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2024 김승옥문학상 수상작품집
조경란 외 지음 / 문학동네 / 2024년 10월
평점 :
주어진 삶을 살아간다. 각자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한다. 안간힘을 쓰고 끊어질까 불안에 휩싸인다. 무엇으로부터 끊어지고 내쳐지는지도 모르면서 말이다. 그러다 한순간 알게 된다. 사는 건 언제나 불안과 두려움의 연속이며 그것과 화해하는 방법을 알아가는 것이라고. 하지만 그걸 알아차린다 해도 온전히 수긍하기가 어디 쉬운가. 오랜만에 읽은 조경란의 단편 「그들」 속 인물이 안쓰럽게 느껴지는 것도 같은 이유다. 그들과 우리가 다르지 않아서. 그들과 우리가 너무 닮아 애처롭다.
「그들」은 영주와 종소 두 사람의 이야기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노인 우울증을 앓고 있는 어머니와 살고 있는 종소는 대학에서 강의를 했지만 임용 과정에서 제외됐다. 어머니를 지켜보는 일은 힘들고 현재는 일자리가 없는 상태인 종소는 자신을 배제한 최교수에게 복수를 하기 위해 그의 아내 영주가 운영하는 카페를 찾아간다. 복수라니, 어떻게 복수를 하겠다는 말인가.
그에 반해 교수 남편을 두고 카페를 운영하는 영주는 아무런 문제가 없어 보인다. 하지만 아니었다. 이상하게 지금껏 지켜온 생활이 무너져버릴 거란 불안이 영주를 힘들게 한다. 단출한 에코백을 챙겨 카페에 출근해 보내는 시간이 영주에게 위안이다. 손님으로 온 종소가 남편과 아는 사이라는 걸 안 후에도 불편하지 않다. 둘 사이에 미묘한 감정의 교류가 오가는 건 아니다. 그저 뭐랄까. 서로의 불안을 조금 알아차리는 것 같다고 할까.
경제적 어려움과 어머니의 우울증을 지켜보는 종소, 학교 폭력의 가해자인 아들 상현과 그를 보호하는 남편으로부터 거리를 두고 싶은 영주. 카페 주인과 손님으로 그저 인사를 나누고 스치듯 대화를 나누며 손님의 뜯어진 주머니를 꿰매줄 수 있는 사이. 그러다 종소가 카페 화장실을 사용하려고 문을 밀었을 때 안에 있던 사람의 머리를 다치는 일이 일어났다. 종소와 영주가 다친 손님을 두고 어찌할 바를 모를 때 최교수가 신속하고 원만하게 처리한다. 그동안의 모든 문제가 해결된 것처럼.
물론 그런 건 아니다. 영주에겐 아들 상현과 종소에겐 일자리와 어머니에 대한 걱정이 있다. 하지만 일상은 이어진다. 종소는 아침마다 어머니를 살피고 재활용 쓰레기를 정리하고 어머니가 부탁한 소금을 사야 한다. 영주는 고장 난 전기밥통을 고쳐야 했다. 소소하지만 당장 해야 하는 일들이다. 삶이란 그런 것이다. 그들처럼 우리에게도 마찬가지다. 종소의 어머니에게 소금이 있으면 괜찮아지는 것처럼 그들과 우리에게도 저마다의 소금이 존재할 것이다. 살아갈 수 없는 일들은 아직 일어나지 않았다. 그것만으로 현재를 긍정하기에 충분한 거 아니겠냐고 조경란은 말한다.
소금. 어머니가 여름에 가장 필요로 하는 것은 소금이었다. 어머니는 어떤 한시적인 어려움이 생겨도 먹는 일에 관해서는 소금만 있으면 겪어낼 수 있다고 믿었고 중소에게 여름은 소금만으로는 부족한 계절이었다. (중략) 그러니까 어머니는 올여름을 지나실 모양인가보다고. 십 킬로그램짜리 천일염을 몇 포대쯤 사놓으면 어머니가 계속 살아가고 싶어할까. (「그들」, 40~41쪽)
「그들」 다음으로 「조각들」이란 동명의 단편이 인상적이다. 반수연의 「조각들」과 이승은의 「조각들」이다. 반수연의 단편은 어린 딸을 위해 한국을 떠나 밴쿠버에서 자리 잡은 목수 아버지와 성인이 된 딸이 미국으로 취업을 해 독립하는 과정을 그린다. 이민자의 삶이란 세대가 변하면서 조금씩 변화한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아버지는 다양한 삶을 인정한다. 이해하지 못하는 타국의 청년의 자리에 딸이 있다는 걸 알게 되는 것이다. 딸이 살아갈 집을 살피고 고치는 모습은 우리가 삶을 살아가는 태도와 다르지 않다.
출입문 나사는 조일수록 헛돌았다. 나사를 단단히 물고 있어야 할 나무가 썩어 부스러기가 떨어져나왔다. 이 상태라면 금세 나가가 헐거워져 문이 저절로 열리거나, 열어야 할 때 열리지 않을 것이었다. 고민을 하다가 썩은 부분을 도려내기로 했다. (반수연의 「조각들」, 176쪽)
이승은의 「조각들」은 잃어버린 것들을 찾으려는 사람의 이야기다. 카페를 운영하며 수제 쿠키를 팔던 서경은 현재 타운 하우스의 입주 도우미로 생활한다. 다시 카페를 운영할 계획을 세우며 주인 부부가 여행을 떠난 사이 쿠키를 굽는다. 평화롭고 여유로운 일상은 옆집에서 온 손님이 찾아오며 조각난다. 놀랍게도 그들은 과거 서경이 카페를 운영했을 당시 가게의 물건을 훔친 고등학생들이었다. 옆집이 고모 집이라며 그곳에서 영화를 찍을 거라고. 서경은 그들을 도우면서 타운 하우스의 진짜 주인처럼 행동한다. 주인 부부가 예정보다 일찍 도착하면서 서경은 난감한 상황에 처하고 위기를 모면하려 거짓말을 하기에 이른다. 의도하지 않았지만 자신은 구할 수 있는 방법은 그뿐이었으니까.
서경은 산산이 부서진 삶의 조각들을 찾아 헤매는 중이다. 조각들을 모아서 원하는 삶을 다시 꾸리고 그 조각을 사람들과 나누는 날을 꿈꾼다. 부단한 노력으로 잃은 것들을 되찾을 수 있다고 믿는 사람이다. 서경은 그것을 되찾을 수 있을까. 찾을 수 있다고 믿어도 되는 걸까. 서경은 무모한 사람일까. 아니면 용감한 사람일까. (이승은의 「조각들」, 312쪽)
세월호 참사 십 년을 담담하게 기록한 조해진의 「내일의 송이에게」, 바람을 피우는 아들의 뒤를 밟는 노인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강태식의 「그래도 이 밤은」, 정신질환을 겪는 아들을 돌보는 가족과 그들을 바라보는 사회의 시선을 그린 안보윤의 「그 날의 정모」까지 다채로운 단편을 만날 수 있다.
가장 이색적이고 기발하고 놀라웠던 단편은 신용목의 「양치기들의 협동조합」였다. 산티아고 순례자 길을 걷는 화자가 스페인 내전 당시 희생된 주민들의 무덤에 군자금이 묻혀 있다는 소문을 듣고 그곳을 찾는다. 그러나 무덤을 파헤치는 밤이 지나고 그곳에 어떤 곳인지 깨닫는다. 아픈 역사의 현장이자 삶의 터전이었다는 것을 말이다. 픽션이지만 정말 어딘가 그런 곳이 존재할 것 같은 착각과 함께 소문에 가려 우리는 진짜 역사를 놓치고 있는 게 아닐까 반성하게 만든다.
불안한 삶을 달래고 위로해 줄 고정된 무언가를 생각한다. 그것은 안정된 일 자리와 언제나 든든한 내 편이라는 누군가로 이어진다. 그러다 생각을 달리한다. 삶은 언제나 불안정하다고. 상수(常數)였다고 믿었던 것도 변수(變數)가 된다고. 그게 삶이라고. 그러니 한여름을 지낼 수 있을 정도의 소금으로 충분할지도 모른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