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할 수 없는 말들이 있다. 사라진 말들이 아니다. 감당할 수 없는 무게를 지녔기에 침묵으로 존재했던 것이다. 공포가 몰고 거대한 침묵, 고통 그 이상의 고통이 말을 잊게 만든 것이다. 그것에 대해 알지 못하는 우리는 쉽게 나쁜 기억이나 심한 트라우마라고 말한다. 경험자가 아닌데도 모든 걸 다 안다는 듯 말하곤 한다. 무려 20여 년이 훌쩍 지났기에 이제는 나아지지 않았냐고 묻는다.

 

 나는 몰랐다. 그만큼의 시간이 지났음에도 나는 여전히 모른다. 당신의 입술이 굳게 닫힌 이유를, 당신이 망각의 삶을 선택한 이유를 모른다. 부끄럽고 창피한 고백이지만 굳이 알려고 하지 않았다. 어린 시절에는 아무도 알려주지 않았다는 이유로, 어른이 되어서는 나와는 다른 세상의 이야기라 믿고 싶었던 것이다. 그동안 소설과 영화로 수많은 당신을 만났지만 이번에 만난 한 소년은 달랐다. 소년이란 글자가 말하듯 너무 어렸다. 보호받아야 할 아이였다.

   

 산 사람이 죽은 사람을 들여다볼 때, 혼도 곁에서 함께 제 얼굴을 들여다보진 않을까.’ (13쪽)

 

 ‘혼은 자기 몸 곁에서 얼마나 오래 머물러 있을까. 그게 무슨 날개같이 파닥이기도 할까. 촛불의 가장자릴 흔들리게 할까.’ (45쪽)

 

 자세하게 설명해주는 어른은 없었다. 왜 이런 일들이 벌어졌는지, 왜 이토록 많은 사람들이 죽었는지, 왜 자꾸만 집으로 돌아가야 하는지 소년은 모든 게 어려웠다. 그러나 누나와 형 곁에 있고 싶었다. 친구를 찾겠다는 이유를 내세웠지만 뜨거운 가슴을 뒤로 한 채 엄마가 있는 집으로 혼자 돌아갈 수 없었다. 그저 차가운 강당 바닥에 누워 있는 죽은 사람들을 외롭게 두고 싶지 않았다. 혼도 떠나지 못하는 그곳에 함께 있어야 할 것 같았다. 아니다, 나는 모른다. 소년의 행동을 읽는 나는 그렇게 짐작할 뿐이다.

 

 ‘서로가 누군지는 여전히 알 수 없었지만, 서로가 얼마나 오래 함께였는지는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었어. 처음부터 함께였던 그림자와 새로 온 그림자가 나란히 내 그림자에 겹쳐질 때, 설명할 수 없는 방식으로 그들의 기척을 구별할 수 있었어. 어떤 그림자들은 내가 알지 못하는 고통들을 오래 견딘 것 같았어. 손톱 아래마다 진한 보랏빛 상처가 있던, 옷이 젖어 있던 몸들의 혼이었을까. 그들의 그림자가 내 그림자 끝에 닿을 때마다 끔찍한 고통의 기척이 저릿하게 전해져왔어. 만약 그렇게 좀더 시간이 흘렀다면, 어느 순간 우리는 서로를 알게 될 수 있었을까. 마침내 어떤 말을, 어떤 생각을 주고받을 방법을 찾아낼 수 있었을까.’ (59~60쪽)

 

 왜 그들은 죽어야 했을까. 왜 그들은 죽어서도 엄마의 품에 안기지 못하고 다시 죽임을 당해야 했을까. 그 현장에 있던 사람들 가운데 누군가는 죽었고 누군가는 살아남았다. 살아남았지만 제대로 된 생을 사는 이는 없다. 어느 누가 이토록 잔혹한 시간을 온몸으로 겪고 먼지를 털 듯 살아갈 수 있단 말인가. 시간을 견디며 죽음을 바라며 살았을지도 모른다. 우리가 안다고 착각하는 시간은 밖의 시간일 뿐이다. 진실인 양 들려주는 보도와 몇 장으로 남겨진 사진을 통해 그 거리와 시간에 들어설 수 없다. 과감히 그 시간에 들어갈 용기를 가진 이도 없었을 것이다.

 

 외부가 아닌 내부에서 벌어진 잔혹하고 야만스러운 인간 그 이하의 행위는 말할 수 없는 말들이 되고 말았다. 살아남은 자들에게 그런 말들은 쌓여 독이 되고 스스로를 병들게 만든다. 살아 있다는 자체가 죄를 실행하고 있는 것처럼 만들었다. 어떻게 그 말을 꺼낼 수 있단 말인가. 일부러 도려내고 도려냈던 기억을 다시 불러올 수 있단 말인가. 몸에 새겨진 잔인한 시각을, 끊임없이 펼쳐지는 악몽의 날들을 말이다.

 

 사실은 이 소설에 대해 아주 긴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제대로 말이다. 독자의 입장에서 충분히 가능하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건 매우 어리석고 건방진 생각이었다. 나는 이 소설에 대해 제대로 말할 수 없다. 어떤 형태로든 말이다. 제대로 말할 수 있는 자격이 있는 이들은 소설 속 인물들뿐이다. 기억과 싸우고 있는 사람들, 그 기억에 대해 물을 수 있는 이들도 그들이다.

 

 ‘어떤 기억은 아물지 않습니다. 시간이 흘러 기억이 흐릿해지는 게 아니라, 오히려 그 기억만 남기고 다른 모든 것이 서서히 마모됩니다. 색 전구가 하나씩 나가듯 세계가 어두워집니다. 나 역시 안전한 사람이 아니란 걸 알고 있습니다.

  이제는 내가 선생에게 묻고 싶습니다.

  그러니까 인간은, 근본적으로 잔인한 존재인 것입니까? 우리들은 단지 보편적인 경험을 한 것뿐입니까? 우리는 존엄하다는 착각 속에 살고 있을 뿐, 언제든 아무것도 아닌 것, 벌레, 짐승, 고름과 진물의 덩어리고 변할 수 있는 겁니까? 굴욕당하고 훼손되고 살해되는 것, 그것이 역사 속에서 증명된 인간의 본질입니까?’ (134쪽)

 

 이처럼 한강은 인간의 고통을 향해 직진한다. 우회할 수도 있는데 말이다.  누구에게나 존재하는 고통의 본질을 캐내려 한다. 타인의 고통에 다가서야 나눌 수 있다고 믿는 듯하다. 그것은 외부에서는 결코 알 수 없는 내부의 존재와 맞닿았을 때 궁극적인 삶의 이유를 발견할 수 있어서다. 그리하여 아주 미세하게 나마 고통의 일부에 공감할 수 있어야 희망이라 이름 붙일수 있는 삶의 조각을 간직할 수 있으니까. 대낮의 태양이 되기 위해 태양 안에서 그것을 견디려는 「노랑무늬 영원」 속 이런 구절처럼 말이다. 소설을 통해 내게로 온 소년, 그 소년이 내게 건넨 말들도 결국엔 그것이었다.   

 

 ‘노랑은 태양입니다. 아침이나 어스름 저녁의 태양이 아니라, 대낮의 태양이에요. 신비도 그윽함도 벗어던져버린, 가장 생생한 빛의 입자들로 이뤄진, 가장 가벼운 덩어리입니다. 그것을 보려면 대낮 안에 있어야지요. 그것을 겪으려면.그것을 견디려면. 그것으로 들어 올려지려면…… 그것이, 되려면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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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간은 어떻게 흐르고 어떻게 고이는 것일까. 어떤 시간은 눈 깜짝할 사이에 사라지며 어떤 시간은 일 분이 한 무한대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누군가는 과거의 시간에 매여 살기도 하고 누군가는 미래의 시간을 상상하며 살기도 한다. 지금 내가 속한 시간은 살아 있는 시간일까, 죽어 있는 시간일까. 박솔뫼의 『도시의 시간』을 읽고 나는 어떤 시간에 갇혀 있다. 돌이킬 수 없는 시간, 말이 되지 못하고 맴돌다 사라진 시간의 숲에서 헤매는 듯하다. 소설 속 우나처럼 준을 기다리고 찾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일본에서 대구로 온 우나와 우미는 학교에 다니지 않는다. 우나와 우연하게 친해진 배정은 화자인 나와 같은 학원에 다닌다. ​우나는 집에서 준의 노래를 들으며 준을 생각하고 우미는 밖에서 다양한 사람들을 만난다. 고등학교 1학년 때 학교를 그만두고 학원에 다니는 나는 걷는 걸 좋아하고 대학 시험에 세 번 떨어진 배정은 대구에서 나서 자랐다. 그러니까 네 명의 공통점은 학교를 다니지 않는다는 것뿐이다. 시간이 많다는 점도 같았다. 우나와 다르게 우미는 학교에 다니고 싶었지만 미용실에 다니는 우미의 엄마는 신경을 쓰지 않았다.

 

 구속되지 않은 시간은 자유롭지만 견디기 힘들다. 그래서 우나는 죽은 아버지가 유산처럼 남긴 1954년에 태어나 1976년에 ‘돌핀’이라는 음반을 낸 가수 제니 준 스미스를 듣는다. 내가 학원에서 수업을 받는 시간에 우나는 도서관에서 준에 대한 기록을 찾는다. 그리고 나와 우나는 함께 걷도 준에 대해 말하고 준을 상상한다. 익숙하지만 익숙하지 않은 도시의 거리를 걷고 걸으며. 우미는 많은 사람을 만나고 사귄다. 배정은 그들 중 하나였다. 학원에서 나를 불쌍하게 봐주고 챙겨주던 배정은 우미와 사귀면서 조금 달라진다. 배정의 시간 속엔 우미가 있었지만 우미의 시간 속엔 배정이 없었다. 나의 시간 속엔 우나가 있고 우나의 시간 속엔 준이 있듯 말이다.

 

  ‘시간은 흐르고 나는 지금처럼 살아갈 것이다. 지금 같은 대학생이 직장인이 될 것이다. 그마저도 될 수 없을지도 모른다. 시간이 지날 것이다. 그 이후는 알 수 없다. 되는 것 없이 변하는 것 없이 완성되는 것도 나아지는 것도 없고 깨닫고 나아가는 것도 없다. 그것만은 꼭 그렇게 될 것이다.’ (46쪽)

 

 소설은 같은 하나의 음악으로 채워진 음반처럼 반복하고 반복한다. 준의 음악을 들으며 그녀를 좋아하던 아버지의 죽음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우나, 일본으로 돌아가 학교에 다니고 단 한 사람의 연인을 갖고 평범하게 살아가기를 꿈꾸는 우미, 우미를 향한 마음이 커지는 배정, 집과 학원과 거리가 전부 인듯 살아가는 나. 계절이 흐르고 해가 바뀌어도 그들의 시간은 천천히 흘러간다. 우나의 가족이 미국으로 떠나기 전까지.

 

 멈춰진 것만 같은 네 명의 시간과 달리 빠르게 변화하는 대구의 시간을 통해 박솔뫼는 어떤 시간을 붙잡고 싶었던 것일까. 살다 보면 잊혀진 사람들과 어떤 날들에 대해 말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몇 년 후 우미를 통해 우나의 죽음에 들었을 때 떠오르는 준의 앨범이 발매된 1976년과 우나와 함께 준의 음악을 듣던 침대가 있던 시간을 얼마나 그리워했는지 깨닫게 되는 것처럼 말이다.

 

 소설은 모호하다. 그러나 이상하게 불편하거나 불친절하다는 느낌이 아니다. 그냥 그럴 수도 있지, 그럴 수도 있어, 그렇게 수긍하게 된다. 이상한 일이다. 어쩌면 박솔뫼가 소설을 통해 보여주는 연약하고 연약한 10대의 시간을 지나왔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연약하지만 연약한다는 걸 믿지 않던 시절들 말이다. 이제는 하나의 점으로 남아 존재하는 시간에 대해 성장이라는 말이 아닌 통과라는 말을 중얼거리게 된다. 붙잡을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가두고 싶었던 시간이 있었던 것이다. 그때의 나를 사랑하고 기억하는 이들과 함께.

 

 ‘언제나 누군가가 있다. 어떤 날에 내가 모두를 알게 되듯이 누군가 모두를 알게 되는 날이 오면 나는 나도 알아 버려도 좋고 알아줬으면 좋고 알고 마음대로 그 누군가의 마음대로 나를 완전히 이해해도 좋다 좋아요 좋습니다. 그래 줬으면 좋겠다. 아주 짧은 순간 내가 모두를 이해하듯이 누군가가 길을 혼자 걷는 나를 보면 모두를 이해한 누군가는 나를 이해해도 좋다고 생각했다.’ (172쪽)​

 

 묘하게 정지향의 『초록 가죽소파 표류기』가 겹쳐지는 소설이다. 하나의 단어로 설명할 수 없는 시간을 걷는 기분이랄까. 그럼에도 어떤 시절에는 단 하나의 단어로 말해버리게 되는 시간들. 이런 문장은 그 시절에만 만날 수 있는 유일한 감성일지도 모른다는 생각. 바람이 될 수 있다고 믿었던 시절과 그것을 나눌 수 있는 유일한 누군가가 존재했던 연약하게 흐르던 시간은 어디에 닿아 있을까.

 

 “나는 좋다고 생각했는데. 오늘 전체가 좋지는 않고 아까 아침에 걷다가 다리를 지날 때쯤에 그때 바람이 부는 게 좋다고 생각했다. 바람이 천천히 다가와서 나를 그 안에 집어넣었어. 내가 바람 안으로 들어간 건데 강제적이지는 않고 그냥 저절로 그렇게 되었어.”

 “네가 들어간 거야?”

 “내가 들어간 건데 바람이 집어넣은 것이기도 해. 그러니까 바람이 커다란 장막이 되어 나를 넣은 채로 갈 길을 간 거야.”

 “저절로 그렇게 된 거야?”

 “어, 그러니까 그렇게 된 거지.”

 “그러니까.”

 “어. 그러니까 저절로. 내일 또 그렇게 되고 다음 날 또 그렇게 되면 잊고 지내다가 한 달쯤 후에도 그렇게 되면 바람은 자주 나를 넣는 거잖아.” (19~2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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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남겨진 것들
염승숙 지음 / 문학동네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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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승숙 작가에 대한 애정이 커지는 시간이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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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년 달력이 도착했다. 달력을 넘기지 못했다. 빨리 새로운 한 해를 맞이하고 싶은 마음과 2014년에 머무르고 싶은 마음이 한 치의 양보도 없이 똑같게 나눠졌기 때문이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2014년을 벗어나고 싶은 마음으로 많이 기울고 있다. 내년이라는 지우개가 지난해를 깨끗하게 지워줄 것 같은 착각에 빠진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새롭게 시작할 수 있다는 용기를 줄 거라 믿어서다. 누구에게나 똑같이 주어진 한 해였지만 아득하게 느껴지는 일 년이다. 거창한 계획을 세웠던 것도 아니고 그저 무탈하게 살아가기를 바랐다. ‘무탈’이라는 말이 이렇게 큰 의미로 다가온 해가 또 있었을까. 온 나라에 스며든 슬픔에 비하면 개인적으로 갑작스러운 아버지의 죽음은 평범한 그것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이기적인 마음은 절대적인 위로가 필요하다. 부재를 인정하는 일은 익숙해지지 않았고 상처는 버릴 수 없었다. 내게 주어진 날들을 살기에도 버거웠다. 그것이 특별할 것 없는 보통의 하루임에도 말이다.

 

 가끔씩 생각한다. 왜 이런 일들이 일어나는 것일까. 누구라도 붙잡고 따지고 싶다. 지난 5월 검사를 위해 입원한 아버지가 사흘 만에 눈을 감았을 때 우리는 내심 안도했다. 아버지의 고통을 빌미 삼아 신과 타협을 했는지도 모른다. 나이가 들면서 삶이라는 오늘을 살아내고 견디는 것이라는 걸 실감한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4월의 빛나는 바다와 5월의 눈부신 푸름을 지나 한 해의 끝에 서 있을 수 있겠는가. 밥을 먹고 잠을 자고 일을 하고 책을 읽고 코미디에 웃고 드라마에 우는 날들이 이어질 수 있겠는가.

 

 우리의 가슴에 송곳처럼 박힌 2014년을 돌아보며 선뜻 어떤 위로와 격려의 말을 건넬 수 없다. 저마다의 절망과 분노를 알 수 없기에 말이다. 그저 오늘을 살아내는 당신도 나와 같은 마음일 거라 짐작할 뿐이다. 여기 세 권의 책이 들려주는 다양한 생이 그렇듯 말이다. 책과의 만남에도 타이밍과 인연이 있는 건 아닐까. 염승숙의 『그리고 남겨진 것들』은 마치 오랫동안 기다렸던 선물처럼 다가왔다. 마냥 신 나는 밝은 소설이 아닌데 묘한 뜨거움이 있었다.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담은 열 개의 이야기는 상실과 부재를 인정하라고 손을 잡아주고 다독인다.

 

 아버지의 등에 소나무가 자라는 것처럼 설명할 수 없는 일들이 일어나고(「습濕」) 외톨이였던 누군가는 죽어 벽돌이 되어 그리운 이를 지켜보며 살아가고(「그리고 남겨진 것들」) 사라진 아버지를 기다리는 아들은 노래를 듣고 요리는 하며 홀로 살아간다(「노래하는 밤 아무도」). 바쁘다는 이유로 가까운 이들의 얼굴을 잊어버리며 살아가고(「양의 얼굴」) 부와 권력으로 삶의 경계가 이뤄지듯 청력에 따라 구역이 나눠질 수 있다는 미래(「눈물이 서 있다」)는 서글프고 섬뜩하다. 그럼에도 소설 속 인물들은 오늘을 살아내고 있었다. 때로 과거의 기억과 사라진 당신을 잊지 않으려고 몸부림치면서도 견디는 것이다. 현실에서도 언젠가는 곁에 있는 모두가 사라질 것이다. 사라진 후에 남겨진 것은 무엇일까. 혼자라는 고독과 소멸하는 삶뿐이라 여기는 나와 당신에게 이런 구절은 힘이 된다. 결국 저마다의 생을 살아가는 걸 알기에.

 

 ‘혼자가 아닌 거야. 누구라도, 인간은, 평생 자기 자신과 함께 식사하는 거야.’(89쪽) 

 

 한 번씩 그립다. 어른이 되어도 여전히 눈물 흘릴 나만의 밤과 손을 잡아주며 괜찮다고 말하는 친구가 간절하다. 이름만 들어도 하나의 얼굴이 떠오르는 공간은 아프다. 이광호의 『지나치게 산문적인 거리』에서 만나는 용산이 아린 것이다. 용산이라는 지명이 지닌 의미가 노란 리본의 팽목항과 겹쳐지는 건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 분명 상실과 부재의 크기와 모양은 다르다. 그러나 그곳에 고인 슬픔과 그곳을 지키는 이들의 마음은 다르지 않을 것이다. ‘너를 잊게 된다는 것’은 ‘네가 있었다’는 것에 대한 증명이다.’(153쪽) 란 분명한 사실이 우리를 견딜 수 없게 만든다. 거기 있었던 네가 한순간 사라질 수 있다는 걸 어떻게 인정할 수 있단 말인가. 점차 나의 오늘에서 아버지는 옅어진다. 이미 아버지의 공간은 사라졌고 함께 했던 시간은 번져 흐려진다. 자꾸만 이광호가 담아낸 용산을 펼쳐본다. 용산을 팽목항을 아버지를 간직하기 위해서.

 

 연말이 다가올 때마다 후회로 채워진 오늘을 자책한다. 화분 속 마른 식물 같았던 아버지에게 작은 물방울의 딸이었다면 어땠을까. 마지막 힘을 다해 눈을 끔뻑이던 아버지에게 사랑한다고 말했으면 좋았을 텐데. 다음 면회가 있을 거라 여겼던 것이다. 지나고 보니 모든 것이 핑계이며 부질없는 탄식이다. 물론 그 시간으로 돌아간다 해도 완벽하게 살았을지 장담할 수 없다. 얼마나 더 살아야 삶을 이해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 앨리스 먼로의 『디어 라이프에서 누군가의 삶을 통해 그 대답에 가까이 다가갈 수 있었다. 유년의 상처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삶(「자갈」)과 이별의 이유를 찾을 수 없이 비껴간 사랑(「아문센」)과 욕망을 절제하는 사람들(「일본에 가 닿기를」). 가장 가까운 가족과 화해하고자 노력하는(「디어 라이프」) 삶이 거기 있었다. 통찰과 관조의 시선으로 삶을 바라보는 앨리스 먼로의 소설은 인식하지 못한 과거의 잘못으로 사랑하는 이를 잃은 게 아닌가 자책하는 나와 당신에게 괜찮다고 용서하라고 말하고 있었다. 창피하고 부끄러운 생채기마다 흘러나오는 붉은 피도 언젠가는 멈춘다고 말이다. 살면 살수록 생이 어렵다는 걸 알지만 만회할 수 있는 생도 우리에게 있다고 알려주고 있었다. 어떤 오늘은 눈물로 채워지고 어떤 오늘은 피하고 싶은 날이 될지라도 아직 도착하지 않은 수많은 오늘을 살아내야 한다고.

 

 ‘사람들은 말한다. 어떤 일들은 용서받을 수 없다고, 혹은 우리 자신을 결코 용서할 수 없다고. 하지만 우리는 용서한다. 언제나 그런다.’(416쪽)

 

 책을 읽는다. 습관처럼 때로는 의식적으로 읽는다. 좋은 책은 누군가에게 기대고 싶은 어깨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여기 세 권의 책이 내게 그랬듯 당신에게 그런 어깨가 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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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물선 2014-12-14 17: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글 너무 좋아요. 위로가 되었습니다. 아버님의 명복을 빕니다.

자목련 2014-12-14 23:09   좋아요 0 | URL
보물선 님 감사합니다. 평안한 밤 보내세요.

2014-12-14 19:1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12-14 23:12   URL
비밀 댓글입니다.

아무개 2014-12-15 11: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늘... 기댈 어깨 같은 글을
자목련 님의 서재에서 만나고 갑니다.
좋은글 감사해요^^

자목련 2014-12-15 17:29   좋아요 0 | URL
아무개 님 빈약한 어깨를 꼭 안아주셔서 감사합니다.
차가운 날씨 감기 조심하세요^^
 
이미, 서로 알고 있었던 것처럼 문학동네 시인선 57
윤희상 지음 / 문학동네 / 2014년 6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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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처럼 이미 알고 있었던 것처럼 편안한 시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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