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고의 시간들
올가 토카르추크 지음, 최성은 옮김 / 은행나무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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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가 토카르추크의 『태고의 시간들』에서 가장 좋았던 문장으로 시작하고 싶다. 그라인더가 품고 간직한 시간 말이다. 아마도 그라인더의 시간을 알아가는 과정이 소설의 전부가 아닐까 나는 그렇게 말하고 싶다.

 

그라인더는 간다. 고로 존재한다. 그러나 그라인더가 대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라인더는 아마도 전체적이고 본질적인 변화의 법칙, 거기서 떨어져 나온 파편일 수도 있다. 그것 없이는 이 세계가 돌아갈 수 없거나, 아니면 전혀 다른 세계가 되었을지도 모르는 그러한 법칙 말이다. 어쩌면 커피 그라인더는 현실의 축일지도 모른다. 모든 것이 그라인더 주위에서 돌고 진보해나가는 현실의 축. 그라인더는 이 세계에서 인간보다 더 중요한 존재일 수도 있다. 나아가 미시아의 그라인더는 ‘태고’라고 불리는 것의 기둥일지도 모른다. (54쪽)

이야기는 어디에나 존재한다. 모든 것은 이야기가 될 수 있고 우리는 모두 이야기의 주인공이 될 수 있다. 다만 알려지지 않을 뿐이다. 알려지지 않았다고 해서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누군가는 여전히 존재한다. 그 이야기 속에서 태어나고 사라진다. 생성과 소멸이 끊임없이 이어지면서 우리는 살아간다. 아주 오래전부터 시작된 이야기, 누군가가 거기 살고 있었다는 걸 말해주는 이야기. ‘태고(太古)는 우주의 중심에 놓인 작은 마을이다.’로 시작하는 폴란드 작가 올가 토카르추크의 『태고의 시간들』은 그런 존재에 대한 이야기다. 태고를 시작으로 그 주변에 대한 묘사를 통해 나는 그 작은 마을, 작은 우주를 상상하려 노력했다. 그러나 나의 머릿속에서 그려지는 태고의 이미지는 처음에는 확장되지 않았다. 모든 이야기가 그렇듯 누군가 등장한다면 달라진다. 나도 그러했다.

남편이 전쟁터로 끌려간 후 아이를 가졌다는 걸 알게 된 게노베파의 시간에 나도 합류한 것이다. 혼자서 남편을 기다리면서 겪는 두려운 일상과 감정의 혼란들에 빠져들었다. 아이를 낳고 젊은 남자에게 동요하는 그 마음에 온전히 닿을 수 없었지만 앞으로 게노베파에게 어떤 일이 일어날지 궁금했다. 그건 크워스카에게도 다르지 않았다. 오롯이 스스로 자신을 돌보고 세상에서 살아남아야 하는 크워스카에게 냉담한 시선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럴수록 더욱 세상에 당당하게 맞섰다. 살아남기 위해 그래야만 했다. 게노베파와 크워스카의 시간은 이제 그들만 존재하는 게 아니라 그녀들의 딸 미시아, 루타에게로 이어진다. 미시아의 아픈 동생 이지도르까지 말이다. 그래서 게노베파와 남편 미하우와 딸 미시아, 아들 이지도르를 중심으로 그들이 살아가는 삶의 이야기구나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소설 속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의 시간을 읽다 보면 묘한 감정을 느낀다. 누군가 게노베파 가족을 인간의 대표로 삼고 지켜보고 있다는 생각이다. 그리하여 나 역시 잠깐 주변을 둘러본다. 아파트 화단을 지키는 나무, 새끼와 함께 나를 경계하면서도 다가오는 길 고양이, 액자 속 그림도 나를 지켜보는 게 아닐까 하는 기분이 든다. 인간만이 존재하는 세계가 아니라 어딘가 우리가 모르는 세계가 존재할 수도 있다는 상상, 어쩌면 그 시작이 태고일지도 모른다. 소설에서 보리수의 시간, 버섯 균의 시간, 과수원의 시간, 죽은 자의 시간, 신의 시간이 있듯이 말이다.

모두가 함께 살아가는 세상에는 전쟁이 일어나고 악이 살아간다. 소설 속 나쁜 인간이 악을 말하듯, 우리의 사회도 그럴 것이다. 나의 시간에 속하는 게 아니라고 생각하면서. 그러니 전쟁에서 돌아온 미하우가 딸 미시아를 통해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수 있다. ‘시간 속에서 그의 사랑을 언제까지나 유지하게 할 수 있는 것, 그리고 시간 속에서 미시아를 영영 멈추게 만드는 것. 덕분에 그의 사랑은 영원한 것이 되었다.’ (83쪽) 이렇게 지극한 사랑이 있을까. 그런 사랑만이 존재하는 시간은 영원하겠지만 미시아의 시간은 그렇지 않았다. 시간은 한곳에 머물다 고여있는 게 아니라 자신의 책임을 다하며 흘렀고 미시아는 성장한다. 누군가의 죽음과 누군가의 탄생이 순환하면서 이어지는 일들이 결국 생이라는 것일까. 미하우가 모든 걸 다 내어주고 사랑한 딸 미시아는 학교도 그만두고 사랑하는 파베우와 결혼을 하고 딸 아델카를 낳는다. 장애를 갖고 태어난 이지도르의 시간은 어떤가. 오직 자신을 이해하는 루타와 함께 태고를 탐험하며 보낸다.

 

그런가 하면 상속자 포피엘스키의 시간에서는 게임이 중요했다. 상속자 포피엘스키의 게임을 통해 신이 인간을 만들고 세상을 지은 과정을 보여준다. 그의 시간을 읽다 보면 신은 어디에 존재하며 왜 인간을 이토록 고통스럽게 만드는가 묻고 싶어진다. 두 번의 전쟁이 일어나고 죽음이 난무하는 세상에 굴복하지 않으려는 몸부림을 보면서 신은 무엇을 전하고 싶은 것일까.

신은 모든 과정이 안에 있다. 신은 모든 변형 속에서 박동한다. 어떤 때는 있고, 어떤 때는 조그만 있고, 때로는 아예 없을 때도 있다. 신은 그가 거기에 없는 순간에도 현존하기 때문이다. (150쪽)

제법 고요하고 평화로운 태고에 외부인의 등장은 공포와 혼돈을 몰고 온다. 군인에게 점령당한 태고, 그들을 주시하면서도 일상을 유지해야 하는 사람들. 소설이 흥미로운 건 태고라는 지명은 허구에 불과하지만 그곳에서의 삶은 과거 폴란드의 역사과 닮았다는 것이다. 폴란드를 둘러싼 강대국의 외압, 유대인의 학살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알려지지 않았지만 존재했던 이야기, 그러니까 게노베파, 크워스카, 미시아, 루타로 이어지는 여성들의 삶과 장애를 가진 이지도르의 이야기 말이다. 어디에도 존재하면서도 존재조차 부정당했을 누군가의 시간을 작가는 아름답게 그려낸 것이다. 그러면서 결국엔 모두 사라지는 존재라는 삶의 소멸과 그걸 인정하면서도 욕망을 버리지 못하는 것에 대한 쓸쓸함을 인물들의 내면을 통해 보여준다. 승승장구하듯 돈을 벌고 정부의 고위직과 친분을 맺고 살아가는 파베우가 느끼는 감정은 소설 안에서 소설 밖으로 이동하여 고스란히 내게로 전해졌다. 그토록 사랑한 미시아와 결혼해 아이들을 낳고 제법 괜찮은 가장을 살았다고 생각했지만 한순간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다가오는 지난 시간들.

 

깨달았다. 그의 인생에서 정오의 시간은 이미 지났음을, 그리하여 이제부터는 은밀하게, 서서히, 자신도 미처 인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땅거미가 내려앉으리라는 것을. 파베우는 자신이 길가의 한옆에 내던져진 돌멩이나 버려진 아이 같다고 느꼈다. 그는 아무리 잡으려 해도 잡히지 않는 이 거친 현재의 시간 속에서 바닥에 등을 대고 똑바로 누운 채 스스로 매초 무(無)의 늪으로 가라앉고 있음을 생생히 감지했다. (249쪽)

저만치 목표를 향해 나가느라 돌보지 못한 것들과 지나친 풍경들이 그래서 더우 애달프고 애처롭다. 어디 파베우가 느낀 슬픔뿐일까. 사랑했던 루타가 다른 남자와 결혼하고 결국엔 태고를 떠났지만 여전히 그녀를 기다리는 이지도르의 시간은 어떤가. 자신의 존재를 부정당하며 살아온 시간, 우표를 모집하면 느꼈던 희열, 결국 비루한 육체로 인한 고통으로 병원으로 요원으로 이동하며 생을 마감한 그의 시간이 우리의 그것과 다르다고 말할 수 있을까. 무엇을 위해 살아가는지, 무엇이 우리를 존재하게 만드는지 알지도 못한 채 주어진 생을 살다가 사라지는 것. 어느 누구도 허투루 시간을 낭비하고 살지 않았음에도 남겨진 시간 앞에서는 무기력해지고 만다. 1914년을 시작으로 80여 년 동안의 그들의 시간은 앞으로 다가올 나의 시간과 얼마나 비슷할까. 똑같이 포개어질 수는 없겠지만 다르게 비껴가지도 않을 터.

하나의 우주였고 다른 우주의 중심이었던 태고를 만나는 시간은 감동이었다. 84편의 조각들로 이루어진 독특하고도 특별한 소설은 끝을 향해 달려갈수록 점점 더 마음을 붙잡고 흔든다. 끝내는 단 하나의 조각도 잃어버리지 않겠다는 다짐을 한다. 도통 무슨 말인지 몰라 헤매던 처음에는 느낄 수 없었던 숭고한 생의 아름다움을 선물한다. 어디에나 존재하는 생의 시간들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위대한 것인지 가슴에 각인시킨다. 아무리 작고 보잘것없는 생의 시간이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는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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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1-15 15:5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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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1-15 16:5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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