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문학 핀 시리즈 소설선 46
문진영 지음 / 현대문학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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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이 아닌 곳에서 살고 싶었다. 그러니까 좀 더 크고 넓은 도시 같은 곳. 한때 그런 곳에서 살았고 지금은 이곳이 아닌 다른 곳을 꿈꾸지 않는다. 그곳이 어디든 산다는 건 매한가지니까. 누군가 떠나고 누군가 남고 그게 삶의 이치라는 걸 알지만 떠나고 남는 마음에 대해서는 깊게 생각해 본 적이 없다. 떠나고 싶어서 떠나고 남고 싶어서 남은 돌아오고 싶어서 돌아오는 게 아니라는 걸 말이다. 사실, 내 마음 하나도 벅차니 당연한 일이다. 어떤 마음을 헤아리는 것은 가능할까. 문진영의 『딩』 을 읽으면서 그런 마음이 무엇일까 생각했다.


『딩』은 아버지가 죽고 집을 정리하기 위해 고향 K로 돌아오는 지원을 시작으로 주미, 재인, 영식, 쑤언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옴니버스 형태의 소설이다. 작은 어촌 마을인 K를 배경으로 그 안에서 스치고 지나가며 연결된 사람들, 특별할 것 없는 다섯 명의 사연은 소리 없이 내리는 눈처럼 가만히 쌓이고 스며든다. 지원은 엄마가 돌아가시고 대학 진학을 하면서 절대 돌아오지 않을 결심으로 고향을 떠났다. 아버지의 죽음으로 장례를 치르고 집을 정리를 위한 목적으로 내려왔다. 돌아온 것이 아니었다. 장례식장에서 연락처를 받은 주미에게 연락을 할 거라 생각하지 않았다.


주미는 부모님이 운영하는 모텔(지금은 호텔로 이름을 바꾼)에서 일을 하면서 언젠가 고향을 떠나기만을 기대했다. 그러나 여전히 이곳에 남았다. 첫사랑과 결혼을 기대했던 연인도 지원을 떠났다. 지원도 모든 걸 정리하고 떠날 생각이지만 생각처럼 쉽지 않다. K는 서핑으로 유명해져 주미의 호텔을 찾는 이도 많다. 똑같은 날들을 보내고 있는데 장례식에서 만난 지원이 연락을 하고 둘은 만난다. 영식의 포장마차에서 둘은 소주를 마시며 지원의 사정과 과거의 일들을 이야기한다. 함께 지원의 집에 와서 잠까지 잔다. 지원을 위해 북엇국을 끓이고 메모를 남기고 다시 호텔로 향한다.


남겨진 사람이 아니라 그냥 여기 있는 사람. 누군가 나 왔어, 하고 돌아왔을 때 거기 있는 사람. 아무 때나 연락해도 늘 있는 사람. 그런 사람은 세상에 드물고, 주미는 그런 사람이 되고 싶어졌다. (72쪽)






지원이 떠난 사람이면 주미는 남은 사람이었다. 마치 돌아온 이를 맞이하려고 기다리고 있는 사람처럼. 지원이 완전히 돌아온 건 아니지만 주미가 있기에 지원은 언제들 돌아올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런가 하면 남아서 기다리는 게 아니라 찾아 나선 사람도 있다. 주미의 호텔에 묵은 재인이 그러하다. 재인은 호텔에서 죽은 연인 P가 묵었던 방에서 지낸다. 재인과 P는 하와이에서 만났다. 재인은 어학원 강사였고 P는 한국에서 온 학생이었다. 둘은 곧 연인이 되었고 P는 서핑을 즐겼다. 그랬던 P가 K의 호텔에서 목을 매어 죽었고 재인은 지금 그곳에 있고 카페에서 아르바이트를 한다. 일을 끝내고 돌아오는 길에는 영식의 포장마차에 들른다.


영식의 포장마차는 지원, 주미, 재인을 연결하는 공간이다. 한때 단란한 가정을 꾸렸던 영식은 사고로 아이를 잃은 후 자포자기한 상태가 되었다. 삶을 포기하려는 순간 어린 주미 덕분에 살았고 포장마차를 시작했다. 베트남에서 온 노동자 쑤언이 포장마차 일을 돕는다. 술과 안주만 파는 게 아니라 식사가 필요한 이들에게는 밥을 팔았다. 혼자 포장마차를 찾는 재인이 그런 손님이었다. 쑤언은 배를 타는 일을 했지만 일이 없을 때 영식을 도왔다. 함께 일했던 마수드가 죽고 쑤언은 남았다. 베트남을 떠난 쑤언이 돌아갈 곳은 베트남이었다. 한국의 겨울과 눈을 딸 누에게 들려주지만 눈이 없는 그곳이 돌아갈 곳이었다.


떠나고 돌아오는 게 삶이라면 어떤 이별도 아쉽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어떤 삶은 돌아오지 못하고 어떤 삶은 떠나지 못한다. 어딘가 부유하다 머물기도 하고 어딘가 부유하다 상처가 나기도 한다. 돌아갈 그곳이 있어 이곳을 버틸 수 있는 삶, 떠날 그곳을 기대하기에 이곳을 견딜 수 있는 삶, 그리고 그들을 가만히 안아주는 남겨진 삶. 『딩』의 지원, 주미, 재인, 영식, 쑤언은 서로가 서로에게 그런 삶이었다. 떠날 것을 알기에 마음을 단속하는 게 아니라 머무는 동안 마음을 기대고 나눠줄 수 있는 삶. 쑤언이 등대 계단참에 둔 귤 하나가 지원의 손으로 옮겨가는 것처럼. P가 재인에게 알려준 국물 맛을 영식의 포장마차에서 만나는 것처럼.


보드에 뭔가가 부딪혀 상처가 나면 부른다는 ‘Ding’을 가만히 따라 읽는다. 상처가 없는 삶은 어디에도 없다고 말해주는 것 같다. 산다는 건 상처를 받는 일 투성이지만 나 또한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기도 할 테니까. 그런 상처가 무섭다고 삶을 포기할 수 없으니까. P가 재인에게 한 말처럼 당연한 거니까. 상처가 남긴 흉터는 때로 성장의 증거가 되기도 하고 앞으로 나갈 동력이 되기도 하니까.


서핑을 하면 딩 나는 건 당연한 거니까. (...) 그건 …… 내가 오늘도 파도에 뛰어들었다는 증거니까. (85~86쪽)


문진영의 『딩』은 삶이라는 파도에 뛰어드는 모두를 응원한다. 큰 소리로 모두가 외치는 함성은 아니다. 가만가만 지켜보며 어디 다친 데는 없냐고, 괜찮냐고 말해주는 그런 목소리다. 슬그머니 귤 하나를 쥐여주고 뜨근한 어묵 국물을 한 컵 담아주는 그런 마음. 작지만 사라지지 않을 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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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못 걸려온 전화
아고타 크리스토프 지음, 용경식 옮김 / 까치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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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못 걸려온 전화를 받는 일은 피곤한 일이다. 발신자는 계속 같은 질문을 하면서 확인을 하고 수신자는 한 번의 답으로 통화를 끝내고 싶기에 둘은 서로 완벽한 불통을 이룬다. 그럼에도 다시 또 전화가 오면 받을 수밖에 없다. 상대가 누구인지 모르기에 바로 전에 전화를 건 사람일지라도 말이다. 발신자가 누구인지 확인할 수 있는 스마트폰을 한 몸처럼 사용하는 지금은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다. 그럼에도 20여 년 전에 발표한 아고타 크리스토프의 짧은 소설 25개가 수록된 『잘못 걸려온 전화』 속 이야기는 낯설지 않다. 아주 짧은 이야기는 인물의 성격이나 시대적 배경 같은 설명은 찾을 수 없다. 느닷없이 찾아오는 방문객을 맞이하고 예고 없이 도착한 우편물 받는 기분이다. 하지만 절대 이상하지도 않고 오히려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 같아 놀라울 뿐이다.


어떤 내용일까, 도무지 상상할 수 없는 제목의 「도끼」를 시작으로 표제작인 「잘못 걸려온 전화」, 마지막 「나의 아버지」는 하나같이 불친절하면서도 익숙하다. 화자의 정확한 나이나 성별도 짐작하기 어려운 이야기도 있지만, 그들은 모두 누군가를 닮았고 심지어 어떤 글은 나를 닮은 것 같은 느낌이다. 그러니 어떤 의미에서는 하나하나 언급하는 것도 불필요하다. 소설 속 인물들은 때로 고독하고, 외롭고, 분노하고 증오한다.


「도끼」속 남편이 침대에서 떨어져 머리에 도끼가 박힌 채로 죽음을 맞이한다. 아내는 전화를 걸어 의사를 부른다. 누가 봐도 의심스러운 건 아내다. 하지만 아내의 주장대로 그냥 그런 일이 일어날 수도 있지 않은가. 마치 죽은 자의 영혼이 안식처를 찾아 떠도는 것 같은 「나의 집에서」나 소모품처럼 공장에서 일을 하다 결국 암에 걸린 「어느 노동자의 죽음」은 고단하고 지친 삶의 끝에서 찾을 수 있는 건 무엇일까 질문을 던지는 듯하다.


내 집에 도착했을 때, 나는 몹시 지친 상태일 것이다. 어떤 침대든 간에 아무튼 침대 위에서 잠이 들 것이다. 구름이 떠나가듯 커튼이 바람에 나부끼는 방에서. 그런 식으로 세월은 흘러갈 것이다. ( 「나의 집에서」, 23쪽)






삶이란 예측할 수 없어서 선뜻 계획을 세울 수 없고 어떤 문제는 자신의 의지로는 해결할 수 없어 원하지 않는 협상을 해야만 한다. 도시의 작은 광장에서의 소음과 교통 체증을 뒤로하고 이사를 온 시골은 천국이었지만 곧 고속도로가 생기고 이전이 도시에는 화단과 쉴 수 있는 벤치와 어린이 놀이터까지 만들어진 「집」처럼 말이다. 도시를 떠나지 않았더라면 하는 막심한 후회가 밀려오는 삶. 아, 내 뜻대로 살 수 있는 삶은 정녕 불가능한 것인가. 이렇게 따지는 나에게 이런 문장으로 아고타 크리스토프는 답한다. 인생이 원래 그런 거라고.


너를 두렵게 하고 너를 해칠 수 있는 유일한 건 인생이라는 것, 너도 이미 알고 있잖아. ( 「영원히 돌아가는 회전열차」, 112쪽)


세상은 나를 중심으로 돌아간다고 내 인생은 나의 것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어느 순간 모든 게 시시해질 때가 있다. 아무런 의욕도 없고 바라는 것도 없고. 애면글면 살 필요가 무언가 싶은 마음. 가족과 같이 지내도 그들의 생각을 모르고 가족을 모른 채 살면서 그들의 소식을 기다렸지만 정작 소식을 받자 멀리 떠나려는 이상하고도 알 수 없는 마음. 그래서 어떤 문장은 더 깊게 와닿고 어떤 문장은 절로 감탄하게 된다. 어쩌면 25개의 짧은 이야기는 세상은 그런 거라고. 산다는 거 별거 아니라고 살아보니 그렇다고 아고타 크리스토프의 고백 같기도 하다. 세상은 부조리한 것투성이고 삶은 한순간이라고.


없어진 것은 단지 당신 일생 중 하루뿐임을. (「도둑」, 115쪽)


밖에는 인생이 있지만, 내 인생에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나를 위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무슨 일인가가 일어나고, 그럴 수 있다고 하더라도, 나는 이제 그런 일에 관심이 없다. ( 「나는 생각한다」, 140~141쪽)


손에 잡은 동시에 끝까지 술술 읽을 수 있는 이야기다. 그러나 후련한 산뜻함으로 마무리할 수 없다. 잘못 걸려온 전화처럼 뭔가 개운치 않은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불편하거나 기분 나쁜 개운치 않음이 아니라 아쉽기도 하고 안타깝기도 한 그런 마음이다. 잘못 건 전화라는 걸 알면서도 계속 전화를 걸 수밖에 없는 누군가, 그것을 단호하게 거부하고 거절하지 못하는 누군가, 그들이 우리의 모습인 것 같아서다. 그들 중 하나는 나일 것만 같아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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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파랑 2024-03-06 13:1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전 모르는 번호는 안받는데 ㅋㅋ
아고타 크리스토프의 작품은 재미있는거 같아요. 특히 예측할수 없는 이야기 ~!
전 아직 이 책을 안가지고 있는데 단편집인가 보군요 ~ 얼른 구매해야겠습니다 ~!!

자목련 2024-03-06 14:41   좋아요 2 | URL
저도 대부분은 안 받는데, 몇 차례 이어지는 번호는 이상하게 받고 나서 후회합니다. ㅎㅎ
새파랑 님 즐겁게 읽으세요^^
 
눈물꽃 소년 - 내 어린 날의 이야기
박노해 지음 / 느린걸음 / 202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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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돌아가고 싶은 순간이 있다. 어떤 이는 지금보다 더 젊은 시절로, 어떤 이는 그리운 이가 존재하던 시절로, 어떤 이는 현재를 뛰어넘어 미래로 가고 싶을 지도 모른다. 그 모든 순간은 돌아갈 수 없기에, 닿을 수 없기에 그립고 애틋하다. 어쩌면 시인 박노해에게는 할머니와 아버지가 살아계시던 어린 시절인지도 모르겠다. 『눈물꽃 소년』은 시인 박노해가 아닌 어린 소년 박기평의 이야기로 순하고 맑고 시린 글이라서 울컥해질 수밖에 없다. 시인의 어린 날의 이야기를 읽노 라면 어느새 내 어린 날의 이야기를 꺼내고 싶어진다. 자신만의 이야기를, 자신을 키워준 이들의 이야기를 말이다. 박노해 시인이 직접 그린 연필그림과 함께 짤막한 33편의 글은 우리를 모두 그 시절의 소년, 소녀로 이끈다.


“잘 몰라도 괜찮다. 사람이 길인께. 말 잘하는 사람보다 잘 듣는 사람이 빛나고, 안다 하는 사람보다 잘 묻는 사람이 귀인이니께.” (12쪽)


할머니의 심부름을 받은 어린 소년은 동네 사람들에게 물어물어 그 길을 간다. 만나는 사람마다 어디 가냐고 묻고 이것저것 말을 건넨다. 처음 가는 길이라 겁먹고 두려운 길을 물어물어 간다. 물어보면 된다고, 답하는 이의 말을 잘 들으면 된다고. 진한 사투리 가득한 그 시절을 나는 잠시 상상한다. 시골에서 자랐기에 소년 기평의 마음을 알 것 같기도 하다. 그러나 고백하자면 내 할머니는 그렇지 않았다. 할머니는 무서웠고 엄격했다. 기평의 할머니처럼 다정하고 손주를 위하는 분이 아니었다.


귀여운 기평의 일상을 쫓다 보면 웃음이 나기도 하고 대견하기도 하고 슬프기도 하다. 내가 모르는 그 시대의 아픔이, 곳곳에 묻어 있기 때문이다. 한 사람의 인생이 어떤 환경에서 어떤 사람들과 어울려 자랐는가에 따라 얼마나 달라지는지 알아서다. 그런 의미에서 소년 기평의 주변에는 사랑이 많은 어른이 많은 듯하다. 할머니, 부모님, 동네 어른들, 공소 신부님, 학교 선생님, 친구들까지. 꼬마 기평이 소년 기평으로 성장하는 과정은 한 편의 동화처럼 예쁘지만 마냥 아름다울 수 없다. 우리 삶이 그렇듯이.


아버지와 단 한 번의 기차여행이 마지막이 될 줄 누가 알았을까. 할머니와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형이 그 자리를 대신하고 가족의 생계를 위해 아이들을 남겨두고 공장에 다녀야 했던 어머니. 학교에서 돌아왔을 때 흰 고무신이 소년을 기다렸다. 그 마음이 어떠했을지, 그 슬픔을 묵묵히 쌓아두었을 소년. 수업 시간엔 선생님께, 훈장 선생님께, 성당에서는 신부님께, 알 때까지 질문을 하던 소년. 선생님의 질타와 매에 부당함을 말하는 소년, 그 소년이 노동운동가, 저항 시인이 된 건 당연한 일이다. 형이 가져다준 시집을 읽고 시를 쓰는 모습을 상상하면 절로 흐뭇해지고 소년이 쓴 시를 읽으면 감동이 밀려온다.


폼을 잡고 시를 쓰다가, 홀로 웃고 울다가 책상에 엎드려 잠들던 그때. 그렇게 시가 내게로 왔고 그렇게 내가 시에게로 갔다. (159쪽)


고운 꽃이 피었다

높은 벼랑 끝자리에

나는 너무 작아서

까치발로 서 봐도

닿을 수가 없어

꽃들아 꽃들아

내 키가 자라기 전에

떨어지지 말아라 (191~192쪽)


전기도 들어오지 않던 시절, 들과 산이 놀이의 전부였던 굴곡진 현대사를 체험한 시인이 들려주는 이야기. 첫사랑 소녀와의 이별은 아프고 외갓집에서 본 자전거를 타고 싶어서 저금통에서 몰래 동전을 꺼내 자전거를 빌려타던 모습은 깜찍하다. 그 시대에 자전거 대여라니, 생각도 못 했던 부분이다. 그런가 하면 졸업식날 할머니와 단둘이 사느라 농사일을 하며 매번 꼴찌를 하는 친구에게 외상으로 국밥을 사주는 호기로운 소년. 중학교에 올라가 신문배달로 외상을 갚았다니 기특하고 대견하다. 그곳에 내가 있었다면 칭찬을 하고 꼭 안아주고 싶다.


“사람의 이름은 말이다. 저마다 깨끗한 비원이 담긴 것이고 이름을 부르면서 그 뜻을 알려주는 것이제. 네 이름대로 네 길을 걸어가면 이미 유명한 사람 아니냐. 다른 사람 이름 가리지 말고, 제 이름 더럽히지 말고, 자기 이름대로 살면 그게 유명한 사람 아니냐. 알겄느냐. 평아, 이 유명한 놈아!” (220쪽)


꿈에 대해 어떤 사람이 될까 고민하는 기평에게 훈장 선생님의 말씀은 지금의 우리가 기억해야 할 말이다. 내 이름으로 반듯하게 성실하게 살라는 당부. 박노해가 들려주는 어린 소년 기평의 이야기는 결국 소년, 소녀의 시절을 지나 어른이 된 모두에게 들려주는 이야기가 아닐까 싶다. 빠르게 변하고 쉽게 잊고 쉬운 것, 새로운 것만 쫓는 우리에게 말이다.


어린 나를 품어 기른 이들은 나보다 더 힘들고 괴로운 시대를 견뎌냈다. 그들이 내 안에 살아있다. 그들이 내 안에서 말을 한다. 우리는 그 모든 걸 품은 위대한 역사적 존재다. 아무리 오늘이 힘들어도, 다시 고난이 닥쳐와도, 그래도 우리는 살아왔고 그래도 우리는 살아갈 것이다. (「작가의 말」, 247~24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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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괭 2024-02-26 17: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기 이름대로 살면 유명한 거라는 말씀!! 좋네요. 기억해 둬야겠어요^^

자목련 2024-02-28 15:04   좋아요 0 | URL
그죠? 그런 의미로 독서괭 님의 이름을 불러드립니다.
독서괭 님!!
 
마고 - 미군정기 윤박 교수 살해 사건에 얽힌 세 명의 여성 용의자 현대문학 핀 시리즈 소설선 41
한정현 지음 / 현대문학 / 202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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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이 사라지면, 너에게로 갈게.” (186쪽)


한정현의 『마고』는 궁금한 소설이 아니었다. 단편을 읽은 기억은 있지만 한정현이 어떤 소설을 쓰고자 하는지, 그가 소설을 통해 전하고자 하는 게 무엇인지 크게 관심이 없었다. 그러니까 한정현의 산문 『환승 인간』을 읽기 전에는 말이다. 산문을 읽고 그의 장편이 궁금해졌다. 그리고 『마고』를 만났다. 제목 『마고』는 한국 신화에서 여신, 거인신으로 전해져 내려오는 마고를 뜻한다. 여신에 대한 이야기일까 싶었지만 '미군정기 윤박 교수 살해 사건에 얽힌 세 명의 여성 용의자'란 부제를 보며 추리소설이 아닐까 살짝 기대했다. 어떻게 읽느냐에 따라 추리소설이 될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소설은 광복 직후 혼란스러운 한반도를 배경으로 윤박 교수의 살인 사건으로 시작된다. 미군정이 시작된 시대 범인은 미군이었다. 그러나 미군 입장에서는 그 사실은 밝혀져서는 안 되었고 다른 용의자가 필요했다. 사건 당인 윤박 교수와 같은 공간에 있었던 세 명의 여성이 용의자가 된다. 세 명의 용의자는 잡지 편집장 선주혜, 과거 식모였고 술집 여성이었지만 지금은 가정주부인 윤선자, 윤박 교수의 조교이자 신인 소설가 현초의는 안타깝게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


종로경찰서의 검안서이자 '세 개의 달'이라는 가명을 사용하는 여성 탐정 연가성은 문화부 기자 권운서와 함께 사건에 연루된 세 명의 여성에 대해 추적한다. 가성과 운서는 오랜 친구 사이로 서로를 위해 전부를 내어줄 수 있는 사이다. 둘은 사건이 일어난 장소인 호텔 포엠의 사장 에리카를 만나 당시 상황과 세 명의 여성에 대해 묻는다. 묘한 분위기를 풍기는 에리카는 세 여성과 윤박 교수의 관계와 행적에 대해 애매모호하게 답한다.


미국의 지원을 받아 유학을 다녀오고 대학 강의와 문단에서 권력을 행사했던 윤박 교수와 세 여성, 그들에게는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하나씩 진실이 드러날수록 윤박 교수의 추악한 본성은 밝혀진다. 자신의 지위를 이용해 그들을 착취하고 협박한 사실이 세 여성에게 충분한 살인 동기가 된다. 세 명이 협공해서 윤박 교수를 죽였다 해도 무방할 정도다.


범인 따위는 중요하지 않다. 소설은 그 시대를 살아가는 세 명의 여성을 비롯한 여성의 삶에 집중하면서도 일본이 사라지고 그들에게 충성했던 이들의 고스란히 미국을 향해 복종하는 역사의 모습도 조명한다. 그리고 이 소설에서 가장 중요한 축이 되는 가성과 운서의 사랑을 시작으로 동성과 이성으로 규정된 사랑이 아니라 다양한 형태의 사랑에 대해 이야기한다. 하나로 규정할 수 없는 이야기다. 여성의 사랑이자 소수자의 사랑이며 미군정기의 지배와 폭력의 이야기, 시대에 저항하고 고발하는 모두의 이야기인 것이다. 폭격으로 인해 살아남을지조차 의문인 시대에 아이를 구하려는 여성의 모습.


“이곳에 만약 신이 있다면 그 신은 남자이고 좌익이거나 우익일 테죠. 여성과 아이와 노인의 목숨 따윈 안중에도 없겠죠. 이 조선 땅에서 저 순교 같은 거 안 합니다.” (129쪽)


나는 그 시대를 알지 못한다. 그건 한정현도 마찬가지다. 한정현의 소설을 통해 나는 조금이나마 그 시대를 상상하고 기록으로 남지 못한 삶을 생각한다. 그런 의미에서 한정현이 소설에 대해 들려주는 작가의 말은 남다르게 다가온다.


작중 세 개의 달은 이 소설 속 세 명의 용의자를 지칭하기도 하지만 조금씩 모양이 변하며 종내는 하나의 원형을 만드는 달처럼 이 세계 속 모든 소수자, 약자들의 연대하는 얼굴이기를 바라며 써넣었다. 강렬한 태양에 맞서지는 못할지언정 늘 우리 곁에, 서로의 곁에 있는 그런 모습으로 말이다. (「작가의 말」, 211쪽)


시대를 잘못 타고났다는 뻔한 말로는 위로할 수 없는 이들의 사랑이자 삶이다. 여자로 태어났지만 남자로 살고 싶었던 가성과 반대로 남자로 태어났지만 여자로 살고 싶었던 운서의 사랑은 시대가 바뀐 현재에도 흔쾌히 인정받을 수 없기 때문이다. 서로를 위하고 사랑한다는 이유 하나로 충분할 텐데. 우리에겐 여전히 연대와 공감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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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소한의 최선
문진영 지음 / 문학동네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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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다는 건 각자의 몫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선택을 강요하고 부축인다. 내가 해 보니 좋았다고, 내가 이끌어주겠다는 식이다. 어쩌면 많은 이들이 선택한 길이 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게 최선일까? 알 수 없다. 산다는 건 역시나 내가 사는 일이니까. 그런 점에서 문진영의 단편집 『최소한의 최선』 속 인물은 애틋하다. 그들은 누군가 함께 있으면서도 한결같이 외롭고 쓸쓸하다. 이상한 건 그 쓸쓸함이 나쁘지 않다.


첫 단편 「미노리와 테츠」 속 ‘수민’과 ‘나’는 학창 시절부터 내내 단짝이었지만 성향은 전혀 다르다. 수민과 같이 간 일본 여행에서 우연히 알게 된 미노리와 테츠 부부의 근황을 수민을 통해 듣는다. 수민은 그 후로 혼자 일본에 가서 그들을 만나기도 했다. 최근에 둘이 이혼했다는 소식이다. 여행에서 수민과 테츠는 죽이 맞는 사이였다. 수민은 그랬다. 적극적이며 모두가 수민을 좋아하게 만들었다. 나는 조용하고 얌전한 소심한 쪽이었다.


서울에 남자친구를 만나러 왔다는 미노리의 연락을 받고 나는 고민한다. 수민 없이 미노리와 둘만 만나는 것이라서. 예전에 나를 좋아하지 않았다며 사과하며 그것에 대해 설명하려는 미노리에게 나는 말한다. “나도 알아. 우리는 지구의 다른 한쪽을 떠받치고 있는 사람들이지.” (「미노리와 테츠」, 30쪽). 아, 이런 표현을 할 수 있는 작가라니. 신선하다 못해 감동적이다.


빛이 환할수록 더 짙어지는 그림자에 관해. 임계점에 닿기도 전에 쉽게 무너져버리는 마음에 대해. (「미노리와 테츠」, 31쪽)


어떤 감정에 대해 도무지 설명할 수 없는 그것을 문진영은 자신만의 핀셋으로 집어올려 보여준다고 할까. 특별한 것 없는 평범한 단편 속에 복잡하고도 미묘한 관계, 감정, 마음을 담아 이야기한다. 이해할 수 없는 마음이나 관계라고 선을 긋는 그런 게 아니라 그 마음을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 가만가만 들려준다.





그런 문진영의 시선은 엄마와 삼촌이 어렸을 때 자식을 버리고 집을 나간 외할머니 '배정심' 여사의 이야기인 「내 할머니의 모든 것」에서도 느낄 수 있다. 오랜 시간 연락이 닿지 않았던 외할머니는 삼촌의 유산 문제로 엄마와 연락이 닿았다. 할머니는 삼촌의 유산을 포기했고 이혼한 엄마의 몫이 되었다. 손녀인 나는 외할머니가 궁금했고 더 알고 싶었다. 나의 눈에 할머니는 멋져 보였다. 패션이나 말투, 행동, 나를 태하는 태도가 그랬다. 그러나 할머니는 곧 사라졌다. 내가 제안한 할머니의 생일 축하 자리가 마지막이었다. 연락이 닿지 않아 걱정이 된 나와 엄마는 할머니의 아파트를 찾았다. 할머니가 한 번도 초대하지 않았던 아파트. 단출하게 정리된 공간.


그날 할머니는 자신이 가진 최선의 것들을 몸에 걸치고 나왔다는 사실이다. 최선의 것들이자 유일한 것들을. 단 한 벌이의 코트, 하나의 모자, 하나의 목도리, 한 켤레의 장갑. 나는 뒤늦게야 그녀가 살아온 삶의 방식을 감히 짐작해 볼 수 있었다. 최소한의 최선. 그것이었다. (「내 할머니의 모든 것」, 96쪽)


그날 우리가 목격한 할머니의 집안 풍경이 누군가에게 지나치게 쓸쓸해 보일지는 모르나, 할머니 자신도 그렇게 느꼈을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분명한 것은, 할머니는 할머니에게 딱 맞는 일일분의 삶을 꾸리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내 할머니의 모든 것」, 116쪽)


할머니의 삶을 온전히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자식인 엄마조차도. 그녀가 원한 삶이 어떤 삶인지, 자식을 버리고 혼자 살기로 결심한 그 마음을 말이다. 그녀가 자신의 삶을 살았다는 걸 받아들일 뿐이다. 섣불리 단정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삶. 외롭고 고독하지 않았을까 상상하지 말고.


누군가 삶은 한 곳에 뿌리를 깊게 내리는 것이라 말할지도 모른다. 그건 그의 삶이다. 이곳저곳에 뿌리를 내리거나 뿌리나 열매 없이 줄기만 지닌 삶도 있는 것이다. 「너무 늦지 않은 어떤 때」 속 육 년의 직장 생활을 끝내고 떠난 인도 여행에서 만난 '안와'도 다르지 않다. 스무 살이나 어린 ‘나’를 친구라 대하는 안와가 살아가는 삶을 모르고 이해하기 어렵다. 그러나 함께 시간을 보내며 점차 불편하고 낡은 도시가 편안해지고 자신과 닮았다는 느낌을 받는다. 그가 건넨 말 “이 세상은 다리. 이곳에 집을 지으려 하지 말고 건너가라.” (「너무 늦지 않은 어떤 때」, 148쪽)이 위로가 된다.


삶이란 그런 것일지도 모른다. 이곳이 아닌 다른 곳에서도 시작할 수 있고, 이것이 아닌 다른 것으로 충분할 수 있다는 것을 배우고 확신을 얻는 과정이 삶은 아닐는지. 그러니 꼭 이곳을 고집할 필요는 없다. 대학교 1학년 때 기숙사 룸메이트로 만난 룸메씨와 나가 즉흥적으로 바이킹을 따라 떠난 월미도 여행을 다룬 「고래 사냥」도 같은 맥락이다. 원하지 않는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는 룸메씨나 주말에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취업 준비를 하는 나에게 삶은 무엇일까. 아무도 나를 붙잡아주지 않고 끌어당기지 않는 느낌. 바이킹을 타면서 느꼈던 어떤 간절함.


한껏 끌어당겨지고 싶었다. 삶 쪽으로. (「고래 사냥」, 159쪽)


문진영의 소설 속 인물을 굳이 설명하자면 환하기보다는 어두운 쪽에 있다. 그러나 그것이 나쁘거나 잘못된 건 아니다. 어둠을 아는 사람은 그 안에도 빛이 있다는 걸 안다. 어둠에 속한 시간이 조금 길어질 뿐 그들이 환한 쪽을 거부하는 게 아니다. 천천히 그들의 속도로 환한 쪽으로 나오는 중이다. 그게 그들의 삶이다. 우리는 그렇게 각자의 방식으로 살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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