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랍에 저녁을 넣어 두었다 문학과지성 시인선 438
한강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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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좋아하는 작가의 책은 곁에 두고도 바로 읽지 않는 경우가 있다. 언제나 그 자리에 있을 테니, 생각 날 때 읽고 싶을 때 읽으면 된다는 생각 때문이다. 한강의 시집도 그렇게 머물러 있었다. 처음 몇 편의 시만 읽고 단편소설에서 만났던 이미지와 겹쳐지는 부분에서는 시가 소설의 근원이었을지도 모른다고 내 멋대로 생각했다. 하나의 서사시 같았던 소설이 시집에 있었다. 생경한 느낌보다는 책상에 앉아 키보드에 손을 올리고 시를 쓰는 한강, 하나의 사물을 오래도록 바라보는 그의 서늘하면서도 따뜻한 시선이 내게 닿는 듯했다.

 

 나는 지금/피지 않아도 좋은 꽃봉오리거나/이미 꽃잎 진/꽃대궁/이렇게 한 계절 흘러가도 좋다//누군가는 목을 매달았다 하고/누군가는/제 이름을 잊었다 한다/그렇게 한 계절 흘러가도 좋다//새벽은/푸르고/희끗한 나무들은/속까지 얼진 않았다//고개를 들고 나는/찬 불덩이 같은 해가/하늘을 다 긋고 지나갈 때까지/두 눈이 채 씻기지 않았다//다시/견디기 힘든/달이 뜬다//다시/아문 데가/벌어진다//이렇게 한 계절/더 피 흘려도 좋다  (「새벽에 들은 노래3」전문)

 

 푸르스름한/어둠 속에 웅크리고 있었다/밤을 기다리고 있었다고 생각했는데/찾아온 것은 아침이었다/(「저녁 잎사귀」일부)

 

 매일 찾아오는 새벽과 저녁은 고요와 적막을 선물하고 그 시간은 자신을 응시할 수 있는 유일한 순간이다. 그곳에서 길어올린 언어로 시인은 읊조린다. 누구나 견뎌내야 하는 삶의 고통을 담담히 노래한다. 시인은 어떤 일이 닥쳐와도 지난 그 순간을 떠올리면 아무렇지 않게 지나갈 것이라 말한다. ‘다시 아문 데가 벌어지면’ 얼마나 쓰라리고 아플까. 느닷없이 찾아오는 죽음을 애도하는 일, 그리고 살아가는 고통스러운 일이 삶이라는 걸 그는 다 아는 듯 냉정할 정도로 차분할 뿐이다. 그럼에도 시를 둘러싼 우울과 어둠은 어찌할 수 없다. 

 

 검은 옷의 친구를 일별하고 발인 전에 돌아오는 아

침 차창 밖으로 늦여름의 나무들 햇빛 속에 서 있었

다 나무들은 내가 지나간 것을 모를 것이다 지금 내

가 그중 단 한 그루의 생김새도 떠올릴 수 없는 것처

럼 그 잎사귀 한 장 몸 뒤집는 것 보지 못한 것처럼

그랬지 우린 너무 짧게 만났지 우우우 몸을 떨어 울

었다 해도 틈이 없었지 새어들 숨구멍 없었지 소리

죽여 두 손 내밀었다 해도 그 손 향에 문득 놀라 돌아

봤다 해도  (「여름날은 간다」전문)

 

 소설에서 보았던 이미지가 고스란히 겹쳐진 시를 읽는다. 그러다 궁금해진다. 시가 먼저였을까, 소설이 먼저였을까. 『희랍어 시간』속 말을 잃은 여자와 「회복하는 인간」속 화자를 만난다. 어쩌면 작가의 지속적인 관심이 인간의 고통에 닿았기에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침묵 속으로 파고들 수밖에 없는 고통의 시간, 버티고 버티어 회복과 마주하기를 간절히 바랐던 순간과 부서져서 피 흘리는 영혼의 조각을 다시 이어붙이려는 몸짓을 본다. 그것이 어느 시절 나의 모습이며 당신의 눈물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어느 순간 시는 우리 삶의 일부가 된다. 반복되는 절망을 버티는 순간 살아 있다는 걸 확인하기도 하니까.

 

 이 어스름한 저녁을 열고/세상의 뒤편으로 들어가 보면/모든 것이/등을 돌리고 있다//고요히 등을 돌린 뒷모습들이/차라리 나에겐 견딜 만해서/되도록 오래/여기 앉아 있고 싶은데 (「피 흐르는 눈 4」의 일부)

 

 이제/살아가는 일은 무엇일까//물으며 누워 있을 때/얼굴에 햇빛이 내렸다//빛이 지나갈 때까지/눈을 감고 있었다/가만히 (「회복기의 노래」전문)

 

 

 그래도 한 번쯤은 정말 누군가에게 묻고 싶다. 살아가는 일은 무엇일까. 운명에게 말을 걸 수 있다면, 지난한 시간의 의미를 묻고 싶은 마음은 「서시」 가 대신한다. 얼마나 힘들었냐고, 괜찮다고, 어디서나 너를 지켜보았노라고 말하는 운명을 저버릴 수 없을 것만 같다. 한강은 어떤 경험을 통해 이런 시를 쓴 것은 아닐까. 혹독할 정도로 텅 빈 충만을 느낀다. 

 

 어느 날 운명이 찾아와/나에게 말을 붙이고/내가 네 운명이란다, 그동안/내가 마음에 들었니, 라고 묻는다면/나는 조용히 그를 끌어안고/오래 있을 거야./눈물을 흘리게 될지, 마음이/한없이 고요해져 이제는/아무것도 더 필요하지 않다고 느끼게 될지는/잘 모르겠어.//당신, 가끔은 당신을 느낀 적이 있었어,/라고 말하게 될까./당신을 느끼지 못할 때에도/당신과 언제나 함께였다는 것을 알겠어,/라고.//아니, 말은 필요하지 않을 거야./당신은 내가 말하지 않아도/모두 알고 있을 테니까./내가 무엇을 사랑하고/무엇을 후회했는지/무엇을 돌이키려 헛되어 애쓰고/끝없이 집착했는지/매달리며/눈먼 걸인처럼 어루만지며/때로는/당신을 등지려고 했는지//그러니까/당신이 어느 날 찾아와/마침내 얼굴을 보여줄 때/그 윤곽의 사이 사이,/움푹 파인 눈두덩과 콧날의 능선을 따라/어리고/지워진 그늘과 빛을/오래 바라볼 거야./떨리는 두 손을 얹을 거야./거기,/당신의 뺨에,/얼룩진  (「서시」전문)

 

 

 어디 있니. 너에게 말을 붙이려고 왔어. 내 목소리

들리니. 인생 말고 마음, 마음을 걸려고 왔어. 저녁이

내릴 때마다 겨울의 나무들은 희고 시린 뼈들을 꼿꼿

이 펴는 것처럼 보여. 알고 있니. 모든 가혹함은 오래

지속되기 때문에 가혹해. (「몇 개의 이야기 6」전문)

 

 「저녁의 소묘」, 「새벽에 들은 노래」, 「피 흐르는 눈」, 「거울 저편의 겨울」 연작들은 제목만 다를 뿐 하나로 이어진 듯하다. 어둡고 음울한 분위기, 겹겹이 쌓인 낮고 작은 음성이 심연 속으로 파고든다. 새벽, 저녁, 어스름, 영혼, 죽음, 고독, 그리고 언어에 대한 지속적인 탐구. 저녁이라는 시간은 시인에게 우리가 아는 그 저녁과 다른 시간이었다. 뭐라 설명할 수 없는 깊은 슬픔과 고독이 그곳에 존재했고 거기서 시가 피어나고 소설이 잉태되고 있었다. 그러니까 저녁은 모든 감정을 응축시킨 힘이었다. 가만히 생각한다. 언젠가 슬픔이 있는 저녁을, 죽음으로부터 시작되는 삶이라는 저녁을, 고통과 절망으로 채워진 저녁을 꺼낼 수 있기를 바라며. 서랍 속에서 구겨진 채로 잠든 그들을 깨우지 않고 가만히 토닥일 수 있는 투명한 고요와 마주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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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니데이 2016-12-23 15:1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한강 작가의 시집이네요.
요즘 날씨가 추워졌어요.
자목련님, 따뜻하고 좋은 금요일 보내세요.^^

서니데이 2016-12-23 22: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목련님, 2016 서재의달인 축하드립니다.
행복한 크리스마스 되세요.^^

자목련 2016-12-26 10:04   좋아요 1 | URL
서니데이 님의 다정한 마음이 더해진 크리스마스를 보냈어요.
감기 조심하시고 남은 2016년 평온하게 채우세요. 고맙습니다^^*
 
없는 사람
최정화 지음 / 은행나무 / 201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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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오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돈 때문에 움직이지라는 문장이 마음에 걸렸다. 그 대부분의 사람들에 자신이 속한다고 생각하니까 어쩐지 자존심이 상했다. 하지만 그건 거부할 수 없는 사실이기도 했다. 돈으로 움직일 수 엇는 사람이 될 수 있다면 좋았겠지만 그렇지 않으니 그렇지 않은 사람으로 사는 수밖에 없었다.’ (196쪽)

 

 능동적인 삶과 수동적인 삶의 차이는 무엇일까. 누군가는 삶의 주인이 누구냐에 따라 다르다고 말할지도 모른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삶의 주인이 누구냐는 묻는 자체는 우습지 않은가. 저마다의 삶은 주인은 바로 자신이니까. 최정화의 『없는 사람』을 읽고 우리는 모두 능동적인 삶과 수동적인 삶의 경계에 서 있는 게 아닐까 생각했다. 왜 그러냐고 묻는다면 자신 있게 설명할 수 없다. 막연하게 그런 생각이 들었으니까. 

 

 소설은 ‘도트’라는 인물을 감시하며 그의 행적을 이부에게 보고하는 무오의 이야기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도트는 누구이며, 그를 감사하는 이유는 무엇이며, 누가 그를 감시하라고 지시했는가 묻지 않을 수 없다. 단순하게 무오는 돈을 많이 벌고 싶어 이부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자신에게 말을 걸고 지켜봐 주며 돈까지 벌게 해주는 이부가 무오는 가족 같았다. 일은 아주 쉽게 여겨졌다. 도트, 그러니까 점을 따라다니는 일은 어렵지 않았고 도트란 인물에게 궁금한 게 없었다. 처음에 무오에게 도트는 하나의 점에 불과했으니까. 그러나 점점 무오에게 주어진 일은 커졌고 도트는 점이 아닌 선이 되어가고 있었다.

 

 무오는 이부에게 질문하고 싶은 게 생겼다. 파업 현장에서 노동자의 지도자인 도트가 선창하는 구호를 외치면 외칠수록 도트를 향한 다른 마음이 자라기 시작했다. 시위 진압에 대한 정보를 주고 대비하라고 말하고 싶었고 자리를 이탈하며 갈등하는 도트에게 자신의 역할을 잊지 말라고 알려주고 싶었다. 사측에서 고용한 용역이었던 무오는 노동자의 자리에서 그들처럼 살고 싶었던 것이다. 도트의 목소리는 무오의 가슴을 깊게 파고들었다. 함께 파업을 하는 노동자가 되고 싶었다.

 

 진짜가 되고 싶다. 그게 무오의 진심이었다. 농성장의 이들에게 신의를 지키고 싶은 것이, 지부장을 일깨워 대책을 마련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래서 상황이 바뀔 거라고 믿는 것이 아니었다. 진짜가 되고 싶었다. 진짜로 이들 중 하나가 되는 것. 이들과 다르지 않은 농성대원이 되는 것. 여기에 속하는 것. 온전히 속하는 것. 이들과 다른 점 없이 섞이는 것. 그것을 원했다. (203~204쪽)

 

 무오는 덩그러니 혼자의 삶이 아닌 우리가 되는 삶을 살고 싶었던 건 아닐까. 그들로 인해 나를 설명할 수 있는 삶, 능동적으로 살고 있다는 확신 같은 거 말이다. 돈 때문에 사는 게 아니라 나 자신을 위해 사는 삶을 간절하게 바랐는지도 모른다. 그것은 도트, 이부, 그리고 농성장의 노동자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소설을 읽으면서 떠올릴 수 있는 현장이 많다는 건 아프고 아픈 일이다. 여전히 진행 중이라는 게 다행이라 여겨야 할까.

 

 소설은 우리 사회의 노동 현실을 고스란히 보여주고 고발한다. 그러나 결국 그 안에서 만나는 건 개인의 고통이었고 불안한 삶이었다. 불안을 껴안으면서 나로 존재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이들. 같은 세상을 사는 우리는 소망한다. 수많은 도트가 멈추지 않고 이동하고 있기를 바란다. 점에서 선으로 그리고 면으로 확장되기를 바란다. 그리하여 없는 사람이 아니라 있는 사람으로 존재하기를, 세상 어디에도 없는 사람은 존재하기 않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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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물선 2016-12-13 17: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도 샀어요!

자목련 2016-12-14 07:47   좋아요 0 | URL
리스트가 겹치는 게 신나고 좋아요!!
 
바다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44
존 밴빌 지음, 정영목 옮김 / 문학동네 / 201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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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요한 말은 쉽게 나오지 않는다. 대체로 그러하다. 꼭 해야 할 말이기에 고민하고 고민한 후에야 하게 된다. 누군가는 비밀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존 밴빌의 소설 『바다』를 읽으면서 나는 내내 그런 생각을 했다. 중요한 말, 꼭 해야 하는 말을 하기 위한 연습과 연습을 하는 주인공 맥스의 마음을 헤아려 보려고 했다. 그것은 삶에 대한 이야기였다. 그러니 누군가에게는 특별할 것도 없는 이야기일지도 모른다. 맥스는 아내 애나가 암으로 죽고 50년 전의 어린 시절에 보냈던 시더스로 돌아온다.

 

 돌아온다는 건 맞은 말이 아닌지도 모른다. 애도할 수 있는 공간이 필요했고 상실의 자리를 채울 무언가가 필요했던 것이다. 그런 맥스를 딸 클레어는 이해할 수 없었다. 도망치듯 과거로 들어가는 아빠를 말이다. 그런데 왜 하필 시더스였을까. 시더스, 그곳은 그레이스 가족이 머물던 곳으로 맥스에게는 신들의 집이었다. 자신과는 다른 삶을 사는 그레이스 가족이 맥스에게는 신(神)의 존재였다. 맥스는 현재가 아닌 과거로 빠져가듯 소설은 그 시절, 그러니까 맥스가 쌍둥이였던 클로이와 마일스와 함께 어울리던 시절로 초대한다.

 

 ‘숨겨지고, 보호받는 것, 그것이 내가 진정으로 원하던 것이었다. 자궁처럼 따뜻한 곳으로 파고들어 거기에 웅크리는 것, 하늘의 무심한 눈길과 거친 바람의 파괴들로부터 숨는 것. 그래서 과거란 나에게 단지 그러한 은둔일 뿐이다. 나는 손을 비벼 차가운 현재와 더 차가운 미래를 털어내며 열심히 그곳으로 간다. 하지만 정말이지 그것이, 과거가 어떤 존재를 가지고 있을까? 결국 과거란 현재였던 것, 한때 그랬던 것, 지나간 현재일 뿐이다. 그 이상이 아니다. 그래도.’ (62쪽)

 

 소설은 현재와 과거를 오며가 아내와 그레이스 가족과 보낸 시간을 차분하면서도 선명하게 들려준다. 가만히 맥스가 들려주는 이야기를 듣노라면 그 집 앞에 서 있는 것만 같다. 맑고 투명한 여름의 비릿하면서도 달콤한 바다 냄새를 상상한다. 나른한 표정을 짓고 바다를 응시하는 그레이스 부인과 새침한 표정으로 맥스를 바라보는 소녀 클로이와 목소리를 숨긴 채 바다를 유영하는 마일스를 알고 있었던 것처럼 그들의 풍경을 그려낼 수 있을 것만 같은 착각에 빠진다. 잠시 머물던 하숙집에 불과했던 시더스가 생동감 있게 그려지는 것이다. 적어도 맥스에게 그곳은 살아있는 공간이었다. 아내를 잃고 힘든 시간을 위로하고 달래줄 수 있는 유일한 곳이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죽을 때까지 죽은 자를 이고 갈 뿐이다. 그런 다음에는 누군가가 우리는 잠시 이고 가고, 그런 다음에는 또 누군가가 우리를 이고 갔던 자들을 이고 가고, 이렇게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먼 세대들로 이어져간다. 나는 애나를 기억하고, 우리 딸 클레어는 애나를 기억하고 나를 기억할 것이며, 그뒤에는 클레어도 사라질 것이고, 클레어를 기억하지만 우리는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생겨날 것이다. 그것으로 우리는 최종적으로 소멸한다.’ (114쪽)

 

 애나와의 이별은 예정된 것이었다. 그러나 삶에서 자신의 일부를 떼어내는 아픔은 예정된 것보다 더 크고 깊은 통증이었다. 맥스에게 남겨진 삶은 그래서 더 힘들고 외로웠고 누군가가 그리웠고 필요했다. 그러나 맥스은 자신의 결핍을 채울 수 있는 건 새로운 누군가가 아닌 기억과 추억이라고 확신한다. 어쩌면 맥스의 삶은 현재가 아닌 과거를 살고 싶었던 건 아닐까. 성적 호기심에 그레이스 부인을 흠모했던 소년이 자석에 끌리듯 당돌한 클로이에게 마음을 뺏기고 사랑에 빠진다. 감당할 수 없는 감정의 소용돌이에서 나오기도 전에 맥스는 클로이와 마일스의 죽음과 맞닿는다. 소년은 이제 존재하지 않는다. 그들이 머물렀던 공간에 누운 늙은 원숭이만 있을 뿐이다. 죽음을 거부하지 않고 받아들이던 애나를 생각하는 밤은 끝없이 펼쳐진 바다와 하나가 된다.

 

 ‘밤이다. 고즈넉하기 짝이 없다. 아무도 없는 것 같다. 나 자신도 없는 것 같다. 바닷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다른 밤이면 우르렁대고 으르렁거릴 텐데, 가까워져 삐걱거리는가 하면, 멀어지며 희미해질 텐데. 나는 이렇게 혼자이고 싶지 않다. 왜 돌아와서 나를 쫓아다니지 않는 거야? 내가 당신한테 최소한 그 정도는 기대할 수 있는 거 아냐? 왜 날이면 날마다, 밤이면 그 끝도 없는 밤마다 이런 적막인 거야? 꼭 안개 같아, 당신의 이런 침묵은.’ (228쪽)

 

 따지고 보면 우리 삶에서 영원한 건 없듯 맥스의 삶에서도 그러했다. 삶은 친구처럼 죽음을 데려오고 남겨진 삶은 다시 그 친구를 기다리는 일이다. 잔인한 진실이다. 존 밴빌은 당연하고도 처연한 진실을 너무도 아름답게 그렸다. 아련하게 겹겹이 쌓인 기억의 자물쇠를 열어 바다에 풀어놓았다. 언제나 그 자리에 있는 바다는 시더스를 닮았다. 그래서 나는 이토록 유려하면서도 몽롱하고 어려운 소설에 더 가까이 닿고 싶은 욕망을 키운다. 저마다의 기억에 자리한 시더스를 생각한다. 내가 잊고 있던 시절, 나를 흔든 신(神)이 누구였는지 생각한다. 그리하여 첫 문장‘그들은, 신들은 떠났다.’에 담긴 맥스의 마음을, 그 아름다운 슬픔의 무게를 감당하고 싶다. 결코 헤아릴 수 없다 하더라도, 그러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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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월 26일에 첫눈이 내렸다. 이곳이 아닌 그곳에 머물렀을 때 만난 눈이다. 사진은 눈이 내릴 당시 놀이터의 모습이다. 제대로 찍지 못했지만 내가 찍고 싶었던 건 눈이 아니라 노란 모과였기에 만족하는 사진이다. 첫눈이 내리고 며칠 뒤에 모과는 한 알도 남아 있지 않았다. 아마도 경비 아저씨가 모두 딴 것 같다. 

 

 첫눈이 내릴 당시 나는 첫눈이 오고 있다는 걸 두 명에게 전했다. 한 명은 김장을 담그는 사진을 보내왔고, 다른 한 명은 늦은 시각에 촛불시위에 다녀왔노라고 말했다. 첫눈을 맞으며 김장을 담근 친구, 첫눈이 아닌 비를 맞으며 촛불을 들고 있었을 언니. 그리고 첫눈은 녹아버렸다.

 

 

 

 

 

 

 

 지난 목요일에 이곳으로 돌아오니 복도의 창문공사가 마무리되고 있었다. 공사라는 말은 거창하다. 뚫려있던 부분이 막히니 답답하면서도 안전한 느낌이 들었다. 예전처럼 난간에 고개를 내밀고 밖을 바라보는 일이 줄어들 것이다. 비가 오거나 많은 눈이 내리면 미끄럽고 얇게 얼음이 얼었던 복도는 만나지 못할 것이다.

 

 12월은 김치냉장고를 가득 채운 김장과 함께 풍요로움으로 시작한다. 귤이나 사과 같은 과일이 식탁 위에 자주 잠을 자고 사은품으로 달력을 준다는 온라인 서점의 광고 메일을 받는다. 예쁜 탁상 달력과 함께 온 책은 아니지만 12월에는 이런 책이 함께 있다. 괜히 기분이 맑아지는 정용준의『선릉 산책』, 50명의 이야기가 궁금해지는 정세랑의『피프티 피플』, 제목처럼 괜찮은 사람이란 누구일까, 궁금해지는 강화길의『괜찮은 사람』, 겨울에 만나는 윌리엄 트레버의 『여름의 끝』, 아직 도착하지 않은 황정은의 『아무도 아닌』이 나의 12월을 채운다. 

 

 

 

 

 

 

 

 

 

 

 

 

 

 

 내년을 말하기가 겁난다. 어떤 변화를 기대해도 괜찮을까. 박근혜 대통령에 대한 탄핵소추안이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다는 소식, 기대해도 좋다는 답을 들은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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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물선 2016-12-09 18: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두권 겹침!

자목련 2016-12-10 14:50   좋아요 1 | URL
황정은과 정용준이 겹치지 않을까, 싶어요.
좋은 소설을 보물선 님과 함께 읽는 즐거움^^
 
오늘처럼 고요히
김이설 지음 / 문학동네 / 201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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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죽을 만큼 힘들다고 말한다. 죽을 만큼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것인지 잘 알지도 못하면서 습관처럼 내뱉는다. 내게 주어진 삶이 가장 힘드니까 남들이 어떻게 살든 관망할 여유도 없다. 그게 산다는 일이다. 하지만 때때로 모든 걸 다 내려놓고 다시 시작할 수 있다면 새로운 삶을 향해 있는 힘을 다해 달릴 수 있다고 생각한다. 설령 헛된 꿈이라도 말이다. 돌아보면 그곳의 모든 흔적은 내가 만든 것인데 왜 그렇게 살았나, 후회가 밀려온다. 김이설의 소설에는 후회라기보다는 한탄에 가까운 외침이 있다. 아니, 그것은 비명일지도 모른다. 더 비참해진 삶, 더 잔혹해진 사람들, 소설의 인물들은 지독한 세상을 닮아가듯 비루한 생을 이어간다. 그럼에도 그들은 삶을 포기하지 않고 살아간다. 어깨를 짓누르는 절망에 지지 않고 말이다. 그게 삶이니까.

 

 결국 스스로 이겨내야 한다. 다른 사람이 슬픔을 대신 덜어줄 수 없다. 대신 앓을 수 없고, 대신 살아줄 수도 없듯이, 온전히 자기 혼자 버텨내야 했다. (「폭염」, 89쪽)

 

 김이설의 소설은 불편하고 힘들다. 폭행이나 폭력에 대한 묘사의 등장 때문이 아니다. 소설이라는 세계의 끝에 현실이 닿아있기 때문이다. 가족이라는 이름의 가해자에게 대들지 못하고 자라 아버지의 폭력을 그대로 답습하는 「미끼」의 아들이나 가부장적이고 권위적인 교사 아버지의 교묘한 폭언과 자신의 아들의 교육을 위해 재혼한 새어머니의 삶을 받아들일 수 없는 「부고」속 딸에게 작은 기쁨이나 바람은 존재할 수 없었다. 윤리나 도덕이 배제된 게 당연한다. 그저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그러니 남편 실직과 빚 때문에 모텔 청소를 하며 버티는 「흉몽」의 아내와 남편과의 불행했던 결혼생활과 이혼 사실을 비밀로 간직하고 고향으로 내려온 「비밀들」 의 ‘나’의 부도덕한 행동을 탓할 수 없다. 판단도 그들의 몫이다. 비난의 시선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그들을 함부로 위로할 수도 없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그런 삶이 타인의 그것이라 우리는 크게 안도하고 쉽게 잊는다.

 

『나쁜 피』를 시작으로 김이설이 직시하는 건 불행한 삶이다. 누구나 알고 어디에나 존재하지만 애써 살피지 않는 삶 말이다. 이 소설집에서 주목할 점은 타인의 고통에 공감하고 그것이 우리 모두의 문제라는 걸 말하고자 한다는 거다. 아마도 많은 이들이 열심히 일하고 정당한 대우를 주장한 파업의 대가로 회사로부터 손해배상 청구를 당한 남편의 자살 후 치매에 걸린 시어머니와 어린 자녀를 둔 여자의 슬픈 독백 「아름다운 것들」을 읽으며 가슴이 먹먹해지고 답답했을 것이다. 도대체 무슨 잘못을 했단 말인가. 거대한 행복의 궁전으로 들어가기를 바란 게 아닌데.

 

 그런가 하면 아내 정미의 자살에 대해 감당할 수 없었던 남편 윤철의 조금씩 안정을 찾고 오히려 편안해하는 「복기」와 남들이 다 부러워하는 집을 장만했지만 오히려 이전보다 더 불안한 일상을 이어가는 「빈집」은 인간의 욕망과 심연을 투영하는 거울과 같다. 윤철은 정미가 죽고 나자 결혼 전 자신 때문에 다리를 절게 된 정미에 대한 자책감을 덜어낼 수 있었다. 행복으로 꾸며진 집의 일부가 될 수 없었던 수정의 슬픔이 멈추기를 바라는 건 나만의 바람일까.

 

 ‘윤철은 정미의 모든 것을 포용하는 사람이고 싶었다. 그것이 윤철이 꿈꿨던 이상적인 남편의 모습이기 때문이었다. 취향의 차이, 입장의 차이, 결국 타인이기 때문에 절대 합일될 수 없는 관계의 한계일 뿐이라도 여겼다.’ (「복기」, 257쪽)

 

 ‘수정은 그 순간 행복이라는 단어를 떠올렸다. 행복해서가 아니라, 행복하다는 감정을 느낀다면 바로 이 순간에 느껴야 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햇볕이 꽉 찬 실내는 따뜻했다. 집안은 깨끗했다. 그런데도 뭔가 허전했다. 무엇이 더 필요한 걸까.’ (「빈집」, 317쪽)

 

 모두에게 완벽한 삶은 어디에도 없다. 저마다 자신의 기준에 도달하려 안감힘을 쓰는 거다. 거기에 작은 격려와 응원이 더해진다면 조금이나마 힘을 얻을 것이다. 그러니 절망에 지지 않는다는 건 그것과의 단절과는 다른 말이어야 한다. 예측은커녕 상상하지 않았던 일들이 벌어지는 삶에서 절망을 끊어낼 수 있는 이가 있을까. 우선은 절망에 지지 않고 대등해져야 한다. 설령 절망과 나란히 걷더라도 말이다. 걷고 걷다 보면 그 끝에 절망이 아닌 그 무언가(희망이면 좋을)를 만날 수 있다는 생각으로 버티고 버티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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