쇳밥일지 - 청년공, 펜을 들다
천현우 지음 / 문학동네 / 202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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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술 하나면 있으면 먹고사는 데는 지장이 없다고 기술이 제일이라고 했던 시대는 사라진 것일까. 한때 공고, 기술고라 불리던 학교는 이제 무슨 과학고나 산업고로 바뀌었다. 학업과 일을 함께 배울 수 있다고 홍보를 하지만 정작 실습에서 차근차근 배우는 대신 현장에 투입되어 무보수로 일하는 경우가 허다한 게 현실이다. 그러게 공부를 잘해서 인문고에 들어가 대학에 가야지 하는 아무 말이나 하는 어른들도 있을 것이다. 천현우의 에세이 『쇳밥일지』를 읽게 된다면 함부로 그런 말을 하지는 못한다. 누구에게나 능력 있는 부모와 환경이 주어지는 건 아니니까.


저자의 환경도 그러했다. 부모의 이혼과 힘겨운 어린 시절을 보낸 그는 가난에서 탈피하고 싶었다. 온전하게 자신의 능력으로 살기를 바랐기에 실업계 고등학교를 택했다. 고졸보다는 더 나은 대우를 받을 수 있다는 희망에 기능대에 들어갔다. 직장인과 같이 하루 종일 받는 수업에서 재미를 찾기는 어려워다. 현실적으로 빚으로 낸 등록금도 문제였다. 휴학을 하고 공장 아르바이트를 하다 학교로 돌아왔다. 실업고, 기능대를 나와도 마주한 현실은 잔혹했다. 힘든 주야 교대 근무를 해도 야간 수당 시간 책정이 적어 월급은 너무 적었고 법으로 보호받는 제도는 어디에도 없었다. 언제든 대신할 누군가가 있다는 사실에 그마저도 불안했다. 거기다 또래와 비교되는 시선들이 저자를 더욱 힘들게 만들었다. 우정을 쌓아온 이들에게조차 전문대 나와서 대기업 가기는 어렵지 않냐는 말을 들었다.


한국에서 명문대란 만병통치약 같아서 어딜 가나 약발이 들었다. 당장 효성만 해도 현장 쇳밥 수십 년 먹어온 기술자가 명문대 학식 몇 년 먹은 관리자 눈치를 살폈다. 게임 속 세상도 예외가 아니었다. 은근슬쩍 대학을 드러내는 이부터, 명문대생을 사칭하는 유저까지 각양각색이었다. 이제껏 봐온 세상이 그 꼴이었지만, 학벌의 그림자가 우리 사이에까지 드리우지 않길 바랐다. (92쪽)


공장에서 열심히 일하고 받은 월급은 겨우 생계를 유지하는 정도라 편입을 결심했는데 어머니가 사기를 당해 빚까지 고스란히 떠안는다. 월급으로는 턱도 없었다. 주말 막노동을 하면서 용접에 대해 알게 되었다. 용접이 얼마나 멋진 일이며 대우도 나쁘지 않고 국가에서 교육비도 대준다는 사실도. 용접이라는 새로운 세계에 들어와 다시 시작해야 했다. 자격증을 따고 취직한 공장은 하청의 현실과 정직원과 비정규직의 차별, 무방비로 노출된 위험의 연속이었다. 그래도 그곳에서 경리 직원 ‘초원 씨’를 만나 책을 읽고 글을 쓰고 좋은 시간을 보냈다. 초원이 서울로 가면서 헤어졌지만 팟캐스트를 듣고 경제와 정치의 책을 읽기 시작했다. 이직 후 조금 안정되었나 싶을 때 어머니의 암 진단 소식을 들었다. 다행히 수술은 잘 되었고 취업의 시간이 이어졌다.


내가 무슨 대기업만 노리는 것도 아닌데, 알짜배기 중견 기업 찾느라 눈알 굴리는 것도 아닌데, 그저 다달이 200만 원 월급에 여덟 시간 일하면 충분한데, 그조차 이리 힘겨울까. (203쪽)


그럼에도 책을 읽고 글을 쓰는 일은 멈추지 않았다. 용접공으로 살아가는 청년의 현실과 사회에 대한 비판과 제안이 많은 사람들에게 읽혔다. 점차 그의 글은 방송, 언론에 노출되고 칼럼을 청탁 받았다. 현장 노동자 지인들의 인터뷰를 하게 되었다. 저자가 만난 이들은 그가 직접 일한 현장의 동료였다. 대학 1학년 ‘노키아’ 공장에서 알바를 하며 만난 여자 동창 은주를 시작으로 용접 학원에서 만난 동생, 용접이라는 걸 알려준 포터 아저씨까지. 그들의 이야기는 곧 비정규직, 노동자의 모습이었다.


『쇳밥일지』는 용접을 하는 청년공의 기록이자 노동 일선의 체험이며 노동 현장에 대한 고발이라 할 수 있다. 낮은 임금, 열악한 근로 환경, 산재에 대한 회사의 생각, 외국인 노동자의 처우까지 우리 사회의 민낯을 보여준다. 지방 중소 기입의 현실을 이보다 더 구체적으로 기록할 수는 없다. 현장을 경험한 이만이 들려줄 수 있는 생생한 기록이다. 청강대의 졸업 축사 요청을 수락한 그가 말하는 용접이 그를 세상과 연결시켰고 이제는 글로 사회를 아름답게 용접하는 이로 만들었다.


‘용접’. 녹여서 붙인다는 뜻처럼 용접봉이 지난 곳은 열이 식으면서 철과 철 사이가 메꾸어집니다. 쇠에다 대고 하는 바느질이라고 생각하심 편할 거예요. 이렇게 메꿔진 흔적을 비드라고 하는데요. 이 비드의 모양으로 용접 실력을 가늠합니다. 좌우 간격이 똑바를수록, 푹 꺼졌다가 볼록하지 않을수록, 눈으로 봤을 때 예쁠수록 ‘좋은 용접’인 셈이죠. 잘 된 용접은 금속판 위에 그린 그림이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264~265쪽)


『쇳밥일지』가 아니었다면 나는 지방 중소기업의 현실이나 용접공을 비롯한 기능공의 삶에 대해 알지 못했을 것이다. 주변에 이런 일을 하는 이가 없다는 이유로 관심을 두지 않았다. 부끄럽지만 그렇다. 그러니 이런 책을 읽은 게 다행이지 않은가. 우리 사회를 구성하는 다양한 이들의 삶에 대해 요즘 MZ 세대의 사고에 대해 조금이나마 알게 되었다. 다른 형태의 삶을 살아가는 이들에 대해 생각한다. 저자가 돌아와서 들려줄 이야기를 기대한다.


앞으로 내가 일해나갈 곳은 현장이 아닌 사무실. 파란 작업복이 하얀 와이셔츠로 바뀌고, 메꾸어나가야 할 공백은 철판과 철판 사이에서 지면과 지면 사이로 바뀐다. 하지만 돌아오리라. 내가 지나쳐왔던 세상, 담배 냄새와 절삭유 냄새로 찌든 곳. 비지땀 흘리며 뿌듯했던 하루도, 죽살이에 벅차 힘겨웠던 하루도, 이내 막걸리와 소주로 씻어내고선 내일 하루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는 곳. (28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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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22-11-09 11: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런 분 이런 책이 있군요. 데려갑니다.
오십중반 제부가 용접 배우고 있어요
직장 다니면서요. 퇴임 후 할 일 몇 가지 미리 준비한다네요. ^^

자목련 2022-11-10 09:38   좋아요 1 | URL
문재인 전 대통령의 추천으로 유명해진 걸로 알고 있어요.
용접을 배우고 계시다면 현장의 구조나 근무에 대해 도움이 될 거라 생각해요.
프레이야 님, 남은 가을 안에서 환한 날들 이어가세요^^

서니데이 2022-12-08 18: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달의 당선작, 축하합니다.
따뜻한 하루 보내세요.^^

자목련 2022-12-09 08:57   좋아요 1 | URL
서니데이 님, 감사합니다.
좋은 하루 이어가세요^^*
 
대성당 (무선) - 개정판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19
레이먼드 카버 지음, 김연수 옮김 / 문학동네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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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이 공평하지 않고 노력과는 상관없이 흘러간다는 걸 알면서도 뭔가를 기대하는 마음은 무엇일까. 그 기대마저 없다면 삶이 너무 서글프기만 하다는 걸 알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불운과 불행을 지나쳐오면서 이제는 어떤 일들도 받아들이고 감당할 수 있을 거라 다짐하지만 매번 무너지고 만다. 산다는 게 다 그런 거지 자조하며 쓸쓸함을 견디는 건 나뿐이 아닐 것이다. 


현실이든 소설이든 인생은 뭘까 묻다가 결국 동지애를 불러온다고 할까. 레이먼드 카버의 단편집 『대성당』을 읽으면서 모든 건 지나가고 그것이 인생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40여 년 전에 발표된 소설집의 열두 편 단편이 그렇게 말해주고 있었다. 그러다 소설 속 젊은 인물들이 이제는 노년의 시기를 지나고 있을 텐데, 그렇다면 지금은 인생이 뭐라는 걸 조금을 알게 되었을까 궁금해졌다. 하지만 살면 살수록 모르는 것들이 쌓여가니 그들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싶었다. 


열두 편의 이야기는 저마다 어려움을 안고 있다. 때로는 그 어려움을 인정하지 못해서 깊은 어려움에 빠지는 경우도 있는데 몇 편의 단편에서 그런 게 보였다. 그건 자존심 때문이기도 하고 미련 때문이기도 하다. 카버가 보여주는 단편 속 인물이나 일상은 특별할 게 없다. 그래서 더 사실적으로 다가오고 우리의 현실과 고민을 대입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다. 40여 년이 지났는데도 말이다. 


직장 동료 버드의 집에 저녁 식사 초대를 받아 가는 ‘나’와 아내의 이야기로 시작하는 「깃털들」은 그들이 서로에게 얼마나 무관심하고 단절된 채로 살아가는지 느낄 수 있다. 직장에서 가장 가까운 사이라고 했지만 정작 버드의 아들 이름이나 집 안에서 공작을 키우고 있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했다. 그건 다른 단편에서도 이어진다. 직장에서 실직한 남편의 무기력한 모습을 그린 「보존」에서 그는 냉장고가 고장 난지도 모른다. 퇴근한 아내가 재료가 상하기 전에 요리를 하고 냉장고에 대해 상의를 해도 냉장고를 구하긴 구할 거라고 할 뿐 적극적인 태도를 취하지 않는다. 경매에 가보자는 아내의 말에도 시큰둥하게 대한다. 


마찬가지로 병원에서 일하는 ‘나’와 방문판매로 비타민을 파는 아내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비타민」의 부부도 전혀 소통하지 못한다. 아내가 무슨 고민을 하며 어떻게 사업을 이어나가는지 ‘나’는 전혀 관심이 없다. “당신이야 내가 비타민을 복용하든지 말든지 신경도 안 쓰겠지. 중요한 건 그거야. 당신은 아무것도 신경 쓰지 않아.”(「비타민」, 141쪽) 아내의 절규에 가까운 목소리가 내게도 들리는 것만 같다. 


어쩌면 무심하다 못해 무관심으로 일관하는 이들은 마침내 맞이하게 될 결과가 두려운 건지도 모른다. 그래서 자꾸 회피하고 미룬다. 「신경써서」 속 로이드와 이네즈가 그렇다. 상의할 게 있다고 말하는 이네즈를 로이드는 회피한다. 무슨 이유로 따로 살고 있는지 구체적인 설명은 없지만 로이드가 이네즈의 방문에 샴페인을 화장실에 감추는 장면으로 대충 알 것 같다. 그러니까 이네즈가 상의할 일은 이혼이다. 이네즈가 찾아왔을 때 로이드는 한 쪽 귀가 귀지로 꽉 막혀 잘 듣지 못하는 상태다. 이네즈가 로이드의 귀지를 빼주려고 방법을 시도하는 게 이 단편의 전부이지만 그것이 가장 중요하다. 이네즈는 뭔가 해결하려 애쓰고 로이드는 두려워하고 방관하는 것. 


“어쨌거나 뭔가 하긴 해야지. 일단 이것부터 해보는 거야. 만약 그래도 안 된다면, 다른 방법을 찾아야지. 그게 인생이야. 그렇지 않아?” (「신경써서」, 163쪽)


뭔가 하긴 해야 하고 잘 안되면 다른 방법을 찾아 나가는 일이 인생이라는 단순하면서도 명백한 이야기. 그럼에도 우리는 매번 실패하고 좌절한다. 왜냐하면 누군가 꿈꾸고 계획하는 인생에는 실패와 좌절이 없기 때문이다. 별거했던 부부가 함께 행복한 시간을 보내기 시작한 순간 집을 비워줘야 하는 현실적인 문제가 생기는 「셰프의 집」, 사랑했던 시간, 좋았던 시간을 뒤로하고 직장 동료와 바람이 나 떠나버린 아내의 빈자리에 육아와 일로 힘들어하는 「열」은 안타깝다. 「열」의 주인공은 아내의 배신에 분노하면서도 하루하루 일상을 이어가야 한다. 그를 도와주는 주변인의 등장으로 안정을 찾지만 곧 또 다른 어려움에 빠진다. 그 과정에서 그가 깨달은 것은 우리가 살아가며 겪는 그것과 다르지 않아 울컥한다. 


그는 자신들이 함께한 인생이 자신이 말한 그대로 이뤄졌다는 것을 확신했다. 하지만 그 인생은 이제 지나가고 있었다. 그 지나침은 ㅡ 비록 그럴 수는 없을 것 같아서 그는 맞서 싸우기까지 했지만 ㅡ 이제 그의 일부가 됐다. 그가 거쳐온 지난 인생의 모든 것들과 마찬가지로. (「열」, 254쪽)


모든 게 계획한 대로 이뤄진다면 삶의 비밀 같은 건 없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인생은 의도하지 않은 방향으로 우리는 데려다 놓는다. 아이의 여덟 살 생일 케이크를 주문하고 행복한 시간을 기대하던 「별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이 되는」 속 부모에게 닥친 일은 아이의 교통사고였다. 뺑소니 교통사고를 당한 아이는 수술을 했지만 의식이 돌아오지 않는다. 의사는 괜찮은 상태라고 말하지만 부모는 절망에서 빠져나올 수 없다. 그런 와중에 집에 잠깐 다니러 간 사이 이상한 전화 때문에 신경이 쓰인다. 아이는 끝내 깨어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고 나중에야 그 전화를 기억한다. 아이의 생일 케이크를 주문했던 빵집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들은 이루 말할 수 없는 슬픔과 분노를 빵집 토해낸다. 사장은 그들에게 자신이 만든 빵을 내놓고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뭔가를 먹는 게 도움이 된다오. 더 있소, 다 드시오. 먹고 싶은 만큼 드시오. 세상의 모든 롤빵이 여기에 있소.” (「별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이 되는」, 127쪽)


그들은 그에게 귀를 기울였다. 그들은 먹을 수 있을 만큼 먹었다. 그들은 검은 빵을 삼켰다. 형광등 불빛 아래에 있는데, 그 빛이 마치 햇빛처럼 느껴졌다. 그들은 이른 아침이 될 때까지, 창으로 희미한 햇살이 높게 비칠 때까지 이야기를 나눴는데도 떠날 생각을 하지 않았다. (「별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이 되는」, 128쪽)


실은 단편의 제목처럼 「별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이 되는」 것들이 우리 인생을 지켜주고 지탱해 주는지도 모른다. 어찌할 바를 모르는 상실과 슬픔에 대해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이처럼 아주 작고 사소한 것들이다. 그저 지나온 삶의 고단함과 쓸쓸함을 나누고 서로를 위로하고 하루를 살아가야 하는 힘을 얻는 것, 그런 경험들을 통해 그것이 인생이라는 걸 우리는 배우고 알게 된다. 불운과 불행의 시간 속에서도 삶은 이어지고 다시 희망을 생각하는 일, 산다는 건 그런 거라고.


표제작 「대성당」에 느끼는 것도 그런 것이다. 화자인 ‘나’는 아내의 친구인 맹인이 자신의 집에 방문한다는 게 영 내키지 않는다. 맹인을 위해 책을 읽어주던 아내가 그와 오랜 시간 관계를 이어온다는 사실도 못마땅하다. 그러니 그런 맹인을 만난다는 게 반가울 리 없다. 그리고 그와 무슨 대화를 나눠야 할지도 모른다. 식사를 하고 차를 마시고 모든 걸 다 끝낸 후 맹인은 볼 수 없는 TV 속 대성당에 대해 설명하는 일이 유쾌할리 없다. 그러다 맹인이 대성당을 그려보자고 제안한다. ‘나’의 손에 맹인이 손을 올리고 함께 대성당을 그리기 시작한다. 


“자네 인생에 이런 일을 하리라고는 한 번도 생각해 보지 못했겠지. 그렇지 않나, 이 사람아? 그러기에 삶이란 희한한 걸세, 잘 알다시피. 계속해 멈추지 말고.” (「대성당」, 309쪽)


그리고 맹인은 화자에게 눈을 감아보라고 말한다. 대성당을 그리는 일이 다 끝나고 맹인이 어떠냐고, 그들이 그린 대성당을 보고 있냐고 물어도 ‘나’는 눈을 뜨지 않았다. 눈을 감은 그 시간은 이제껏 자신이 살아온 것과는 분명 다른 것이었다. ‘나’가 느끼고 경험했을 그 모든 것들을 우리는 알 수 없다. ‘나’가 눈을 감고 그림을 그리기 전 맹인을 이해하려 하지 못했던 것처럼. “이거 진짜 대단하군요.”라고 말하는 그 놀라운 신비로움을 알지 못한다. 


그런 면에서 표제작 「대성당」은 아름답고 훌륭하다. 인생에서 우리가 쉽게 말하는 것들, 함부로 단정했던 모든 것들이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알려준다고 할까. 맹인의 말처럼 삶이란 희한하고 멈출 수 없는 것인지도 모른다. 여전히 산다는 건 어렵고 알 수 없어 두렵지만 그것 때문에 포기해서는 안 되는 게 인생이다. 어떤 기대도 어떤 절망도 하지 않고 살아갈 수 있다면 좋겠지만 절망하더라도 삶의 희망과 기대를 놓지 않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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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anca 2022-11-08 09:4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너무 좋아하는 책이에요. 특히 <대성당> 정말 걸작이죠. 저도 희망과 기대 간직하며 살게요. 여전히 실망이 누적되면 마음, 몸까지 아프지만요.

자목련 2022-11-09 11:05   좋아요 0 | URL
저는 너무 늦게 읽었지만, 오히려 지금 읽어서 더 좋은 것 같아요. 좋은 소설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는 이곳도 좋고요.
블랑카 님, 몸도 마음오 아프지 말고, 설령 아프더라고 잘 이겨나가요, 우리!

새파랑 2022-11-08 12:0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대성당> 너무 좋더라구요~! 저도 얼마전에 읽어서 리뷰 찾아보니 전 <열>을 제일 인상깊게 읽었다고 써놨네요. 리뷰 안남겼으면 기억도 못했을거 같아요 ㅋ

자목련 2022-11-09 11:04   좋아요 1 | URL
맞아요, 리뷰의 좋은 점이지요. <열>속에서 그 노년 부부의 역할이 중요하게 다가왔어요. 우리가 늙는다는 것, 인생이라는 게 알 수 없다는것. 그래도 오늘을 즐겁게 살아야겠지 싶어요!
 

조금 엉뚱하지만 소설가의 첫 에세이는 언제쯤 출판되는 게 좋은가 생각해 보았다. 독자에게 좋아하는 소설가의 에세이는 등단이나 활동 기간과 상관없이 언제라도 반갑다. 글이라는 건 같지만 그 주제가 다르니 기존에 만났던 글과는 색다른 분위기를 기대하게 된다. 시인이나 소설가의 산문을 떠올리면 어떤 작가는 주 종목이라고 하기엔 그렇지만 시나 소설보다 에세이가 더 좋을 때가 있다. 그리하여 그 작가의 에세이가 연이어 나오기도 한다. 어쩌면 그건 출판사의 마케팅일지도 모른다. 오해의 소지가 있을지 모르지만 김초엽의 소설이 아닌 에세이가 반갑다는 말이다.


SF 소설에 대한 경계심을 풀어준 작가라고 할까. 그러니 김초엽이 들려주는 SF 이야기, 책과 소설 작업에 대한 이야기, 쓰는 일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담은 『책과 우연들』을 즐겁게 읽을 수 있었다. 그가 어떻게 소설을 쓰는 작가로 살게 되었는지, 거기가 SF 소설을 사랑하는 이유와 그로 인해 무엇을 말하고 싶은지 진솔한 진심이 담긴 책이다. 특히 내게는 SF에 대한 이해와 그 세계를 이해하기 위해 소설이 아닌 다양한 분야의 책들로부터 영향을 받았다는 게 인상적이었다. 그리고 우리가 막연하게 작가라면 방대한 양의 독서를 할 거라는 생각에 편협한 독자라는 답이 왠지 친근하게 다가왔다. 


그가 소개하는 책들은 제목만으로도 어렵고 난해한 내용이라는 걸 알 수 있었는데 정작 그의 글로 통해 만나보니 궁금하고 직접 읽어보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한 권의 소설을 쓰면서 부수적으로 읽은 책도 많았다. 역시 쓰기 위해서는 읽는 일도 중요하구나 싶다. 과학책을 읽고 다큐멘터리를 보는 작가, 과학과 SF의 경계는 미묘하다면서도 그가 과학을 사랑하는 작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작가의 에세이에서 독자는 작가의 쓰기에 대한 이야기를 기대한다. 김초엽은 이 책에서 자신의 소설 쓰기에 대해서도 말하고 있는데 대학원 시절 직접 소설 쓰기 모임을 만들고 주말마다 그 소설을 썼다고 한다. 그때는 소설가가 되려는 생각이 없었는데도 말이다. 소설 작법에 대한 책도 소개하는데 한 번씩 소설을 쓰다가 난항에 빠질 때 참고를 하는 정도였다. 결국엔 쓰기는 누군가의 기술이 아니라 저마다의 방식이 있는 법이다. 그럼에도 그런 책들을 보면 든든한 마음이 드는 건 작가도 마찬가지.


에세이에서 김원영 작가와 『사이보그가 되다』를 쓰는 과정을 들려주는 부분은 특히 인상적이었다. 김초엽 작가가 후천적으로 청각장애가 있다는 사실을 첫 소설집을 읽고 한참 후에 알았던 나는 그가 기고한 글을 검색해 읽은 기억이 있다. 해서 초고를 거의 뒤엎는 과정, 편집자가 제시한 방향성, 기술발전으로 인한 장애의 미래를 다루면서 자신의 이야기를 어떻게 꺼내야 할지 고민하는 과정의 진정성이 느껴졌다. 


개인의 경험이 어떻게 사회와 연결되는지, 이 경험을 구조 속에서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지, 나와 타인의 경험은 얼마나 같고 또 다른지, 그런 이야기까지 도달할 수 있어야만 개인의 경험은 사적인 서술에 그치지 않고 풍부한 의미를 갖게 된다. (104쪽)


다른 의미일 수 있지만 최근 노벨문학상 수상을 한 아니 에르노가 떠올랐다. 개인적 경험을 토대로 자전적 글쓰기가 타인과 연결되어 어떻게 공감과 연대로 이어지는지 생각했다. 결국 쓴다는 건 나 혼자만의 일이 아니라 모두의 일이 될 수도 있다는 멋있는 일이구나. 작가라는 주체가 아니라도 말이다. 물론 작가에게 글쓰기는 보통의 독자나 일반인과는 다른 무게가 있겠지만 도저히 앞이 보이지 않을 때는 누구에게라도 찾아오니까. 그게 무슨 글이든 말이다. 


글 쓰는 일은 때로 세계 전체를 뭉쳐 내 손에 가져다 놓고, 과거와 현재 곳곳으로 나를 데려가 주는 빽빽한 거미줄 위에서 벌어지는 화려한 작업 같다가도, 때로는 나를 뚝 떼어내 좁고 작은방, 오직 책들로만 둘러싸인 방에 고립시킨다. 재미있지만 가끔은 심심하고 외롭고 심지어 고통스러울 때도 있다. 도저히 앞이 보이지 않을 때가 있다. (154쪽)


책과는 떼어놓을 수 없는 작가이기에 책방이나 읽은 책에 대한 부분은 빼놓을 수 없다. 이런 책을 사야지 하고 들어갔지만 의도한 것과는 다르게 엉뚱한 책을 손에 넣게 되는 일, 일이든 여행이든 어떤 지역을 방문할 때 작은 책방을 찾아 그곳에서만 만날 수 있는 책을 사는 일. 책 목록에서 내가 읽고 좋았던 책(레이철 카슨의 『침묵의 봄』이나 가즈오 이시구로의 『클라라와 태양』, 이유리의 『브로콜리 펀치』, 배명훈의 『안녕, 인공존재』)을 발견하는 일도 즐겁지만 아직 만나지 못한 새로운 책과의 우연한 만남도 즐겁다. 에세이의 제목처럼 말이다. 


어떤 책들이 우리를 생각지도 못했던 낯선 세계로 이끈다면, 책방은 그 우연한 마주침을 가능하게 하는 통로다. 좀 더 많은 책이 그렇게 우연히 우리에게 도달하면 좋겠다. 우리 각자가 지닌 닫힌 세계에 금이 간다거나 하는 거창한 일까지는 일어나지 않더라도, 적어도 우리는 조금 말랑하고 유연해질 것이다. 어쩌면 그냥, 그런 우연한 충돌을 일상에 더해가는 것만으로 충분할지도. (234쪽)


작가의 에세이는 그가 쓴 소설에 대한 궁금증과 이해를 위한 안내서 같은 역할을 한다. 무엇을 바라는 마음으로 소설을 썼는지, 어떤 소설을 쓰고 싶은지 전체를 다 알 수는 없지만 일부라도 느낄 수 있기에 이미 읽었던 소설이나 예정된 소설 읽기를 더욱 풍성하게 이끌어준다. 김초엽의 소설로 SF 소설에 대한 친근감이 생긴 후 예전보다 SF를 즐겁게 읽을 수 있었다. 『책과 우연들』 통해서 읽고 쓰는 일의 기쁨이 커졌다. 


나는 내가 쓰고 싶었던 것이 유토피아 자체가 아니라 유토피아를 만들어가는 사람들에 관한 것임을 알았다. 불가능에 맞서는 태도에 관한 것임을 알았다. (24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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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쟝쟝 2022-11-04 13:08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아이참. 이런 문장을 쓰시면 괜히 저는 감동을 받잖아요.

˝개인적 경험을 토대로 자전적 글쓰기가 타인과 연결되어 어떻게 공감과 연대로 이어지는지 생각했다. 결국 쓴다는 건 나 혼자만의 일이 아니라 모두의 일이 될 수도 있다는 멋있는 일이구나. 작가라는 주체가 아니라도 말이다. 물론 작가에게 글쓰기는 보통의 독자나 일반인과는 다른 무게가 있겠지만 도저히 앞이 보이지 않을 때는 누구에게라도 찾아오니까. 그게 무슨 글이든 말이다.˝

무물론 저한테 쓰신 말이 아니라 아니에르노와 김초엽과 여타의 훌륭하신작가님을 포함해!!! ㅋㅋ. 글을 쓰는 우리 모두가 감동받을 문장이지만... 괜히 오늘 쓴 글도 생각나고 그래서 저는 그냥 감동을 받아 버리는 것이지요.

그럴 수 있을까요? 앞이 보이지 않을 때의 공감과 연대가 될 수 있을까요? 그런데 저는 그래온 것 같아요. 어느 시기마다 분명 어떤 책이 있었고 어떤 문장이 있었습니다. 하하. 그래서 저도 그 경험들을 토대삼아 읽고 쓰는 모양입니다. 어쨌든 나의 언어를 만들어가는 것. 멈추지 말아요, 우리! ​힘!!

자목련 2022-11-06 10:37   좋아요 2 | URL
♡♡♡♡♡♡♡
네, 우리는 그럴 수 있어요. 말씀처럼 어떤 시기에 어떤 책의 어떤 문장으로 힘을 얻고 위로를 받으며 살아가고 있으니까요. 서로를 알지 못해도 서로를 만나지 못해도 서로를 응원하고 서로를 기대하는 마음으로. 그 마음으로 우리는 조금씩 더 나은 삶으로 성장하고 있어요. 그것이 서툴고 애쓰는 몸짓일지라도 말이에요!

서니데이 2022-12-08 18: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달의 당선작, 축하합니다.
따뜻한 하루 보내세요.^^

자목련 2022-12-09 08:57   좋아요 1 | URL
^^*
 
내가 너에게 가면
설재인 지음 / 자이언트북스 / 202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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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봄은 돌봄을 받는 이와 돌보는 이 모두를 성장시킨다. 돌보는 동안 상대를 지켜보고 사랑을 주기 때문이다. 의도하지 않았더라고 사랑을 주게 된다. 내 손길, 내 말, 내 마음에 따라 상대가 변화하는 걸 느끼는데 어떻게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상대도 마찬가지다. 관심을 갖고 지켜보는 이가 있다면 올바르고 좋은 쪽으로 나가려고 하니까. 관성처럼 말이다. 처음 만나는 설재인의 장편소설 『내가 너에게 가면』 은 그런 따뜻하고 애틋한 돌봄의 마음과 시선을 말하는 소설이다. 


죽은 할머니가 혼자 남은 손녀딸을 지켜보기 위해 사물에 깃드는 장면으로 시작하는 이 소설은 SF 인가 싶었지만 아니었다. 할머니 종옥이 떠나지 못하고 지켜보는 손녀 성주는 작은 항만군의 초등학교 돌봄반 교사로 일하며 복싱을 한다. 그러니까 성인 여자다. 평생을 사랑하며 키운 성주가 밥을 안 먹어서 빵이라도 먹게 해달라고 저승사자에게 부탁해 남은 것이다. 그러나 성주에게는 그만한 사정이 있다. 복싱을 하려면 체중이 중요한데 밥과 빵은 절대 피해야 할 음식이라는 걸 할머니는 받아들일 수 없었다. 주먹을 날리며 싸우고 받아온 트로피를 던져버렸으니까. 그 목이 나간 트로피에 할머니의 영혼이 깃든 것이다. 


할머니의 영혼이 성주를 지켜보듯 것처럼 성주는 돌봄반에서 만난 초등학교 1학년 애린이를 지켜본다. 할머니의 장례식장에서 엄마를 잃은 어린 소녀. 외국인 엄마와 한국인 아빠를 둔 애린. 아빠는 일하느라 외국에 있고 웹툰을 그리는 삼촌 도연이 애린을 키우고 돌봤다. 도연은 애린이 친구와 싸운 일로 미안한지 빵을 만들어왔다. 빵을 먹을 계획이 없었는데 애린의 집요한 권유에 어쩔 수 없이 먹었다. 한국말도 잘 하고 똑 부러지는 애린은 성주를 잘 따랐고 성주가 복싱을 한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


우연히 성주 집에 오게 된 애린이 목이 부러진 트로피를 가져가고 체육관에 등록할 줄은 몰랐다. 그 속에 깃든 종옥을 볼 수 있을 줄이야. 덕분에 종옥은 체육관으로 옮겨져고 그곳에서 매일 성주를 볼 수 있었다. 규칙적인 운동과 식단을 지키고 있던 성주였는데 애린과 도연의 등장으로 자꾸만 그게 무너졌다. 이상하게 싫지 않았다. 운동이 끝난 후 도연이 만든 빵을 맛있게 먹고 함께 달리기를 하고 애린에 대해 이야기를 했다. 성주는 애린을 통해 어린 자신의 모습을 발견했다. 친구의 손녀를 키운 할머니와 자신을 향하던 수많은 시선과 편견들, 부모도 아닌 삼촌이 키우는 애린에게는 어떤 말들이 오갈지 잘 알고 있었다. 


소설은 성주가 일하는 돌봄반을 통해 여전한 사회적 차별을 말한다. 외국인 노동자를 바라보는 한국인의 시선, 돌봄 교사인 성주를 정규직과 다르게 대하는 교장의 태도, 부모가 아닌 이들과 가족으로 살아가는 이들을 향한 참견의 모습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동시에 그 반대의 시선도 들려준다. 성주를 키운 종옥, 애린을 돌보는 삼촌, 성주를 응원하는 교사들. 서로가 서로를 돌보는 모습이다. 어린이만 돌봄이 필요한 게 아니라는 걸 알려준다. 애린을 통해 성주와 삼촌도 돌봄을 받고 있었다. 


아이의 작았던 세계에 낯선 사람들이 생겨난다. 땅에서 솟아나고, 하늘에서 떨어지고, 강을 헤엄쳐 흠뻑 젖은 채로 기어오르기도 하고, 또 어딘가에서 발을 구르며 전속력으로 달려오기도 한다. 작았던 아이를 그 사람들이 키운다. 점차 이 사람과 저 사람을, 그 사람과 또다른 사람들을 동시에 마음에 심어 사랑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누구도 가르쳐주지 않았지만 태생에서부터 내재된 본능의 씨앗이 발아하여 알게 된다. 소중히 여기는 사람들이 많아질수록 더 많은 씨앗을 심고, 더 많은 꽃을 피우고, 벌과 나비를 불러오고, 꿀을 슬그머니 맛볼 수 있다는 것도 조금 더 크면 알게 될 것이다. (229~230쪽)


소설은 대단할 것 없는 평범한 일상에서 혼자가 아닌 함께 살아가고 있음을 알려준다. 성주가 도연과 애린을 만나면서 “웃는 일이 많고 싶었다.”(244쪽)고 느끼는 것처럼. 한 사람의 생에 누군가 들어오는 일이 얼마나 대단한 일이지 확인시킨다. 누군가 돌보는 일은 돌봄을 받는 일이라는 걸 말이다. 나를 키우고 돌본 이들을 떠올리게 만든다. 그들의 존재가 얼마나 감사한지 알게 한다. 봄날의 햇살처럼 따뜻하고 소설 속 도연이 만드는 빵처럼 맛있고 부드러운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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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행복하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이병률 지음 / 달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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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을 읽는 일은 모든 감각을 깨우는 일이다. 설령 내 사랑이 끝났을지라도 사랑과는 멀리 떨어져 나온 삶이라도 사랑을 읽는 동안 나를 휘몰아졌던 사랑 속으로 진입하기 때문이다. 아픈 줄 알면서도 사랑의 불구덩이 속으로 걸어 들어가던 시간, 이별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며 스스로를 갉아먹던 침잠의 시간. 어느 날 이유 없이 서러워 아무도 모르게 울음을 쏟아내던 그 쓰라린 시간과 마주한다. 사라졌다고 믿었던 설렘의 순간, 무엇 때문에 헤어져야 하는지 납득할 수 없어 잠들지 못하던 밤이 고스란히 밀려온다.


이병률의 에세이 『그리고 행복하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를 읽으면서 누군가 여전히 사랑의 조각을 붙잡고 있음을 인식하거나 소식을 모르는 그의 안부나 행복을 바라는 마음을 발견하게 될지도 모른다. 사랑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말할 수 없음에도 시인이 들려주는 사랑에 나도 모르게 빠져든다. 당신이라 부를 수 있는 이가 지금은 곁에 없어도 어느 시절 당신과 보냈던 짧은 시간, 스치든 지나간 계절, 그리고 가슴에 남은 기억들은 누군가의 사랑이고 감정이다.


사랑을 배운 적이 없어서, 사랑을 하지 못하는 당신이 사랑을 하지 못하고 있을 때도, 세상은 사랑의 풍경을 보여주며 페이지를 남긴다. 그러니까 당신아, 우리는 그 페이지를 따라 여행해야 하고, 그 길에서 나 자신을 에워싼 모두를 괴롭혀서라도 영혼을 다 소모할 수 있을 때만 이번 생의 주인이 될 수 있다. 주인공 말고 주인이.(49쪽)


친구라도 될 걸 그랬다는 노랫말처럼 때로 사랑의 고백은 발화되어서는 안 되는 침묵으로 남아야 했다. 정성껏 써 내려간 치밀한 프러포즈가 그러하듯 상대에게 부담으로 남을 뿐이다. 여행을 하고 시를 쓰고 강의를 하고 꽃집을 운영하는 그가 말하는 사랑은 지극히 개인적인 사랑이자 모두의 사랑에 해당된다. 어떤 사랑은 시로, 어떤 사랑은 일기로, 어떤 사랑은 하나의 사연으로, 어떤 사랑은 편지의 형태로 쓰일 뿐이다. 그러니 이 책은 사랑에 대한 담론이며 사랑과 이별에 대한 고백이자 누구나 공감하는 애틋한 사랑이자 사랑을 기다리는 이의 마음이다.


그래서 하나하나 사랑의 조각을 소개하는 건 무의미할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어떤 글에는 오래 머물게 된다. 생일에 꼭 장갑을 선물하고 싶다는 글, 비 오는 날 연인이 저 멀리서 우산을 들고 있는 걸 발견하고 냉큼 쓰고 있던 우산을 쓰레기통에 버리는 여자에 대한 글, 사귀는 걸 주변에 알리지 못해 둘만이 아닌 여럿이 보낸 크리스마스에서 사다리 게임으로 선물이 다른 사람에게 돌아갔다는 글이 그랬다. 어느 시절 매만지던 약지 손가락의 감각이 되살아나서, 비가 오던 날 우산을 하나만 사 오던 모습이 좋아서 심장이 뛰던 순간, 어느 해 크리스마스 선물로 준비한 장갑이 떠올라서다.


내가 사랑했던 사람들이 번복자가 되어 나를 떠날 수밖에 없었던 순간들을 되돌린다면 어떨까. 당신이라는 세계가 놓치고 만 것들을 붙잡는 것. 그것은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일이라서, 있는 힘껏 몸을 돌리고 관점을 되돌려 ‘그때의 나는 내가 아니었다’고 말하면서 두 팔 벌려 안을 수 있다면.(98쪽)


과거가 돼버린 이야기다. 시인은 모든 걸 번복할 수 있다면 어떨까 하며 지나간 사랑을 후회하지만 어떤 사랑은 우주의 의지를 끓어 모아도 결국 이별의 수순을 밟게 된다는 걸 알기에 그저 담담하다. 어쩌면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시간이 지났기 때문에 가능한 담담함일지도 모른다. 사랑은 둘이어야 가능한 일이고 둘이어야 만들 수 있는 것이라서 그렇다. 


한 사람이 혼자서 하는 게 사랑은 아니기에, 한 사람이 할 수 있다 하더라도 그건 사랑이 아니기에, 우리는 사랑하다가고 어긋나고, 이어보려 해도 고스란히 해진 자국을 남긴다.(124쪽)


그럼에도 책에서 만난 사랑은 한 편의 영화 같고 음악 같다. 그건 사랑이 우리를 살게 하고 지탱하는 힘이라는 걸 알기 때문이다. 심지어 이별을 견디는 시간조차도 사랑의 기억이 있기에 버틸 수 있는 시기가 있다. 좋았던 기억이 왜 이별로 이어지나 분노하면서도 훗날 그 모든 것들은 아름다움에 아름다움으로 남는다. 아련해지고 흐릿해진 아름다움으로 말이다.


우리가 사는 삶이란 그저, 사랑하는 모두가 빠져나간 자리의 뒷전을 자주 느끼는 일이며, 사랑이 사랑의 힘만으로 도달할 수 없다는 불가능을 여러 번 체험하는 일이며, 도무지 막으려 해도 막을 수 없는 신산한 시절을 그저 견디고 견뎌야만 하는 일, 피할 수 없어서 우리는 그 모든 것들의 쓸쓸함을 삼키고 또 삼키며 삽니다.(160쪽)


『그리고 행복하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는 사랑을 하는 이들에게는 찬란한 사랑으로 나가는 격려가 될 것이고 혼자만의 사랑을 하는 이들에게는 사랑이 주는 기쁨과 힘을 확인하며 용기를 북돋을 것이고 사랑이 끝났다고 여기는 이에게도 결국 삶이란 사랑에 속한 것이라는 걸 깨닫게 될 것이다.


사랑을 읽는 일은 가만히 내 사랑을 헤아려 보는 일이다. 서툴고 아팠던 사랑부터 전부를 걸어도 아깝지 않았던 사랑과 이제는 그의 이름을 들어도 덤덤해진 가슴이 서럽기도 한 사랑까지. 그 모든 사랑으로 받은 것들로 인해 내가 살았던 날들과 부디 내가 주었던 것들로 그 사랑도 살았던 날들이 있기를 바라는 마음을 꺼내보는 일이다. 사랑이 얼마나 눈부시고 소중한 것인지 나만의 공간에 새기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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