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44
존 밴빌 지음, 정영목 옮김 / 문학동네 / 201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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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요한 말은 쉽게 나오지 않는다. 대체로 그러하다. 꼭 해야 할 말이기에 고민하고 고민한 후에야 하게 된다. 누군가는 비밀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존 밴빌의 소설 『바다』를 읽으면서 나는 내내 그런 생각을 했다. 중요한 말, 꼭 해야 하는 말을 하기 위한 연습과 연습을 하는 주인공 맥스의 마음을 헤아려 보려고 했다. 그것은 삶에 대한 이야기였다. 그러니 누군가에게는 특별할 것도 없는 이야기일지도 모른다. 맥스는 아내 애나가 암으로 죽고 50년 전의 어린 시절에 보냈던 시더스로 돌아온다.

 

 돌아온다는 건 맞은 말이 아닌지도 모른다. 애도할 수 있는 공간이 필요했고 상실의 자리를 채울 무언가가 필요했던 것이다. 그런 맥스를 딸 클레어는 이해할 수 없었다. 도망치듯 과거로 들어가는 아빠를 말이다. 그런데 왜 하필 시더스였을까. 시더스, 그곳은 그레이스 가족이 머물던 곳으로 맥스에게는 신들의 집이었다. 자신과는 다른 삶을 사는 그레이스 가족이 맥스에게는 신(神)의 존재였다. 맥스는 현재가 아닌 과거로 빠져가듯 소설은 그 시절, 그러니까 맥스가 쌍둥이였던 클로이와 마일스와 함께 어울리던 시절로 초대한다.

 

 ‘숨겨지고, 보호받는 것, 그것이 내가 진정으로 원하던 것이었다. 자궁처럼 따뜻한 곳으로 파고들어 거기에 웅크리는 것, 하늘의 무심한 눈길과 거친 바람의 파괴들로부터 숨는 것. 그래서 과거란 나에게 단지 그러한 은둔일 뿐이다. 나는 손을 비벼 차가운 현재와 더 차가운 미래를 털어내며 열심히 그곳으로 간다. 하지만 정말이지 그것이, 과거가 어떤 존재를 가지고 있을까? 결국 과거란 현재였던 것, 한때 그랬던 것, 지나간 현재일 뿐이다. 그 이상이 아니다. 그래도.’ (62쪽)

 

 소설은 현재와 과거를 오며가 아내와 그레이스 가족과 보낸 시간을 차분하면서도 선명하게 들려준다. 가만히 맥스가 들려주는 이야기를 듣노라면 그 집 앞에 서 있는 것만 같다. 맑고 투명한 여름의 비릿하면서도 달콤한 바다 냄새를 상상한다. 나른한 표정을 짓고 바다를 응시하는 그레이스 부인과 새침한 표정으로 맥스를 바라보는 소녀 클로이와 목소리를 숨긴 채 바다를 유영하는 마일스를 알고 있었던 것처럼 그들의 풍경을 그려낼 수 있을 것만 같은 착각에 빠진다. 잠시 머물던 하숙집에 불과했던 시더스가 생동감 있게 그려지는 것이다. 적어도 맥스에게 그곳은 살아있는 공간이었다. 아내를 잃고 힘든 시간을 위로하고 달래줄 수 있는 유일한 곳이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죽을 때까지 죽은 자를 이고 갈 뿐이다. 그런 다음에는 누군가가 우리는 잠시 이고 가고, 그런 다음에는 또 누군가가 우리를 이고 갔던 자들을 이고 가고, 이렇게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먼 세대들로 이어져간다. 나는 애나를 기억하고, 우리 딸 클레어는 애나를 기억하고 나를 기억할 것이며, 그뒤에는 클레어도 사라질 것이고, 클레어를 기억하지만 우리는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생겨날 것이다. 그것으로 우리는 최종적으로 소멸한다.’ (114쪽)

 

 애나와의 이별은 예정된 것이었다. 그러나 삶에서 자신의 일부를 떼어내는 아픔은 예정된 것보다 더 크고 깊은 통증이었다. 맥스에게 남겨진 삶은 그래서 더 힘들고 외로웠고 누군가가 그리웠고 필요했다. 그러나 맥스은 자신의 결핍을 채울 수 있는 건 새로운 누군가가 아닌 기억과 추억이라고 확신한다. 어쩌면 맥스의 삶은 현재가 아닌 과거를 살고 싶었던 건 아닐까. 성적 호기심에 그레이스 부인을 흠모했던 소년이 자석에 끌리듯 당돌한 클로이에게 마음을 뺏기고 사랑에 빠진다. 감당할 수 없는 감정의 소용돌이에서 나오기도 전에 맥스는 클로이와 마일스의 죽음과 맞닿는다. 소년은 이제 존재하지 않는다. 그들이 머물렀던 공간에 누운 늙은 원숭이만 있을 뿐이다. 죽음을 거부하지 않고 받아들이던 애나를 생각하는 밤은 끝없이 펼쳐진 바다와 하나가 된다.

 

 ‘밤이다. 고즈넉하기 짝이 없다. 아무도 없는 것 같다. 나 자신도 없는 것 같다. 바닷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다른 밤이면 우르렁대고 으르렁거릴 텐데, 가까워져 삐걱거리는가 하면, 멀어지며 희미해질 텐데. 나는 이렇게 혼자이고 싶지 않다. 왜 돌아와서 나를 쫓아다니지 않는 거야? 내가 당신한테 최소한 그 정도는 기대할 수 있는 거 아냐? 왜 날이면 날마다, 밤이면 그 끝도 없는 밤마다 이런 적막인 거야? 꼭 안개 같아, 당신의 이런 침묵은.’ (228쪽)

 

 따지고 보면 우리 삶에서 영원한 건 없듯 맥스의 삶에서도 그러했다. 삶은 친구처럼 죽음을 데려오고 남겨진 삶은 다시 그 친구를 기다리는 일이다. 잔인한 진실이다. 존 밴빌은 당연하고도 처연한 진실을 너무도 아름답게 그렸다. 아련하게 겹겹이 쌓인 기억의 자물쇠를 열어 바다에 풀어놓았다. 언제나 그 자리에 있는 바다는 시더스를 닮았다. 그래서 나는 이토록 유려하면서도 몽롱하고 어려운 소설에 더 가까이 닿고 싶은 욕망을 키운다. 저마다의 기억에 자리한 시더스를 생각한다. 내가 잊고 있던 시절, 나를 흔든 신(神)이 누구였는지 생각한다. 그리하여 첫 문장‘그들은, 신들은 떠났다.’에 담긴 맥스의 마음을, 그 아름다운 슬픔의 무게를 감당하고 싶다. 결코 헤아릴 수 없다 하더라도, 그러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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