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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랍에 저녁을 넣어 두었다 - 2024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ㅣ 문학과지성 시인선 438
한강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3년 11월
평점 :
좋아하는 작가의 책은 곁에 두고도 바로 읽지 않는 경우가 있다. 언제나 그 자리에 있을 테니, 생각 날 때 읽고 싶을 때 읽으면 된다는 생각 때문이다. 한강의 시집도 그렇게 머물러 있었다. 처음 몇 편의 시만 읽고 단편소설에서 만났던 이미지와 겹쳐지는 부분에서는 시가 소설의 근원이었을지도 모른다고 내 멋대로 생각했다. 하나의 서사시 같았던 소설이 시집에 있었다. 생경한 느낌보다는 책상에 앉아 키보드에 손을 올리고 시를 쓰는 한강, 하나의 사물을 오래도록 바라보는 그의 서늘하면서도 따뜻한 시선이 내게 닿는 듯했다.
나는 지금/피지 않아도 좋은 꽃봉오리거나/이미 꽃잎 진/꽃대궁/이렇게 한 계절 흘러가도 좋다//누군가는 목을 매달았다 하고/누군가는/제 이름을 잊었다 한다/그렇게 한 계절 흘러가도 좋다//새벽은/푸르고/희끗한 나무들은/속까지 얼진 않았다//고개를 들고 나는/찬 불덩이 같은 해가/하늘을 다 긋고 지나갈 때까지/두 눈이 채 씻기지 않았다//다시/견디기 힘든/달이 뜬다//다시/아문 데가/벌어진다//이렇게 한 계절/더 피 흘려도 좋다 (「새벽에 들은 노래3」전문)
푸르스름한/어둠 속에 웅크리고 있었다/밤을 기다리고 있었다고 생각했는데/찾아온 것은 아침이었다/(「저녁 잎사귀」일부)
매일 찾아오는 새벽과 저녁은 고요와 적막을 선물하고 그 시간은 자신을 응시할 수 있는 유일한 순간이다. 그곳에서 길어올린 언어로 시인은 읊조린다. 누구나 견뎌내야 하는 삶의 고통을 담담히 노래한다. 시인은 어떤 일이 닥쳐와도 지난 그 순간을 떠올리면 아무렇지 않게 지나갈 것이라 말한다. ‘다시 아문 데가 벌어지면’ 얼마나 쓰라리고 아플까. 느닷없이 찾아오는 죽음을 애도하는 일, 그리고 살아가는 고통스러운 일이 삶이라는 걸 그는 다 아는 듯 냉정할 정도로 차분할 뿐이다. 그럼에도 시를 둘러싼 우울과 어둠은 어찌할 수 없다.
검은 옷의 친구를 일별하고 발인 전에 돌아오는 아
침 차창 밖으로 늦여름의 나무들 햇빛 속에 서 있었
다 나무들은 내가 지나간 것을 모를 것이다 지금 내
가 그중 단 한 그루의 생김새도 떠올릴 수 없는 것처
럼 그 잎사귀 한 장 몸 뒤집는 것 보지 못한 것처럼
그랬지 우린 너무 짧게 만났지 우우우 몸을 떨어 울
었다 해도 틈이 없었지 새어들 숨구멍 없었지 소리
죽여 두 손 내밀었다 해도 그 손 향에 문득 놀라 돌아
봤다 해도 (「여름날은 간다」전문)
소설에서 보았던 이미지가 고스란히 겹쳐진 시를 읽는다. 그러다 궁금해진다. 시가 먼저였을까, 소설이 먼저였을까. 『희랍어 시간』속 말을 잃은 여자와 「회복하는 인간」속 화자를 만난다. 어쩌면 작가의 지속적인 관심이 인간의 고통에 닿았기에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침묵 속으로 파고들 수밖에 없는 고통의 시간, 버티고 버티어 회복과 마주하기를 간절히 바랐던 순간과 부서져서 피 흘리는 영혼의 조각을 다시 이어붙이려는 몸짓을 본다. 그것이 어느 시절 나의 모습이며 당신의 눈물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어느 순간 시는 우리 삶의 일부가 된다. 반복되는 절망을 버티는 순간 살아 있다는 걸 확인하기도 하니까.
이 어스름한 저녁을 열고/세상의 뒤편으로 들어가 보면/모든 것이/등을 돌리고 있다//고요히 등을 돌린 뒷모습들이/차라리 나에겐 견딜 만해서/되도록 오래/여기 앉아 있고 싶은데 (「피 흐르는 눈 4」의 일부)
이제/살아가는 일은 무엇일까//물으며 누워 있을 때/얼굴에 햇빛이 내렸다//빛이 지나갈 때까지/눈을 감고 있었다/가만히 (「회복기의 노래」전문)
그래도 한 번쯤은 정말 누군가에게 묻고 싶다. 살아가는 일은 무엇일까. 운명에게 말을 걸 수 있다면, 지난한 시간의 의미를 묻고 싶은 마음은 「서시」 가 대신한다. 얼마나 힘들었냐고, 괜찮다고, 어디서나 너를 지켜보았노라고 말하는 운명을 저버릴 수 없을 것만 같다. 한강은 어떤 경험을 통해 이런 시를 쓴 것은 아닐까. 혹독할 정도로 텅 빈 충만을 느낀다.
어느 날 운명이 찾아와/나에게 말을 붙이고/내가 네 운명이란다, 그동안/내가 마음에 들었니, 라고 묻는다면/나는 조용히 그를 끌어안고/오래 있을 거야./눈물을 흘리게 될지, 마음이/한없이 고요해져 이제는/아무것도 더 필요하지 않다고 느끼게 될지는/잘 모르겠어.//당신, 가끔은 당신을 느낀 적이 있었어,/라고 말하게 될까./당신을 느끼지 못할 때에도/당신과 언제나 함께였다는 것을 알겠어,/라고.//아니, 말은 필요하지 않을 거야./당신은 내가 말하지 않아도/모두 알고 있을 테니까./내가 무엇을 사랑하고/무엇을 후회했는지/무엇을 돌이키려 헛되어 애쓰고/끝없이 집착했는지/매달리며/눈먼 걸인처럼 어루만지며/때로는/당신을 등지려고 했는지//그러니까/당신이 어느 날 찾아와/마침내 얼굴을 보여줄 때/그 윤곽의 사이 사이,/움푹 파인 눈두덩과 콧날의 능선을 따라/어리고/지워진 그늘과 빛을/오래 바라볼 거야./떨리는 두 손을 얹을 거야./거기,/당신의 뺨에,/얼룩진 (「서시」전문)
어디 있니. 너에게 말을 붙이려고 왔어. 내 목소리
들리니. 인생 말고 마음, 마음을 걸려고 왔어. 저녁이
내릴 때마다 겨울의 나무들은 희고 시린 뼈들을 꼿꼿
이 펴는 것처럼 보여. 알고 있니. 모든 가혹함은 오래
지속되기 때문에 가혹해. (「몇 개의 이야기 6」전문)
「저녁의 소묘」, 「새벽에 들은 노래」, 「피 흐르는 눈」, 「거울 저편의 겨울」 연작들은 제목만 다를 뿐 하나로 이어진 듯하다. 어둡고 음울한 분위기, 겹겹이 쌓인 낮고 작은 음성이 심연 속으로 파고든다. 새벽, 저녁, 어스름, 영혼, 죽음, 고독, 그리고 언어에 대한 지속적인 탐구. 저녁이라는 시간은 시인에게 우리가 아는 그 저녁과 다른 시간이었다. 뭐라 설명할 수 없는 깊은 슬픔과 고독이 그곳에 존재했고 거기서 시가 피어나고 소설이 잉태되고 있었다. 그러니까 저녁은 모든 감정을 응축시킨 힘이었다. 가만히 생각한다. 언젠가 슬픔이 있는 저녁을, 죽음으로부터 시작되는 삶이라는 저녁을, 고통과 절망으로 채워진 저녁을 꺼낼 수 있기를 바라며. 서랍 속에서 구겨진 채로 잠든 그들을 깨우지 않고 가만히 토닥일 수 있는 투명한 고요와 마주하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