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 이별을 위한 짧은 편지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68
페터 한트케 지음, 안장혁 옮김 / 문학동네 / 201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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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진정으로 원하는 건 내부의 변화다. 외부를 바꾸는 일도 쉬운 건 아니지만 내부의 변화는 정말 어렵다. 어제와 같은 하루를 살아가는 일상에 안도하면서도 마음 한 편으로는 어떤 자극을 원한다. 외모를 정리하고 여행을 계획하고 뭔가를 배우기도 한다. 수만 번 결심을 하고 마음을 다잡아도 내부는 철옹성처럼 단단할 때가 많다. 그래서 내부를 움직이는 건 아주 커다란 사건이나 상처를 동반한다. 누군가는 그것을 ‘성장’ 혹은 ‘성숙’이라 부르기도 한다. 페터 한트케의 『긴 이별을 위한 짧은 편지』속 ‘나’에게 그것의 시발점은 아내 유디트의 이별 통보였다. “나는 지금 뉴욕에 있어요. 더 이상 나를 찾지 마요. 만나봐야 그다지 좋은 일이 있을 성싶지 않으니까.” 이런 편지를 받고 그냥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는 이가 과연 있을까? ‘나’ 역시 그러했다. 오스트리아에서 당장 미국으로 떠난다. 아내를 찾기 위한 명분이 있었지만 ‘나’에겐 일종의 여행의 시작이었다.

 

아내가 묵었던 호텔을 찾았지만 아내는 떠났고 그에게 남겨진 건 사진기 뿐이었다. 어디서 아내를 찾아야 할까. 아내의 흔적을 뒤쫓고 있지만 항상 한 발 느린 상태다. 아내를 향한 감정도 모호하다. 호텔에서 혼잣말을 하면서 아내에게 욕을 내뱉고 만나면 당장이라도 죽일 듯 화를 낸다. 그럴 봐에야 만날 필요가 있을까. 이 과정에서 흥미로운 건 ‘나’의 모습이다. 미국의 술집에서 거리에서 낯선 사람과 만나 쓸데없는 이야기를 하거나 그들을 관찰한다. 호감이 가는 여자를 발견해도 그뿐이다. 조금 더 적극적으로 다가가지 못한다. 여행자란 위치 때문일까. 그런 건 아닌 것 같다. 혼자만의 시간을 갖고 자신을 들여다보다가도 감정에 못 이겨 화를 내고 술을 진탕 마시고 취한다. 아내와 ‘나’사이의 거리는 잡힐 듯 잡히지 않는다. 이렇게 ‘나’의 불편한 여행에 동행하는 건 지루할 뿐 유쾌한 일은 아니다.

그런 여행에 변화가 온 건 과거 하룻밤의 연인 ‘클레어’를 만나는 일이다. 그녀의 어린 딸 ‘베네딕틴’과 여행을 한다. ‘클레어’와 새롭게 관계를 시작하는 게 아닐까 싶었지만 그건 착각이었다. 그저 친구로서의 만남과 대화가 전부였다. 그러나 ‘클레어’와 ‘나’의 대화는 많은 의미를 부여한다. 자신이 처한 상황과 감정을 솔직하게 털어놓고 조언을 듣기도 한다. ‘베네딕틴’이 질문을 하면서 둘 사이의 대화를 끊어놓지만 그 역시 ‘나’에게는 색다른 경험이다. 아이란 존재가 주는 특별함이라고 할까. 예측할 수 없는 일이 발생하고 모든 사물에 대해 호기심을 보이는 아이의 순수함에 놀라는 것이다.

 

“이곳에서는 왜 내게 유독 불안 상태에 대한 기억력만 살아 있는지, 그 이유를 알게 돼. 내가 매일같이 보아왔던 것과 비교해볼 대상을 아직 가져본 적이 없었던 거지. 내가 받는 인상들이라는 게 모두 이미 익히 알려져 있는 인상들의 반복일 뿐이라는 거야. 그 말은 내가 아직 세상을 많이 돌아다녀 보지 못했다는 것뿐만 아니라 나와 다른 조건들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을 많이 보지 못했음을 의미해.” (78쪽)

이런 말을 하는 ‘나’에게 ‘클레어’의 말은 무척 의미심장하다. “당신은 장소를 바꾼다기보다는 미래 속으로 달려가려고 마치 타임머신을 탄 듯이 이곳으로 왔어. 하지만 이곳에서 앞으로 우리가 어떤 모습으로 살아갈지는 알 수 없어. 우리가 무언가를 비교한다면 그 대상은 과거가 되겠지. 우리는 기껏해야 다시 아이가 되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아.“ (83쪽)

 

‘클레어’가 ‘베네딕틴’을 키우지 않았더라면 몰랐을 것이다. ‘나’가 아내 유디트와의 이별로 인해 많은 것들을 돌아보고 생각하는 것처럼 ‘클레어’는 아이를 낳아 키우면서 성장했다고 할 수 있다. 평범하고 사소한 일상부터 ‘나’가 이 여행에서 읽는 책 고트프리트 켈러의 『녹색의 하인히리』에 대해서도 이어지는데 이 책은 소설에서 상징하는 바가 크다. ‘나’는 그녀에게 책을 읽어주고 둘은 소설에 대해, 하인히리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다. “녹색의 하인히리는 아무것도 해석하려 하지 않았지.” “비겁하거나 소심해서 경험을 회피한 것이 아니라, 그 일이 자신에게 별 가치가 없거나, 그가 관여했을 때 행여 거절당할까 봐 두려웠을 뿐이지.” 란 ‘클레어’의 해설은 ‘나’에 관한 말처럼 들린다. 그러니까 『녹색의 하인히리』의 하인리히는 결국 ‘나’와 다르지 않다는 말이다.

‘나’가 미국 여행에서 아내의 행방만 쫓고 그녀를 향한 생각만으로 달려가는 과정이 점점 의새로운 의미를 찾아간다고나 할까. ‘클레어’와의 만남이 없었다면 그는 화와 분노로 가득한 마음을 정리하지 못했을 것이다. 현재라는 작은 조각만 보고 인생의 전체를 상상하는 어리석음을 계속 품고 있었을 것이다. 그 와중에 ‘나’는 서른 살 생일을 맞는다. 하나의 세대가 끝나고 다른 세대로의 진입이다. 이러한 여행의 시간들을 통해 ‘나’는 여행의 처음에 느꼈던 감정에 대해 정리를 한다. 그러한 변화를 감지할 수 있는 이런 부분은 무척 섬세하면서도 황홀하기까지 하다. 혼자만의 시간, 고요한 자아를 발견하는 순간이라고 감히 말하고 싶다.

내 존재조차도 잊어버린 채 물끄러미 밖을 내다보았다. 그러고 있자니 숨을 들이쉴 때마다 그 실측백나무가 잔잔하게 흔들리면서 내게로 점점 다가와 마침내 내 가슴속까지 파고 들어왔다. 나는 움직이지 않고 서 있었다. 머릿속의 혈관은 박동을 멈췄고 심장도 멎었다. 나는 더 이상 숨을 쉬지 않았고 피부는 무감각해졌다. 그리고 나의 의지와 상관없이 몰려드는 쾌감과 함께 나무의 움직임이 호흡 중추 기관의 기능을 넘겨받는 것을 감지했다. 실측백나무가 나를 자신의 품 안에서 흔들리게 했다. 내가 저항하기를 그만두고 마침내 잉여의 존재가 되어 실측백나무의 부드러운 놀이에서 벗어나자 실측백나무가 내게서 다시 빠져나가는 것을 느꼈다. (98쪽)

‘나’는 달라졌다. 누군가 그것을 알지 못해도 그의 내부는 그렇게 변화한다. 그리하여 자신에게 권총을 들이대고 심지어 발사까지 하고 흥분한 아내 유디트를 지켜보고 그녀에게서 권총을 빼앗아 바닷속으로 던져버릴 수 있었다. 소설의 처음에서 등장하는 ‘나’를 떠올리면 불가능한 일이다. 이제 둘은 진짜 이별할 수 있을까? 소설의 말미에서 그들은 ‘백발이 성성한 데다 주름진 얼굴에 수염 자국이 하얗게 남아 있는’ 영화감독 존 포드를 만난다. 감독과 만나 함께 걸으며 들려주는 이야기도 부분도 인상적이다. 온통 자기 자신밖에 몰랐던 그들에게 ‘우리’에 대해 알려준다. 진짜 어른이라고 할까. 일어날 수 있는 모든 것들을 경험하고 인생을 통찰한 이에게 듣는 이야기.

 

페터 한트케의 『긴 이별을 위한 짧은 편지』는 결국 성장에 대한 이야기라 할 수 있다. 서로의 관계를 정리하고 제대로 이별한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엄청난 성장이다. ‘나’는 여행을 통해 자신의 이제껏 몰랐던 자아를 발견했고 유디트 역시 그 시간을 통해 남편과 자신에게 남았던 감정의 실체를 찾았다 할 수 있다. 서로에게 거리를 두고 서로를 마주하는 과정에서 이별을 배우고 성장한다고 할까. 그들에서 이별은 과거와의 이별이며 새로운 시작이다.

장소 하나 바꾸는 것이, 우리가 사실을 받아들이고 싶지 않은 것들을 마치 꿈을 잊는 것처럼 깨끗이 잊어버리게 만드는 데 그렇게 많은 기여를 한다면, 그거야말로 놀라운 일이 아니겠는가? - 칼 필립 모리츠 『안톤 라이저』

​이동한다는 건 장소를 변경하는 단순한 일이면서 지금껏 나의 모습을 객관적으로 살펴본다는 일이다. 어쩌면 소설의 모토라고 할 수 있는 『안톤 라이저』의 저 구절은 내부의 변화를 간절히 원하는 우리에게 필요한 문장인지도 모른다. ‘장소’란 말 대신 넣을 수 있는 것들을 생각한다. ‘누군가 사람 한 명을 만나는 일’과 ‘한 권의 책을 읽는 일’로 바꾼다. 『긴 이별을 위한 짧은 편지』 역시 누구나 경험할 수밖에 없는 것(이별, 사랑, 죽음...)들을 통해 우리는 그렇게 성장한다는 걸 알려주며 깊고 아름다운 여운을 남긴다. 진정한 내부의 변화가 일어나는 순간에 밀려오는 감동과 함께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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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1-04 19:3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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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1-05 16:3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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