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고의 시간들
올가 토카르추크 지음, 최성은 옮김 / 은행나무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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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올가 토카르추크의 『태고의 시간들』에서 가장 좋았던 문장으로 시작하고 싶다. 그라인더가 품고 간직한 시간 말이다. 아마도 그라인더의 시간을 알아가는 과정이 소설의 전부가 아닐까 나는 그렇게 말하고 싶다.

 

그라인더는 간다. 고로 존재한다. 그러나 그라인더가 대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라인더는 아마도 전체적이고 본질적인 변화의 법칙, 거기서 떨어져 나온 파편일 수도 있다. 그것 없이는 이 세계가 돌아갈 수 없거나, 아니면 전혀 다른 세계가 되었을지도 모르는 그러한 법칙 말이다. 어쩌면 커피 그라인더는 현실의 축일지도 모른다. 모든 것이 그라인더 주위에서 돌고 진보해나가는 현실의 축. 그라인더는 이 세계에서 인간보다 더 중요한 존재일 수도 있다. 나아가 미시아의 그라인더는 ‘태고’라고 불리는 것의 기둥일지도 모른다. (54쪽)

이야기는 어디에나 존재한다. 모든 것은 이야기가 될 수 있고 우리는 모두 이야기의 주인공이 될 수 있다. 다만 알려지지 않을 뿐이다. 알려지지 않았다고 해서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누군가는 여전히 존재한다. 그 이야기 속에서 태어나고 사라진다. 생성과 소멸이 끊임없이 이어지면서 우리는 살아간다. 아주 오래전부터 시작된 이야기, 누군가가 거기 살고 있었다는 걸 말해주는 이야기. ‘태고(太古)는 우주의 중심에 놓인 작은 마을이다.’로 시작하는 폴란드 작가 올가 토카르추크의 『태고의 시간들』은 그런 존재에 대한 이야기다. 태고를 시작으로 그 주변에 대한 묘사를 통해 나는 그 작은 마을, 작은 우주를 상상하려 노력했다. 그러나 나의 머릿속에서 그려지는 태고의 이미지는 처음에는 확장되지 않았다. 모든 이야기가 그렇듯 누군가 등장한다면 달라진다. 나도 그러했다.

남편이 전쟁터로 끌려간 후 아이를 가졌다는 걸 알게 된 게노베파의 시간에 나도 합류한 것이다. 혼자서 남편을 기다리면서 겪는 두려운 일상과 감정의 혼란들에 빠져들었다. 아이를 낳고 젊은 남자에게 동요하는 그 마음에 온전히 닿을 수 없었지만 앞으로 게노베파에게 어떤 일이 일어날지 궁금했다. 그건 크워스카에게도 다르지 않았다. 오롯이 스스로 자신을 돌보고 세상에서 살아남아야 하는 크워스카에게 냉담한 시선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럴수록 더욱 세상에 당당하게 맞섰다. 살아남기 위해 그래야만 했다. 게노베파와 크워스카의 시간은 이제 그들만 존재하는 게 아니라 그녀들의 딸 미시아, 루타에게로 이어진다. 미시아의 아픈 동생 이지도르까지 말이다. 그래서 게노베파와 남편 미하우와 딸 미시아, 아들 이지도르를 중심으로 그들이 살아가는 삶의 이야기구나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소설 속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의 시간을 읽다 보면 묘한 감정을 느낀다. 누군가 게노베파 가족을 인간의 대표로 삼고 지켜보고 있다는 생각이다. 그리하여 나 역시 잠깐 주변을 둘러본다. 아파트 화단을 지키는 나무, 새끼와 함께 나를 경계하면서도 다가오는 길 고양이, 액자 속 그림도 나를 지켜보는 게 아닐까 하는 기분이 든다. 인간만이 존재하는 세계가 아니라 어딘가 우리가 모르는 세계가 존재할 수도 있다는 상상, 어쩌면 그 시작이 태고일지도 모른다. 소설에서 보리수의 시간, 버섯 균의 시간, 과수원의 시간, 죽은 자의 시간, 신의 시간이 있듯이 말이다.

모두가 함께 살아가는 세상에는 전쟁이 일어나고 악이 살아간다. 소설 속 나쁜 인간이 악을 말하듯, 우리의 사회도 그럴 것이다. 나의 시간에 속하는 게 아니라고 생각하면서. 그러니 전쟁에서 돌아온 미하우가 딸 미시아를 통해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수 있다. ‘시간 속에서 그의 사랑을 언제까지나 유지하게 할 수 있는 것, 그리고 시간 속에서 미시아를 영영 멈추게 만드는 것. 덕분에 그의 사랑은 영원한 것이 되었다.’ (83쪽) 이렇게 지극한 사랑이 있을까. 그런 사랑만이 존재하는 시간은 영원하겠지만 미시아의 시간은 그렇지 않았다. 시간은 한곳에 머물다 고여있는 게 아니라 자신의 책임을 다하며 흘렀고 미시아는 성장한다. 누군가의 죽음과 누군가의 탄생이 순환하면서 이어지는 일들이 결국 생이라는 것일까. 미하우가 모든 걸 다 내어주고 사랑한 딸 미시아는 학교도 그만두고 사랑하는 파베우와 결혼을 하고 딸 아델카를 낳는다. 장애를 갖고 태어난 이지도르의 시간은 어떤가. 오직 자신을 이해하는 루타와 함께 태고를 탐험하며 보낸다.

 

그런가 하면 상속자 포피엘스키의 시간에서는 게임이 중요했다. 상속자 포피엘스키의 게임을 통해 신이 인간을 만들고 세상을 지은 과정을 보여준다. 그의 시간을 읽다 보면 신은 어디에 존재하며 왜 인간을 이토록 고통스럽게 만드는가 묻고 싶어진다. 두 번의 전쟁이 일어나고 죽음이 난무하는 세상에 굴복하지 않으려는 몸부림을 보면서 신은 무엇을 전하고 싶은 것일까.

신은 모든 과정이 안에 있다. 신은 모든 변형 속에서 박동한다. 어떤 때는 있고, 어떤 때는 조그만 있고, 때로는 아예 없을 때도 있다. 신은 그가 거기에 없는 순간에도 현존하기 때문이다. (150쪽)

제법 고요하고 평화로운 태고에 외부인의 등장은 공포와 혼돈을 몰고 온다. 군인에게 점령당한 태고, 그들을 주시하면서도 일상을 유지해야 하는 사람들. 소설이 흥미로운 건 태고라는 지명은 허구에 불과하지만 그곳에서의 삶은 과거 폴란드의 역사과 닮았다는 것이다. 폴란드를 둘러싼 강대국의 외압, 유대인의 학살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알려지지 않았지만 존재했던 이야기, 그러니까 게노베파, 크워스카, 미시아, 루타로 이어지는 여성들의 삶과 장애를 가진 이지도르의 이야기 말이다. 어디에도 존재하면서도 존재조차 부정당했을 누군가의 시간을 작가는 아름답게 그려낸 것이다. 그러면서 결국엔 모두 사라지는 존재라는 삶의 소멸과 그걸 인정하면서도 욕망을 버리지 못하는 것에 대한 쓸쓸함을 인물들의 내면을 통해 보여준다. 승승장구하듯 돈을 벌고 정부의 고위직과 친분을 맺고 살아가는 파베우가 느끼는 감정은 소설 안에서 소설 밖으로 이동하여 고스란히 내게로 전해졌다. 그토록 사랑한 미시아와 결혼해 아이들을 낳고 제법 괜찮은 가장을 살았다고 생각했지만 한순간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다가오는 지난 시간들.

 

깨달았다. 그의 인생에서 정오의 시간은 이미 지났음을, 그리하여 이제부터는 은밀하게, 서서히, 자신도 미처 인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땅거미가 내려앉으리라는 것을. 파베우는 자신이 길가의 한옆에 내던져진 돌멩이나 버려진 아이 같다고 느꼈다. 그는 아무리 잡으려 해도 잡히지 않는 이 거친 현재의 시간 속에서 바닥에 등을 대고 똑바로 누운 채 스스로 매초 무(無)의 늪으로 가라앉고 있음을 생생히 감지했다. (249쪽)

저만치 목표를 향해 나가느라 돌보지 못한 것들과 지나친 풍경들이 그래서 더우 애달프고 애처롭다. 어디 파베우가 느낀 슬픔뿐일까. 사랑했던 루타가 다른 남자와 결혼하고 결국엔 태고를 떠났지만 여전히 그녀를 기다리는 이지도르의 시간은 어떤가. 자신의 존재를 부정당하며 살아온 시간, 우표를 모집하면 느꼈던 희열, 결국 비루한 육체로 인한 고통으로 병원으로 요원으로 이동하며 생을 마감한 그의 시간이 우리의 그것과 다르다고 말할 수 있을까. 무엇을 위해 살아가는지, 무엇이 우리를 존재하게 만드는지 알지도 못한 채 주어진 생을 살다가 사라지는 것. 어느 누구도 허투루 시간을 낭비하고 살지 않았음에도 남겨진 시간 앞에서는 무기력해지고 만다. 1914년을 시작으로 80여 년 동안의 그들의 시간은 앞으로 다가올 나의 시간과 얼마나 비슷할까. 똑같이 포개어질 수는 없겠지만 다르게 비껴가지도 않을 터.

하나의 우주였고 다른 우주의 중심이었던 태고를 만나는 시간은 감동이었다. 84편의 조각들로 이루어진 독특하고도 특별한 소설은 끝을 향해 달려갈수록 점점 더 마음을 붙잡고 흔든다. 끝내는 단 하나의 조각도 잃어버리지 않겠다는 다짐을 한다. 도통 무슨 말인지 몰라 헤매던 처음에는 느낄 수 없었던 숭고한 생의 아름다움을 선물한다. 어디에나 존재하는 생의 시간들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위대한 것인지 가슴에 각인시킨다. 아무리 작고 보잘것없는 생의 시간이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는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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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1-15 15:5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11-15 16:51   URL
비밀 댓글입니다.
 
참 괜찮은 눈이 온다 - 나의 살던 골목에는 교유서가 산문 시리즈
한지혜 지음 / 교유서가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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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을 기다리는 계절이 다가온다. 어딘가에는 첫눈이 내렸겠지만 지금 내 눈앞에는 단풍이 남았다. 가을을 살면서 눈을 기다린다는 건 좀 이상한가. 뭔가 빨리 끝내고 새로운 것을 시작하면 잘 할 수 있다는 그런 우매한 다짐일지도 모른다. 하루하루가 다르지 않은 시간으로 채워진다는 것에 대한 만족이 아니라 불만과 불안이라고 할까. 나는 나를 잘 다스린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생각해보니 거울을 보면서 나에게 잘 하고 있다고 말을 건네는 일도 언젠가부터 멈춰 있었다. 이런 마음 때문일까. 조곤조곤하면서도 단호한 태도로 일관하는 한지혜의 산문 『참 괜찮은 눈이 온다』읽고 나는 다시 거울을 바라보며 “이렇게 살아도 괜찮아”라고 가만히 말할 수 있었다.

자신의 삶에 대해 담담하게 말할 수 있다는 건 그동안의 시간을 부정하는 일도 긍정하는 일도 아니다. 온전히 받아들이고 나를 인정하는 일이다. 그건 쉬운 일이 아니다. 한지혜의 글이 주는 힘은 그런 것이었다. 어쭙잖은 위로나 조언이 아닌 그냥 나의 생각을 이야기를 하고 가만히 기다리는 사람이라고 할까. 우리는 안다. 거기, 그 사람이 존재한다는 것만으로도 좋은 기운이 전해진다는걸. 이 산문의 글에서 나만이 그것을 보았고 느꼈을까. 아니다, 좋은 글은 어디서든 그 빛을 발하고 누구에게나 선명하게 박힌다.

집이 아닌 작은방에서 살았다는 글을 시작으로 한지혜가 들려주는 삶이 고스란히 내게로 스며들었다. 작은 시골에서 나고 자란 나의 그 시절이 생생하게 그려졌다. 도시 속 개천, 단칸방, 철거민, 임대 아파트와는 다른 풍경이지만 내가 느꼈던 감성은 다르지 않았다. 형제가 많아 항상 옷을 물려 입고 한방에서 하나의 이불을 끌어당기며 화를 내던 시절. 엄마가 밀가루에 콩만 넣고 쪄서 만들어준 간식거리, 김치 냄새 풍기던 도시락통, 그리고 그 안에서 뭔가 다른 세상을 꿈꿨던 내가 거기 있었다. 동화책이나 세계문학전집은 조금 먼 이야기였지만 가난을 온몸으로 체감하며 자란 그때를 그리워하는 마음은 닮았다. 작은 소읍을 떠나 내가 접한 도시의 풍경도 다르지 않았다. 하나의 대문을 사용하지만 작은 마당을 둘러싼 작은방으로 이어지던 시간, 옆집의 벽이 보이던 창문, 김치며 밥을 나누던 공간이었다. ​나와 확연하게 다른 건 그녀의 태도다. 언제부턴가 나는 먼저 해 본 사람이 되었다. 그래서 자꾸만 묻기 전에 알려주려 하고 뭔가 도와주려는 마음을 감추지 못한다. 그것이 권력으로 보일 수 있다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없었다. 똑같은 경험은 없다 당연한 사실을 놓치고 있었다.

​사람은 저마다 개별적인 존재이다. 모든 환경과 경험도 개별적일 수밖에 없다. 비슷한 경험은 있지만 똑같은 경험은 없다. 그러므로 나도 너와 똑같이 경험해봤다는 말이나 한 발 더 나아가 해봐서 안다는 말은 매우 신중히 해야 할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험 많은 인생을 자처하는 사람일수록 다른 사람의 시련에 혹독하거나 냉정하기 쉽다. (46쪽)

식물인간으로 긴 시간을 힘들게 보내고 돌아가신 아버지의 가계부에 대한 이야기와 그렇게 돌아가신 아버지를 지켜보았기에 암으로 투병하신 엄마의 마지막을 편하게 보내드리고 싶었던 자식들을 향한 의료계의 불편한 시선을 읽으면서 나는 내 아버지와 엄마 같았던 큰언니의 죽음을 떠올리게 되었다. 평생의 삶을 빠짐없이 가계부에 기록한 아버지와 나의 아버지는 같을 수 없지만 삶과 죽음에 대해 느꼈을 허무감 말이다. 검사나 받자 보자며 입원하신 아버지에게 찾아온 심정지, 다시 의식이 돌아왔지만 아버지의 시간은 3일이 전부였다. 돌아가신 아버지의 짐을 정리하면서 아버지가 살았던 작은방에 속한 게 너무도 조악하고 비루한 것들이라서 서글펐던 기억. 환자인 어머니 본인과 가족들이 연명치료를 하지 않기로 결정했음에도 그런 자식을 비난하는 의사의 말은 얼마나 큰 대못이 되었을까 생각하면 마음이 아프다.

골목에 대한 추억과 이야기라 이름 붙였지만 그곳은 우리가 살아온 지난 시간이 있었고 현재 우리가 살아가는 시간에 대한 사유가 있었다. 나의 작은 사연으로 시작해 우리의 일상으로 연결하는 일은 쉬운 듯 보이지만 그렇지 않다. 이 산문집은 그런 과정을 보여준다. 한지혜 개인으로 시작해 우리가 사는 사회로 이어진다. 그래서 더 남다르고 의미 있다. 우리가 사는 사회에 개인인 한지혜와 같은 내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녀가 신춘문예 응모작을 심사하는 이야기도 다르지 않다. 그녀는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할 뿐이었지만 그것은 문학을 꿈꾸는 이들에게는 아주 중요하고 대단한 일이기 때문이다. 전문가의 입장에서 글의 도입부만 읽어도 끝을 예상할 수 있겠지만 그녀는 작품을 끝까지 꼼꼼하게 읽는다고 한다. 보내온 이들의 간절한 마음을 알기에 허투루 할 수 없었을 것이다. 모든 분야의 모든 사람들에게 합당한 마음일 텐데, 우리 사회에서 그런 믿음은 사라진지 오래다. 최선을 다해 노력하면 된다는 메시지는 공허한 메아리가 되었다. 개천에서 용이 나는 세상이 아니라는 건 알고 있지만 개천의 존재까지 무시당하는 사회로 전락해버린 것이다. 정직(貞直)과 정도(程度)가 통하는 세상을 우리는 꿈꿔도 좋을까.

 

미래를 향하여 혹은 다른 삶을 향하여 한 번 더 발걸음을 내딛는 것, 그 의지가 바로 삶의 가장 궁극적인 순간이 아닐까 싶다. 그러하니 모든 생은 멈추지 않는 순간 행복을 향해 다가선다. 수시로 구렁에 빠지겠지만 끝내는 실패할 수 있지만 적어도 목표를 향해 걷고 있다면 우리의 삶은 끝나도 다 끝난 것이 아니다. (90~91쪽) ​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라는 말처럼 우리에게 주어진 삶은 단순하게 실패와 성공으로 구분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 참으로 기껍고 고맙다. 삶의 기준과 행복은 저마다 다르다는 것, 그러니 내가 행복한 순간은 내가 만들고 내가 만끽하는 것은 아닐까. 입덧으로 힘들었을 때 불량식품을 먹으면서 견딜 수 있었고 작은 텃밭에서 식물을 기르면서 느꼈던 작은 감동, 돌아가신 엄마의 레시피를 생각하며 만드는 김치, 일상의 사소한 조각들이 모여 하나의 삶을 이룬다는 사실을 확인한다. 나의 삶과 당신의 삶도 그보다 특별하지 않다는 걸 새삼 느끼는 순간이다.

 

내 의지와 상관없이 내 삶을 흔드는 일이 비일비재한 세상이다. 구조조정으로 회사를 그만두고 송별회를 하는 순간 그녀가 노래를 부르며 후련했던 마음과 그날 내린 눈에게 받은 위로를 이야기하는 이런 문장은 오늘을 사는 모두가 공감할 수 있기에 한결 친근하고 깊은 위로를 안겨준다. 우울과 좌절로 끄적거린 블로그의 글에 비밀글로 남긴 누군가의 살가운 속내처럼, 지친 일상의 무게에 위축된 마음을 일으켜 세운다.

 

내 마음은 어느 때보다도 가벼웠다. 더한 눈이 쌓여도, 더 먼 길을 걷는다 해도 괜찮을 것 같았다. 그랬다. 그날 함박 함박 떨어지던 눈이 내 귓가에서 그렇게 말했다. “괜찮다, 괜찮다, 괜찮다.” (60쪽)

 

좋은 일도 아주 좋지는 않았고, 나쁜 일도 아주 나쁘지는 않았다. 당시에는 크게 좋았고, 당시에는 처절하게 비참했던 일도 세월이 지나고서 보니 그저 그런 일들이다. 그리그 그것들을 그저 그런 일로 만든 건 결국 그 시절 내가 가지고 있던 내 삶의 태도였다. 좋은 일을 아주 좋은 일로 만들지 못한 이도 나였고, 나쁜 일을 아주 나쁜 일로 치닫게 하지 않는 이도 나였다. (64쪽)

 

​소소한 기쁨과 즐거움을 잃어버리고 우울한 나에게 일상을 움직이는 힘에 대해 생각하게 만든다. 그게 무엇이든 기쁨을 발견할 수 있다는 걸 나는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것이다. 울어도 괜찮고, 화를 내도 괜찮고 속상해해도 괜찮다는 걸 말이다. 보통의 나, 보통 이하의 나여도 괜찮다고 고백한다. 계절이 바뀔 때마다 달려드는 불안을 껴앉을 수 있을 것 같다. 단호하면서도 다정한 글이 주는 위안이 당신에게도 전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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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니데이 2019-11-13 19: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늘 낮에는 비가 내렸지만, 내일은 눈이 올 것처럼 차가운 계절이 되었어요.
일교차 큰 날씨 감기 조심하시고, 따뜻한 저녁시간 보내세요.^^

자목련 2019-11-14 17:47   좋아요 1 | URL
어제는 정말 수능한파가 몰려오는구나 싶었어요. 이제 진짜 겨울인가 봐요. 서니데이 님도 포근한 시간 보내세요.
 

 

배가 고픈 상태로 마트에서 장 보기를 하면 안 된다. 뭐라도 자꾸 사게 된다. 필요한 것들, 구매할 목록을 작성해도 소용없다. 바로 먹을 수 있는 빵이나 분식을 사고 만다. 적당히 배가 불렀을 때 장을 봐야 한다. 온라인 쇼핑에서도 마찬가지다. 불만이 있거나 불안하거나 만족스럽지 못한 마음은 충동적으로 구매하기를 누른다. 얼마 후 정신을 차리고 취소를 할 수 있는 경우에는 그나마 다행이지만 빠른 업체의 배송 중이라는 알림은 취소를 해도 소용이 없다.

 

여유로운 마음이 점차 사라진다. 책장에 있는 책을 찾지 못하고 덜컥 주문하고서 책장에서 책을 발견한다. 지금 아니면 안 될 것 같은 마음,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야 할 일이면 더욱 그렇다. 도움을 주는 이의 상황을 알고 배려한다고 생각해서 미리 부탁을 할 때가 있다. 가족의 경우, 이럴 때 뭐 그리 급하냐고 한 소리를 듣거나 그때 말하라며 대화는 멈춘다. 그러면 상처를 받고 소리를 내지 못하는 말만 허공을 떠다닌다.

자꾸만 조급함이 나를 덮친다. 해야 할 일에 대한 조급함이라면 부지런으로 연결 시 킬 수 있을 텐데, 그건 아니다. 새벽에 깨는 일이 잦아져서 걱정이다. 깨는 게 문제가 아니고 잠드는 일이 쉽지 않다. 나이가 들어서, 늙어가는 거라고 농담처럼 했던 말이 농담이 아닌 요즘이다. 이런 날들에 허수경 시인의 글을 읽는 일이 그나마 정신을 맑게 만든다. 이런 짧은 문장을 오래 바라보고 몇 번씩 읽는다.

 

 

하루에도 몇 번은 절망한다. 하루에도 몇 번은 희망한다. 그건 아주 정상적인 일이다.

언젠가 쓸 수 없는 순간이 반드시 온다,라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충동적으로 사들이는 책들, 그 책의 미래는 읽지 않고 정리하는 책이 될지도 모를 일. 그런데도 책들이 나를 또 흔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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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유행열반인 2019-11-06 15: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쓴 글인 줄 알았지 뭐에요. 장바구니 열기 전엔 배부터 든든히ㅎㅎㅎㅎ

자목련 2019-11-08 09:51   좋아요 1 | URL
모두 비슷한가 봐요. ㅎ

수이 2019-11-06 20: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목련님 감기 걸리지 말아요 감기 조심!!

자목련 2019-11-08 09:51   좋아요 0 | URL
넵!! 수연 님도 건강 잘 챙기시고 향기로운 11월 보내세요^^*
 
긴 이별을 위한 짧은 편지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68
페터 한트케 지음, 안장혁 옮김 / 문학동네 / 201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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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진정으로 원하는 건 내부의 변화다. 외부를 바꾸는 일도 쉬운 건 아니지만 내부의 변화는 정말 어렵다. 어제와 같은 하루를 살아가는 일상에 안도하면서도 마음 한 편으로는 어떤 자극을 원한다. 외모를 정리하고 여행을 계획하고 뭔가를 배우기도 한다. 수만 번 결심을 하고 마음을 다잡아도 내부는 철옹성처럼 단단할 때가 많다. 그래서 내부를 움직이는 건 아주 커다란 사건이나 상처를 동반한다. 누군가는 그것을 ‘성장’ 혹은 ‘성숙’이라 부르기도 한다. 페터 한트케의 『긴 이별을 위한 짧은 편지』속 ‘나’에게 그것의 시발점은 아내 유디트의 이별 통보였다. “나는 지금 뉴욕에 있어요. 더 이상 나를 찾지 마요. 만나봐야 그다지 좋은 일이 있을 성싶지 않으니까.” 이런 편지를 받고 그냥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는 이가 과연 있을까? ‘나’ 역시 그러했다. 오스트리아에서 당장 미국으로 떠난다. 아내를 찾기 위한 명분이 있었지만 ‘나’에겐 일종의 여행의 시작이었다.

 

아내가 묵었던 호텔을 찾았지만 아내는 떠났고 그에게 남겨진 건 사진기 뿐이었다. 어디서 아내를 찾아야 할까. 아내의 흔적을 뒤쫓고 있지만 항상 한 발 느린 상태다. 아내를 향한 감정도 모호하다. 호텔에서 혼잣말을 하면서 아내에게 욕을 내뱉고 만나면 당장이라도 죽일 듯 화를 낸다. 그럴 봐에야 만날 필요가 있을까. 이 과정에서 흥미로운 건 ‘나’의 모습이다. 미국의 술집에서 거리에서 낯선 사람과 만나 쓸데없는 이야기를 하거나 그들을 관찰한다. 호감이 가는 여자를 발견해도 그뿐이다. 조금 더 적극적으로 다가가지 못한다. 여행자란 위치 때문일까. 그런 건 아닌 것 같다. 혼자만의 시간을 갖고 자신을 들여다보다가도 감정에 못 이겨 화를 내고 술을 진탕 마시고 취한다. 아내와 ‘나’사이의 거리는 잡힐 듯 잡히지 않는다. 이렇게 ‘나’의 불편한 여행에 동행하는 건 지루할 뿐 유쾌한 일은 아니다.

그런 여행에 변화가 온 건 과거 하룻밤의 연인 ‘클레어’를 만나는 일이다. 그녀의 어린 딸 ‘베네딕틴’과 여행을 한다. ‘클레어’와 새롭게 관계를 시작하는 게 아닐까 싶었지만 그건 착각이었다. 그저 친구로서의 만남과 대화가 전부였다. 그러나 ‘클레어’와 ‘나’의 대화는 많은 의미를 부여한다. 자신이 처한 상황과 감정을 솔직하게 털어놓고 조언을 듣기도 한다. ‘베네딕틴’이 질문을 하면서 둘 사이의 대화를 끊어놓지만 그 역시 ‘나’에게는 색다른 경험이다. 아이란 존재가 주는 특별함이라고 할까. 예측할 수 없는 일이 발생하고 모든 사물에 대해 호기심을 보이는 아이의 순수함에 놀라는 것이다.

 

“이곳에서는 왜 내게 유독 불안 상태에 대한 기억력만 살아 있는지, 그 이유를 알게 돼. 내가 매일같이 보아왔던 것과 비교해볼 대상을 아직 가져본 적이 없었던 거지. 내가 받는 인상들이라는 게 모두 이미 익히 알려져 있는 인상들의 반복일 뿐이라는 거야. 그 말은 내가 아직 세상을 많이 돌아다녀 보지 못했다는 것뿐만 아니라 나와 다른 조건들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을 많이 보지 못했음을 의미해.” (78쪽)

이런 말을 하는 ‘나’에게 ‘클레어’의 말은 무척 의미심장하다. “당신은 장소를 바꾼다기보다는 미래 속으로 달려가려고 마치 타임머신을 탄 듯이 이곳으로 왔어. 하지만 이곳에서 앞으로 우리가 어떤 모습으로 살아갈지는 알 수 없어. 우리가 무언가를 비교한다면 그 대상은 과거가 되겠지. 우리는 기껏해야 다시 아이가 되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아.“ (83쪽)

 

‘클레어’가 ‘베네딕틴’을 키우지 않았더라면 몰랐을 것이다. ‘나’가 아내 유디트와의 이별로 인해 많은 것들을 돌아보고 생각하는 것처럼 ‘클레어’는 아이를 낳아 키우면서 성장했다고 할 수 있다. 평범하고 사소한 일상부터 ‘나’가 이 여행에서 읽는 책 고트프리트 켈러의 『녹색의 하인히리』에 대해서도 이어지는데 이 책은 소설에서 상징하는 바가 크다. ‘나’는 그녀에게 책을 읽어주고 둘은 소설에 대해, 하인히리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다. “녹색의 하인히리는 아무것도 해석하려 하지 않았지.” “비겁하거나 소심해서 경험을 회피한 것이 아니라, 그 일이 자신에게 별 가치가 없거나, 그가 관여했을 때 행여 거절당할까 봐 두려웠을 뿐이지.” 란 ‘클레어’의 해설은 ‘나’에 관한 말처럼 들린다. 그러니까 『녹색의 하인히리』의 하인리히는 결국 ‘나’와 다르지 않다는 말이다.

‘나’가 미국 여행에서 아내의 행방만 쫓고 그녀를 향한 생각만으로 달려가는 과정이 점점 의새로운 의미를 찾아간다고나 할까. ‘클레어’와의 만남이 없었다면 그는 화와 분노로 가득한 마음을 정리하지 못했을 것이다. 현재라는 작은 조각만 보고 인생의 전체를 상상하는 어리석음을 계속 품고 있었을 것이다. 그 와중에 ‘나’는 서른 살 생일을 맞는다. 하나의 세대가 끝나고 다른 세대로의 진입이다. 이러한 여행의 시간들을 통해 ‘나’는 여행의 처음에 느꼈던 감정에 대해 정리를 한다. 그러한 변화를 감지할 수 있는 이런 부분은 무척 섬세하면서도 황홀하기까지 하다. 혼자만의 시간, 고요한 자아를 발견하는 순간이라고 감히 말하고 싶다.

내 존재조차도 잊어버린 채 물끄러미 밖을 내다보았다. 그러고 있자니 숨을 들이쉴 때마다 그 실측백나무가 잔잔하게 흔들리면서 내게로 점점 다가와 마침내 내 가슴속까지 파고 들어왔다. 나는 움직이지 않고 서 있었다. 머릿속의 혈관은 박동을 멈췄고 심장도 멎었다. 나는 더 이상 숨을 쉬지 않았고 피부는 무감각해졌다. 그리고 나의 의지와 상관없이 몰려드는 쾌감과 함께 나무의 움직임이 호흡 중추 기관의 기능을 넘겨받는 것을 감지했다. 실측백나무가 나를 자신의 품 안에서 흔들리게 했다. 내가 저항하기를 그만두고 마침내 잉여의 존재가 되어 실측백나무의 부드러운 놀이에서 벗어나자 실측백나무가 내게서 다시 빠져나가는 것을 느꼈다. (98쪽)

‘나’는 달라졌다. 누군가 그것을 알지 못해도 그의 내부는 그렇게 변화한다. 그리하여 자신에게 권총을 들이대고 심지어 발사까지 하고 흥분한 아내 유디트를 지켜보고 그녀에게서 권총을 빼앗아 바닷속으로 던져버릴 수 있었다. 소설의 처음에서 등장하는 ‘나’를 떠올리면 불가능한 일이다. 이제 둘은 진짜 이별할 수 있을까? 소설의 말미에서 그들은 ‘백발이 성성한 데다 주름진 얼굴에 수염 자국이 하얗게 남아 있는’ 영화감독 존 포드를 만난다. 감독과 만나 함께 걸으며 들려주는 이야기도 부분도 인상적이다. 온통 자기 자신밖에 몰랐던 그들에게 ‘우리’에 대해 알려준다. 진짜 어른이라고 할까. 일어날 수 있는 모든 것들을 경험하고 인생을 통찰한 이에게 듣는 이야기.

 

페터 한트케의 『긴 이별을 위한 짧은 편지』는 결국 성장에 대한 이야기라 할 수 있다. 서로의 관계를 정리하고 제대로 이별한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엄청난 성장이다. ‘나’는 여행을 통해 자신의 이제껏 몰랐던 자아를 발견했고 유디트 역시 그 시간을 통해 남편과 자신에게 남았던 감정의 실체를 찾았다 할 수 있다. 서로에게 거리를 두고 서로를 마주하는 과정에서 이별을 배우고 성장한다고 할까. 그들에서 이별은 과거와의 이별이며 새로운 시작이다.

장소 하나 바꾸는 것이, 우리가 사실을 받아들이고 싶지 않은 것들을 마치 꿈을 잊는 것처럼 깨끗이 잊어버리게 만드는 데 그렇게 많은 기여를 한다면, 그거야말로 놀라운 일이 아니겠는가? - 칼 필립 모리츠 『안톤 라이저』

​이동한다는 건 장소를 변경하는 단순한 일이면서 지금껏 나의 모습을 객관적으로 살펴본다는 일이다. 어쩌면 소설의 모토라고 할 수 있는 『안톤 라이저』의 저 구절은 내부의 변화를 간절히 원하는 우리에게 필요한 문장인지도 모른다. ‘장소’란 말 대신 넣을 수 있는 것들을 생각한다. ‘누군가 사람 한 명을 만나는 일’과 ‘한 권의 책을 읽는 일’로 바꾼다. 『긴 이별을 위한 짧은 편지』 역시 누구나 경험할 수밖에 없는 것(이별, 사랑, 죽음...)들을 통해 우리는 그렇게 성장한다는 걸 알려주며 깊고 아름다운 여운을 남긴다. 진정한 내부의 변화가 일어나는 순간에 밀려오는 감동과 함께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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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1-04 19:3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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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1-05 16:35   URL
비밀 댓글입니다.
 

 

한 번씩 종말에 대해 생각한다. 자연재해 같은 대재앙의 소식을 접할 때마다 세상이 끝나는 날은 어떻게 올까, 궁금하다. 지난 세기말처럼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적어도 내가 죽기 전까지는 말이다. 그렇다면 내가 존재하지 않는 먼 미래는 어떤 모습으로 존재할까. 냉동인간이 가능해지고 늘어나는 수명을 즐길 수 있도록 모든 일은 인공지능이 대신하고 만병통치약이 등장할지 알 수 없다. 아니, 반대로 무서운 질병에 빠른 속도로 퍼져 손을 쓸 사이도 없이 모두가 사라지는 건 아닐까. 가장 무서운 게 바이러스라는 말도 무시할 수 없는 세상이고, 우주가 폭발할지도 모르는 일이고. 그럼 이 모든 경우의 수를 대비해서 세계 어딘가에서는 뭔가 대책을 마련하고 있는 게 아닐까. 저스틴 크로닌의 『패시지』에서 미국 정부가 세상의 모든 병을 치유할 수 있는 완벽한 백신을 연구하는 것도 그런 의미였을지도 모른다. 너무도 놀랍고 잔인한 방법이라는 사실을 몰랐다면 말이다.

 

소설은 무척 방대하다. 그도 그럴 것이 『패시지』(1,2권)는 저스틴 크로닌의 『트웰브』, 『시티 오브 미러』와 함께 ‘패시지 삼부작’의 첫 시작이다. 올해 미국 FOX TV에서 방영된 드라마 원작이다. 소설은 ‘에이미’란 소녀에 대한 소개로 시작한다. 엄마 지넷이 유부남이었던 남자와 만나 낳은 아이로 홀로 에이미를 키웠다. 몇 년 뒤 남자가 찾아왔지만 함께 할 수 없었고 지넷은 끝내 에이미를 교회에 버렸고 그곳의 레이시 수녀에게 맡겨진다. 레이시 수녀와 함께 동물원에 간 에이미는 그곳에서 울가스트라는 FBI 요원에게 납치당한다. 울가스트는 왜 여섯 살 어린 에이미를 데리고 갔을까? 울가스트의 임무는 ‘노아 프로젝트’를 완성하기 위한 실험체를 구해주는 일이다. 모든 병을 치료할 수 있는 백신을 발견하는 프로젝트였다. 실험체라 불리는 이들은 모두 범죄를 저지르고 사형을 선고받은 이들이었다. 에이미는 그런 존재가 아니었다. 울가스트 요원은 에이미를 통해 자신은 죽은 딸 에바를 떠올렸고 에이미를 데리고 도망치기 시작한다. 울가스트가 에이미가 상대하는 건 정부였고 결국엔 에이미는 그들의 프로젝트에 실험체 13이 되었다.

성경 속 선의의 뜻 그대로 ‘노아 프로젝트’가 성공할 수 있을까. 아니었다. 에이미를 제외한 12명의 사전 실험체는 기괴한 능력을 가진 채 세상으로 나았고 사람들을 사냥하고 죽이기 시작한다. ‘트웰브’라 불리는 그들은 뱀파이어 바이러스를 퍼트려 세계 인류를 괴물 ‘바이럴’로 만든다. 그러니까 진짜 종말 아닌 종말이 닥친 것이다. 시간은 흘러 백 년이 지난 후 인류의 생존자들은 ‘퍼스트 클로니’란 요새를 만들어 ‘바이럴’과 치열한 싸움을 벌인다. 불안과 공포로 가득한 그곳에 그 소녀, 에이미가 나타난다. 에이미는 ‘트웰브’를 상대할 수 있는 힘, 바이러스를 치료할 수 있는 유일한 치료제였다. ‘트웰브’가 세상으로 나갈 때 군부대는 폭발했고 에이미도 죽은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깊은 잠에 빠져든 것이다.

에이미는 죽지 않을 것이다. 그것이 가장 무서운 일, 그들이 저지른 가장 지독한 일이었다. 시간은 부두를 사이에 두고 갈라지는 물길처럼 그 아이를 피해 움직였다. 시간이 빠르게 흘러가도 에이미는 변하지 않을 것이다. (1권, 374쪽)

소설은 이제 요새 ‘퍼스트 클로니’안에서 ‘바이럴’과 싸우면서 살아가는 생존자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요새를 보호하는 조명의 배터리가 약해지고 그들을 구해줄 군대를 기다리는 그때 소녀가 나타난다. 바로 에이미가 눈을 뜬 것이다. 마지막 생존자들은 에이미를 경계하지만 곧 에이미가 특별한 존재라는 걸 인식한다. 함께 ‘바이럴’과 싸울 수 있는 존재, 바이러스를 이겨낼 희망이라는 걸 말이다.

“93년 전은 바로 ‘제로의 해’, 그러니까 이 전염병이 시작된 그해라고. 93년 전 봄, 콜로라도주 텔루라이드에서 누군가가 여섯 살짜리 여자아이의 목 안에 자체 전력원이 달린 송신기를 삽입했어. 이 아이는 ‘지난 역사’에서 그대로 걸어 나온 거나 다름없어. 그리고 이 송신기를 삽입한 그 누군가는 93년째 이 아이를 돌려보내라고 신호를 보내고 있는 거라고.” (2권, 175쪽)

‘퍼스트 클로니’의 원정대와 에이미는 진실을 찾아 떠나고 그 길은 예상했듯 험난하다. 그래도 그들은 멈추지 않는다. 에이미는 정말 유일한 희망이 맞는 걸까. ‘노아 프로젝트’의 실체를 밝힐 수 있을까. 소설을 읽으면서 <World War Z>나 한국 영화 <부산행>이나 <마녀>가 생각나기도 했다. 방대한 스토리와 수많은 인물이 등장함에도 지루하지 않고 집중하게 만든다. SF나 스릴러를 좋아하는 독자라면 즐겁게 만날 것이다. ‘패시지 삼부작’이 어떤 결말을 맺을지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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