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창하게 말하자면 돌아왔다. 가장 긴 시간 집을 떠나 있었다. 넓은 공간에 있다가 좁은 공간에 오니 답답하면서도 애틋한 느낌이 든다. 완벽하게 회복된 건 아니어서 일상의 복귀는 아직 힘들다. 적지 않은 부분에서 도움을 받는다. 그래서 살짝 우울하다. 건강하다는 게 얼마나 감사한지 생각하는 날들이다. 다시 감사의 이유를 찾아야 하는 날들이기도 하다.
가지런하게 쌓인 책들이 웃는 것 같다. 빈 방에서 나를 기다려준 책이라서 읽기도 전에 애정이 자란다. 잊고 있던 책도 있어 반갑다. 김숨의 소설 『바느질하는 여자』는 꽤 긴 시간을 필요로 할 것 같다. 이상하게도 그곳에서 이곳으로 돌아오면 내가 가장 먼저 하는 일은 책정리다. 그만큼 책이 나를 지배하고 있다는 말이다. 읽는 속도가 점점 느려지고 있다. 눈이 나빠지고 있다는 증거이기도 하고 집중력이 떨어졌다는 말이기도 하다.


그러거나 말거나 윤대녕의 장편소설 『피에로들의 집』이 나왔으니 조만간 곁에 둘 것 같다. 퇴원 후 특별히 신경썼던 부분이 먹거리였던 터라 예전보다 음식을 다룬 글에 관심이 커졌다.『황석영의 밥도둑』이 개정판이라는 사실도 몰랐을 정도니 말이다. 왕성한 입맛은 돌아오지 않았고 아침엔 역시나 파프리카와 구운 고구마를 먹었다.돌아오 마자 순대, 떡볶이, 치킨을 먹었는데 기대했던 맛이 아니었다. 이상한 일이다. 맥주를 마시지 못해서 그런 걸까. 앞으로 나는 맥주를 마시지 못할 것이다. 그런 자세로 살아야 한다는 말이다. 자세라는 말이 나왔으니 허연의 이런 시를 읽고 가야지. 내게는 곧은 자세, 기다릴 줄 아는 자세, 열심을 내는 자세가 필요하다.
자세
위대한 건 기다림이다. 북극곰은 늙은 바다코끼리
가 물에 올라와 숨을 거둘 때까지 사흘 밤낮을 기다
린다. 파도가 오고 파도가 가고, 밤이 오고 밤이 가
고. 그는 한생이 끊어져가는 지루한 의식을 지켜보
며 시간을 잊는다.
그는 기대가 어긋나도 흥분하지 않는다. 늙은 바
다 코끼리가 다시 기운을 치리고 몸을 일으켜 먼바다
로 나가아갈 때. 그는 실패를 순순히 받아들인다.
다시 살아난 바다코끼리도, 사흘 밤낮을 기다린
그도, 배를 곯고 있는 새끼들도, 모든 걸 지켜본 일
각고래도 이곳에서는 하나의 자세일 뿐이다.
기다림의 자세에서 극을 본다.
근육과 눈빛과 하얀 입김.
백야의 시간은
자세들로 채워진다.
그리고 이 책이 있다. 정결한 문장으로 웅숭깊은 시간을 선물하는 책. 봄에 만나면 더 좋을 제목이다. 그래서 나는 이 책을 이제서야 읽는다.
‘창은 눈이다. 내 눈이 보는 것을 믿을 수 없으니 창에 드리워진 얼룩을 탓하는 말은 애초에 변명에 지나지 않는다. 또 다른 차에 기대어 본다. 마음의 창이다. 내 작은 창에 난 얼룩들이 사람을 보는 청안이 되면 좋겠다. 세월 가며 차츰 얼룩으로 흐려질 두 눈에 세상을 보는 혜안이 되면 더 없이 좋겠다.’ (71쪽)
‘우리의 마음도 한순간의 풍경에 지나지 않는 것인지 모른다. 즉심이다. 애초에 정처 없는 것들, 바람 끝자락에 매달려 나붓대는 것들에 마음이 붙들리는 건 어리석은 일이다. 창밖에는 밤하늘과 하나된 검은 강이 낮게 엎드려 뒤채고 있다. 풀벌레도 덩달아 잠 못 드는 밤에 또 생각이 잦다.’ (127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