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을 팝니다, T마켓 - 5분의 자유를 단돈 $1.99에!
페르난도 트리아스 데 베스 지음, 권상미 옮김 / 앵글북스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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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밌는 소설을 만났다. 그런데 정말 재밌다고 할 수 있을까? 재밌게 읽었는데 다 읽고 나니 씁쓸한 기운이 몰려오는 건 왜일까? 길고 복잡한 이름의 저자 ‘페르난도 트리아스 데 베스’의 『시간을 팝니다, T마켓』 은 그런 소설이다. 시간을 파는 마켓이라고, 정말 가능한 일일까. 호기심과 궁금증을 불러오는 제목이다. 때마침 시간을 견딜수록 엄청난 상금을 받는다는 설정의 드라마를 보고 난 후였다. 놀라운 건 이 소설이 11개국에서 출간되어 20년 가까이 베스트셀러란다.


서두가 길다. 소설로 들어가 보자. 소설은 아주 평범한 보통 남자(TC)의 이야기다. 그러니까 세계 어디서든 볼 수 있는, 주변의 샐러리맨으로 보면 되겠다. 그의 꿈은 곤충의 몸과 영혼을 연구하는 과학자였지만 현실은 그냥 회사원이다. 결혼을 해서 아내가 있고 아들 둘이 있다. 그리고 매달 갚아야 하는 주택 융자 상환금이 있다. 뭔가 기시감이 오는가? 어쩌면 당신과 똑같은 상황일지도 모른다. 하루하루 견디고 버티며 사는 삶. 어느 날 라디오에서 말기 암 환자 전문의가 하는 말을 듣게 된다. 모든 이들은 생의 마지막에 인생을 결산해 본다고. 우리의 주인공 TC도 자신의 빚을 떠올렸고 그 빚을 갚으려면 35년이라는 시간이 필요하다는 걸 알았다. 월급쟁이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고민 끝에 회사를 관두고 사업을 하기로 한 것이다. 바로 시간을 파는 것이다. 물론 아내는 남편이 그냥 하는 소리인 줄 알았다. 어떤가, 어디서 들어 본 스토리 같지 않은가.


이제 TC가 팔려는 게 무엇인지 알아보자. 바로 시간이다. 병원에서 소변 검사를 할 때나 사용할 법한 플라스크 용기에 시간을 담아 팔겠다는 것이다. 엉뚱한 의뢰에 귀찮은 공무원들은 TC가 필요한 것들을 다 통과시켰다. 설마 진짜 그런 물건을 팔 거라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주인공 TC는 굴하지 않았고 직진했다. 차마 이 물건을 사달라고 부탁은 못하는 대신 친구의 가게에 물건을 진열해달라고 부탁했다. 결과는 대박이었다. 단돈 1.99$에 살 5분의 T(시간)를 살 수 있다. 사실, 빈 용기에 불과하다는 건 모두가 아는 비밀이다.


“이 상품을 어떻게 쓰는지 설명해 주시겠습니까?”

“설명을 드리지요. 이 한 통을 제 가게에서 삽니다. 용기를 열면 5분의 T를 갖게 되는 겁니다. 물론 원하실 때 5분을 소비하실 수 있지요. 이 5분은 바로 구매자의 것이며 다른 누군의 T도 아니라는 점을 이해하는 게 중요합니다. 이 T는 원래 구매자에게 없던 시간이지만, 이 제품을 사시면 그 5분은 다시 구매자에게 귀속되는 셈이죠. 어디에 있든, 뭘 하고 있었든지 상관없이 말입니다.” (86쪽)


중요한 건 구매자에게 5분은 귀속되며 어디에 있든, 뭘 하든 상관없다는 것. 그러니까 5분의 구매자는 상사의 눈치를 볼 필요 없이 커피 한 잔을 마시거나 수다를 떨거나 눈을 감거나, 화장실에 갈 수 있다. 온전히 나만을 위한 5분의 시간. 그 5분이 얼마나 간절한지 이미 다 알고 있지 않은가. 5분의 단잠, 5분의 여유, 업무를 미룰 수 있는 5분. 그렇다. 이제 TC는 5분의 용기가 아닌 더 큰 용량의 용기를 생산하고 판매한다. 시간을 점차 늘어난다.


5분의 여유와 휴식은 점점 커지고 사회는 혼란에 빠진다. 당장 업무를 봐야 하는데 담당자가 자신의 시간을 구매했으니 일을 할 수 없다고, 뒤로 미루겠다고 하는 것이다. 처음이 어렵지 일단 시작된 시간 구매는 끝도 없이 늘어난다. 사회적 문제였다. 급기야 구매한 T를 소비해야 할 소비 기간까지 정해졌다. 물론 전 세계적인 열풍으로 이어졌고 35년짜리 시간도 판매가 되었다. 너도나도 35년짜리 T를 사기에 급급했다. 나만 유행에 뒤처질 수 없다는 일종의 동조심리가 같은 거라고 할까.


어떤 나라에서 T가 든 컨테이너는 며칠 안에 사회에서 인정받는 유일한 대안 가치가 되었다. 다른 모든 것은 가치가 없었고 원하는 이도 없었다. 부동산이 곧 가치가 급락할 자산이 되리라는 점을 직감하기란 쉬웠고, 사람들은 가능한 한 빠른 시일 내에 처분하고 싶어 했다. (144쪽)


T를 사기 위해 아파트는 담보가 되었다. 세상에나 이게 무슨 일인가? 마냥 웃기고 재미난 웹툰과 소설이 될 수 없다는 걸 직감했을 것이다. 보통 남자((TC)가 사는 사회를 우리가 살고 있으니까. 그렇다. 이 소설은 경제 소설이다. 소설 속 ‘대차대조표’나 ‘자유 주식회사’, 주식, 광고는 우리의 모습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그리고 시간에 대한 경구. 모두에게 똑같이 주어진 시간의 주인은 누구인지 묻는다. 현재 누릴 수 있는 기쁨, 여유가 아닌 미래에 저당잡힌 삶을 위해 살 거냐고 말이다. 진정한 삶의 가치를 위해 개인과 사회가 어떻게 변화해야 하는지 진지한 질문을 던진다.


현 체제는 긍정적인 측면도 많이 있지만 때로 우리를 과도하게 노예화하며 체제를 지탱하고자 노력하는 개인에게 고통을 야기한다. 부富를 기준으로 한 국가 간 순위는 우울증을 겪는 국가들의 순위이기도 하다. 현대를 살고 있는 세계 시민들은 우리가 자신에게 씌운 굴레에서 벗어나야 할 절실한 필요를 느끼고 있다. (177쪽, 저자의 말 중에서)


오직 나만이 계획하고 쓸 수 있는 시간과 현재를 사는 삶에 대해 깊이 있는 고민을 한 적이 언제였던가. 남들과 비교하며 떠밀리듯 살아온 삶이 도착할 미래는 행복할까. 주어진 시간을 어떻게 살아갈지 결정은 자신의 몫이니 시간의 노예가 아닌 주체가 되어야 한다는 걸 잊지 말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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퐁 카페의 마음 배달 고양이
시메노 나기 지음, 박정임 옮김 / 놀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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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책은 제목에 끌려서 읽게 된다. 일본 소설 『퐁 카페의 마음 배달 고양이』는 고양이 때문에 궁금했다. 뭔가 따뜻하고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려줄 것 같았다. ‘마음 배달 고양이’라니. 마음을 어떻게 배달한다는 것일까. 당연 소설의 화자는 고양이다. 인상적인 건 19년의 묘생을 마치고 세상을 떠난 고양이 ‘후타’는 저승의 삶에 적응 중이다. 저승의 삶이 나쁜 건 아니지만 생활비와 간식비가 필요하다. 장난감이나 간식은 스스로 벌어서 사야 한다는 말이다. 후타는 임무를 완수하면 보고 싶은 사람을 만나게 해준다는 공고에 보고 카페 ‘퐁’을 찾아간다.


주인 ‘니지코’는 카페의 우편함을 만들고 손님들의 사연을 받는다. 손님들이 보고 싶어 하는 사람을 만날 수 있도록 도와준다. 물론 그 일은 모두 후타의 몫이다. 니지코와 후타는 이승을 초록 세계로, 저승을 파란 세계로 부르기로 한다. 후타는 의뢰한 사람이 만나고 싶은 인물을 찾아가 그들의 마음 중 일부를 전한다. 중요한 건 만나고 싶은 상대가 전혀 다른 모습으로 나타나고, 그 상대의 특별한 말에서 만나고 싶은 사람임을 의뢰인 스스로가 눈치채야 한다. 간절하게 그리워하고 원한다면 알려주지 않아도 알아볼 수 있다는 것이다.


카페를 찾은 손님들의 사연은 저마다 간절하다. 돌아가신 아빠에게 첫 개인전을 보여 드리고 싶다는 딸, 태어나지 못한 딸을 해마다 그리워하는 부부, 사랑이 아닌 현실적인 미래를 선택했지만 옛 연인과 다시 한번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 여자, 과거 상처를 준 선생님께 보란 듯이 성공한 모습을 보여주고 싶은 청년, 반대하는 결혼을 하고 소식을 끊었지만 엄마를 만나고 싶은 중년의 딸.


후타는 우선 의뢰인이 찾는 인물을 찾아야 한다. 그들의 말이나 마음을 꼬리 끝에 슬쩍 묻혀 온 후 의뢰인이 알아볼 수 있도록 해야 한다니. 이승과 저승을 오가며 지하철도 타고 택시도 타고 의뢰인의 일상도 관찰하고 그들이 보고 싶어 하는 사람도 살핀다. 그러면서 고양이가 아닌 인간의 삶과 관계가 얼마나 복잡한지 알게 된다. 각각의 에피소드 모두 흥미롭지만 태어나지 못한 딸을 그리워하는 부부 사연과 엄마가 반대하는 결혼을 했지만 이혼으로 이어져 엄마와 연락을 하지 못하고 곁에서 지켜보는 딸의 사연은 특별하게 다가온다.


천륜으로 맺어진 부모와 자식이지만, 어느 순간 남보다 못한 사이가 되기도 한다. 마음과 다르게 나가는 날카로운 말로 상처를 주고 괜한 자존심에 선뜻 다가가지 못하니까. 그런가 하면 태어나지 못한 딸의 사연은 가슴이 먹먹해진다. 이승에서는 존재하지 않는 딸은 저승에서 잘 지내고 있고 내년이면 학교에도 들어간다고 걱정하지 말라고 전한다. 그 마음을 전해 들은 부부가 나누는 대화 “추억도 소중하게 키우면 성장하는 걸까.” (124쪽)를 마음에 새기고 간직하고 싶다.


삶이란 계획대로 흐르지 않고 사랑하는 사람과의 관계도 내 맘과 다르게 어긋난다. 한 치 앞도 알 수 없는 삶이라는 걸 잊고 산다. 고양이 후타의 시선으로 바라본 인간의 모습을 통해 각자의 상처와 과거, 그리운 이를 떠올린다. 한순간 소원해진 관계, 연락이 끊긴 친구, 용서를 구하지 못한 사이, 사랑한다는 말을 하지 못하고 떠나보낸 이들. 그리고 그런 생각은 내가 만나고 싶은 사람이 잘 지내고 있기를 바라는 마음과 반대로 내가 그런 사람일 수 있으니 나도 잘 살아야 한다는 어떤 다짐으로 이어진다.


좌절이 없었던 인간과 실패나 후회를 경험하고 기억하는 인간. 티끌 없는 하나 없는 아름다움을 이길 수는 없다고 하지만, 상처를 극복한 인간에게는 그 이상의 강인함이 있다. (192쪽)


소설처럼 세상을 떠난 사람을 만나는 일은 가능하다면 얼마나 좋을까. 나도 카페 퐁에 방문해서 우편함에 사연을 쓰고 싶다. 그러나 눈으로 볼 수 없지만 그리워하면 그리워하는 대로, 기억하면 기억하는 대로 잊히지 않을 거라는 걸 알기에 삶을 이승과 저승으로 나누는 일은 의미가 없다. 현명한 후타의 말처럼 말이다. 내가 기억하고 그리워한다면 영원히 내 안에 있을 테니까.


이쪽에 와서 알 된 사실은, 현세니 사후세계니 하면서 마치 초록 세계가 중심인 것처럼 말하곤 하지만 사실 이쪽에서 저쪽을 보면 초록 세계야말로 이곳에 오기까지의 여정처럼 느껴진다는 것이다. 직접 경험하지 않으면 알 수 없지만 말이다. (80쪽)


고양이와 말을 할 수 있는 니지코, 무지개다리를 떠올리는 카페 퐁, 이승과 저승을 오가는 고양이, 꼬리 끝에 닿는 순간 혼이 옮겨간다는 판타지 요소는 소설 적 재미를 풍부하게 만든다. 드라마도 만들어도 좋을 것 같다. 어쩌면 곧 드라마로 만날 수 있을지도. 그나저나 나도 고양이 꼬리를 슬쩍 만져볼까. 어떤 고양이가 후타 같은 고양이인지 알 수 없으니 모든 고양이를 만져야 하는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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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시 게이하트 휴머니스트 세계문학 32
윌라 캐더 지음, 임슬애 옮김 / 휴머니스트 / 202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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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만히 루시의 발걸음을 상상한다. 루시의 눈빛, 루시의 옷차림, 루시의 피아노 연주. 그 모든 것을 놓치고 싶지 않다. 좋은 소설이다. 예측할 수 없는 것들이이 빚어내는 가장 아름다운 작품이 우리네 인생이다. 다락방 님 고마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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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4-06-05 12:0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별말씀을요!! 🙋‍♀️

자목련 2024-06-07 15:42   좋아요 0 | URL
💕 💕
 
마지막 욕망
크리스티앙 보뱅 지음, 김도연 옮김 / 1984Books / 202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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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 때문에 죽을 수 있다고 생각한 적이 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사랑을 아프게 하고 영원한 고통을 주고 죽음으로 돌려주고 싶었다는 게 맞겠다. 물론 나는 죽지 않았다. 어떤 시도도 하지 않았다. 내 사랑이 보잘것없거나 특별해서가 아니다. 죽음에 골몰했던 순간이 지나니 아무런 일도 없었던 것처럼 우스워졌다. 사랑은 그런 것일까. 잘 모르겠다. 알고 싶지 않다. 사랑은 알려고 할수록 단단하게 벽을 쌓는다. 소중하고 온전했다고 믿었던 사랑은 한순간 물거품처럼 사라진다. 영혼까지 잠식했던 사랑은 아주 먼 옛날 흩어진 기억의 조각으로 남는다. 나는 왜 이런 글을 쓰고 있는가. 이게 다 크리스티앙 보뱅의 『마지막 욕망』 때문이다.


늪처럼 빠져드는 보뱅의 문장, 읽고 있지만 나갈 수 없고 헤매게 만드는 문장, 그러나 포기할 수 없게 만드는 문장. 그리고 그 안에 담긴 사랑과 죽음. 아니 욕망이라고 해야 맞을까. 그러니 그냥 쓴다. 잘 몰라서 여전히 보뱅의 문장에 갇혀서. 선명한 죽음으로 시작하는 이 소설을 뭐라 말해야 적당할까. 사랑에 대한 갈구, 욕망. 다른 방법을 찾을 수 없어서 죽음으로 답할 수밖에 없는 간절함. 절절한 사랑일까. 천천히 죽음이 움직이는 이런 문장에 나는 반하고 만다. 그렇다고 죽음을 찬양하는 건 아니다.


블랙베리나 라즈베리의 거품처럼 솟았다가 솜털처럼 미지근하게 흘러내리는 피가 생생히 느껴졌다. 마치 첫 태양에 살짝 베인 꽃이 벌어지듯이. (10쪽)


마치 피가 땅에서 흘러나오고 그 땅이 사라져 가듯이. 몸이 가벼워지고 조금씩 비워진다. 기이하고 완전한 부드러움. 흡사하다. 당신이 나를 끌어당겨 꽉 안았을 때, 나를 숨 멎게 하고 풀어주었던 그 부드러움과 참으로 흡사하다. (11쪽)


소설 속 ‘나’는 ‘당신’이 선물해 준 철필로 나를 죽음을 실행한다. 그토록 사랑한 당신을 남겨두고 나는 왜 죽음을 선택하는 것일까. 이제 둘 사이의 사랑을 만나볼 차례다. 나와 당신은 연인이다. 은밀하고 은밀한 연인, 불륜이다. 나에게는 남편이 있고 딸도 있다. 그러나 나는 당신을 사랑한다. 죽음과 하나가 된 내가 들려주는 당신에 대한 이야기, 당신과 나눈 사랑 이야기. 당신은 호텔에 머물며 글을 쓰는 사람이다. 당신과 호흡하고 당신과 마주한 풍경들, 함께 느꼈던 모든 감정들, 그 떨리는 숨결, 그 비밀스러운 기억을 섬세한 감각으로 펼쳐놓는다.






은밀한 사랑은 둘만의 공간을 채우고 세계를 확장하지만 그 세계의 밖은 대로 고통으로 채워진다. 당신을 향한 나의 마음은 보낼 수 없는 편지가 되고 나는 그 편지처럼 접혀진다. 사랑이 무엇이기에 이토록 삶을 흔드는 것일까. 누군가 나와 당신의 사랑이 공개할 수 없는 지지 받을 수 없는 사랑이라 그렇다고 말할지도 모른다. 정녕 그런 것일까. 아닐 것이다. 설령 비난과 책망이 난무해도 사랑 안에 거한 이들은 그 사랑 안에서 저마다 특별하다.


기다림. 기다리기. 올 수 없는 것, 오지 않을 것을 기다리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 아시나요? 사랑이 저주임을 알고 있나요? 당신에게서 삶을 송두리째 뽑아버리고서는 살아 있게 남겨두고, 일상을 벼락에 맞아 불타버린 황폐한 곳으로 만든다는 것을요? 견딜 수 없는 고통이 차라리 나을 정도입니다. (59쪽)


나는 다정함과 잔인함이 욕망의 이면에 서로 달라붙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존재는 부재로 인해 성장했기에 부재를 피할 수는 없었다. 탄생은 죽음만큼이나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때로는 나가는 일이 포기나 멀어짐보다 더 큰 상처를 줄 수도 있다. (74쪽)


당신에겐 나 아닌 사랑이 있었다. 당신이 사랑한 그녀. 오렌지 나무로 남은 사랑을 당신이 잊지 못하는 걸 안다. 그러니 당신이 떠날 때에도 당신을 이해한다. 이제 조금 선명해진다. 당신은 떠났다. 내가 선택한 죽음의 이유는 명확해졌다. 아름다운 은율로 흐르던 둘의 시간, 기다렸던 계절과 꽃. 당신이 없는 삶은 당신을 또렷하게 불러온다. 여기 없어서 당신은 존재한다. 여기 없어서 당신이 더 생생하다. 당신이 없어서 견딜 수 없는 삶.


사랑이 시작되는 이유도 별로 없지만, 사랑이 끝날 때는 더더구나 아무런 이유도 존재하지 않았다. (129쪽)


누군가를 사랑하는 일은 어떤 것일까. 상대를 향한 사랑이 깊을수록 나는 희미해지는 것일까. 그 사랑이 짙어갈수록 나의 형체는 사라지는 것일까. 어떤 말로도 정의내릴 수 없는 사랑. ‘나’는 사랑이 끝났음을 인정할 수 없었던 것일까. 당신이 아닌 나만이 사랑의 끝을 정할 수 있었다. 아니, 사랑의 완성을 위한 선택이 죽음이었는지도 모른다. 온몸에 새겨진 사랑을 간직한 채 당신에게로 갈 수 있는 유일한 방법 말이다. 우리가 될 수 있고 우리로 남을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마지막 욕망이었던 것이다. 어떤 주저함과 두려움 없이 죽음을 통해 당신에게 향한다. 그것은 스스로를 파괴하는 게 아니다. 사랑이 끝나지 않았음을 증명하는 일이다. ‘나’의 사랑은 그런 것이다. 정성을 다한 곡진한 사랑이다. 끝나지 않은 사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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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파랑 2024-05-30 15: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읽을때는 이해를 잘 못했는데 자목련님 리뷰를 보고 아하! 이랬습니다. 너무 어두운 보뱅에 적응을 못했는데 다시 읽어봐야 할거 같아요~!!

자목련 2024-05-31 12:01   좋아요 1 | URL
보뱅의 책 가운데 제일 읽기 어려운(?) 소설이었다고 할까요. 아름답지만 무겁고, 흐터진 상징과 언어를 줍느라 힘든. 그러나 탄성을 자아내는 보맹의 문장이란!

서니데이 2024-06-01 21: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목련님, 편안한 주말 보내고 계신가요.
오늘부터 6월 시작입니다.
좋은 일들 가득한 한 달 되시고, 건강하고 행복한 시간 보내세요.
좋은 주말 되세요.^^

자목련 2024-06-03 13:00   좋아요 1 | URL
조금씩 더위를 실감하는 날들이에요.
서니데이 님, 즐겁고 활기찬 날들 이어가세요^^
 
당연하게도 나는 너를 우리학교 소설 읽는 시간
이꽃님 지음 / 우리학교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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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나?

우리가 저수지에 갔을 때 말이야. 그날 유난히도 어두웠잖아. 태어나서 내가 겪은 수많은 밤들 중에 제일 어둡고 외로웠던 밤이었어. 내가 그 밤을 잊을 수 없는 만큼, 너도 그날을 잊지 못하겠지. 그런데 그거 알아? 그날 일을 잊지 못하는 사람이 한 명 더 있다는 거. (7쪽)


이런 문장을 읽고 무엇을 상상하게 될까. 분명 그 밤의 저수지에서 어떤 일이 일어난 게 틀림없다고 생각할 것이다. 우리는 누구일까, 그리고 다른 한 사람은 목격자일까. 섣부른 판단일지 모른다. 목격자라니, 그럼 사건이 일어났다는 것일까. 이꽃님은 이번에도 남다르다. 내가 예상한 방향이 아닌 다른 방향을 제시한다.


사라진 소년 해록, 그리고 같이 있던 소녀 해주. 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경찰이 해주를 찾아온 건 당연한 일이다. 해록의 실종, 그 실마리를 해주가 잡고 있는 것일까. 그러나 경찰을 향한 해주의 대답은 날카롭고 불안하다. 뭔가 감추는 것만 같은 심상치 않은 분위기. 서툰 독자는 해주를 의심한다. 나 역시 그러했다. 보기 좋게 이꽃님이 이끄는 대로 끌려가고 말았다.


소설의 첫 문장처럼 나(해주)는 너(해록)에게 너와 나 사이의 이들을 들려준다. 그리고 해주를 찾아온 경찰이 둘에게 일어난 일을 들려준다.그러니까 사랑 이야기라고 말이다. 지극히 개인적인 시선과 객관적인 시선. 엇갈린 두 개의 이야기, 무엇이 진짜일까. 나와 너는 사귀는 사이였다. 첫 만남을 시작으로 너무 예쁜 커플로 학교에서도 유명했다. 그런데 어쩌다 너와 나는 이런 결말을 맞았을까.


너를 만나면서 나는 모든 걸 너에게 맞췄다. 내가 좋아하는 옷이 아니라 네가 좋아하는 옷을 입고, 네가 싫어하는 행동은 하지 않았고 친구도 만나지 않았다. 오로지 너만 바라보는 내가 되었다. 친구들에게 싫은 소리를 들었고 친구들은 떠났다. 너를 위해 나의 모든 걸 주었는데 너는 나를 멀리했다. 너를 좋아해서, 너를 사랑해서 그랬는데 너는 나를 무시했다. 너를 위해서 아빠의 명품시계까지 훔쳐 선물했는데 너는 그걸 친구에게 주었다. 그리고 미안해하기는커녕 화를 내고 나를 외면했다.


사랑하는 마음이 커서 잘못된 행동이라는 걸 알면서도 친구들의 조언을 질투로 여긴 나. 해주의 말이 전부 사실이라면 아프가 안타깝다. 해주가 사랑이라고 믿는 게 사랑이 아닌 가스라이팅이라는 게 보이기 때문이다. 정말 해록은 나쁜 아이일까. 이쯤 되면 경찰관의 이야기가 궁금해진다. 경찰관이 말하는 해주와 해록의 관계는 반대였다. 해록을 지배하는 건 해주였다. 해록을 가스라이팅하고 협박하고 있었다. 해록은 어떻게 해서든 해주에게서 벗어나고 싶었다. 해주를 꿰뚫어 보는 경찰관이 들려주는 곰팡이 이야기.


“그거 아니? 곰팡이는 한번 피기 시작하면 걷잡을 수 없이 퍼지는 거. 나주에는 피할 수 없을 만큼 모든 게 곰팡이에 전염되고 말아. 그런데 무서운 건 이거여. 곰팡이가 더럽고 건강을 해친다는 걸 알면서도, 어느 순부터는 곰팡이를 당연하게 여기게 되거든. 매일 아주 조금씩 조금씩 번져 가니까. 곰팡이가 온 집안을 점령해 옷과 가구까지 모조리 썩어 가는데도 심각한 줄 모르는 거냐. 그 집에서 꺼내 입은 옷에도 곰팡내가 진동하는데, 몰라. 늘 곰팡이랑 함께니까 모르는 거지.” (168쪽)


의사인 아빠와 대기업에 다니는 엄마가 있었지만 늘 혼자였던 해주는 외로웠고 누군가 필요했다. 그래서였을까. 그 간절함이 집착이 되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좋아하니까, 사랑하니까 해록에게 그래도 된다고 여겼는지도 모른다.


누군가를 사랑하는 마음은 티를 내지 않으려 해도 티가 나고, 숨기고 싶어도 자꾸만 들통나 버리거든요. 그 반대의 마음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랑이라는 가면을 쓰고 있어도 그것이 진심으로 당신을 설레게 하는 것인지, 망설이고 주춤하게 만드는 것인지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겪고 있을 많은 사랑이 따뜻함일지 두려움일지 알 수 없습니다. 그걸 알 수 있는 사람은 오직 당신뿐이겠지요. (「작가의 말」 중에서)


빠져드는 소설이지만 복잡한 마음을 감출 수 없다. 불안한 십 대의 감정을 잘 그려낸 이 소설을 뭐라 불러야 할까. 추리소설, 스릴러, 심리소설이라 해야 할까. 아니면 해주의 말처럼 사랑 이야기라 해야 할까. 사랑이었을 것이다. 사랑했으니까. 하지만 사랑이라는 이름 아래 감춰진 상처와 고통은 사랑이 아니라는 걸 알아야 한다. 상대가 원하는 대로 맞추는 게 아니라 있는 그대로 좋아하고 사랑하는 것, 그것이 건강한 사랑이라는 걸 말이다. 사랑하니까 당연하게 나는 너를 참아주고 감당해야 하는 건 아니라는걸. 그건 사랑이 아니라는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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