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을 열지 않는 봄날이다. 미세먼지와 근처 아파트 신축 공사현장 때문이다. 아침저녁으로 쌀쌀하지만 한낮에는 창을 모두 열고 봄바람을 맞고 싶은 날들이다. 어떤 장소든 창이란 창은 다 열고 싶은 마음이다. 굵은 봄비가 기다려지기도 한다. 꽃향기를 품은 비 냄새는 달콤할 것만 같다. 기다리는 비 대신 시인이 들려주는 비를 읽는다.

 

 

        봄비

 

 3월에 내리는 봄비는

 노름빚투성이 새신랑이

 잠시 옷 갈아 입으러오는

 발소리 같고

 

 3월에 내리는 밤비는

 서투른 새댁이 치마끈 풀어

 만삭의 물항아리로 부풀어 오르는

 숨죽인 물소리 같고

 

 새벽이면 남몰래

 처마 밑으로 흘러가는

 산수유, 꽃눈에 얹힌

 노란 눈물 같기도 하고 ( 박승민 시집,『지붕의 등뼈』)

 

 

 최근에 시집을 몇 권 구매했고 곁에 두었다. 제대로 읽지 않았지만 그래도 거기 시집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뿌듯하다. 어쩌다 보니 시인이 쓴 산문도 읽었다. 남자 시인이 들려주는 책상에 대한 이야기. 시인의 책상은 글에 대한 욕망을 불러온다.

 

 시를 쓰기 위해 앉은 책상에 무엇이 놓여 있을까. 영감을 주는 어떤 물건이나 인물의 사진이 놓여 있는 건 아닐까. 시가 잉태되는 공간, 시와 시인이 하나가 되는 공간, 오롯이 그들의 은밀한 공간을 엿보는 짜릿함은 무엇일까. 아마도 시인을 흠모하는 나의 격한 마음 때문일지도 모른다. 이런 문장에서 나는 숨소리도 숨겨야만 할 것 같으니까.

 

 ‘잠이 고여 있는 밤이다. 누군가를 잃어버릴 것 같은 밤이다. 상실감은 상실 이전에도 가능한, 불완전한 사건이다. 당신은 모순을 사랑한다. 모순이 당신을 뒤흔드는 만큼. 누구나 태어나본 적도 없으므로 죽어지지 않는 책들을 가지고 있다. 누구나 무언가를 쓰는 공간을 갖고 있고, 당신에게 그 공간은 늙을 기회도 갖지 못한 나무의 몸으로 지은 책상이다. 책상은 온전히 책들을 받쳐 앉고 있으나, 시인에게 책상이란 자신을 받쳐 안은 또 다른 종이에 다름 아니다.’ (149쪽, 이이체의 글)

 

 

 책상이라는 사물이 시인에게는 시가 아니라 종이와 같은 것이었다. 책상에 대한 집착 혹은 애착이 시가 되고 문학이 되고 삶으로 확장된 것이다. 책상에 앉은 시간이 길어질수록 잡념이 늘어나는 나와 달리 시인은 상념이 시로 피어난다. 시인에게 책상은 저마다 다른 추억을 불러왔고 다른 의미였다. 나만의 책상을 갖고자 했던 열망이 있었고, 결코 잊을 수 없는 기억이 존재했고 설명하기 어려운 불편함이 있었다. 그들은 규격화된 책상과 함께 책상이라는 이미지를 말하고자 했다. 그러니까 시인에게 책상은 어디에나 존재했다. 다른 이름, 다른 모양으로 말이다.

 

 ‘책상은 나무를 호명한다. 나무는 바람을, 바람은 공중을, 공중은 새를 다시 호명할 것이다. 새는 깃털을, 깃털은 가벼움을, 가벼움은 운동하는 발을, 운동하는 발은 강물을, 책상이 떠다닌다. 내 손이 닿았던 책상들이 떠다닌다. 침묵들이 떠다닌다.’ (105쪽, 박진성의 글

 

 나무를 호명하고 세상의 모든 것들을 호명하는 시인의 책상과 내 책상은 확연히 다르다. 나에게 책상이란 무엇일까. 나의 책상에서 글이라 할 수 있는 게 나오지 않는 게 당연하다. 그런 욕망을 키우는 게 잘못인지도 모른다. 책들과 연필, 볼펜, 가위, 메모지가 너저분하게 자리한 내 책상는  책들과 시집 몇 권도 놓여 있다. 이렇게 사랑스러운 시를 품은 고영민의 『구구』란 시집도 함께.

 

 

  명랑

 

 나는 내가 좋습니다 당신도

 당신이 좋습니까

 

 낮에 당신은 당신에게 뭐라 말합니까

 밤에 당신은 당신에게

 뭐라 말합니까

 

 오늘 당신에게 내 생각이 잠깐

 다녀갔습니까

 오늘 나에게 당신 생각이

 잠깐 다녀갔습니까

 

 자기 꼬리를 물려고 빙글빙글 도는

 강아지처럼

 어둔 하늘 아래 천천히 시드는

 방앗잎들처럼

 

 가볍게 오고 싶지 않습니다 가볍게

 가고 싶지 않습니다

 

 정말입니다

 나는 내가 좋습니다 당신도

 당신이 좋습니까 (30쪽)

 

 

 이런 고백을 받고 싶다. 아니, 당신에게 이 시를 빌려 고백하고 싶다. 봄에만 만날 수 있는 꽃들이 피어나면 사람들은 꽃마주을 나갈 것이고 누군가는 깊은 밤 이런 시를 외고 읊을 수도 있겠다.  종잇장처럼 가벼웠을 몸, 마지막 봄일까 두려운 마음을 숨긴 채 어머니에게 봄을 보여주고 싶은 마음이 밤을 환하게 비추었을 터. 애절하고 아프다.

 

 

         밤 벚꽃

 

 꽃이 활짝 피었다는 소식을 듣고

 일부러 며칠을 더 지체했습니다

 

 당신을 업고

 천변에 나옵니다

 오늘밤 저 꽃들도 누군가의 등에

 얌전히 업혀 있습니다

 어둠 속에서 한 나무가 흘러내리는 꽃을

 몇 번이고

 추슬러올립니다

 

 무거운데

 이젠 나 좀 내려다오, 아범아

 내려다오

 

 피어 있을 때보다

 떨어질 때 더 아름다운 꽃이 있습니다

 

 당신을 업고 나무에 올라

 풀쩍, 뛰어내렸습니다 (65쪽)

 

 

  사랑

 

 늦은 저녁, 텅 빈 학교 운동장에 나가

 철봉에 매달려본다

 

 너는 나를

 있는 힘껏 당겨본 적이 있는가

 끌려오지 않는 너를 잡고

 스스로의 힘으로

 끌려가본 적이 있는가

 

 당기면 당길수록 너는 가만히 있고

 오늘도 힘이 부쳐

 내가 너에게 

 부들부들 떨면서 가는 길

 

 허공 중 디딜 계단도 없이

 너에게 매달려 목을 걸고

 핏발 선 너의 너머 힘들게 한번

 넘겨다본 적이 있는가 (82쪽)

 

 

 좋은 시가 많다. 물론 주관적인 평가다. 『구구』란 제목만 보고는 어떤 시가 있을까 궁금했다. 처음 만나는 시집에 대한 편견 혹은 경계(?)하고 해야 할까. 펼쳤더니 다정했고 친근했다. 익숙한 일상이 거기 있었고 그리움이 있었고 함께 읽고 싶은 시가 있었다. 3월이 지나면 곧 잔인한 4월이 온다. 잔인한 슬픔이 있다. 시를 읽는 시간, 슬픔이 조금은 약해지면 좋겠다. 그럴 수 없는 슬픔이라는 걸 알면서도 그런 바람을 버릴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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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니데이 2016-03-30 17: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목련님 , 좋은 저녁시간 되세요.^^

자목련 2016-03-31 18:10   좋아요 1 | URL
서니데이 님도 맛있는 저녁 드시고 향기로운 시간으로 채우세요^^*
 

 

 

 

 

 

 어떤 바닥은

 허공의 깊은 혓바닥에 매달려 있을 때

 아름답다

 

 마음 속, 아무, 안 된다, 수, 중심을, 일이다

 바닥에, 색이나, 그, 없으므로, 빤히, 끝없이

 깊은, 덧칠도, 구멍에, 세심한, 쳐다보고, 반사되는

 칠을, 하지, 한번, 주의가, 있을, 거울처럼

 아무도, 대 못질은, 세상, 바닥은, 언제나, 캄캄한

 건너오지, 더더욱, 누구도, 이미, 배후를, 블랙홀처럼

 말라, 하면, 빠져나올, 허공의, 경계할, 우리는

 

 어떤 풍경은

 바닥이라는 넓은 그늘에 꽂혀 있을 때

 가장 위험하다 (「바닥을 위한 각서」, 전문)

 

 

 

 

 우연하게 펼친 시집에서 만난 짧은 시가 강렬한 빛처럼 눈을 찌른다. 바닥을 친다는 슬픔, 아무것도 없다는 두려움, 모든 걸 내려놓았다는 서투룬 위무. 깊숙이 패인 바닥의 골짜기를 채울 그것은 의지일 것이다. 미세먼지로 뿌연 봄이다. 그 안에서 노랗고 빨간 봄을 보는 건 그런 봄을 가슴에 품은 사람이다. 예쁜 봄, 환한 봄, 고마운 봄. 천지가 다 그런 봄이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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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장소] 2016-03-25 12: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말들이 저는 그저 거울의 회색빛 흡반사면 ㅡ(이걸 뭐라 불렀는지 잊음)혹은 동공 ㅡ으로 읽어요....
막막하긴 같음...

자목련 2016-03-28 11:58   좋아요 1 | URL
막막해도, 이 봄이 환했으면 좋겠어요. 다가올 4월에는 더더욱...

[그장소] 2016-03-28 12:02   좋아요 0 | URL
잊지 않고 계신분 ㅡ들이 더 많아야 할텐데 ㅡ단지 기억만 하고 아무것도 바뀌는 것이 없을까봐 ㅡ스며시 초조해집니다..
마음 건강하게 먹어야 하겠습니다..뭐든 지지 않으려면...자신과도...
그렇죠?^^
 

 

 여느 봄처럼 꽃샘추위가 날카롭다. 유독 올해가 더 춥게 느껴지는 건 지난봄을 잊고 살기 때문이다. 사느라 바빠서 그 봄을 잊고 있다가 다시 냉이, 달래, 쑥의 맛으로 채워진 봄을 떠올린다. 어설픈 쑥국을 끓이던 시간, 여름이 지나고 가을이 되고 겨울이 오기를 기다렸던 그 봄. 누구에게나 봄이 다시 오는 게 아니라는 명징한 슬픔. 3월에 내리는 폭설에 탄성을 지르는 이는 순수한 아이들뿐이다. 

 

 

 

 

 

 꽃별 - 이선식

 

 혹한을 견디지 못하고 얼어 죽은 나무인줄 알았다

 몇 날 며칠 나무의 관절들이 욱신거리더니

 이윽고 봇물 터졌다

 

 나무가 땅속에서 길어 올린 별

 환한 얼굴처럼 다닥다닥

 꽃이 피었다

 

 물을 긷는 물관일 줄 알았던 뿌리가 실은

 별을 긷는 두레박이었던 것

 땅속에도 별이 있듯이

 사람의 가슴에도 별이 있다

 사람의 가슴에 별을 긷는 사람이

 그 사람의 정인(情人)이다

 

 이 봄,

 저렇게 많은 사람들이 사랑을 만났다는 증표처럼

 공중에 별들이 빼곡하다 (『시간의 목축』, 6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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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16-03-13 18: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지막 연 참 좋아요. 자목련님에게도 어서 따스한 봄이길 빌어요. 작년 3월 이맘때 어디에 있었던가 문득 생각이 들었는데, 좋은 추억이 떠올라 순간 행복해지더군요.

자목련 2016-03-15 18:02   좋아요 0 | URL
돌이켜보면 봄을 기다리는 마음 언제나 이미 봄으로 충만했던 것 같아요. 포근한 봄이 빨리 사라지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거창하게 말하자면 돌아왔다. 가장 긴 시간 집을 떠나 있었다. 넓은 공간에 있다가 좁은 공간에 오니 답답하면서도 애틋한 느낌이 든다. 완벽하게 회복된 건 아니어서 일상의 복귀는 아직 힘들다. 적지 않은 부분에서 도움을 받는다. 그래서 살짝 우울하다. 건강하다는 게 얼마나 감사한지 생각하는 날들이다. 다시 감사의 이유를 찾아야 하는 날들이기도 하다.

 

 가지런하게 쌓인 책들이 웃는 것 같다. 빈 방에서 나를 기다려준 책이라서 읽기도 전에 애정이 자란다. 잊고 있던 책도 있어 반갑다. 김숨의 소설 『바느질하는 여자』는 꽤 긴 시간을 필요로 할 것 같다. 이상하게도 그곳에서 이곳으로 돌아오면 내가 가장 먼저 하는 일은 책정리다. 그만큼 책이 나를 지배하고 있다는 말이다. 읽는 속도가 점점 느려지고 있다. 눈이 나빠지고 있다는 증거이기도 하고 집중력이 떨어졌다는 말이기도 하다.

 

 

 

 

 

 

 

 

 

 

 

 

 

 그러거나 말거나 윤대녕의 장편소설 『피에로들의 집』이 나왔으니 조만간 곁에 둘 것 같다. 퇴원 후 특별히 신경썼던 부분이 먹거리였던 터라 예전보다 음식을 다룬 글에 관심이 커졌다.『황석영의 밥도둑』이 개정판이라는 사실도 몰랐을 정도니 말이다. 왕성한 입맛은 돌아오지 않았고 아침엔 역시나 파프리카와 구운 고구마를 먹었다.돌아오 마자 순대, 떡볶이, 치킨을 먹었는데 기대했던 맛이 아니었다. 이상한 일이다. 맥주를 마시지 못해서 그런 걸까. 앞으로 나는 맥주를 마시지 못할 것이다. 그런 자세로 살아야 한다는 말이다. 자세라는 말이 나왔으니 허연의 이런 시를 읽고 가야지. 내게는 곧은 자세, 기다릴 줄 아는 자세, 열심을 내는 자세가 필요하다.

 

 

 자세

 

 

 위대한 건 기다림이다. 북극곰은 늙은 바다코끼리

가 물에 올라와 숨을 거둘 때까지 사흘 밤낮을 기다

린다. 파도가 오고 파도가 가고, 밤이 오고 밤이 가

고.​ 그는 한생이 끊어져가는 지루한 의식을 지켜보

며 시간을 잊는다.

 

 그는 기대가 어긋나도 흥분하지 않는다. 늙은 바

다 코끼리가 다시 기운을 치리고 몸을 일으켜 먼바다

로 나가아갈 때. 그는 실패를 순순히 받아들인다.

 

 다시 살아난 바다코끼리도, 사흘 밤낮을 기다린

그도, 배를 곯고 있는 새끼들도, 모든 걸 지켜본 일

각고래도 이곳에서는 하나의 자세일 뿐이다.

 

 기다림의 자세에서 극을 본다.

 

 근육과 눈빛과 하얀 입김.

 백야의 시간은

 자세들로 채워진다.

 

 

 그리고 이 책이 있다. 정결한 문장으로 웅숭깊은 시간을 선물하는 책. 봄에 만나면 더 좋을 제목이다. 그래서 나는 이 책을 이제서야 읽는다.

 

 창은 눈이다. 내 눈이 보는 것을 믿을 수 없으니 창에 드리워진 얼룩을 탓하는 말은 애초에 변명에 지나지 않는다. 또 다른 차에 기대어 본다. 마음의 창이다. 내 작은 창에 난 얼룩들이 사람을 보는 청안이 되면 좋겠다. 세월 가며 차츰 얼룩으로 흐려질 두 눈에 세상을 보는 혜안이 되면 더 없이 좋겠다.’ (71쪽)

 

 

 ‘우리의 마음도 한순간의 풍경에 지나지 않는 것인지 모른다. 즉심이다. 애초에 정처 없는 것들, 바람 끝자락에 매달려 나붓대는 것들에 마음이 붙들리는 건 어리석은 일이다. 창밖에는 밤하늘과 하나된 검은 강이 낮게 엎드려 뒤채고 있다. 풀벌레도 덩달아 잠 못 드는 밤에 또 생각이 잦다.’ (12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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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3-04 11:3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3-07 11:50   URL
비밀 댓글입니다.
 
한낮인데 어두운 방
에쿠니 가오리 지음, 신유희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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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낮인데 어두운 그 방에 잠시 머물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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