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나브로 살이 찌고 있다. 가을에 많이 먹고 많이 논 탓이다. 모르는 사이가 아니라 매일매일 살이 찌고 있다는 걸 확인하면서도 방치한다. 체중계에 올라갈 때마다 저녁에는 먹지 말아야지, 다짐하면서도 뭔가 먹고 있는 나. 그런데도 자꾸만 주전부리를 찾고 있다. 마음을 살찌우는 독서는 뒤로 미루고 몸만 살찌우고 있다. 가을이 끝나고 겨울이 시작되는 날들, 두툼한 외투에 몸을 감추기 좋은 계절. 이 살들을 어찌하랴. 다이어트가 필요하다. 생각의 다이어트. 종종 집을 떠난다. 여행은 아니다. 떠난다는 건 좋은 일이다. 떠난 자리에서 이곳을 생각할 수 있고 조금은 다른 나를 마주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곳과 이곳, 모두 소중한 공간이다. 혼자와 함께를 생각하는 곳. 지난 금요일 집으로 돌아왔고 나를 반기는 건 역시나 책들. 택배 상자를 뜯으며 소중하고 친근한 인연이 보내준 책을 쓰다듬으며 내가 없던 내 공간을 바라본다. 내가 김숨을 좋아한다는 걸 잊지 않고 신간을 보낸 이, 시의 새로운 감각을 보여줄 함민복의 시그림책.

 

 

 

 

 

 

 

 

 

 

 

 

 

 

 

 

 

 

 세탁기를 돌리고 물을 끓이고 쓰레기를 버린다. 특별할 것 없는 일상, 그러나 편안하고 소중한 일상. 그곳에서는 친구를 만났다. 우리는 일 년에 두 번 정도 만나는 것 같다. 이곳보다는 그곳이 친구와 더 가까운 곳이기에.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나를 기억하는 이가 있다는 건 소중하고 재미있다. 마치 낯선 누군가의 이야기를 듣는 것처럼 내가 모르는 나를 듣는다. 사는 일에 대해, 늙는 것에 대해, 커피를 마시고 밥을 먹으며 끊임없이 이야기를 나눈다. 통화를 자주 하는 사이가 아닌데도 우리는 만나면 수다쟁이가 된다.

 

 어딘가 내린 첫눈이 아직 이곳에는 내리지 않았고 오늘은 입동이다. 온수매트를 꺼내고 밤이면 모아둔 커튼을 펼친다. 커튼이 펴치면서 아늑한 밤이 된다. 누군가는 겨울이라고 말하는 순간, 겨울은 아직 이곳에 도착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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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니데이 2017-11-07 17: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오늘은 입동인데, 곧 겨울이 온다는 소리 같아요.
자목련님, 따뜻한 저녁시간 보내세요.^^

자목련 2017-11-08 16:16   좋아요 1 | URL
가을도 그렇지만 겨울은 왠지 마음이 바빠져요.
서니데이 님도 포근한 오후 보내세요, 감기 조심하시구요^^
 

 

 봄에는, 그래도 좀 걸었다. 내 기준의 걷기로 제법 걸었다. 목 디스크로 언니가 입원한 6월까지도 말이다. 그런데 더위가 몰려오고 비가 오기 시작하니 점점 꾀가 났다. 징검다리처럼 걷다가 결국엔 아침에 일찍 일어나도 신발을 신는 현관까지 나가지를 못했다. 나갔다 하더라도 아파트 단지를 한 바퀴 도는 게 아니라 잠깐 바람만 쐬다가 들어오고 말았다. 그리고 가을이 되었다. 걷는 즐거움을 그리워하는 계절이 되었다. 적당한 바람과 적당한 햇빛이 나를 유혹하는 계절. 장석주의 『가만히 혼자 웃고 싶은 오후』을 읽으면서 천천히 걷고 싶어졌다. 아주 천천히 걷다가, 앉을 만한 곳이 있으면 그냥 앉아서 해바라기를 하고 싶어졌다.

 

 걷기의 즐거움은 풍부한 감각적 경험을 낳는다는 데서 비롯한다. 나는 풍경을 보고, 냄새 맡고, 맛보고, 만지며 걷는다. 걷기는 저 바깥에서 내 안으로 전달되는 소리와 냄새와 시각적 자국들을 바탕으로 한 사유와 상상력의 촉매제다. 걷기에 몰입하는 사람은 시공간을 향해 자신의 존재를 열어젖힌 채 세상의 풍경들을 제 안으로 받아들인다. 걷기는 이것들을 모아 스스로를 빚는 성분으로 삼는 것이다. 또한 걷기는 관능적 기쁨을 되살리고, 건강에 보탬이 될 뿐만 아니라 나를 오롯이 나 자신에게로 되돌리는 수단이다. (233쪽)

 

 장석주가 들려주는 그의 삶은 단순하고 평안한다. 무언가에 얽매이지 않고 사는 자유로움 같은 게 느껴졌다. 그런데 지금의 삶에 정착할 때까지 그 과정은 단순하고 평온하지 않았을 것이다. 마음의 평정과 고요가 찾아오기까지 수많은 파도가 일렁이며 천둥과 번개가 내리쳤을 것이다. 어찌할 수 없는 마음을 달래려 도서관에서 책을 읽었다는 장석주의 그 어느 시절처럼, 출판사를 접고 시골로 내려와 살기로 한 결정한 그 시절의 마음을 나는 알 수 없다. 어쩌면 그 힘든 시기를 견뎌냈기에 이렇게 편안하고 빛나는 글을 쓰는지도 모른다. 그가 시인이라서가 아니라.

 

 같은 자리에서 계절이 바뀌는 모습을 지켜본다는 건 특별하지 않을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신기하게도 봄, 여름, 가을, 겨울 이미 겪어온 그 계절의 변화를 마주할 때마다 놀랍고 감격스럽다. 그러니 봄이 되면 어김없이 모란과 작약의 황홀함에 빠져들고 여름의 건강한 초록에 반하는 것이다. 이건 내가 시골에 살아서 잘 안다. 장석주의 글에는 자연, 걷기, 글쓰기, 책에 대한 이야기가 많다. 그것이 그를 이루고 그것들과 함께 살아가기 때문이다. 하루에 여덟 시간씩 글을 쓰는 일. 한눈을 팔지 않고 오롯하게 그것을 해내는 일. 누군가는 그게 직업이니까 당연한 거 아니냐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러나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사랑하며 최선을 다하는 건 정말 어려운 일이다. 우리 스스로 잘 알고 있지 않은가. 해야 할 일을 다 끝내고 한 손에 책을 들고 숲을 걷는 장석주의 삶은 그에게 최고다. 문득 그의 글을 읽으면서 그의 나이만큼 먹었을 때 나는 그처럼 살 수 있을까, 생각했다. 걷고, 읽고, 사랑하고, 쓰고 단순하게 사는 삶. 복잡하지 않고 여유가 있는 삶.

 

 장석주의 시골 생활과 서재는 이미 잘 알려졌다. 그러나 나는 그가 그곳에서 어머니와 함께 살았다는 건 이 책을 통해 알았다. 아들은 유유자적 책을 읽고 어머니는 갖가지 채소를 심었다. 어머니가 지어주신 밥과 된장찌개를 먹는 단순한 일상은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에는 그리움이 되었다. 둘이었다가 하나가 된 일상의 적막함이라니. 농담처럼 결국엔 다 혼자라고 말하지만 정작 혼자가 되었을 때 우리는 모두 어찌할 바를 모른다. 이미 책에서 배웠다 하더라도, 안다고 생각해도 직접 경험하지 않고는 알 수 없는 것들. 그것이 인생이다.

 

 단 일 회의 편도여행, 그것이 인생이다. 지도 없이 떠난 편도여행에서 길을 잘못 들어 엉뚱한 곳을 헤매고, 구렁텅이에 빠져 벗어나려고 고단하게 허우적이며 안간힘을 쓰는 사람도 어딘가에는 있는 법이다. 나는 아름다운 사람을 만나고, 절경을 만나 뜻밖에 횡재한 기분인 적도 있었다. 인생이라는 편도여행은 우연과 불운들, 기이한 행운과 엇갈림의 연속이다. 분명한 사실은 이 편도여행은 떠난 뒤 다시 돌아오지 못한다는 점이다. 다시 돌아올 수 없음, 그 불가피성으로 이 여행은 슬픔과 아쉬움, 그리고 덧없음과 감미로움이라는 긴 여운을 남긴다. (119~120쪽)

 

 인생의 오후를 가장 빛나게 살고 있기에 아름다운 것일까. 문장을 따라 읽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휴식을 얻는다. 이처럼 편안한 시인의 산문집을 읽다 보면 저절로 떠오르는 책이 있는데 바로 ‘메리 올리버’의 『완벽한 날들』이다. 아마 나 아닌 누군가도 같은 생각이 아닐까 싶다. 시인의 일상과 사유, 그리고 자연을 노래한 점에서 정말 닮았다. 눈에 보이는 자연, 피부에 닿는 계절, 보고 듣고 느끼고 생각한 그대로의 기록이다. 단순한 것처럼 보이지만 그것이 얼마나 위대한 일인지, 글을 읽는 우리는 이미 잘 안다.

 

 노란 은행잎을 주워 담으며 알록달록 단풍을 즐기는 사이 ‘가을이 되었다’는 말은 곧 과거가 될 것이다. 깊은 잠에 들지 못하고 자주 깨던 지난여름이 그러하듯. 우리는 그 계절을 그리워한다. 지겨워하고 그리워한다. 겨울이 시작되는 날, 이런 문장을 다시 읽으리라.

 

 겨울 아침의 서리 사이로 반갑기 그지없는 소문이 들려온다. 미美는 목적을 지니고 있으며 그걸 직감하는 게 평생, 계절마다 우리에게 주어지는 기회고 기쁨이다. 우리가 그런 욕구를 느끼는 건 우리 외부의 것들 때문이 아니다. 질문들과 그 답을 얻으려는 노력은 우리 내부에서 나온다. (중략) 햇살은 언 풀잎들에 고루 닿고, 일방적인 광경의 일부일 뿐만 아니라 하나의 특별한 광경으로 불타오른다. 아직 똑바로 선 잡초들은 순간적으로 얼음과 빛의 셔츠를 입고 마법의 지팡이가 된다. 이 첫 빛은 작은 연못과 소나무 숲의 기회도 놓치지 않는다. 이제 은빛은 그만, 분홍을 보라. 더할 나위 없는 은은한 연초록의 분출을 보라. 오직 이 시간만이, 늘 새롭고 신선한 새벽만이 연출할 수 있는 광경이다. (『완벽한 날들』, 4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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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물선 2017-10-19 18:1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우리는 지금도 나름 <완벽한 날들>로 살고 있는걸지도 몰라요.. 그저 조금 더 나아진 모습으로 나이들길 바라는게지요^^

자목련 2017-10-20 15:34   좋아요 1 | URL
네, 맞아요. 오늘을 살고 있다는 것, 그게 가장 완벽한 게 아닐까 싶어요.

2017-10-19 19:2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10-20 15:33   URL
비밀 댓글입니다.
 

 

 가을은 정말 결실의 계절인가 보다. 아니, 열매의 계절인지도 모르겠다. 수북한 밤을 보며 든 생각이다. 무언가를 획득하는 일은 성취감이 크다. 작은 노동의 수고로 비어있던 자루가 차오르는 건 즐거운 기쁨일 것이다. 그 기쁨의 주체는 내가 아니다. 나는 그저 그것들을 바라보는 사람이다.  


 밤의 상태는 살펴보지 않고 씻어서 냄비에 삶았다. 지난번 먹은 밤보다 맛이 없었다. 모든 밤이 맛있을 수는 없으니까. 하룻밤이 지나고 밤이 들어있던 자루에 정체를 알 수 없는 작은 알맹이들이 가득하다. 그것은 벌레가 밥을 먹은 흔적이었다. 온전한 밤을 고르는 일이 시작되었다. 한눈에 보기에도 벌레가 먹은 밤을 고르는 건 쉬었다. 그러나 눈에 보이지 않는 흔적을 찾아내기란 쉽지 않았다. 고른다고 고른 밤을 씻어 물기를 빼고 얼마 후 다시 작은 알맹이가 나타났다. 도대체 벌레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 어떻게 이 단단한 껍질을 뚫고 밤을 먹는 것일까. 똑같이 생긴 밤을 바라보면서 겉으로는 아무것도 알 수 없는 게 밤이구나 생각했다. 찐 밤을 갈라 보고서야 썩거나 먹을 수 있는 부분이 얼마 안 되는 밤의 내면을 마주한다. 누군가의 내면을 아는 일도 그렇겠지. 겉으로는 그의 내부를 알 수 없고. 몇 번의 만남과 대화로 안다고 착각하기도 하니까. 그럼 밤 껍질은 위장일까. 아니 내부를 보호하기 위한 보호막일지도 모른다. 쉽게 웃으면서도 속내를 보여주지 않는 것처럼.

 

 할아버지 추도 예배를 드린 어제, 홀로 참석하신 작은아버지의 얼굴이 떠오른다. 지난봄 입원과 시술, 그리고 계속되는 약 복용으로 부은 얼굴로 등장하셨다. 괜찮으시냐고 물었더니 통증은 없고 약 때문에 붓는 얼굴 때문에 속상하시다고만 하셨다. 몸이 보내는 신호였지만 부은 얼굴이 작은아버지의 상태를 다 알려주는 건 아니었다. 우리는 그 마음을 정확하게 알 수 없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나의 외부를 생각했다. 그리고 나의 내부를.


 가즈오 이시구로가 노벨문학상을 수상하고 그의 소설에 대한 글을 많이 접한다. 내게도 두 권의 책이 있다. 읽지 않은 채 구매만 한 책. 조만간 읽으면 좋으련만. 장담은 어렵다.  그럼에도 소장하지 않은 소설 『나를 보내지 마』를 구매해야 하나, 혼자 생각한다. 충동구매로 이어지면 안 되는데. 관심이 가는 책은 첫 소설과 첫 시집. 장수진의 『사랑은 우르르 꿀꿀』, 박사랑의 『스크류바』.

 

 

 

 

 

 

 

 

 

 

 

 도망치듯 성큼성큼 걸어가는 가을이다. 고개를 들어 가만히 하늘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가을과 하나가 될 수도 있겠다는 착각에 빠진다. 떠나는 가을을 붙잡을 수 없겠지만 가을과 행복한 이별을 할 수는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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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법 쌀쌀해진 날씨에 몸을 움츠린다. 이대로 가을과 이별하고 겨울과 만나는 건가? 알 수 없는 일이다. 내일부터 시작되는 추석 연휴에 누군가는 여행 가방을 챙기고 누군가는 스트레스가 쌓인다. 정보를 알려주는 방송에서는 묻지도 않는 식용유 사용법(전, 무침, 튀김에 적절한)을 상세히 알려준다. 다른 지역으로 이동을 하거나 여행을 계획하지 않은 이에게는 그저 보통의 날들과 같을 것이다. 외지에서 오는 차량으로 도로가 조금 막힐 것이고 친구나 친척들과 안부 문자를 나누고 제법 긴 전화통화를 하겠지.

 

 9월은 어떻게 지냈던가. 10일은 다른 곳에서 보냈다. 서울에 다녀오기도 했다. 어영부영했던 8월과는 어떻게 다른가. 매번 후회가 더 많은 날들이다. 그러고 보니 2017년이 90 여일 밖에 남지 않았다니. 숫자는 왜 이리 정확한가. 숫자는 왜 이리 흔들림이 없는가. 부정을 저지른 숫자마저 당당하다. 정확한 날짜에 들어오는 월급은 흔적 없이 사라진다. 적립금도 마찬가지. 숫자를 지배할 수 있을까, ㅎ 가을이 열매의 계절이 맞나 보다. 맛있는 고구마와 밤을 쉽게 얻는다. 씻어서 냄비에 삶기만 하면 된다. 밤을 먹는 시간은 최대한의 게으름이 필요하다.

 

 

 

 

 연휴에는 게으름이 쌓일 것이다. 책읽기도 마찬가지겠지. 그럼에도 이런 책을 읽고 싶다. 박솔뫼의 두 번째 소설집이 나왔다. 김혜진과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의 장편. 읽을 수 있을까. 아니, 읽지 않을 거야. 그냥 빈둥거리겠지. 그래도 한 권 정도는 읽지 않을까. 마음의 소리가 튀어나오고 있다. ㅎ 

 

 

 

 

 

 

 

 

 

 

 

 9월이 지나고 10월이 쌍둥이처럼 겨울을 불러올 것 같다. 회색빛 겨울이 싫다고 했던 언니의 말이 생각난다. 가을, 그리고 겨울이 오는 건 당연한 일. 고장 난 시계처럼 겨울이 천천히 올 수도 있지 않을까. 그냥 쓸데없는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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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니데이 2017-09-29 11: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목련님 즐거운 추석연휴 보내세요.^^

자목련 2017-09-30 17:14   좋아요 1 | URL
네, 서니데이 님도 건강하고 평온한 연휴 보내세요^^

에디터D 2017-10-01 01: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계절의 변화를 느낄 수 있다는 것 자체가 감사한 일이지만 겨울을 특히 좋아하는 저 역시 올 겨울은 천천히 오길 바라고 있어요. 역시나 쓸데없는 바람일테지만요. 즐거운 추석 되시길! ^^

자목련 2017-10-02 16:22   좋아요 0 | URL
어쩌면 그 기다림은 첫 눈을 기다리는 그것과 같지 않을까 싶기도 해요. 라제 님도 따뜻한 추석 보내세요^^

서니데이 2017-10-02 18: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겨울이 오기 전에 조금 남은 따뜻하고 좋은 시간이예요.
자목련님 추석인사 드리러 왔어요.
즐겁고 행복한 추석연휴 보내세요.^^

자목련 2017-10-10 11:27   좋아요 1 | URL
길고 긴 연휴가 끝나버렸어요. ㅎ
좋은 시간으로 채우셨나요?
서니데이 님, 감기 조심하시고 활기찬 한 주 시작하세요^^
 

 

 보통의 연인은 종종 다툰다. 사소한 싸움으로 서로의 애정을 확인하기도 하고 그로 인해 사랑이 더욱 단단해지기도 한다. 보통의 연인이 그렇다는 말이다. 하지만 한쪽에서 지나치게 사소한 것에 자주 화를 내고 집착이 심해지면 둘의 관계는 어긋날 수밖에 없다.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모든 걸 감싸 안아야 한다는 생각은 위험한 짓이다. 그러니까 내가 더 많이 사랑하면 괜찮을 거야, 내가 더 이해하면 괜찮을 거야 믿으며 만남을 지속해서는 안 된다. 쉽지 않겠지만 그래야만 한다고 나는 강화길의 소설을 읽고 확신했다. 강화길의 단편집 『괜찮은 사람』과 장편소설『다른 사람』은 폭력(데이트 폭력, 왕따, 온라인 댓글 폭력)을 다룬다. 

 

 강화길의 단편에서 공포는 부드럽게 조성된다. 남들이 부러워하는 남자친구(「호수-다른 사람」), 모두가 선망하는 유치원(「니꼴라 유치원- 귀한 사람」, 완벽한 연인(「괜찮은 사람)」가 만들어내는 공포는 처음엔 그들의 삶에 합류하고 싶을 만큼 매력적으로 다가온다. 그들과 교류하여 그들과 같은 일상을 이어갈 수 있다면 제법 괜찮은 사람처럼 보일 거라 믿었기 때문이다.

 

 「호수-다른 사람」속 민영을 끔찍하게 챙기며 사랑하는 그의 남자친구를 아무도 의심하지 않았다. 호숫가에서 민영이를 해친 범인이 남긴 단서를 함께 찾아보자고 진영에게 그곳에 가자고 했을 때 진영은 완강히 거부해야만 했다. 그에게 전해지는 섬뜩함과 두려움을 그대로 밀고 나가야 했다. 그러나 그건 진영에게 너무도 어려운 일이었다. 진영뿐 아니라 강화길의 소설 인물이 대체로 그러했다. 답답할 정도로 상대의 말을 믿고 시간이 지나면 나아질 거라 생각한 것이다. 타인의 평판이 중요하기도 했다. 매일 만나는 사랑하는 이가 한순간 공포의 존재가 된다는 걸 믿을 수 없었을지도 모르겠다. 아니면, 그것이 나름 안전하다고 여겼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나는 그와 이야기할 때면 몸의 어딘가에 난 깊고 붉은 상처를 들여다보는 기분이 들었다. 쓰리고 욱신거리는 통증이 묵직하게 몸을 짓누르는 느낌. 하지만 언제 어디서 다쳤는지는 모르는, 나도 모르게 몸에 박힌 상처를 발견하는 기분. 그래서였다. 나는 대부분의 이야기를 반복해서 털어놓았지만 결국 모든 것을 말하지는 않았다. (「호수 - 다른 사람」, 19쪽)

 

 그래서 진영은 말을 아꼈던 건 아닐까.「니꼴라 유치원- 귀한 사람」속 나도 그랬을 것이다. 이상한 소문을 들었지만 유치원 원장에게 직접 물어볼 수가 없었을 것이다. 이 유치원만 졸업하면 아이의 미래가 밝고도 환한데, 대기자에 이름을 올리는 것도 얼마나 어려운 일인데. 그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중요하지 않았다. 아이가 구성원이 되었다는 것만으로 이미 충분했으니까. 

 

 뒤늦은 후회를 했을 때 우리는 되돌릴 수 있는 기회라는 걸 놓치고 만다. 많은 이들이 알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데 하면서 스스로 괜찮다고 다독인다. 결혼 예정인 「괜찮은 사람」의 ‘나’처럼 말이다. ​약혼자와 함께 그가 사 둔 집을 보러 가는 과정을 자세하게 기록한 이 소설에서 민주는 내세울 게 없는 존재다. 약혼자에게 비하면 그렇다. 그래서 그와 결혼을 하면 지금보다 훨씬 더 좋은 사람, 괜찮은 사람이 될 게 분명했다. 그러니 그의 폭력과 공격은 감싸 안아야 할 것이었다.

 

 나는 그저 괜찮은 사람이 되고 싶었다. 남들이 나를 괜찮은 사람으로 생각하는지 늘 신경이 쓰였다. 누군가가 나에게 조금이라도 실망하거나, 나를 좋아하지 않으면 이 빈약하고 허름한 트랙에서조차 떨어져 나갈 것 같은 불안이 밀려왔다. 그러나 나는 이런 마음을 드러내지 않으려 정말 열심히 노력했다. 불안은 순식간에 번지는 곰팡이와 같아서 쉽게 눈에 띄었고, 그러면 공격의 대상이 되기 쉬웠다. 자신을 별 볼 일 없는 사람으로 느끼는 것과 정말로 함부로 대해도 상관없는 사람이 되는 건, 굉장한 차이였으니까. (「괜찮은 사람」, 88쪽)

 

 그 집을 찾아가는 과정은 괴기한 분위기로 가득하다. 그가 운전하는 자동차 내부도 그렇다. 불편하고 거북하지만 그가 설명하지 않는 이유가, 아니면 별일 아니라서 그런가 보다 생각한다. 더럽고 흉물스러운 풍경, 고약한 냄새, 어느 하나 산뜻하지 않다. 정말 그가 그토록 바랐던 집이 이런 곳에 있단 말인가. 돌아가자고 말해야 했지만, 말하지 못한다. 알면서도 여기서 끝내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민주는 계속해서 괜찮은 척한다. 괜찮은 사람이 되고 싶어서.

 

 소설 속 인물은 뻔히 보이는 결말을 향해 걸어간다. 두렵다고, 싫다고, 도움을 요청하는 목소리를 내지 않는다. 다른 길을 찾으려 하지 않거나 그곳에 계속 머문다. 어쩌면 그건 강화길의 의도였을지도 모른다. 익숙한 폭력, 일상이 된 불안과 공포의 실체를 고스란히 보여주려는 의도는 아닐까. 괜찮다고 말하는 목소리의 떨림을 알아채야 한다고. 더이상 괜찮다고 말할 필요는 없다고.

 

 그에 비하면 장편소설 『다른 사람』에서 강화길은 작정하고 끔찍한 폭력을 들려준다. 직장 상사인 남자친구에게 다섯 번째 폭력을 당하고 경찰에 신고한 진아. 사건이 언론이 알려지고 회사를 관둔 진아의 삶은 온전할 리 없었다. 피해자인 진아가 설 곳은 어디에도 없었다. 진아가 온라인 댓글을 보고 과거 누군가를 떠올리고 소설은 확장된다. 그러니까 진아 혼자만이 아닌 단아, 유리, 수진의 이야기를 시작한다. 강화길은 진아의 이야기를 시작으로 사회 전반의 폭력을 다룬다.

 

 서울의 대학으로 편입을 하기 전 진아가 다녔던 지방의 대학교, 그리고 진아의 친구들. 그들의 이야기를 교차로 들려준다. 잊고 있었다고 믿었던 상처, 시간이 지났으니까 괜찮아졌을 거라고 믿고 싶었던 시절. 폭력을 행사하며 피해의식이 있다고 말하는 나쁜 남자. 아무렇지 않게 성공가도를 달리는 남자.피해자였음에도 사실을 말할 수 없었던 진아, 유리, 수진의 고통. 한 남자와 한 여자가 호감을 갖고 만나 사귀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감정의 교류가 아닌 일방적인 폭력, 그리고 그것을 바라보는 타인의 시선. 예상했지만 폭력을 묘사하고 고통받은 일상을 읽어내는 일은 쉽지 않았다. 소설일 뿐이라고 치부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여자애들이었다. 해도 되는 것보다 해서는 안 되는 것들을 더 많이 배운 여자애들. 된다는 말보다 안 된다는 말을 더 많이 듣고 자란 여자애들. (59쪽)

 

 잘못한 게 없는데 왜 죄책감을 느껴야만 하지? 혼란스러울 때마다 울음이 터져 나왔다. (228쪽)

 

 그렇지 않은가. 어디서나 만날 수 있는 사람. 어디에서나 벌어지는 일. 그렇게 대단하지도 엄청나지도 않는 사건. 그러나 어넺나 존재해왔던 살마. 이것이 나의 방법이다. 누군가에게 끝없이 편지를 쓰는 것, 혼자 책 속에 파묻히는 것, 있었던 일을 하나하나 기록하는 것처럼 내가 할 수 있는 어떤 것. 그러나 때때로 그 모든 것은 날조된 기록이 되기도 한다. 내가 당신 일을 서술할 때가 아니다. 내가 저지른 일을 적어나갈 때다. 나는 여러 버전의 기억들을 쓰고 또 쓴다. 왜냐면 클리세는 문을 닫고 나오는 것까지만 나올 뿐이니까. 닫힌 문을 열기 위해서, 혹은 문들 다시 닫아버리기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는 누구도 모른다. 그래서 나는 너의 이름으로 무언가를 쓰기도 한다. (332~333쪽)

 

 나는 어떻게 자랐는가. 지금의 나는 조카나, 후배에게 어떻게 말하는가. 가슴이 답답했지만 『다른 사람』속 진아, 단아, 수진은 더이상 수동적 삶에서 벗어나려 한다. 리베카 솔닛의 글을 빌리자면 침묵하지 않는다. 두렵고 무서워서 스스로를 가둔 방에서 무수한 질타와 시선을 감내하며 나오는 중이다. 리베카 솔닛의 문장에서 언어 대신 소설을 넣어 읽어보았다. 강화길의 소설을 통해 우리가 보아야 할 것이 무엇인가 생각했다.

 

 언어가 추구할 가장 진실 되고 가장 중요한 목적은 세상을 또렷하게 만들어서 우리가 잘 보도록 돕는 것이다. 언어와 그가 반대로 쓰였을 때, 우리는 우리가 곤란에 처했고 어쩌면 무언가 은폐되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걸 깨닫는다. (『여자들은 자꾸 같은 질문을 받는다』, 중에서)

 

 강한 흡입력으로 끝까지 손을 놓지 못하게 만드는 소설이다. 구성과 전개, 앞으로 어떤 결말이 나올까 기대하게 만들었다. 어떤 결말을 만들어야 할까. 피해자가 숨지 않는, 혼자만의 방법으로 고통과 싸우지 않는, 따뜻한 세상과 마주할 수 있는 그런 결말은 과연 올까. 그들이 원하는 다른 사람이 될 수 있을까. 대답할 수 없다. 선뜻 어떤 말도 꺼낼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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