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의 빌라
백수린 지음 / 문학동네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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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고 투명한 풍경화 같은 표지를 가만히 보고 있노라면 그곳이 어디든 모든 게 평온할 것 같다. 매섭게 바람이 부는 찰나의 순간을 포착했을지도 모르는데 말이다. 모든 게 그렇지 않은가. 순간의 장면, 순간의 기분으로 전부를 다 안다고 믿기도 하고 그로 인해 섣부른 판단으로 오해는 깊어지니까. 오해가 이해가 되는 순간은 때로 너무 멀고 때로 오지 않는다. 백수린의 단편집 『여름의 빌라』를 읽으면서 나의 오해가 단절로 이어진 관계는 없었을까 생각하니 두려워졌다. 소설집 전체가 관계나 단절을 주제로 한 건 아니지만.


표제작 「여름의 빌라」는 제목에서 기대했던 휴가지의 풍경이나 휴식과는 다른 고요한 슬픔을 안겨준다. 서로 좋았던 기억만 간직했던 ‘주아’와 ‘베레나’ 부부가 재회하면서 함께 보낸 여름의 시간들이 새로운 기억으로 남는다. 전에는 알지 못했던, 보지 못하고 느끼지 못했던 상처를 마주하면서 함부로 말할 수 없는 타인의 삶을 보여준다. 누군가에게는 생의 터전인 일상이 누군가에게는 관광지가 되는 아니러니한 일상. 그리고 그 안에 담긴 아픈 역사.


긴 세월의 폭력 탓에 무너져내린 사원의 잔해 위로 거대한 뿌리를 내린 채 수백 년 동안 자라고 있다는 나무. 그 나무를 보면서 나는 결국 세계를 지속하게 하는 것은 폭력과 증오가 아니라 삶에 가까운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단다. (「여름의 빌라」 중에서)


섣부르게 짐작하고 판단하는 대신 상대의 이야기를 가만히 들어주는 일, 그 역시 이해의 시작일 것이다. 더 가까이 다가서 자세히 보고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눈 일처럼 쉬운 일도 없을 텐데. 우리는 무슨 이유로 그런 일상을 외면하는 것일까. 거대한 역사 속 진실뿐 아니라 우리의 삶에서도 마찬가지다.


잘못된 기억을 바로잡는 일, 혹은 그때 감정을 차분히 떠올려보면 서운함보다는 미안함과 아쉬움이 더 컸다는 걸 알 수 있다. 이국인 프랑스에서 이전과는 다른 삶을 꿈꿨던 ‘나’와 파리 주재원이었던 언니가 함께 보낸 시간을 그린 「시간의 궤적」에서도 그런 안타까움이 전해진다. 서로의 과거를 모르고 오직 주어진 현재만 알기에 더 빨리 친해질 수 있었다. 가까워졌기에 현재의 불안, 고민, 걱정을 보여주지만 그 모든 걸 품기엔 그들의 시간이 부족했을지도 모른다. 한 편의 영화처럼 싱그러운 추억만 남긴 채.


어쩌면 좋을지 망설이는 사이, 언니가 먼저 우산을 펼쳐 들고 빗속으로 걸어들어갔다. 우산을 써봤자 아무 소용도 없는 비였다. 언니는 이내 우산을 접더니 비를 쫄딱 맞은 채 나에게 빗속으로 들어오라고 손짓했다. 그리고 우리는 폭우 속을 달렸다. 웃음을 터뜨리면서. 머지않아 거짓말같이 비가 그치고 해가 날 거라는 사실엔 관심조차 없는 사람들처럼. (시간의 궤적 중에서)


같은 공간에서 같은 시간을 보냈더라도 이처럼 서로가 간직하는 감정은 다르다. 낯선 곳으로의 이사는 설레기도 하지만 적응해야 하는 불안을 떨칠 수 없다. 「고요한 사건」 에서 화자는 재개발 지역으로 이사를 왔지만 그 동네의 분위기가 낯설다. 정착이 아닌 잠깐의 거주라서 그랬을까. 혼자라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차가운 겨울밤, 이런 문장을 읽노라면 마치 화자인 ‘나’와 독자인 내가 하나가 된 것 같은 묘한 기분이다. 외로움, 고독이라는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창밖에는 커다란 눈송이가 떨어져내리고 있었다. 깃털처럼 부드러운 눈송이가. 역청 빛 어둠을 덧칠한 이웃집의 지붕 위에도, 옥상 위의 장독대와 비탈 아래쪽의 앙상한 나무초리 위에도, 고요하게. 얼마나 아름다웠는지. 그것은 정말 내가 태어나서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커다란 눈송이였다. 마른 눈. 자국눈. 가랑눈. 국어사전에서 내가 발견했던 무수한 단어로도 형용하기가 충분치 않던 눈송이. 그토록 숨 막히는 광경을 나는 그전에도 그 이후에도 본 적이 없었다. (「고요한 사건」 중에서)


그런가 하면 이전의 백수린의 소설에서 만나지 못한 색다른 분위기, 응원하고 싶은 당돌함이라 말하고 싶은 단편도 실렸다. 보통의 엄마와는 다른 특별한 엄마를 바라보는 딸의 시선 「폭설」, 평범하게 두 아이를 키우며 살아가는 화자에게 찾아온 욕망을 그려낸 「아직은 집에는 가지 않을래요」, 할머니를 추억하는 방식이지만 결국엔 할머니에게 소중했을 시간과 사랑에 대한 이야기 「흑설탕 캔디」, 풋풋하고 첫사랑과 반항과 방황을 아름답게 들려주는 「아카시아 숲, 첫 입맞춤」이 그러하다.


우리의 맨 종아리를 간지럽히던 싱그러운 연초록빛의 풀들. 햇살에 투명하게 반짝이던 나비들. 유속이 느린 수면 가까이에서 천천히 날다가 순식간에 저만치 솟구치던 작은 새들. 다미의 말에 얼마만큼의 진실과 거짓이 섞여 있는지는 나에게 중요하지 않았다. 다미가 들려주는 것은 내가 상상할 수 없는 일들로 이루어진 매혹적인 서사였으니까. (「아카시아 숲, 첫 입맞춤」 중에서)


하나의 계절이 지나고 다른 계절이 왔을 때 그 계절의 선명함이 잘 보이는 것처럼 누군가의 상처, 상실, 관계도 그렇게 알게 된다. 그래서 좀 억지스럽지만 『여름의 빌라』는 여름이라는 계절보다는 오히려 차갑고 냉랭한 겨울에 더 잘 어울린다. 요동치던 마음이 조금은 누그러지고 평온해져 어떤 기억, 어떤 감정과 조우할 수 있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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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니데이 2020-12-10 20: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목련님, 올해의 서재의 달인과 북플마니아 축하드립니다.
따뜻하고 좋은 연말 보내시고,
항상 행복과 행운 가득하시기를 기원합니다.

자목련 2020-12-11 10:36   좋아요 1 | URL
서니데이 님, 감사합니다. 항상 먼저 챙겨주시고 인사를 전해주시네요.
어제보다는 조금 따뜻하네요. 건강 잘 챙기세요.
 
소설 보다 : 가을 2020 소설 보다
서장원.신종원.우다영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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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신춘문예의 계절이라는 걸 알고 있다. 소설을 쓰는 이들에게 이 계절은 힘겹고 고통스러울 것이다. 어떤 기대와 설렘과 동시에 절망도 맛보는 순간이 이어질 테니까. 올해 초에 나는 분명히 작가의 소설을 읽었다. 그러니까 신춘문예 당선작이었다. 이름도 기억했다. 그리고 그 소설이 좋아서 이 작가의 다른 소설도 읽고 싶다고 여겼다. 그런데 내 기억은 오래가지 않았다. 『소설 보다 : 가을 2020』을 두고 나는 서장원이란 작가의 이름을 처음 마주한 것 같았다. 그러다 소설을 읽으면서 뭔가 닮은 분위기가 생각났다. 검색을 하니 역시나 올 초에 인상 깊게 읽은 소설의 작가였다.


가족에 대해, 관계에 대해, 아니 상실에 대한 이야기라고 해야 할까. 어쩌면 그 안에서 관습처럼 행해진 차별에 대한 것일지도 모른다. 아들과 딸, 부모에게 그들은 어떻게 다른가. 물론 소설 속에서는 분명한 이유가 있다고 할 수 있다. 아들이 아팠고, 우선적으로 돌봄과 정성은 아들에게 기울 수 밖에 없는 것이니까.


노영의 오빠가 3년의 투병 끝에 사망하자 노영의 어머니는 절에 발길을 끊었다. 노영의 아버지는 그전에, 병원에서 더 이상의 치료는 의미가 없다고 한 시점에 염주며 휴대용 반야심경 따위를 내다 버렸다. 두 사람은 아들이 아프기 전부터 아들만을 위해 기도했으므로 다른 자식이 남아 있다는 사실은 그다지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다. 「이 인용 게임」


노영과 함께 노영의 어머니가 입원한 병원에 가는 길, 화자인 ‘나’는 과거 노영과 사귄 사이였다. 둘은 호주에서 만났다. 이미 헤어진 연인과 친구처럼 만나 서로의 일상을 공유하는 사이에 남은 건 무엇일까. 그러니 이 소설의 끝에 무엇이 있을까. 처음에는 조금 묘했다. 연인에 대한 이야기인가. 깊은 상처와 속내는 천천히 다가온다. 노영에게 오빠가 있었다는 것, 병에 걸려 투병을 했지만 죽었다는 사실, 아픈 오빠 때문에 부모에게 노영은 언제나 관심 밖이었다. 오빠가 아프니까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오빠가 떠난 후에도 어머니는 노영을 바라보지 않았다. 어머니의 모든 감각은 아들만 기억하고 그리워한다.


나는 눈이 오는 풍경을 보고 싶다고 했다. 호주에서는 흰 눈을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노영은 그러면 언젠가 함께 눈을 보자고 내게 말했다. 그건 고백에 가까운 말이었는데, 나는 물론 받아들였다. 언젠가 함께 흰 눈이 덮인 풍경을 보자고, 어느 여름날에 우리는 그런 약속을 했었다. 「이 인용 게임」


담담하게 자신의 이야기를 상대가 아닌 멀리 누군가에게 전하는 듯하다. 서장원의 스타일일까. 아직은 모르겠다. 그래도 기대가 된다. 그녀의 소설을 더 읽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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얄라알라 2020-12-07 16: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느낌이 비슷해서 보니, 역시 서장원 작가의 글이었다는 말씀이시네요^^ 이런 경험, 뭔지 상상이 됩니다. 마치 저도 겪어본 것처럼. 다음에 소설 고를 때는 기억했다가 서장원 작가님을

자목련 2020-12-08 11:33   좋아요 0 | URL
네, 다음에는 이름으로도 바로 기억하려고요. ㅎ
얄랴 님, 좋은 하루 보내세요^^

blanca 2020-12-07 19:1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 반가우셨겠어요. 저도 신춘문예 작품 중 너무 좋아서 깜짝 놀란 작품이 있어요. 2020년 경향신문 당선작 <빨간열매>라고 정말 놀라울 정도로 좋더라고요. 자목련님도 한번 읽어보시면 좋아하시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다음에 작품집을 냈나 찾아볼 정도로 좋았어요. 아직 나이도 젊어 좋은 작가가 될 자질이 보인다 생각했어요.

자목련 2020-12-08 11:32   좋아요 0 | URL
아, 말씀하신 작품 검색해서 읽었어요. 정말 좋으네요. 이유리 작가 기억하겠습니다. 이제 며칠 후면 또 새로운 작가의 소설을 만나니 1년이라는 시간이 참 빠르다 싶어요.
블랑카 님, 따뜻하고 다정한 12월 보내세요^^

희선 2020-12-08 02: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부모라고 모든 자식을 다 사랑하지는 않는 듯해요 모든 자식한테 마음 쓰는 부모가 더 많다고 믿고 싶지만... 아픈 손가락에 더 마음이 간다고 하는 말이 있잖아요 그런 것도 그냥 받아들여야 하는 건지... 그게 나을지도 모르죠


희선

자목련 2020-12-08 11:30   좋아요 1 | URL
그쵸? 아픈 손가락이 있기 마련이니까요. 그래도 편애는 아니었으면 싶어요.
희선 님, 이 겨울 건강하게 잘 보내시길 바라요.
 


같은 공간과 시간을 공유한 이들은 다투기도 한다. 서로의 기억이 많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설령 그것이 오류이고 왜곡이라 할지라도 말이다. 아침 일찍, 그러니까 평소보다 이른 시간에 친구가 전화를 걸어왔다. 혹 무슨 일이 있나 걱정하면서 전화를 받았다. 친구는 물어볼 게 있다면서 학교 이야기를 꺼냈다. 특정 선생님에 대한 기억이었다. 나는 내가 기억하고 있는 대로 말했다. 그 기억은 대체로 친구와 비슷했다. 친구는 반색하면서 다른 친구 이야기를 꺼냈다. 나는 이름만 아는 동창이었다. 그 아이도 나를 그렇게 기억할 것이다.


특정 선생님과 과목에 대한 기억은 학교 전체와 선생님들에 대한 생각으로 이어졌다. 어린 시절 선생님은 무척 중요한 존재였다. 지금까지 교직에 계실까, 그때 왜 그렇게 무서웠을까. 대부분 초임 발령지였으니 젊고 어린 선생님들이셨다. 아련하고도 애틋한 순간을 나누고 우리는 다시 현실로 돌아왔다. 추워진 날씨, 고장 난 밥솥( 주문을 했다), 스트레스에 대한 이야기. 마지막엔 늘 그렇듯 아프지 말고 건강하자고 말을 건넸다.


시선은 언제나 변화한다. 내 위치가 달려져서 그렇기도 하고 경험치가 쌓여서도 그렇다. 선생님에 대한 이야기를 해서 그럴까. 선생님에 대한 생각을 잠깐 했다. 교육자라는 사명감 같은, 그리고 현재 나와 연결된 선생님에 대한 고마움. 연말이 다가와서 그런가 보다. 앙상한 가지만 남긴 나무 가운데 여태 꽃은 간직한 장미를 발견했는데 기분이 묘했다. 차를 타고 지나가는 길이라 사진을 찍지 못한 게 아쉽다. 전혀 시들거나 사라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덤빌 테면 덤벼하는 태도라고 할까. 요즘 같은 날들에는 그런 결연한 의지가 도움이 될지도 모르겠다.


똑같이 주어진 날들인데 12월은 뭔가 부족한 걸 채워야 할 것 같다. 올해의 책이나 무슨 결산 같은 걸 하는 것도 그래서 일 것이다. 업무의 목표나 달성도 중요하겠지만 이런 사소한 즐거움도 12월이기에 가능한 것 아닐까. 아직 한 달이나 남았으니 읽지 못했던 책도 읽고 읽고 싶은 책을 쟁여놔도 괜찮다는.


황정은의 『아무도 아닌』이 새로운 표지로 나왔다. 좋은 단편집이라고 소문냈던 책이다. 양장본이다. 소유하고 싶은 욕구를 채워볼까. 나에게 주는 크리스마스 선무로도 나쁘지 않을 듯하다. 아름다운 핑계이지 않은가. 메리 올리버의 시집 『천 개의 아침』, 최근에 읽은 에세이 때문일까, 주변에 좋다는 소문 때문일까 하루키의 단편집 『일인칭 단수』도 핑계 목록에 넣어도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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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큐하는 마음 일하는 마음 3
양희 지음 / 제철소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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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의 살아온 이야기를 듣다 보면 어느 순간에서 울컥하고 만다. 삶이라는 게 평탄하지 않다는 걸 알아서가 아니라 자신의 삶에 최선을 다하고 있는데도 힘겹다는 게 전해지기 때문이다. 지나온 삶의 궤적이 아름답게 보인다면 그렇게 바라보는 시선이 존재해서다. 내가 볼 수 있는 삶과 나는 전혀 알 수 없는 삶을 보게 되는 것, 그게 다큐멘터리가 아닐까 생각한다. 단순하게 보면 현실을 사실적으로 기록하는 일이다. 그런데 다큐멘터리는 언제나 울림과 감동을 안겨준다. 다큐멘터리의 원동력은 어디서 발생하는 걸까. 양희의 인터뷰집 『다큐하는 마음』에서 조금이나마 알 수 있었다.


한때는 다큐멘터리는 재미가 없다고 생각했다. 때로는 지루했고 때로는 평범해서 매력이 없다고 느꼈다. 그런데 어느 해인가 ‘EBS 국제다큐영화제’를 시청하면서 달라졌고 매년 기다렸다. 영화나 드라마가 아닌 다큐멘터리만이 보여줄 수 있는 무언가가 있다는 걸 알게 된 것이다. 하지만 다큐멘터리의 제작에 대해서는 잘 몰랐다. 감독이 촬영을 하고 섭외를 하고 모든 걸 다 한다고 여겼다. 배급사가 있고 홍보를 해야 한다는 사실을 몰랐다. 협회나 단체에서 지원을 받는 정도만 알고 있었다. 그 역시 얼마나 부족한가 이 책을 통해 조금 알게 되었다.


다큐하는 마음은 무엇일까. 무엇을 그들을 다큐멘터리로 이끈 것일까. 양희가 만난 9명(감독, 프로듀서, 촬영감독, 편집감독, 비평가, 홍보마케터, 수입배급자, 영화제 사무국장, 영화제 집행위원장) 전해주는 그 마음을 알 수 없겠지만 조금이나마 무엇이 그들을 지탱하는지 알 것 같다.


다큐멘터리가 어떻게 시작되고 얼마나 많은 시간을 촬영하는지 몰랐다. 짧은 상영시간을 위해 몇 년을 찍는다는 게 놀라웠고 담아낸 그 모든 시간을 집약하고 촬영을 편집해서 세상에 내놓는다는 작업이 얼마나 지난할까 생각했다. 상영할 수 있는 극장도 많지 않고 여전히 사람들에겐 주류가 아닌 비주류로 인식되고 있으니까. 그런 인식을 바꾸기 위해 노력하는 이들이 그들이었다. 다큐멘터리는 내가 아닌 우리, 그리고 그 너머의 삶을 살피는 일이라고 느껴졌다. 인터뷰하는 이들에게 다큐멘터리는 직업이 될 수 없음에도 그 끈을 놓을 수 없는 것이었다.


“직업이라고 하면 그 일을 통해 생계가 보장되어야 하는데 그렇지는 않아요. 대신 제가 좋아하는 일을 지속할 수 있도록 다른 일을 해가면서 하죠.” 맞다. 시인이 전업작가로 살기 어려운 것처럼, 다큐멘터리스트 역시 마찬가지다. 세상의 온갖 여린 것, 보드라운 것, 나약한 것, 힘없는 것을 사랑하고 지지하는 일은 이토록 어려운 일이다. (173쪽)


9명 각각 자신의 자리에서 할 수 있는 모든 걸 쏟아내며 다큐를 하고 있었다. 그래도 나는 이런 부분이 특히 더 좋았다. 강유가람 감독의 시선, 이태원에서 세 명의 여성의 이야기를 듣기 위해 그곳으로 작업실을 옮기고 그들이 허락할 때까지 기다리는 마음. 잘 보이지 않는 이들의 삶을 곁에서 바라보는 일이 다큐가 시작되는 순간이구나 느꼈다.


“다큐멘터리는 계속해서 공부하고 생각하게 해요. ‘나는 배우지 않으면 변하기 어려운 사람’이라는 것을 알아서 그런지, 다큐멘터리를 만들면서 좀 더 좋은 사람이 돼야 한다는 생각을 많이 해요. 또 그게 원동력이 되기도 하고요. 그게 제가 다큐멘터리를 계속하는 마음이에요.” (74쪽, 감독 강유가람의 인터뷰 내용 중에서)


좋은 다큐멘터리를 만들어도 관객과 만나는 창구가 없다면 아무 소용이 없다. 그런 점에서 다큐멘터리를 소개하고 비평하는 비평가의 역할도 꼭 필요하다. 내가 사는 세상이 아닌 다른 세상의 이야기지만 그 안에서 닮은 점을 찾고 다른 걸 공감하고 인정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 인터뷰어 양희의 말처럼 비평가는 다리를 놓는 사람이다.


두 발을 딛고 서 있는 각자의 자리뿐 아니라, 감독의 눈으로 바라본 세상을 함께 바라보고 대화할 때 우리는 타인의 삶을 내 삶으로 치환시킬 수 있다. 어쩌면 비평가는 다큐멘터리와 관객을 이어주는 사람만이 아니라, 다큐멘터리가 보여주는 세상과 현실에 다리를 놓는 사람인지도 모르겠다. (182쪽)


가장 최근에 내가 본 다큐멘터리는 세월호의 기억을 다룬 「부재의 기억」으로 그 잔상이 오래 남았다. 제92회 아카데미 시상식 단편 다큐멘터리 부문에 노미네이트된 작품이다. 방송사에서 편성을 하지 않았더라면 나는 그 작품을 볼 수 없었을 것이다. 책에서도 언급되어 무척 남다르게 다가온다. 아마도 많은 이들에게 그럴 것이다. <우리 학교>, <님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 같은 작품도 다시 떠올릴 수 있었다. 한 편의 다큐멘터리에 담긴 수많은 이들의 수고를 생각하며 그들에게 다큐멘터리가 직업이 될 수 있는 환경이 빨리 만들어지기를 바란다.


이제까지 몰랐던 다큐의 세계와 다큐하는 마음이 내게로 전해졌다. 이곳이 아닌 그곳의 삶, 좀 더 많은 이들에게 알려져야 할 진실과 기록에 대한 관심이 필요하다는 걸 알았다. 많은 이들의 수고와 노력이 모여 하나의 다큐멘터리가 완성되는 것처럼 우리가 살아가는 인생도 그러하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거리를 가깝게 만드는 힘, 그게 다큐멘터리의 힘이다. 다큐하는 마음에 나 같은 독자의 마음까지 합쳐진다면 더 큰 힘을 발휘할 거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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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렸을 때 글씨를 제법 잘 썼다고 말하면 아무도 믿지 않는다. 특히 조카는 설마? 하는 표정을 한다. 심지어 그 당시 대회에 나가서 상을 탔다고 해도 말이다. 연필로 쓰는 글씨였다. 그랬던 나인데 이제는 연필을 쓰지 않는다. 손글씨를 쓰더라도 연필이 아니라 알록달록 사인펜을 겨우 쓸 뿐이다. 아마도 아무튼 시리즈에서 『아무튼, 연필』이 궁금했던 건 아련한 추억 때문이 아닐까 싶다. 읽기도 전에 나는 연필 수집광이 들려주는 각양각색의 연필 이야기, 혹은 연필의 역사 정도로만 이 책에 대해 생각했다. 어느 정도 그런 이야기도 있다. 연필이니까. 연필을 누가 처음 만들었는지, 연필의 디자인, 연필의 색상, 연필의 관련한 에피소드 말이다.

연필이라니. 초등학생들도 연필을 잘 쓰지 않는 것 같다. 연필보다는 샤프, 숙제도 컴퓨터로 하는 경우가 더 많다. 그래도 연필은 애틋하다. 이상하게 그렇다. 연필을 쓰지 않아도 내겐 연필이 있다. 필통도 있다. 버리지 못하는 물건 중의 하나가 연필이다. 모아두었던 불펜은 한 번씩 선 긋기를 해서 상태를 확인하고 버린다. 연필은 쓰지 않으면, 연필심이 존재하는 한 버릴 수가 없다. 이 책을 읽으면서 연필을 찾아보았다. 필통 속 연필, 컵 속 연필, 연필이 꽤 많았다. 좋아한다고는 말할 수 없다. 그러니까 연필은 취향을 떠나 그 이상의 의미가 있다. 처음 내 이름을 쓴 연필, 소중한 마음을 전하는 편지를 쓰고 시험지에 답을 쓰고. 누군가는 연필로 쉽게 지울 수 있고 고칠 수 있어 나쁘다고 할 수도 있지만 그런 이유 때문에 연필이 더 좋은 건 아닐까.


김지승의 작가가 연필로 바라본 여자들의 이야기는 아프면서도 근사하다. 연필심처럼 견고하고 날카로운 시선이 좋았다. 뭔가 다른 말로 쓰고 싶다. 그냥 연필처럼 좋다는 말이 적절할 것 같다. 흑연 심 연필을 처음 만든 사람이 여학생이었다는 글로 시작하지만 우리는 그 여학생의 이름을 알지 못한다. 어디 그뿐인가, 역사 속에서 발명가, 사업가, 전문가의 이름이 여성으로 기록된 게 언제인가. 여성의 삶은 그렇게 흐릿하며 쉽게 지워졌다. 여성이었던 비서가 연필로 쓴 건 임시였고, 중요한 결재는 상사인 남자가 만년필로 했던 과거의 일상만으로도 충분하다.


아무튼, 다시 연필로 돌아가면 저자는 자신과 연필을 연결해 준 이들을 하나씩 호명하며 그들과의 사연을 들려준다. 다른 지방에서 이사를 온 저자가 만난 신부님이 선물한 오셀로 연필, 양배추가 말을 걸아 상담을 하면서 만나 상담사의 연필, 연필을 선물 받기 위해 친구를 만난 자리에서 듣는 코끼리 소동, 같은 건물 지하에 살았던 마녀로 불리던 이웃 할머니의 지우개가 달린 노란색 연필. 단종된 연필을 구하기 위해 웹서핑으로 연락이 닿은 스페인 프리힐리아의 실비아 할머니, 연필로 이어지는 여성작가들. 처음에 의아하게 여겼던 표지 속 코끼리와 긴 머리칼의 여성과 연필이 등장하는 게 당연하게 느껴졌다.


연필로 시작해 연필로 끝나는 이야기들. 나는 한 자루의 연필을 사기 위해 거리로 선 버지니아 울프에게 듣고 싶은 연필의 의미를 생각하고 “연필은 어딘가에서 어디로 가는 다리다”란 최윤의 문장 속 연필을 상상하며, 시간 여행이 가능하다면 나라도 연필이 필요하다는 <작은 아씨들> 속 막내 에이미에게 연필을 사 주겠노라 다짐하게 만든 메이 올컷의 연필을 응원한다.


‘연필을 아낀다’를 연필 쓰는 사람의 언어로 번역하면 ‘연필을 즐겁게 자주 쓴다’이다. 손가락 한 마디 정도의 몽당연필이 되기까지 이 세상에서의 소멸을 돕는 방식으로의 아낌이다. 연필들은 천천히 사라진다. 그들을 아끼는 사람들의 손에서. (114쪽)


인간이 자기 밖으로 시선을 돌리는 순간과 연필이 연필이기를 그치는 순간의 교차는 우연이 아니다. 연필을 쓰다 보면 인간과 연필이 만나 아주 드문 풍경을 만든다는 걸 알 수 있는 순간이 있다. 그 순간을 놓치고 싶지 않아서 계속 연필을 쓰는 건지도 모르겠다. 적어도 나는 그렇다. (145쪽)


특정한 물건을 좋아하는 일, 그건 특별하거나 위대한 건 아니다. 그저 일상의 즐거움을 누릴 줄 아는 것이다. 그것이 저자에게는 연필이고, 누군가에는 그런 글을 엮은 책이고, 수많은 무엇일 수 있다. 아무튼, 연필에 대한 저자의 사유는 풍부했고 아름다웠다. 그래서 나는 연필을 더 버릴 수 없을 것이다. 연필을 쓰지 않더라도 연필을 쥐는 순간, 나는 이런 문장을 떠올리고 연약하면서도 단단한 존재로 살아가기로 한다. 그리고 당신도 그러기를 바란다.


사람이 잘 부서지는 존재이고, 의아할 만큼 연약한 존재라는 사실은 ‘안다’고 말하기보다 ‘모를 수가 없다’고 해야 한다. 삶이 환기시키는 건 그런 거다. 우리는 그냥 알기보다 대체로 모를 수가 없는 경험으로 자란다. 상담가가 내려놓은 연필 끝이 뭉툭해져 있었다. 흑연은 잘 부서졌다. 사람이 그런 것처럼 흑연도 강하지 않았다. 나는 다행히 흑연은 아니었지만 공교롭게 사람이었다. 부서지고 무너지고 더 약해질 수 있는 존재가 나이기도 하다는 걸 모를 수가 없어서 모른 척하고 산 것일지도. (46쪽)


사람은 그렇게 강하지 않아요. 그 말이 여전히 내 옆에 있다. 그럼 나는 잘 무너지고 부서지는 사람들 곁에 있기로 한다. 강함과 약함이 어디에서 기인하고 그걸 나누는 기준은 무엇인지, 그 각각의 의미와 위계는 누가 정하는 것인지를 자문하면서. 사람이 어떤 순간에 무너질 수 있으며 그 무너짐이 어떤 죄책감을 만드는지에 예민할 수 있는 건 내가 잘 무너지고 부서지는 사람이어서다. 모를 수가 없다. 모른 척은 해도. 연필을 쓰는 사람은 부서진 흑연 가루가 종이의 섬유질에 남는 것이 연필 필기의 원리임을 매 순간 경험한다. 종이 위에 남는 건 바로 그 부서짐의 노력이니까. (49~5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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