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이드가 한 말이 있다. “인간으로 태어나면 반드시 해야 할 것이 있다. 일 할 것과 사랑해 볼 것”
이 말을 들은 게 20대 중반쯤이었는데, 엉켜있던 인간관이 이때 명징해졌다. 듣고 보니 결혼했거나 연애하는 분들은 원만하고 자기 책임을 잘 지키는 반면, 곁에 아무도 없는 사람은 정 반대였다. 일명 정나미 떼는 재주가 있었던 것이다.
일과 사랑, 이 두 가지 영역에서 모자란 사람은 부족한 사람들이 맞다. 20대는 이 둘을 탐색하고 찾아내는 시기라 성취 차이가 크지 않았다. 30대에 들어서고 보니 이 둘의 성취유무가 얼마나 중요한지 매일 느끼고 있다. 조금 부족한 사람들을 보면, 친한 지인은 안타까웠고 일로 만나는 지인은 한심스러웠다.
안타까운 친구 E가 있었다. 계약직 간호사로 일하며 승무원을 희망할 만큼 외모가 좋다. 소개팅에 별생각 없는 E였는데, 내가 안달라서 소개팅을 시켜줬다. 결론은 E에게 제대로 뒷통수 맞았다. 알아서 만나라고 서로에게 핸드폰 번호를 넘겨주고 신경 쓰지 않았는데, 어제 만난 E의 이야기를 듣고 얼굴이 화끈거렸다.
둘이 알아서 만난 것 까진 좋았는데 만난 후 내게 한마디도 없었다는 게 문제의 시작이었다. 만남 후 마음에 들든 안 들든, 하루 늦더라도 ‘만났었다’는 문자 한통 내게 보내줬으면 좋지 않았겠는가. 만남 후 남자 쪽이 에프터 전화와 문자를 보냈는데 E가 모조리 무시했다. 남자분은 점점 징징거리는 문자를 보냈는데, E는 여기서 더 정 떨어졌다며 합리화를 하고 있었다. E는 그로부터 일주일이 지나서 내게 고백하며 뒷통수를 제대로 후렸다. 남자분 나이는 35살, E는 30살이었다. 철없는 20대면 문자 씹어도 된다. 사회적 에티켓을 아는 30대 아닌가. 거절할 생각이었으면 알아서 상대분에게 직접 거절하던가, 민망하면 주선자를 통해서 거절의사를 전해도 되지 않았을까. 남자분께 너무 죄송했다. 내 얼굴을 봐서라도 E는 그렇게 행동해서는 안됐다.
지난 상처를 꺼내는 것 같아 불안했지만, 직접 남자분께 미안하다고 전화를 했다. 괜찮다며 주선해준 자체가 고맙고 다음에 밥 사주겠다며 좋게 통화를 끝내주셨다. 이렇게 예의있는 남자를 차버린 안목없는 E와 사람잘못 본 내 눈은 어떤 문제가 있는지 되집어보는 시간을 가졌다.
E는 베지터리언이다. 저녁 코스를 계획해 왔을 상대남을 배려해서 어떤 걸 먹겠냐는 남자분 질문에 다 괜찮다고 말했단다. 야채를 좋아한다거나 스파게티 먹자는 그 한마디가 어려웠을까. 덕분에 남자분은 혜화역의 유명 한우 샤브샤브 집으로 안내 했고, E는 저녁 먹고 왔다는 거짓말을 해야 했다. 이 이야기를 듣는 순간 E는 자기가 뭘 원하는지 모른다는 생각이 번뜩 들었다.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원하는 게 뭔지 모르는데, 상대가 원하는 걸 알 리가 없다.
E는 이제껏 그래왔다. 어중간한 경력과 어정쩡한 어학연수 모두 자신이 뭘 원하는지, 뭘 얻어야 하는지 생각해보지 않은 결과였다. 그런 E임을 대학생 때부터 알고 있으면서도, 매번 도와줬던 나도 똑같은 바보다. 기대에 반했던 경우가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던 것이다.
나는 E를 통해 뭘 얻고 싶어 했는지 생각해봤다. 애민사상과 그를 통한 상대적 우월감이 머릿속에서 떠올랐다. 고백 건데 E를 동등한 위치에서 본적이 없다. 내 눈엔 항상 부족해보였고, 부족함을 채워주고 싶었다. E를 도와줌으로써 나는 착한사람, 잘난 사람임을 스스로 자위할 수 있었던 것이다. 조언하고 도와줘도 E의 실천력을 알았기 때문에, 결국 따라오지 못할 것을 알고 있었다. 덕분에 상대적 우월감을 더 강하게 흡입할 수 있었다.
E도 무의식적으로 이걸 알았으니, 평소에는 조용하다가 도움이 필요할 때만 나를 찾았던 것이다. 내 도움을 기분나빠하면서도, 필요하면 취하는 기형적인 관계가 우리였다. 왜 E가 시큰둥한지, 나는 매번 욕먹으면서 도와주려 했던 것인지 깨달았다. 이번 소개팅은 그 정점의 사건이었다.
남한테 꿀리고 싶지 않은 것이 아니라, 남을 꿀리게 만들고 싶다. 약간의 찬양까지 받으면 더 좋겠다. 욕구를 버리고 노력을 덜하던가, 노력하고 욕구를 채우든가 둘 중 어떤 선택을 해도 잘 산다. 나는 오늘부터 욕구를 택하기로 했다. 욕구를 위해 진짜로 해야 할 일과 하면 안되는 일을 구분하는 게 지금부터 할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