 작가에 관한 한 꽤 쓸만한 기억력이었는데
이젠 그마저도 제겐 없군요. 엉엉.

혜당 스님 책을 찾아 읽고 리뷰와 댓글 틀린 부분 고쳤습니다.
고맙습니다.^^


2007-07-10 17:31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