큐브 창비교육 성장소설 13
보린 지음 / 창비교육 / 202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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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3이라는 시간은 딱 1년만 고생하면 다음으로 나갈 수 있다고 여겨진다. 그래서 고3은 중요하다고 말한다. 스트레스를 동반하지만 이 시간만 지나면 뭔가 다 해결될 것 같은 착각에 빠진다. 그냥 고등학교 3학년일 뿐인데 말이다. 강원도 고성의 바닷가 마을에 사는 ‘연우’가 어느 날 큐브에 갇힌 설정으로 시작하는 보린의 『큐브』에서도 마찬가지다. 연우도 고3이다.

이유도 모른 채 투명한 정육면체 큐브에 갇혀 빠져나오지도 못하고 지구 둘레를 돌고 있다. 같은 반 친구들은 연우를 찾지만 아무도 발견하지 못한다. 연우는 그곳에서 할 수 있는 게 없다. 무기력 그 자체다. 잠이 쏟아지고 잠에서 깨면 배가 고프다. 다행인 건 언제나 유부초밥이 있었다. 이상한 건 어디선가 ‘채집되었다’는 말이 나온다.

빨간 공, 언제나 같은 자리, 정육면체 한가운데 떠있다. 홀로그램 비슷한 것으로, 연우가 깨어날 때는 투병하다가 시간이 지날수록 모래시계처럼 아래에서부터 빨갛게 차오른다. 가끔 매미 소리를 낸 다음 메시지를 보여 준다. 넌 채집되었다, 근처에 먹을 게 있다, 의식을 통제할 거다, 내용은 딱 세 종류다. 공이 완전히 빨갛게 채워지면 큐브 안팎의 모든 것이 처음으로 돌아온다. 연우 자신만 빼고. (19쪽)

연우는 포기하지 않고 끊임없이 탈출을 시도하는데 어느 순간 ‘항상성 붕괴……부접합……조사종료……’란 말이 뜬다. 그리고 연우는 다시 교실로 돌아온다. 놀라운 건 연우가 큐브에 갇힌 아니 채집된 시간이 무려 1년이었고 실종 상태였다는 것이다. 돌아온 연우는 일상을 되찾으려 하지만 자신만 빼고 모든 게 달라진 현실을 확인한다. 연우가 좋아하던 해고니는 꿈이었던 서퍼가 아니라 서프 숍에서 일을 하고 다른 친구들도 대학에 갔다. 연우도 대학 입시를 위해 도서관에 다닌다.

연우에게도 변화가 있다. 그건 연우만이 아는 비밀이다. 큐브에 갇혔을 때 채집된 장치와 거기에 복제된 자아인 젤리 곰이다. 작고 귀여운 젤리 곰은 연우가 말을 할 때마다 연우와 같은 목소리로 말을 한다. 마치 혼잣말을 하는 것처럼. 그러나 그 목소리는 진짜 연우의 마음 같다. ‘나는 우연우, 너야’라고 말하는 젤리 곰이라니. 이걸 누가 믿을 수 있을까. 그러나 조금씩 연우는 또 다른 연우인 젤리 곰과 대화를 나누게 된다.

연우는 1년 전 해고니에게 하려 했던 고백을 하지만 해고니는 연우가 고성을 떠날 거라며 받아주지 않는다. 연우는 해고니가 좋아서 고성에서 할 수 있는 일을 생각한다. 아버지도 예전과 다르게 연우가 하고 싶은 일을 하라고 한다. 막연하게 대학에 가려고 했던 마음을 돌아본다. 그리고 해고니가 왜 서퍼가 아니라 서프 숍 직원으로 일하는지 왜 바다를 무서워하는지 알게 된다.

연우는 큐브에서 빠져나왔지만 여전히 갇혀 있었고, 1년이 지났어도 지난여름 교실의 공기 속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여전히 그때 그곳에 머물러 있었다. 아무것도 리셋하지 못한 채, 되풀이되는 과거의 한순간 속에 갇혀 있었다. 자신이 무얼 원하는지 알지 못한 채, 해고니가 멀어지는 것을 지켜보기만 하던 그때 그 순간 속에. (178~179쪽)

보린의 『큐브』 는 자신이 무얼 원하는지 모른 채 대학 입시만을 위해 살아가는 고3의 고민을 SF라는 설정을 통해 보여준다. 연우가 큐브에서 보낸 1년이라는 시간은 인생 전체로 보면 아주 짧은 시간에 불과하다. 고3이라는 시간도 다르지 않다. 앞으로 살아갈 인생을 위한 고민은 1년으로 결정되는 게 아니니까. 연우 같은 고3이나 청소년에게만 해당되는 건 아닐 것이다. 여전히 원하는 바를 찾지 못하고 과거의 한순간(큐브)에 갇혀 있는 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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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주에는 서울 경기권에 어마 무시한 첫눈이 내렸다. 그곳에서 멀리 떨어진 이곳엔 눈이 거의 내리지 않았다. 첫눈이라는 걸 확인할 정도가 전부였다. 11월에 내린 첫눈과 함께 가을은 감쪽같이 사라진 것 같았다. 하지만 가을은 아직 남아있다. 곳곳에서 붉은 단풍나무와 노란 은행잎을 볼 수 있다. 그래도 12월이니 마음은 겨울로 이동한다.


12월이라고 쓰고 보니 마음이 바쁘다. 딱히 잡힌 약속이 있는 것도 아닌데 뭔가 마무리를 지어야 할 게 있는 것만 같다. 그런 게 있던가. 그냥 내 마음이 그렇다. 한 해의 마지막이 달이라는 게 뭔가 압박으로 다가온다. 30일도 채 남지 않았다는 것, 올해에도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는 생각. 그러나 반문한다. 그럼 뭘 했어야 하지? 나름의 계획들은 언제나 그렇듯 무산되고 목표는 달성되지 않았다. 아, 모르겠다. 12월이라서 그런가 보다.


기분이 좋아지는 책 이야기를 하자. 단 두 권이 주는 만족과 행복. 어제 도착한 책이다. 김소연 시인의 『생활체육과 시』, 스콧 피츠제럴드의 『바질 이야기』. 잠자냥 님의 리뷰를 읽고 구매했다. 땡투도 함께. 표지도 너무 근사하다. 책 구매에 있어 표지가 미치는 영향은 이렇게 크다. 한 손에 쏙 들어오는 크기, 작고 가볍다. 그러니 금방 읽을 수 있을 것 같다. 물론 미루지 않고 바로 읽어야만 가능하다.







김소연의 『생활체육과 시』는 아침달의 ‘일상시화’ 시리즈다. 난다의 ‘시의적절’ 시리즈와 비슷하다. 시를 좋아하는 이이라면 시인의 산문과 시를 함께 읽을 수 있다. 두 시리즈를 비교해도 좋을 것 같다. 출판사의 같은 듯 다른 기획, 독자의 선택의 폭은 다양해진다.


일기예보를 자주 찾아본다. 폭설이 올까 무서우면서도 눈을 기다리기도 한다. 겨울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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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고 2024-12-03 14: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바질책 샀어요ㅋㅋㅋ˝생활체육과 시˝는 제목이 독특하네요. 꼭 무슨 교양과목 중에 있을 것 같은;;

자목련 2024-12-04 12:57   좋아요 0 | URL
12월엔 바질~~
<생활제육과 시>는 정말 강의 제목 같기도 해요^^

구단씨 2024-12-03 16: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바질이야기.
소개글 흥미로워서 궁금했는데, 저도 이번 기회에 장바구니에 쏘옥~ 합니다.

여기는 첫눈이 완전 함박눈 수준으로 내리다가, 거의 매일 비가 내리다가 그럽니다.
겨울이 추운 건 당연한데, 조금만 추웠으면 좋겠네요.

자목련 2024-12-04 12:58   좋아요 0 | URL
바질, 같이 읽어요!
너무 춥지 않은 겨울, 적당한 추위를 기대해요^^

희선 2024-12-08 20: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해 마지막 달도 조금 있으면 삼분의 일이 가겠습니다 늘 십이월엔 한 게 없네 하는군요 2024년에 더 한 듯합니다 눈이 많이 와서 피해도 있다고 하는데, 눈을 못 본 저는 부럽기도 합니다 눈이 와도 피해가 없으면 좋을 텐데...

자목련 님 감기 조심하세요


희선

자목련 2024-12-09 15:31   좋아요 1 | URL
어느 지역은 폭설로 피해가 크고 어느 지역은 눈을 보기 힘들죠.
희선 님도 아프지 마시고 따뜻하고 건강한 날들 이어가세요^^
 
운명의 꼭두각시
윌리엄 트레버 지음, 김연 옮김 / 한겨레출판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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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험하지 않고 학습하지 않은 삶은 바깥에 있다. 일부러 안으로 들이지 않는다면 생이 끝날 때까지 바깥에 존재한다. 자연스럽게 밖에서 안으로 들어오는 통로가 되는 것, 소설이 아닐까 싶다. 윌리엄 트레버의 장편소설 『운명의 꼭두각시』을 읽으면서 그랬다. 아일랜드의 역사를 잘 모르는 나는 이 소설을 통해 그것에 대해 조금 더 알게 되었다. 지독하게 아픈 역사의 상처와 영국과 아일랜드의 관계에 대해서. 소설은 한편으로는 역사소설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나에게는 운명의 소용돌이 속에서 살아남은 이들, 그들의 사랑에 관한 소설로 각인되겠지만 말이다. 그리고 한강의 소설 『소년이 온다』, 『작별하지 않는다』에 대해 잠깐 생각했다. 그러니까 우리의 역사를 다른 소설을 바깥에서 어떻게 읽을 것인가에 대해. 그 결과는 한강의 2024 노벨문학상 수상으로 이어진 건 아닐까.


윌리엄 트레버의 『운명의 꼭두각시』는 시대적 배경과 없다면 내가 느낀 것처럼 복잡하게 다가올 소설이다. 1차 세계 대전 당시 영국의 편에서 반대였던 독일군과 싸운 아일랜드가 독립을 원했지만 그것은 이뤄지지 않았다. 영국으로부터 독립을 이루기 위한 아일랜드와 영국 사이의 갈등과 싸움은 계속된다. 그 과정에서 배신과 갈등이 생기는 건 당연하다. 영국과 아일랜드는 서로를 적대하지만 모두가 그런 건 아니다. 애나 우드컴은 영국인이지만 아일랜드 남자와 결혼했다. 킬네이에서 퀸턴 가문의 안주인으로 어려움에 처한 아일랜드를 도왔다. 그런 애나 우드컴의 증손자이자 주인공인 윌리의 어머니도 영국인이었다. 그들이 사는 로크 지방은 서로 다른 종교를 존중하며 각자의 신념을 유지하며 살아가는 평화로운 곳이었다.


그러나 시대는 그들의 평화를 지켜주지 않았다. 윌리의 개인교사인 킬개리프 신부와 가업인 제분소를 운영하던 아버지 윌리엄 퀀턴도 시대에 희생된 이들이다. 킬개리프 신부는 아일랜드의 제국주의 혐오자에 의해 죽임을 당했고 아버지는 영국이 아일랜드의 독립을 막고자 파견한 왕립 경찰대 ‘블랙 앤드 텐즈’가 스파이를 처단하는 명목으로 생을 마감했다. 퀀턴 씨의 저택은 불길에 휩싸였고 집안에 있던 가족들의 죽음도 있었다. 잔인하고 끔찍했다. 남편과 두 딸을 잃은 윌리의 어머니에게 남은 생은 화염으로 무너진 저택 그 자체였다. 저택을 재건할 의지는커녕 삶을 살아가기 힘들 정도였다. 위스키에 취한 일상을 보내는 큰 딸을 윌리의 외조부모는 그냥 볼 수 없었다. 딸이 걱정되어 수차례 편지를 보내며 아일랜드를 방문하겠다 하지만 윌리의 어머니는 편지를 읽지 않는다.


그리하여 윌리의 이모가 사촌 메리엔을 데리고 퀸턴가에 오게 된다. 소설에서 가장 중요한 윌리와 메리엔의 만남 말이다. 그야말로 운명적인 만남이다. 윌리와 메리엔 사이의 사랑은 피할 수 없는 것이었다. 시대의 불운 같은 건 잊어버리고 둘 사이의 사랑이 폐허가 된 킬네이를 다시 세우며 살아가면 좋았을 것이다. 윌리와 메리엔에 서로에게 보내는 편지 형식은 둘 사이의 절절한 마음을 잘 보여준다. 윌리의 시선에서 들려주는 처음은 조금 복잡하고 어렵지만 메리엔의 등장으로 독자는 퀀텀가를 떠날 수 없게 된다. 소설은 윌리와 메리언, 그리고 그들의 딸인 이멜다의 관점으로 그들의 사랑과 남겨진 이들의 삶을 들려준다.


비가 내렸다. 광택이 나는 나무관 위에서 조약돌 하나가 덜그럭거렸다. 당신이 고개를 숙이고 턱을 가슴 쪽으로 세계 누르는 것을 보았다. 한두 번 당신은 얼굴에 손을 올렸다. 당신이 울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고통 같은 고뇌가 나를 사로잡았다. 당신이 간절히 원하는 위로를 해줄 수 없었고, 손을 잡을 수도, 정직하게 당신만을 위해 울 수도 없었다. 우리는 돌아서서 모두가, 비를 긋기 위해 우산을 들고, 무덤에서 멀어졌다. (194쪽)


아름다운 퀸턴가의 비극과 그곳에서 피어나는 사랑. 그러나 윌리는 사랑이 아닌 퀸턴가의 복수를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때문에 킬네이를 떠나야 했고 돌아올 수 없었다. 그가 떠난 킬네이엔 메리언과 딸 이멜다가 있었다. 아버지는 볼 수 없었지만 이멜다는 잘 성장했다. 하지만 운명은 이멜다를 그냥 두지 않았다. 퀸턴가의 비밀을 찾아 나서고 운명의 그늘은 이멜다를 조종한다. 노년이 돼서야 메리언과 재회한 윌리는 이멜다를 지킨다.


반쯤 탄 집이 아무리 음울해도, 아무도 나를 원하지 않아도 당신이 거기 속했으므로 내가 있어야 할 곳은 그곳이었다. 내 존재의 모든 세부, 내 몸의 모든 혈관, 모든 흔적, 내 모든 친밀한 부분이 눈을 감고 쓰러지고 싶게 만든 그 부드러움으로 당신을 사랑했습니다. (263~264쪽)


“내 말은, 이멜다, 일이 그렇게 된다는 거야. 가장 중요한 일은 우연히 일어난단다.” (291쪽)


어렵고 힘든 소설이었다. 밖에 있던 나는 소설을 통해 아일랜드의 아픈 역사 속으로 아주 살짝 들어간 기분이다. 운명의 소용돌이에서 힘겹게 살아남은 사람들. 아름답지만 슬픈 사랑이다. 아일랜드와 영국의 아픈 역사는 물론이고 윌리와 메리언 개인의 삶도 마찬가지다. 모든 걸 포기할 수 없었던 건 무엇이었을까. 굴곡진 삶을 버티고 시간을 견딜 수 있었던 건 서로를 향한 사랑이 아니었을까. 그렇게 그들은 사랑했고 살아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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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스 2024-11-27 15: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제 <예언자의 노래> 읽었는데, 그 책은 가상현실이구요, 이 리뷰 보니 이것도 얼른 읽고 싶네요. 아일랜드 작가들은 특별한 무엇인가가 있다는 생각입니다.

자목련 2024-11-28 17:30   좋아요 1 | URL
아일랜드 작가를 많이 만난 건 아니지만 그들만의 결이 있는 것 같아요.
그레이스 님도 즐겁게 만나시길 바라요.

2024-11-27 18:0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4-11-28 17:32   URL
비밀 댓글입니다.
 
루시 게이하트 휴머니스트 세계문학 32
윌라 캐더 지음, 임슬애 옮김 / 휴머니스트 / 202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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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에 연습이 있다면 잘 살 수 있을까. 아니다, 연습이니까 최선을 다하지 않고 실전에 잘 하면 된다고 생각할 것이다. 연습할 수 없기에 순간의 감정은 가짜가 아닌 진짜 최고가 된다. 시간이 지나면 부끄럽고 후회로 남더라도 말이다. 윌라 캐더의 장편소설 『루시 게이하트』를 읽으면서 루시야말로 그런 삶을 살았구나 싶다.


추위에 떨지 않고 바람에 몸을 맡긴 채 춤추든 발걸음을 내딛던 루시, 어든 계절이든 쉬엄쉬엄은 루시에게 해당되지 않는 말이었다. 지금도 어딘가에서 루시는 그렇게 목적지를 향해 발걸음을 재촉하고 있을 것만 같다. 나는 이 소설이 좋아서, 소설 속 루시를 상상하며 만나고 싶다. 살짝 상기된 얼굴에 긴장을 감추지 않는 표정을 상상한다. 루시의 피아노 연주를 듣고 싶다. 안타까운 사고로 생을 마감했지만 루시를 아는 모든 이의 가슴에는 루시가 살아있을 것이다. 소설로 만난 모든 독자에게도.


작은 마을 해버퍼드 중심가에서도 1킬로미터쯤 떨어진 서쪽 끝자락에 살았던 루시는 피아노를 잘 쳤다. 피아노를 배우기 위해 피아니스트의 꿈을 안고 고향을 떠나 시카고로 간다. 그곳에서 운명의 만남이 이뤄진다. 우연하게 듣게 된 성악가 서배스천의 노래를 듣고 스승의 추천으로 그의 연습 시간 반주자가 된다. 매일 서배스천의 연습실로 향하는 길은 루시에게 가장 행복한 길이 된다. 그건 서배스천도 마찬가지다. 루시를 통해 잊고 있던 생의 기쁨을 생각한다. 서배스천을 향한 루시의 감정은 점점 깊어지고 서배스천 역시 알고 있다. 하지만 두 사람의 관계는 서로를 아끼고 존경하고 행복을 바라는 사이일 뿐이다. 루시는 그렇게 성장하고 있었다.


루시가 성장을 알아본 이가 있었다. 그는 고향에서 가장 부유한 해리였다. 해리는 루시를 찾아온다. 오페라ㄹ를 보며 일주일을 시간을 보낼 셈이다. 루시는 해리가 자신을 찾아온 목적을 짐작했다. 친구를 만나 반갑고 좋았지만 그의 청혼을 받아들일 수는 없었다. 해리는 곧 다른 여자와 결혼했고 루시는 아무렇지 않았다. 루시의 마음에는 서배스천이 있었고 그와 보내는 시간이 가장 소중했다. 둘 사이에 어떤 약속이나 다짐은 없었다. 서배스천은 루시에게 아버지뻘이었고 아내가 있었다. 그건 중요하지 않았다. 서배스천을 통해 배우고 더 좋은 연주를 하고 그의 곁에서 그를 지켜보는 삶을 꿈꿨다. 그러나 꿈은 이뤄질 수 없었다. 비극적인 운명이 도착했다. 공연을 위해 떠난 서배스천이 사고로 죽은 것이다.


루시는 고향으로 돌아왔고 어둠과 침묵의 시간을 보낸다. 아버지와 언니 폴린의 보살핌을 받으며 지내지만 루시의 마음은 쉽게 회복되지 않는다. 해버퍼드에는 루시에 관한 소문이 자자했다. 오며 가며 해리를 볼 수 있었지만 해리는 어떤 틈도 내주지 않았다. 루시는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했다. 추운 거리를 명랑하게 걷는 루시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루시가 어렸을 때부터 지켜본 램지 부인은 루시를 부르고 따뜻한 말을 건넨다. 루시가 겪고 있는 상실과 슬픔을 위로하고 앞으로 살아갈 날에 대한 희망을 전하고 싶었던 것이다. 루시보다 먼저 인생을 살아온 사람으로 루시를 아끼는 마음이 전해진다. 정말 그렇지 않은가. 이제 겨우 스물을 넘긴 나이, 스물하나, 스물둘에게 인생의 봄이 지나고 있을 뿐이니까.


“인생은 짧아. 할 수 있을 때 장미 꽃잎을 그러모아야지. 분명 루시도 조금 모았겠지.”

“조금요.”

“루시는 아직 시작도 안 했어. 봄이 힘든 일이 있었다고 낙담하면 안 돼. 네 앞에 긴 여름이 있는 데다가 모든 일은 때가 되면 풀리기 마련이니까. ” (173쪽)


그러나 타인의 말 한마디로 무너지고 가라앉았던 마음이 일어서는 건 아니다. 루시는 스스로 일어선다.오랜 시간 닫혔던 문을 열고 나간다. 아버지와 폴린과 함께 오페라 순회공연을 보고 온 다음 루시는 잊었던 마음을 찾는다. 순회 극단의 가수의 노래를 듣고 무대에 올라 그를 도와주고 싶었다. 그를 통해 서배스천을 본 것일까. 어떤 뜨거운 갈망. 그랬다. 루시의 가슴엔 여전히 서배스천이 존재하고 있었다.


서배스천 자체가 앎으로 향하는 문이자 길이었다는 걸 깨닫는다. (191쪽)


만약, 만약 생 자체가 연인이라면? (중략) 아, 이제는 알았다! 루시는 가져야만 했다. 도망칠 수 없었다. 다시 세상으로 나아가 그의 정체성을 이루는 모든 것을 손에 넣어야 했다. (192쪽)


루시는 다시 한번 성장했고 앞으로도 성장할 일만 남았다. 이 소설은 루시의 성장에 관한 이야기다. 그것은 수많은 루시를 떠올리게 만든다. 과거에 루시였던 이들에게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이 소설이 아름다운 건 루시 때문이 아니다. 작가가 그려낸 소설 속 모든 인물이 생생하게 살아있고 그들 역시 성장해서다. 루시의 재능과 반짝임을 한눈에 알아보고 지원한 서배스천. 그가 루시를 사랑하는 방식이었다. 루시를 향한 서투른 마음으로 다른 선택을 한 해리의 인생도 그렇다. 고향에 돌아온 루시를 대했던 자신의 행동을 후회하고 반성하며 루시와 그녀의 가족이 모든 떠난 뒤에도 루시를 기억하며 살아가는 해리. 루시의 꿈을 응원하며 음악을 사랑한 아버지, 그런 아버지 대신 가계를 책임지고 살아야 했던 폴린.


혼자 남은 해리가 그 모두를 기억한다. 루시의 반짝이는 삶을 기억하고 무언가를 지향했던 루시를 기억하며 살아간다. 누군가는 루시가 되고 누군가는 해리가 된다. 인생이 연습이 있었다면 그런 전제는 필요 없다. 그러 모아놓은 장미 꽃잎이 적다해도 말이다. 인생이 어느 계절을 살든 순간을 사랑하는 루시가 그랬던 것처럼 차가운 겨울 따위는 두렵지 않을 것이다. 계절이 바뀔 때마다 이 소설이 생각할 것 같다. 어느 계절에 읽어도 좋겠지만 빙판에서 스케이트를 타는 겨울에 만나면 더 애틋하고 아름다울 것 같다. 추운 날에는 살아 있다는 감각이 강렬해진다는 루시를 만날 것만 같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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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야제 2024-11-20 16: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성장소설과 성장영화를 정말 좋아하는지라 소개해주신 소설 <루시 게이하트> 바로 구매했습니다. 추운 날에는 살아있다는 감각이 강렬해진다는 제목에 이끌려 서평을 단숨에 읽었습니다. 여름의 무기력함이 겨울이 되자 사라지는 기분이 참 신기해요. 작년 겨울에 혹독한 추위를 제대로 겪었기에 그런가봐요. ˝연습할 수 없기에 순간의 감정은 가짜가 아닌 진짜 최고가 된다˝ 라는 서두의 문장에 흠뻑 반했습니다. 최근 들어서 경험한 일련의 사건들을 한번에 정리해주는 감사한 문장입니다. 연습이 아닌 삶의 모든 순간들이 이제서야 비로소 아름답게 보이기도 하네요. 덕분에 좋은 소설 읽을 수 있게 되어서 감사합니다! 자목련님의 감각적인 서평들 하나씩 소중하게 읽어나가겠습니다. 조심스럽게 친구신청도 해봅니다ㅎㅎ 따뜻한 겨울 보내세요!

자목련 2024-11-20 17:10   좋아요 1 | URL
안녕하세요, 전야제 님^^
댓글 남겨주시고 친구 신청을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올 겨울도 어마어마하게 춥다고 해요. 하지만 겨울이니 추운 게 당연하겠지 싶은 마음을 가져봅니다. <루시 게이하트>는 정말 아름답고 좋은 소설이에요. 전야제 님도 반하실 게 분명합니다.즐겁게 읽으시길 바라요^^*

레삭매냐 2024-11-25 11: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아주 느린 속도로 읽고 있는
책이라 반갑네요 :>

분발해서 빨리 읽어야겠습니다.
루시 양의 성장소설.

자목련 2024-11-26 10:23   좋아요 0 | URL
루시를 어떻게 만나셨을까 궁금하네요.
리뷰 기다리겠습니다.
 
2024 김승옥문학상 수상작품집
조경란 외 지음 / 문학동네 / 202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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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어진 삶을 살아간다. 각자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한다. 안간힘을 쓰고 끊어질까 불안에 휩싸인다. 무엇으로부터 끊어지고 내쳐지는지도 모르면서 말이다. 그러다 한순간 알게 된다. 사는 건 언제나 불안과 두려움의 연속이며 그것과 화해하는 방법을 알아가는 것이라고. 하지만 그걸 알아차린다 해도 온전히 수긍하기가 어디 쉬운가. 오랜만에 읽은 조경란의 단편 「그들」 속 인물이 안쓰럽게 느껴지는 것도 같은 이유다. 그들과 우리가 다르지 않아서. 그들과 우리가 너무 닮아 애처롭다.


「그들」은 영주와 종소 두 사람의 이야기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노인 우울증을 앓고 있는 어머니와 살고 있는 종소는 대학에서 강의를 했지만 임용 과정에서 제외됐다. 어머니를 지켜보는 일은 힘들고 현재는 일자리가 없는 상태인 종소는 자신을 배제한 최교수에게 복수를 하기 위해 그의 아내 영주가 운영하는 카페를 찾아간다. 복수라니, 어떻게 복수를 하겠다는 말인가.


그에 반해 교수 남편을 두고 카페를 운영하는 영주는 아무런 문제가 없어 보인다. 하지만 아니었다. 이상하게 지금껏 지켜온 생활이 무너져버릴 거란 불안이 영주를 힘들게 한다. 단출한 에코백을 챙겨 카페에 출근해 보내는 시간이 영주에게 위안이다. 손님으로 온 종소가 남편과 아는 사이라는 걸 안 후에도 불편하지 않다. 둘 사이에 미묘한 감정의 교류가 오가는 건 아니다. 그저 뭐랄까. 서로의 불안을 조금 알아차리는 것 같다고 할까.


경제적 어려움과 어머니의 우울증을 지켜보는 종소, 학교 폭력의 가해자인 아들 상현과 그를 보호하는 남편으로부터 거리를 두고 싶은 영주. 카페 주인과 손님으로 그저 인사를 나누고 스치듯 대화를 나누며 손님의 뜯어진 주머니를 꿰매줄 수 있는 사이. 그러다 종소가 카페 화장실을 사용하려고 문을 밀었을 때 안에 있던 사람의 머리를 다치는 일이 일어났다. 종소와 영주가 다친 손님을 두고 어찌할 바를 모를 때 최교수가 신속하고 원만하게 처리한다. 그동안의 모든 문제가 해결된 것처럼.


물론 그런 건 아니다. 영주에겐 아들 상현과 종소에겐 일자리와 어머니에 대한 걱정이 있다. 하지만 일상은 이어진다. 종소는 아침마다 어머니를 살피고 재활용 쓰레기를 정리하고 어머니가 부탁한 소금을 사야 한다. 영주는 고장 난 전기밥통을 고쳐야 했다. 소소하지만 당장 해야 하는 일들이다. 삶이란 그런 것이다. 그들처럼 우리에게도 마찬가지다. 종소의 어머니에게 소금이 있으면 괜찮아지는 것처럼 그들과 우리에게도 저마다의 소금이 존재할 것이다. 살아갈 수 없는 일들은 아직 일어나지 않았다. 그것만으로 현재를 긍정하기에 충분한 거 아니겠냐고 조경란은 말한다.


소금. 어머니가 여름에 가장 필요로 하는 것은 소금이었다. 어머니는 어떤 한시적인 어려움이 생겨도 먹는 일에 관해서는 소금만 있으면 겪어낼 수 있다고 믿었고 중소에게 여름은 소금만으로는 부족한 계절이었다. (중략) 그러니까 어머니는 올여름을 지나실 모양인가보다고. 십 킬로그램짜리 천일염을 몇 포대쯤 사놓으면 어머니가 계속 살아가고 싶어할까. (「그들」, 40~41쪽)


「그들」 다음으로 「조각들」이란 동명의 단편이 인상적이다. 반수연의 「조각들」과 이승은의 「조각들」이다. 반수연의 단편은 어린 딸을 위해 한국을 떠나 밴쿠버에서 자리 잡은 목수 아버지와 성인이 된 딸이 미국으로 취업을 해 독립하는 과정을 그린다. 이민자의 삶이란 세대가 변하면서 조금씩 변화한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아버지는 다양한 삶을 인정한다. 이해하지 못하는 타국의 청년의 자리에 딸이 있다는 걸 알게 되는 것이다. 딸이 살아갈 집을 살피고 고치는 모습은 우리가 삶을 살아가는 태도와 다르지 않다.


출입문 나사는 조일수록 헛돌았다. 나사를 단단히 물고 있어야 할 나무가 썩어 부스러기가 떨어져나왔다. 이 상태라면 금세 나가가 헐거워져 문이 저절로 열리거나, 열어야 할 때 열리지 않을 것이었다. 고민을 하다가 썩은 부분을 도려내기로 했다. (반수연의 「조각들」, 176쪽)


이승은의 「조각들」은 잃어버린 것들을 찾으려는 사람의 이야기다. 카페를 운영하며 수제 쿠키를 팔던 서경은 현재 타운 하우스의 입주 도우미로 생활한다. 다시 카페를 운영할 계획을 세우며 주인 부부가 여행을 떠난 사이 쿠키를 굽는다. 평화롭고 여유로운 일상은 옆집에서 온 손님이 찾아오며 조각난다. 놀랍게도 그들은 과거 서경이 카페를 운영했을 당시 가게의 물건을 훔친 고등학생들이었다. 옆집이 고모 집이라며 그곳에서 영화를 찍을 거라고. 서경은 그들을 도우면서 타운 하우스의 진짜 주인처럼 행동한다. 주인 부부가 예정보다 일찍 도착하면서 서경은 난감한 상황에 처하고 위기를 모면하려 거짓말을 하기에 이른다. 의도하지 않았지만 자신은 구할 수 있는 방법은 그뿐이었으니까.


서경은 산산이 부서진 삶의 조각들을 찾아 헤매는 중이다. 조각들을 모아서 원하는 삶을 다시 꾸리고 그 조각을 사람들과 나누는 날을 꿈꾼다. 부단한 노력으로 잃은 것들을 되찾을 수 있다고 믿는 사람이다. 서경은 그것을 되찾을 수 있을까. 찾을 수 있다고 믿어도 되는 걸까. 서경은 무모한 사람일까. 아니면 용감한 사람일까. (이승은의 「조각들」, 312쪽)


세월호 참사 십 년을 담담하게 기록한 조해진의 「내일의 송이에게」, 바람을 피우는 아들의 뒤를 밟는 노인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강태식의 「그래도 이 밤은」, 정신질환을 겪는 아들을 돌보는 가족과 그들을 바라보는 사회의 시선을 그린 안보윤의 「그 날의 정모」까지 다채로운 단편을 만날 수 있다.


가장 이색적이고 기발하고 놀라웠던 단편은 신용목의 「양치기들의 협동조합」였다. 산티아고 순례자 길을 걷는 화자가 스페인 내전 당시 희생된 주민들의 무덤에 군자금이 묻혀 있다는 소문을 듣고 그곳을 찾는다. 그러나 무덤을 파헤치는 밤이 지나고 그곳에 어떤 곳인지 깨닫는다. 아픈 역사의 현장이자 삶의 터전이었다는 것을 말이다. 픽션이지만 정말 어딘가 그런 곳이 존재할 것 같은 착각과 함께 소문에 가려 우리는 진짜 역사를 놓치고 있는 게 아닐까 반성하게 만든다.


불안한 삶을 달래고 위로해 줄 고정된 무언가를 생각한다. 그것은 안정된 일 자리와 언제나 든든한 내 편이라는 누군가로 이어진다. 그러다 생각을 달리한다. 삶은 언제나 불안정하다고. 상수(常數)였다고 믿었던 것도 변수(變數)가 된다고. 그게 삶이라고. 그러니 한여름을 지낼 수 있을 정도의 소금으로 충분할지도 모른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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