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 괜찮은 눈이 온다 - 나의 살던 골목에는 교유서가 산문 시리즈
한지혜 지음 / 교유서가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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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을 기다리는 계절이 다가온다. 어딘가에는 첫눈이 내렸겠지만 지금 내 눈앞에는 단풍이 남았다. 가을을 살면서 눈을 기다린다는 건 좀 이상한가. 뭔가 빨리 끝내고 새로운 것을 시작하면 잘 할 수 있다는 그런 우매한 다짐일지도 모른다. 하루하루가 다르지 않은 시간으로 채워진다는 것에 대한 만족이 아니라 불만과 불안이라고 할까. 나는 나를 잘 다스린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생각해보니 거울을 보면서 나에게 잘 하고 있다고 말을 건네는 일도 언젠가부터 멈춰 있었다. 이런 마음 때문일까. 조곤조곤하면서도 단호한 태도로 일관하는 한지혜의 산문 『참 괜찮은 눈이 온다』읽고 나는 다시 거울을 바라보며 “이렇게 살아도 괜찮아”라고 가만히 말할 수 있었다.

자신의 삶에 대해 담담하게 말할 수 있다는 건 그동안의 시간을 부정하는 일도 긍정하는 일도 아니다. 온전히 받아들이고 나를 인정하는 일이다. 그건 쉬운 일이 아니다. 한지혜의 글이 주는 힘은 그런 것이었다. 어쭙잖은 위로나 조언이 아닌 그냥 나의 생각을 이야기를 하고 가만히 기다리는 사람이라고 할까. 우리는 안다. 거기, 그 사람이 존재한다는 것만으로도 좋은 기운이 전해진다는걸. 이 산문의 글에서 나만이 그것을 보았고 느꼈을까. 아니다, 좋은 글은 어디서든 그 빛을 발하고 누구에게나 선명하게 박힌다.

집이 아닌 작은방에서 살았다는 글을 시작으로 한지혜가 들려주는 삶이 고스란히 내게로 스며들었다. 작은 시골에서 나고 자란 나의 그 시절이 생생하게 그려졌다. 도시 속 개천, 단칸방, 철거민, 임대 아파트와는 다른 풍경이지만 내가 느꼈던 감성은 다르지 않았다. 형제가 많아 항상 옷을 물려 입고 한방에서 하나의 이불을 끌어당기며 화를 내던 시절. 엄마가 밀가루에 콩만 넣고 쪄서 만들어준 간식거리, 김치 냄새 풍기던 도시락통, 그리고 그 안에서 뭔가 다른 세상을 꿈꿨던 내가 거기 있었다. 동화책이나 세계문학전집은 조금 먼 이야기였지만 가난을 온몸으로 체감하며 자란 그때를 그리워하는 마음은 닮았다. 작은 소읍을 떠나 내가 접한 도시의 풍경도 다르지 않았다. 하나의 대문을 사용하지만 작은 마당을 둘러싼 작은방으로 이어지던 시간, 옆집의 벽이 보이던 창문, 김치며 밥을 나누던 공간이었다. ​나와 확연하게 다른 건 그녀의 태도다. 언제부턴가 나는 먼저 해 본 사람이 되었다. 그래서 자꾸만 묻기 전에 알려주려 하고 뭔가 도와주려는 마음을 감추지 못한다. 그것이 권력으로 보일 수 있다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없었다. 똑같은 경험은 없다 당연한 사실을 놓치고 있었다.

​사람은 저마다 개별적인 존재이다. 모든 환경과 경험도 개별적일 수밖에 없다. 비슷한 경험은 있지만 똑같은 경험은 없다. 그러므로 나도 너와 똑같이 경험해봤다는 말이나 한 발 더 나아가 해봐서 안다는 말은 매우 신중히 해야 할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험 많은 인생을 자처하는 사람일수록 다른 사람의 시련에 혹독하거나 냉정하기 쉽다. (46쪽)

식물인간으로 긴 시간을 힘들게 보내고 돌아가신 아버지의 가계부에 대한 이야기와 그렇게 돌아가신 아버지를 지켜보았기에 암으로 투병하신 엄마의 마지막을 편하게 보내드리고 싶었던 자식들을 향한 의료계의 불편한 시선을 읽으면서 나는 내 아버지와 엄마 같았던 큰언니의 죽음을 떠올리게 되었다. 평생의 삶을 빠짐없이 가계부에 기록한 아버지와 나의 아버지는 같을 수 없지만 삶과 죽음에 대해 느꼈을 허무감 말이다. 검사나 받자 보자며 입원하신 아버지에게 찾아온 심정지, 다시 의식이 돌아왔지만 아버지의 시간은 3일이 전부였다. 돌아가신 아버지의 짐을 정리하면서 아버지가 살았던 작은방에 속한 게 너무도 조악하고 비루한 것들이라서 서글펐던 기억. 환자인 어머니 본인과 가족들이 연명치료를 하지 않기로 결정했음에도 그런 자식을 비난하는 의사의 말은 얼마나 큰 대못이 되었을까 생각하면 마음이 아프다.

골목에 대한 추억과 이야기라 이름 붙였지만 그곳은 우리가 살아온 지난 시간이 있었고 현재 우리가 살아가는 시간에 대한 사유가 있었다. 나의 작은 사연으로 시작해 우리의 일상으로 연결하는 일은 쉬운 듯 보이지만 그렇지 않다. 이 산문집은 그런 과정을 보여준다. 한지혜 개인으로 시작해 우리가 사는 사회로 이어진다. 그래서 더 남다르고 의미 있다. 우리가 사는 사회에 개인인 한지혜와 같은 내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녀가 신춘문예 응모작을 심사하는 이야기도 다르지 않다. 그녀는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할 뿐이었지만 그것은 문학을 꿈꾸는 이들에게는 아주 중요하고 대단한 일이기 때문이다. 전문가의 입장에서 글의 도입부만 읽어도 끝을 예상할 수 있겠지만 그녀는 작품을 끝까지 꼼꼼하게 읽는다고 한다. 보내온 이들의 간절한 마음을 알기에 허투루 할 수 없었을 것이다. 모든 분야의 모든 사람들에게 합당한 마음일 텐데, 우리 사회에서 그런 믿음은 사라진지 오래다. 최선을 다해 노력하면 된다는 메시지는 공허한 메아리가 되었다. 개천에서 용이 나는 세상이 아니라는 건 알고 있지만 개천의 존재까지 무시당하는 사회로 전락해버린 것이다. 정직(貞直)과 정도(程度)가 통하는 세상을 우리는 꿈꿔도 좋을까.

 

미래를 향하여 혹은 다른 삶을 향하여 한 번 더 발걸음을 내딛는 것, 그 의지가 바로 삶의 가장 궁극적인 순간이 아닐까 싶다. 그러하니 모든 생은 멈추지 않는 순간 행복을 향해 다가선다. 수시로 구렁에 빠지겠지만 끝내는 실패할 수 있지만 적어도 목표를 향해 걷고 있다면 우리의 삶은 끝나도 다 끝난 것이 아니다. (90~91쪽) ​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라는 말처럼 우리에게 주어진 삶은 단순하게 실패와 성공으로 구분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 참으로 기껍고 고맙다. 삶의 기준과 행복은 저마다 다르다는 것, 그러니 내가 행복한 순간은 내가 만들고 내가 만끽하는 것은 아닐까. 입덧으로 힘들었을 때 불량식품을 먹으면서 견딜 수 있었고 작은 텃밭에서 식물을 기르면서 느꼈던 작은 감동, 돌아가신 엄마의 레시피를 생각하며 만드는 김치, 일상의 사소한 조각들이 모여 하나의 삶을 이룬다는 사실을 확인한다. 나의 삶과 당신의 삶도 그보다 특별하지 않다는 걸 새삼 느끼는 순간이다.

 

내 의지와 상관없이 내 삶을 흔드는 일이 비일비재한 세상이다. 구조조정으로 회사를 그만두고 송별회를 하는 순간 그녀가 노래를 부르며 후련했던 마음과 그날 내린 눈에게 받은 위로를 이야기하는 이런 문장은 오늘을 사는 모두가 공감할 수 있기에 한결 친근하고 깊은 위로를 안겨준다. 우울과 좌절로 끄적거린 블로그의 글에 비밀글로 남긴 누군가의 살가운 속내처럼, 지친 일상의 무게에 위축된 마음을 일으켜 세운다.

 

내 마음은 어느 때보다도 가벼웠다. 더한 눈이 쌓여도, 더 먼 길을 걷는다 해도 괜찮을 것 같았다. 그랬다. 그날 함박 함박 떨어지던 눈이 내 귓가에서 그렇게 말했다. “괜찮다, 괜찮다, 괜찮다.” (60쪽)

 

좋은 일도 아주 좋지는 않았고, 나쁜 일도 아주 나쁘지는 않았다. 당시에는 크게 좋았고, 당시에는 처절하게 비참했던 일도 세월이 지나고서 보니 그저 그런 일들이다. 그리그 그것들을 그저 그런 일로 만든 건 결국 그 시절 내가 가지고 있던 내 삶의 태도였다. 좋은 일을 아주 좋은 일로 만들지 못한 이도 나였고, 나쁜 일을 아주 나쁜 일로 치닫게 하지 않는 이도 나였다. (64쪽)

 

​소소한 기쁨과 즐거움을 잃어버리고 우울한 나에게 일상을 움직이는 힘에 대해 생각하게 만든다. 그게 무엇이든 기쁨을 발견할 수 있다는 걸 나는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것이다. 울어도 괜찮고, 화를 내도 괜찮고 속상해해도 괜찮다는 걸 말이다. 보통의 나, 보통 이하의 나여도 괜찮다고 고백한다. 계절이 바뀔 때마다 달려드는 불안을 껴앉을 수 있을 것 같다. 단호하면서도 다정한 글이 주는 위안이 당신에게도 전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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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니데이 2019-11-13 19: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늘 낮에는 비가 내렸지만, 내일은 눈이 올 것처럼 차가운 계절이 되었어요.
일교차 큰 날씨 감기 조심하시고, 따뜻한 저녁시간 보내세요.^^

자목련 2019-11-14 17:47   좋아요 1 | URL
어제는 정말 수능한파가 몰려오는구나 싶었어요. 이제 진짜 겨울인가 봐요. 서니데이 님도 포근한 시간 보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