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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욕망
크리스티앙 보뱅 지음, 김도연 옮김 / 1984Books / 2024년 4월
평점 :
사랑 때문에 죽을 수 있다고 생각한 적이 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사랑을 아프게 하고 영원한 고통을 주고 죽음으로 돌려주고 싶었다는 게 맞겠다. 물론 나는 죽지 않았다. 어떤 시도도 하지 않았다. 내 사랑이 보잘것없거나 특별해서가 아니다. 죽음에 골몰했던 순간이 지나니 아무런 일도 없었던 것처럼 우스워졌다. 사랑은 그런 것일까. 잘 모르겠다. 알고 싶지 않다. 사랑은 알려고 할수록 단단하게 벽을 쌓는다. 소중하고 온전했다고 믿었던 사랑은 한순간 물거품처럼 사라진다. 영혼까지 잠식했던 사랑은 아주 먼 옛날 흩어진 기억의 조각으로 남는다. 나는 왜 이런 글을 쓰고 있는가. 이게 다 크리스티앙 보뱅의 『마지막 욕망』 때문이다.
늪처럼 빠져드는 보뱅의 문장, 읽고 있지만 나갈 수 없고 헤매게 만드는 문장, 그러나 포기할 수 없게 만드는 문장. 그리고 그 안에 담긴 사랑과 죽음. 아니 욕망이라고 해야 맞을까. 그러니 그냥 쓴다. 잘 몰라서 여전히 보뱅의 문장에 갇혀서. 선명한 죽음으로 시작하는 이 소설을 뭐라 말해야 적당할까. 사랑에 대한 갈구, 욕망. 다른 방법을 찾을 수 없어서 죽음으로 답할 수밖에 없는 간절함. 절절한 사랑일까. 천천히 죽음이 움직이는 이런 문장에 나는 반하고 만다. 그렇다고 죽음을 찬양하는 건 아니다.
블랙베리나 라즈베리의 거품처럼 솟았다가 솜털처럼 미지근하게 흘러내리는 피가 생생히 느껴졌다. 마치 첫 태양에 살짝 베인 꽃이 벌어지듯이. (10쪽)
마치 피가 땅에서 흘러나오고 그 땅이 사라져 가듯이. 몸이 가벼워지고 조금씩 비워진다. 기이하고 완전한 부드러움. 흡사하다. 당신이 나를 끌어당겨 꽉 안았을 때, 나를 숨 멎게 하고 풀어주었던 그 부드러움과 참으로 흡사하다. (11쪽)
소설 속 ‘나’는 ‘당신’이 선물해 준 철필로 나를 죽음을 실행한다. 그토록 사랑한 당신을 남겨두고 나는 왜 죽음을 선택하는 것일까. 이제 둘 사이의 사랑을 만나볼 차례다. 나와 당신은 연인이다. 은밀하고 은밀한 연인, 불륜이다. 나에게는 남편이 있고 딸도 있다. 그러나 나는 당신을 사랑한다. 죽음과 하나가 된 내가 들려주는 당신에 대한 이야기, 당신과 나눈 사랑 이야기. 당신은 호텔에 머물며 글을 쓰는 사람이다. 당신과 호흡하고 당신과 마주한 풍경들, 함께 느꼈던 모든 감정들, 그 떨리는 숨결, 그 비밀스러운 기억을 섬세한 감각으로 펼쳐놓는다.
은밀한 사랑은 둘만의 공간을 채우고 세계를 확장하지만 그 세계의 밖은 대로 고통으로 채워진다. 당신을 향한 나의 마음은 보낼 수 없는 편지가 되고 나는 그 편지처럼 접혀진다. 사랑이 무엇이기에 이토록 삶을 흔드는 것일까. 누군가 나와 당신의 사랑이 공개할 수 없는 지지 받을 수 없는 사랑이라 그렇다고 말할지도 모른다. 정녕 그런 것일까. 아닐 것이다. 설령 비난과 책망이 난무해도 사랑 안에 거한 이들은 그 사랑 안에서 저마다 특별하다.
기다림. 기다리기. 올 수 없는 것, 오지 않을 것을 기다리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 아시나요? 사랑이 저주임을 알고 있나요? 당신에게서 삶을 송두리째 뽑아버리고서는 살아 있게 남겨두고, 일상을 벼락에 맞아 불타버린 황폐한 곳으로 만든다는 것을요? 견딜 수 없는 고통이 차라리 나을 정도입니다. (59쪽)
나는 다정함과 잔인함이 욕망의 이면에 서로 달라붙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존재는 부재로 인해 성장했기에 부재를 피할 수는 없었다. 탄생은 죽음만큼이나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때로는 나가는 일이 포기나 멀어짐보다 더 큰 상처를 줄 수도 있다. (74쪽)
당신에겐 나 아닌 사랑이 있었다. 당신이 사랑한 그녀. 오렌지 나무로 남은 사랑을 당신이 잊지 못하는 걸 안다. 그러니 당신이 떠날 때에도 당신을 이해한다. 이제 조금 선명해진다. 당신은 떠났다. 내가 선택한 죽음의 이유는 명확해졌다. 아름다운 은율로 흐르던 둘의 시간, 기다렸던 계절과 꽃. 당신이 없는 삶은 당신을 또렷하게 불러온다. 여기 없어서 당신은 존재한다. 여기 없어서 당신이 더 생생하다. 당신이 없어서 견딜 수 없는 삶.
사랑이 시작되는 이유도 별로 없지만, 사랑이 끝날 때는 더더구나 아무런 이유도 존재하지 않았다. (129쪽)
누군가를 사랑하는 일은 어떤 것일까. 상대를 향한 사랑이 깊을수록 나는 희미해지는 것일까. 그 사랑이 짙어갈수록 나의 형체는 사라지는 것일까. 어떤 말로도 정의내릴 수 없는 사랑. ‘나’는 사랑이 끝났음을 인정할 수 없었던 것일까. 당신이 아닌 나만이 사랑의 끝을 정할 수 있었다. 아니, 사랑의 완성을 위한 선택이 죽음이었는지도 모른다. 온몸에 새겨진 사랑을 간직한 채 당신에게로 갈 수 있는 유일한 방법 말이다. 우리가 될 수 있고 우리로 남을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마지막 욕망이었던 것이다. 어떤 주저함과 두려움 없이 죽음을 통해 당신에게 향한다. 그것은 스스로를 파괴하는 게 아니다. 사랑이 끝나지 않았음을 증명하는 일이다. ‘나’의 사랑은 그런 것이다. 정성을 다한 곡진한 사랑이다. 끝나지 않은 사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