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커바웃
김하경 지음 / 삶창(삶이보이는창)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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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는 모두 오늘을 사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니까 이 말은 어떤 이는 과거에 매달린 채 살고, 어떤 이는 오로지 내일만 보고 산다는 것이다. 모두 행복한 삶을 원하지만 그들의 방식은 다르다. 김하경의 소설집 『워커바웃』은 당신은 어디에 중점을 두고 사냐고 묻는 듯하다. 소설 속 인물은 우리와 다르지 않게 이 시대를 사는 시민들이다. 하루를 벌어 하루를 살고, 누군가에게 싫은 소리를 하지 못하고 혼자만 끙끙앓고, 새로운 세상을 꿈꾸기도 하고, 누군가를 용서할 수 없어 분노하기도 한다. 그렇기 때문에 이 소설은 소설이라기 보다 누군가의 일기처럼 다가온다.

 

 표제작 <워커바웃>은 과거의 상처로 인해 마음을 닫고 사는 한홍이와 그녀의 마음을 열게 만드어 준 발데르를 통해 함께 사는 세상에 대해 이야기한다. 프리랜서인 홍이는 친구 희선의 부탁으로 율포조선 해고자들의 농성집회를 취재하기 위해 율포로 향한다. 25년 전 아버지를 생각하면 여전히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그러나 굴뚝에서 농성 중인 노동자와 그들을 지지하고 걱정하는 그들의 가족과 동료를 통해 그녀는 과거 자신의 아버지를 떠올린다. 아버지 때문에 가족 모두가 힘들었기에 아버지를 이해할 수 없었다. 율포에서 노동자들과 어울리고 그들의 삶을 마주하고 나서야 그들이 아버지와 다르지 않았다는 걸 알게 된다. 그들을 응원하며 자신의 취재를 도와주는 발데르에게서 어떤 희망을 보게 된 것이다.

 

 ‘내가 아닌 다른 누군가가 내 안에 들어와 있는 말하는 것 같았다. 순간 깨달았다. 내가 이들과 똑같이 느끼고 똑같이 말하게 되었다는 것을. 같은 마음으로, 같은 언어로 말하게 되었다는 것. 비로소 굴뚝 위 사람들과 굴뚝 아래 사람들이 내 안에 들어와 하나가 되었다.’ 198쪽

 

 이 소설을 읽으면서 김진숙과 크레인을 떠올린다. 함께 염려하고 함께 기도했던 순간들을 말이다.  아버지의 삶에 속하고 싶지 않았던 홍이가 굴뚝 집회 현장을 지켜보면서 발데르에게서 느꼈던 그것은 같이 가는 것이다. 조금 천천히 가더라도 다 함께 가는 길이 더 아름답고 더 행복한 일라는 걸 우리는 잊고 있었던 건 아닐까.

 

 <초란>은 과거 노동 운동의 지도자였던 강준을 통해 여전히 노동 운동의 현실은 아프지만 그래도 희망을 놓지 말라고 말한다. 시골로 들어와 닭을 키우는 강준은 아내에게도 말하지 못한 상처가 있다. 과거 대산중공업에 다닐 때의 일이다. 함께 노동 운동을 하던 친구 영호가 감옥에서 죽은 것이다. 그 뒤로 강준은 그 일과 관련된 이들과는 연락을 끊고 지냈다. 그러다 늦었지만 영호의 추모비를 세우는 행사로 후배의 연락을 받은 것이다. 강준을 통해 1980년대를 마주하는 이들도 많을 것이다. 안타까운 건 최소한의 안전도 보장받지 못한 채 일선에서 생활하는 이들은 사라지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래도 희망을 놓지 말자는 강준의 말은 이 시대의 모든 노동자들에게 든든한 힘이 된다.

 

 ‘1980년대처럼 싸우라는 말이 아이다. 그렇게 싸울 수도 없꼬. 지금은 분명 그때와 다르다. 하지만 세상이 아무리 변해도, 아무리 세상이 절망적이라 캐도, 노동조합은 여전히 우리의 희망이데이. 그 유일한 희망을 버려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촛불 시민이 아무리 거리로 몰려나와도, 인터넷 누리꾼이 아무리 떠들어싸도, 조직적으로 되지 않으모 반짝하고 끝나고 마는 기라. 눈을 뭉칠라카모 먼저 작은 덩어리를 만들어야 한다 아이가? 그 작은 덩어리를 굴리모 많은 눈들이 거 들러붙어 큰 덩어리가 되는 기라. 그 작은 덩어리 하나하나가 노동조합 아이가?’  69~70쪽

 

 촛불 시위에 대한 편견을 버리고 동참을 유도하는 <지르 자자! 찌찌!>, 교통사고로 뇌사자가 된 친구의 죽음을 통해 안타까운 의료 현실을 고발하는 <누가 죽었어요?>, 개혁을 꿈꿨지만 당에 이용만 당하고 빚만 지고 만 씁쓸한 정치 현장을 보여주는 <비밀과 거짓말>, 사회적 약자지만 보호받지 못한 채 결국 불행으로 생을 마감하는 둘례와 윤철의 이야기 <둘례전>은 모두 우리 사회의 문제를 보여준다. 

 

 김하경은 힘겨운 현실에 모든 걸 놓아버리고 싶은 인물을 내세웠지만 포기를 말하는 대신 앞으로 나가가라고 말한다. 강준의 말처럼 인생에는 연습도 실험도 없으니까.  희망을 버리지 말고 살아야 하는 게 우리의 운명이라고 말이다.

 

 ‘어차피 인생에는 연습이 없다. 실험도 허락하지 않는다. 오로지 실전이 있을 뿐이다. 분명 실패할 수 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여기까지 왔고, 앞으로도 멈출 수도 없다. 그래서 간다. 빌어먹을……. 그게 내 운명이다.’  4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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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애하는 사물들 문학동네 시인선 23
이현승 지음 / 문학동네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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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김없이 여름은 자취를 감추고 그 자리에 슬그머니 가을이 왔다. 계절이 바뀌니 일상에도 작은 변화가 생긴다. 길었던 머리카락을 짧게 잘랐고 아침 저녁으로 뜨거운 밥을 먹기 시작했다. 찬 물에 말아 먹던 밥과 냉면을 생각하면 저절로 몸이 움츠러든다. 원하든 원하지 않든 계절은 다른 이름으로 돌아오고 잊고 있던 그리움의 존재는 되살아난다. 이런 날들에 시를 읽는다는 건 위험한 일인지도 모른다. 시는 다분히 감정의 소모를 불러올 것이고 나 역시 친구처럼 누군가에 짙은 우울에서 나를 건져 달라고 문자를 보낼지도 모를 일이다. 변한 것은 아무 것도 없고 내게 속한 시간도, 주어진 시간이 늘었다거나 줄었다거나 하지 않는데 말이다. 그러니까 가을은 받고 싶지 않은 우울이라는 선물을 덥석 떠맡기는 것이다.

 

 가을이라서 엊그제는 <가을 단상>이란 제목의 시를 따라 읽었지만 이 시집에서 첫 번 째 읽은 시의 제목은 <에이프릴>이다. 그렇다. 여전히 나는 봄을 그리워하고 봄을 잊지 못하는 것이다. 다가올 봄이 아닌 내 몸에 문신처럼 남은 지난 봄의 날들을 말이다. 더이상 봄눈에 놀라지 않는 오늘을 살지만.

 

  <에이프릴>

 

 우는 아이를 안고 걸어오는 길이었습니다.

 비둘기 두 마리 고추장비빔밥맛 삼각김밥을 쪼아먹고 있

었습니다.

 너덜너덜 더이상 삼각형이 아닌 삼각김밥처럼

 피만 것인지 지다 만 것인지 목련나무가

 눈비 지나간 사월의 끝을 어루만지고 있었습니다.

 

 울 다 잠이 든 아이는 자다 깨어 다시 울고

 우리는 이 모든 것이 어쩔 수 없다는 것을 압니다.

 나뭇가지에 얹혔던 꽃도 눈도 갑작스런 찬바람도

 뜨겁게 달아오르는 이마와 불과 목과 겨드랑이도.

 

 꽃은 나뭇가지에서 피어나지만

 나무도 가 본 적 없는 세상으로 먼저 갑니다.

 공중에 잠깐 머물다 곤두박질치는 꽃잎들을

 나무는 돌멩이가 가라앉는 물속 보듯 바라봅니다.

 

 펄펄 끓는 아이를 품에 안고 돌아오며 보았습니다.

 아프지 말아라 목련나무야 벚나무야 비둘기야

 해열진통제 같은 사월의 눈이

 펄펄 끓는 벚나무 이마를 가만히 짚습니다. - 62쪽

 

 <비의 무게>

 

 분리수거된 쓰레기들 위로

 비가 내린다

 끼리끼리 또 함께

 비를 맞고 있다

 

 같은 시각

 옥수동엔 비가 오고

 압구정동엔 바람만 불듯이

 똑같이 비를 맞아도

 폐지들만 무거워진다

 

 같을 일을 다행도

 어쩐지 더 착잡한 축이 있다는 듯이

 처마 끝의 물줄기를

 주시하고 있는 사람이 있다

 

 내리는 빗속에서

 더이상 젖지 않는 것들은

 이미 적은 것들이고

 젖은 것들만이

 비의 무게를 알 것이다 - 22쪽

 

 지난 봄, 나는 펄펄 끓는 열보다 더 뜨거운 아픔을 지켜보아야만 했다. 어쩔 수 없다는 현실을 인정하면서, 내 감정의 한계를 경험하면서 아파했다. 두 번의 계절이 바뀌었지만 크기를 잴 수 없는 슬픔은 여기 저기 흩어졌을 뿐 사라지지 않는다. 해마다 봄을 맞이하면 우리는 또 각 자의 자리에서 소리없이 절규하고 통곡할 것이다. 비에 젖은 것들만이 비의 무게를 안다는 당연한 말이 왜 이리 절절하게 다가오는지 모르겠다.

 

 <눈물의 원료>

 

 우리는 언제나 두 번 놀란다

 한 번은 갑작스런 부고 때문에

 또 한 번은 너무나 완강한 영정 때문에

 

 다 탄 향의 재처럼 가뭇가뭇한 눈을 씻고

 우리는 산적과 편육과 장국으로 차려진 상을 받으며

 사나운 곡소리와 눈물을 만드는 재료에 대해 생각한다

 

 사람의 얼굴이란 웃는 표정과 우는 표정이 비슷하고

 가리는 울음과 드러내는 웃음이 반반 섞이고 나면

 알 수 없다 알 수 없이 망연하게 들여다볼 수밖에 없다

 

 삶의 마지막 순간에 호흡은 들숨일까 날숨일까

 마지막 날숨을 탄식이라고 볼 수 있을까

 들숨을 결심할 때의 그것으로 볼 수 있을까

 

 남의 밥그릇에 밥을 퍼줄 때만 우리는 잠시 초연해질 수

있다

 밥통을 열어젖힐 때의 훈김처럼 갑자기 나타났다가 사라

지는 것들을 본다 - 28쪽

 

 <친애하는 사물들>

 

 아파서 약 먹고 약 먹어서 아팠던 아버지는

 주삿바늘을 꽂고 소변주머니를 단 채 차가워졌는데

 따뜻한 피와 살의 영혼으로 지어진 몸은

 불타 재가 되어 날고 허공으로 스몄는데

 

 아버지의 구두를 신으면 아버지가 된 것 같고

 집 어귀며 책상이며 손 닿던 곳은 아버지의 손 같고

 구두며 옷가지며 몸에 지니던 것들은 아버지 같고

 내 눈물마저도 아버지의 것인 것 같다

 

 우리는 생긴 것도 기질도 입맛도 닮았는데

 정반대의 표정으로 서로를 마주본다

 포옹하는 사람처럼 서로의 뒤편을 바라보고 있다

 우리는 마주 오는 차량의 운전자처럼

 무표정하게 서로를 비껴가버린 것이다 - 82쪽

 

 누구나 겪는 일이라고, 담담하게 받아들여야 하는 소식들이 점점 늘어간다. 누군가의 발병, 누군가의 죽음, 누군가의 이별, 누군가의 실패나 좌절이 아무렇지 않은 현실이 되었다. 매 시각 뉴스는 잔혹한 뉴스를 전달하고 우리는 점점 소모되고 사라진다. 균일화된 눈물을 흘리거나 동일한 크기로 분노를 발산한다. 마치 이 모든 것이 당연한 삶의 공식인 것처럼 받아들이려 한다.

 

 <다정도 병인 양>

 

 왼손등에 난 상처가

 오른손의 존재를 일깨운다

 

 한 손으로 다른 손목을 쥐고

 병원으로 실려오는 자살기도자처럼

 우리는 두 개의 손을 가지고 있지

 

 주인공을 곤경에 빠뜨려놓고

 아직 끝이 아니라고 위로하는 소설가처럼

 삶은 늘 위로인지 경고인지 모를 손을 내민다

 

 시작해보나마나 뻔한 실패를 향해 걸어가는

 서른 두 살의 주인공에게도

 울분이지 서러움인지 모를 표정으로

 밤낮없이 꽃등을 내단 봄 나무에게도

 위로는 필요하다

 

 눈물과 콧물과 침을 섞으면서 오열할 구석이,

 엎드린 등을 쓸어줄 어둠이 필요하다

 왼손에게 오른손이 필요한 것처럼

 오른손에게 왼손이 필요한 것처럼 - 54쪽

 

 어떤 이들에게 가을은 아주 위험한 계절이다. 여름 내 단단하게 부여잡은 감정이 한 순간 무너져 내리는 가을, 처진 등을 보여도 될 누군가가 필요하다. 시를 읽으라는 권유는 잘못된 일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시라도 읽어야 뭉쳐진 가슴을 풀어낼 수 있을 것이다. 왼손을 잡아줄 오른손이 없는 이들에게, 오른손을 잡아줄 왼손이 없는 이들에게는 더더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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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스커레이드 호텔 매스커레이드 시리즈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양윤옥 옮김 / 현대문학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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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사물은 바라보는 각도에 따라 그 모양이 달라진다. 물처럼 담는 그릇에 따라 변형되기도 한다. 물이라는 본질은 변하지 않은 채로 말이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보여지는 모습에 따라 다르고 보고 싶은 마음에 따라 달리 보인다.  그렇기 때문에 열 길 물 속은 알아도 한 사람 속은 모른다는 말이 있는지 모르겠다. 그러니까 인간은 때로 진짜 나를 감추기 위해 변장을 하거나 가면을 쓰기도 하는 것이다. 나쁜 의도가 아니더라도 말이다. 제목에서 암시하듯 히가시노 게이고의매스커레이드 호텔에서 형사 닛타가 열흘 동안 자신의 신분을 감추고 호텔리어로 살아야 하는 이유도 그랬다. 호텔에서 벌어진 살인 사건을 막기 위한 선택이었다.

 

 아무런 연관도 없는 세 명의 피해자, 사건마다 알 수 없는 조합인 두 개의 숫자만을 남긴 세 건의 살인사건에 숨겨진 단서를 통해 다음 서건 장소를 알아낸다. 도쿄 최고의 야경으로 유명한 최고급 호텔에서 과연 살인은 일어날까? 소설은 예고된 범죄 공간에서 사건을 막고 범인을 검거해야 하는 단순 명료한 추리소설의 형식과 요건을 갖추고 있다.

 

 형사들은 벨보이, 하우스 키퍼, 방문객, 프런트 직원으로 위장하며 수사한다. 범인에 대해 밝혀진 단서가 없으니 모든 인물이 용의자가 될 수 있다. 이 소설이 흥미로운 점은 그 공간이 바로 호텔이라는 점이다. 호텔은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출입한다. 더구나 호텔리어는 고객의 입장에서 그들을 보호하려 한다. 호텔리어인 나오미가 닛타와 마찰이 생기는 이유도 그 때문이다.  닛타의 고교시절 교생 선생님이 과거의 오해로 호텔리어로 나타난 닛타에게 온갖 트집을 잡아도 불평이나 불만을 제기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결국 닛타 형사는 나오미에게 사건의 전말을 알려주고 협조를 구한다. 호텔에 대한 애정으로 나오미는 그를 돕지만 여전히 불만을 감추지 못한다. 그러니까 닛타는 호텔에 방문하는 모든 고객들을 의심하며 뒷조사를 하려는 반면, 나오미는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고객을 옹호한다. 누군가에게는 잠시 머무르는 공간일지 모르지만 나오미에겐 소중한 추억이 담긴 곳이자 일터이니 당연한 일이다. 설사 그가 진실을 숨긴 채 가면을 쓴 이라 하더라도 말이다.

 

 소설은 호텔에서 일어날 수 있는 모든 경우의 수를 보여준다. 인간이 얼마나 위선적일 수 있는지, 인간의 집착이 얼마나 무서운지, 감춰진 욕망의 크기를 낱낱이 드러낸다. 숙박부에 기재하는 이름과 주소, 연락처가 가명인 경우는 허다하고 남의 눈을 피해 사랑을 나누는 위험한 관계를 지속하기 위한 방문도 많은 곳이 호텔이다.  내가 아닌 나로 살 수 있는 곳이기도 한 것이다. 물론 어느 공간이든 가능하지만 호텔이라는 곳은 허락받은 공간이라고 해야 할까. 색안경을 끼고 보면 사람들은 모두 위험한 존재이며, 속이려고 마음만 먹으면 남을 속일  수 있는 현재 우리 사회의 모습을 포착할 수 있는 공간인 것이다. 그것은 안락하고 편안한 객실을 위해 많은 감시 카메라가 함께 존재하는 것과 같다.

 

 열정과 패기만 앞세운 닛세와 어리바리한 아저씨 같지만 범죄 해석과 정보 수집에 탁월한 노세와 현장에서의 경험으로 탁월한 추리 감각을 선보이는 나오미의 활약은 소설의 흥을 돋군다. 짧은 시간 경찰이 아닌 호텔리어로 생활하면서 닛타는 타인에 대한 가면 벗기기가 아닌 이해의 폭을 넓히고 나오미 역시 닛타를 응원한다.  

 

 누가 범인일지 단 한 명의 고객도 놓치 수 없기 때문에 독자는 집중할 수밖에 없다. 방문객은 물론이며 내부의 호텔 사정을 가장 잘 알며 마스터키를 지닌 직원도 의심해야 한다. 히가시노 게이고는 함께 범인을 추리하고 예상 경로를 추리하는 동시에 인간 심연을 들여다 볼 수 있는 즐거움을 선사한다. 때로 가면의 날로 채우고 싶은 욕망, 혹은 때로 가면의 날로 채워야만 하는 삶에 대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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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못은 우리 별에 있어
존 그린 지음, 김지원 옮김 / 북폴리오 / 201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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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가 알고 있는 우주에 무한하다고 믿는 단 하나를 꼽으라면 아마도 그건 사랑일 것이다. 어떤 형태로도 담을 수 없고 만질 수도 없고 볼 수도 없지만 사랑은 영원하며 무한한 존재라는 것이다. 사랑은 존재만큼 그 영향력도 무한하다. 우리는 흔히 사랑 때문에 죽고 사랑 때문에 산다고 말하지만 그 말은 결코 쉽게 해서는 안 될 엄숙한 말인지도 모른다. 암 투병 중인 소녀와 소년의 사랑 이야기인 잘못은 우리 별에 있어』는 누군가를 사랑하는 일이 얼마나 위대한 일인지 깨닫게 한다.

 

 소설은 말기 암 환자인 열 여섯 헤이즐이 환우 모임에서 골육종으로 다리 하나를 절단한 소년 어거스터스(이하 거스)를 만나면서 시작한다. 산소 탱크가 신체의 일부이고 투약 부작용으로 퉁퉁 부운 얼굴의 헤이즐에게 의족을 한 거스는 정말 멋진 아이였지만 관심을 표현할 수 없었다. 그렇지만 그가 내민 손에 담긴 진심을 알아 볼 수 있었다. 그들에게 암이라는 특별한 공통점이 있었으니까. 암은 그들에게 평범한 일상일 뿐이다. 헤이즐과 거스는 주변의 염려와 걱정을 뒤로 하고 서로에게 더 가까이 다가간다.

 

 죽음이라는 거대한 존재를 무시할 수 없었지만 헤이즐과 거스는 최선을 다해 삶을 즐긴다. 함께 영화를 보고 게임을 하고 좋아하는 책을 읽고 이야기를 나누며 적당히 부모에게 반항한다. 지극히 십대스러운 둘의 모습은 그 존재만으로 눈부시고 아름다웠다. 거스가 헤이즐이 가장 좋아하는 작가와 연락을 취하고 그를 만나기 위해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을 여행하면서 둘 사이는 긴밀해진다. 서로에서 속한 부분은 점점 더 커진 것이다. 그러니까 이제 거스는 헤이즐이고 헤이즐은 거스인 것이다.

 

 괴팍스러운 작가와의 만남은 기대했던 만큼의 즐거움을 안겨주지 않았고 여행에서 돌아온 거스는 헤이즐에게 암이 손 쓸 수 없을 정도로 전이 된 사실을 고백한다. 누군가를 사랑하는 일은 자신의 전부를 거는 일임을 거스는 온 몸으로 보여주고 있었다. 그들의 미래는 처음부터 예고되어 있었는지도 모른다. 

 

 “응, 난 지상에서 잊히는 게 두려워. 하지만 내 말은, 우리 부모님처럼 말하고 싶진 않지만 난 사람이 영혼을 갖고 있다고 믿고, 영혼 간의 대화를 믿어. 망각에 대한 두려움은 다른 거야. 내가 내 목숨을 잃는 대가로 아무것도 내놓을 수 없을지 모른다는 게 두려운 거지. 위대한 선을 추구하는 삶을 살지 않았다면, 최소한 위대한 선을 위해서 죽어야 하지 않겠어? 난 내 삶도 죽음도 그렇게 의미있 않을까 봐 두려워.” 178쪽

 

 거스는 헤이즐이 자신의 장례식에 와 주고 자신을 기억해주길 바란다. 잊혀지는 게 아니라 간직되는 것을 바란 것이다. 헤이즐은 누구나 언젠가 죽는 평범한 죽음이 아니라 헤이즐을 사랑한 거스의 죽음이 얼마나 위대하며 아름다운 일인지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이다. 거스를 사랑한 순간부터 말이다.

 

 언제 어떤 모습으로 죽음이 닥쳐올지 긴장을 늦을 수 없는 현실이라서 헤이즐과 거스의 사랑이 눈부시고 아름다운 게 아니다. 암이라는 질병 앞에서 마주한 사랑이 아니라 한 소녀와 한 소년의 무한대의 사랑이라서 그렇다. 헤이즐과 거스의 사랑이기 때문에 빛나는 것이다. 그게 이 소설이 특별한 점이다. 아이들의 사랑이 예뻐서, 간절해서 아프고 아프다. 어쩌면 뻔한 이야기를 들려주지 않을까 하는 걱정대신 환하고 벅찬 감동을 전해주는 건 십대 소년 소녀의 순수하고 솔직한 마음을 그대로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자신에게 닥친 못된 운명에 대해 때로 욕하고 때로 원망하고 두려워하면서 헤이즐의 표현대로 죽음의 부작용을 잘 견디고 있어 고맙고 대견한 것이다.

 

 “난 널 사랑하고, 진심을 말하는 그 간단한 기쁨을 거부하고 싶은 마음은 없어. 난 널 사랑해. 사랑이라는 게 그저 허공에 소리를 지르는 거나 다름없다는 것도 알고, 결국에는 잊히는 게 당연한 일이라는 것도 알고, 우리 모두 파멸을 맞이하게 될 거고 모든 노력이 무위로 돌아가는 날이 오게 될 거라는 것도 알아. 태양이 우리가 발 딛고 산 유일한 지구를 집어삼킬 거라는 것도 알고. 그래도 어쨌든 너를 사랑해.” 163쪽

 

 누가 이처럼 멋진 사랑을 거부할 수 있을까. 누구나 거스의 고백을 받는 게 아니다. 오직 단 한 사람, 헤이즐만을 위한 고백이다.이토록 근사한 거스의 고백을 받은 헤이즐은 내내 행복할 것이다.  우주가 사라지지 않은 한, 설사 우주가 사라진다 해도 거스와 헤이즐의 사랑은 여전히 존재할 것이다. 그들의 사랑은 무한대의 그것이라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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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리시스 2012-09-03 14: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읽으셨군요. 저도 어제 아니, 토요일에 받았어요. 과장이 아니라 사실, 자목련님이 말씀 안해주신 그거,
찾으러 가야죠 이제, 저도.

자목련 2012-09-07 10:49   좋아요 0 | URL
지금쯤은 아이님도 거스와 헤이즐을 만나셨겠지요?
 
삶을 바꾸는 책 읽기 - 세상 모든 책을 삶의 재료로 쓰는 법
정혜윤 지음 / 민음사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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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람들은 저마다 좋아하는 무엇이 있다. 누군가는 영화를, 누군가는 운동을, 누군가는 음식을, 누군가는 책을 좋아할 것이다. 좋아하는 것에 대해 이야기할 때 사람들은 즐겁다. 그것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때도 마찬가지다. 책을 좋아하는 나는 책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는 책은 언제나 반갑다. 내가 알지 못하는, 읽지 못했던 책을 만날 수 있을 거란 기대와 설렘 때문이다.  

 

 『침대와 책』으로 처음 만난 정혜윤은 내게 거대한 존재였다. 세상에 존재하는 책에 대한 모든 것을 알고 있을 것만 같았다. 그런 그녀가 이번엔 색다른 방법으로 책을 소개한다. 그러니까 『삶을 바꾸는 책 읽기』은 독서 에세이가 아니라 자기계발을 위해 책이 왜 필요한지 말하는 책인 것이다.

 

 왜 책을 읽냐고, 책에서 무엇을 얻을 수 있냐고, 그렇다면 무슨 책을 읽어야 하냐고 묻는 사람들에게 그녀는 성실하게 답한다. 그녀가 만난 다양한 사람들이 들려주는 이야기를 통해 삶을 바꿔준 책의 힘을 말해준다. 그녀가 만난 이들은 유명하거나 특별한 이들이 아니다. 한글을 읽고 쓰지 못해 군대 간 남편이 보낸 편지에 답장을 보낼 수 없었던 할머니, 직장에서 해고 된 근로자, 한 평생 택시 운전을 하신 할아버지, 이혼 후 가사 도우미로 일하는 아주머니, 중고 거리에서 라디오를 수리를 하는 아저씨처럼 그저 평범한 우리네 이웃이다.

 

 ‘책은 우리에게 대놓고 무엇을 가르쳐 주는 것도, 위로하는 것도 아닙니다. 다만 책은 자꾸 자신을 만나게 합니다. 돌아보게 합니다. 이 돌아봄의 의미는 큽니다. 우린 어떤 일을 완성하기도 전에 그 결과부터 그려 보곤 합니다. 그러나 바로 그런 순간에 우린 인생을 하나의 도구로 생각합니다. 하지만 바로 돌아봄이라는 행위를 통해 우리는 인간이라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생각하게 됩니다. 돌아봄을 통해서 우리의 현재는 책 속의 챕터가 됩니다. 우리는 그 새로운 챕터에서 뭔가 새로 시작할 마음을 가질 수 있습니다.’ p.100~101

 

 삶은 다채롭지만 언제나 행복한 건 아니다. 우리는 살고 있는 세상의 표정은 내일을 예측할 수 없는 불안한 모습이다. 이러한 시대에 책은 얼마나 위로가 될까. 책을 통해 만나는 삶은 때로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더 비루하며 처참하다. 책은 때로 우리에게 분노를 가르치고, 용서와 화해를 제시한다. 그녀의 말처럼 돌아보게 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제대로 살고 있는지 묻게 하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고민하게 만든다.

 

 ‘책 하나하나가 우리를 부르는 영혼이고 인간 하나하나가 서로를 부르는 영혼입니다. 내 옆에 가까이 있는 것, 내가 가까이 두고자 하는 것, 나와 연결되어 있는 것, 나와 협력하는 것, 나를 변화시키는 것이 나를 무한히 창조합니다. 우리 삶은 무한히, 끝없이 갈라지는 길과도 같습니다. 그 갈림길마다 책들이 놓여 있을 수 있습니다. 목마른 나그네를 위한 하나의 이정표처럼, 하나의 쉼터처럼.’ p. 157~158

 

 그녀가 소개한  책들이 모두에게 같은 의미로 다가오지는 않을 것이다. 한 권의 책이 누군가에게는 사랑을, 누군가에게는 이별을, 누군가에게는 용서로 다가오기도 하니까. 삶을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그녀의 리스트엔 여전히 그렇듯, 읽지 못한 책들이 많다. 그렇지만 누군가에게 책을 선택할 수 있는 기준이 되거나 큰 도움이 될 것이다. 그리고 누군가는 분명 그 책들을 통해 변화할 것이다. 나를 변화하는 책을 만나는 일은 얼마나 감격적인 일인가.

 

 책을 읽는다. 어제도 읽었고 오늘, 그리고 내일도 읽을 것이다. 처음에는 그냥 읽었던 책이, 점점 좋아지고, 알고 싶어서 읽는다. 세상의 모든 것을 책으로 다 만날 수 있다고 생각하니까. 그렇다고 그 책들을 다 읽을 수 있다는 건 아니다. 그저 나와 인연이 닿은 책들, 원하지 않았지만 내게로 와 준 책들을 읽을 뿐이다. 그들과 마주하는 일은 살아가는 일이며, 삶의 비밀을 만나는 일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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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12-08-20 12: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지막 문장 특히 담겨요. 제게도 책을 우연히 또는 계획적으로 만나는 일은 살아가는 일이었고 앞으로도 그럴거에요, 자목련님^^

자목련 2012-08-20 21:58   좋아요 0 | URL
이곳도 책으로 이어진 곳, 프레이야님과 저도 그렇게 이어진, 맞지요?

라로 2012-08-20 12: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정혜윤의 [침대와 책]이 너무 좋아서 그녀의 책을 거의 모으는 수준이었는데
이 책은 왜 이리 정이 안 갈까요?????
님의 리뷰를 읽으니 맘이 흔들리네요,,,아니면 의리가 돋는 것인지???^^;;

자목련 2012-08-20 22:03   좋아요 0 | URL
저도 <침대와 책>의 글에 반했어요. 인터뷰집 <그들은 한 권~>도 무척 좋아해요. 한데, <런던을~>에서는 이상하게 그 애정이 덜했어요.
이 책도 좋아한 두 책과 비교하면 사랑의 크기가 작아요.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