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고풍 요리사의 서정
박상 지음 / 작가정신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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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의 장편소설 『복고풍 요리사의 서정』은 좀 이상한 소설이다. 이상하다는 게 나쁘다는 게 아니고 묘하다고 할까. 그 이상함이 기억 속 시집을 펼치게 만들고 그 이상함이 엄마가 해주셨던 음식을 떠올리게 한다. 그건 그리움이며 사랑이다. 재밌고 기발하고 정신을 쏙 빼놓는 유머가 닿는 곳에 그것들이 있었다. 박상의 소설은 유쾌한 기억으로 남았는데 더욱 강력한 유머로 돌아왔다. 이런 아이디어는 어디서 나오는 걸까. 대단한 작가라고 생각한다. 나는 이 소설에서 이 부분이 제일 좋았다. 뭐든 될 수 있다고 믿는 그런 자신감과 순수함이 좋아서 나는 고양이가 될 거야.라고 따라 말해버렸다. 고양이는 될 수 없을 것이다. 아, 요즘 나는 고양이에 꽂혀있구나.


“나는 시인이나 고구마가 될 거야.”

“그게 뭐야! 이원식, 네가 뭐가 되든 상관없는데 시인이나 고구마는 아니야.”

“왜? 뭐?”

“못 웃길 거야.”

“웃겨야 돼? 그리고 고구마가 안 웃겨?”

“시시해. 넌 이 좁아터진 지구의 뻔한 말장난만 이해하는데 만족할 수 있니? 나는 풍성한 우주의 언어를 이해할래. 그곳엔 스케일이 큰 유머 감각이 있을 거야.”

“흥, 시는 말장난이 아니야. 시아 우주를 더 많이 이해하면 어쩔래?”

“시끄러. 요리나 제대로 배워.” (89~90쪽)


소설은 좀 특이하다. 이상한 건 특이함과 같을 수 있다. 소설을 다 읽고 나서도 내가 이 소설을 잘 읽은 건가 싶은 마음이 떠나지 않는다. 이해하지 못해도 읽으면서 즐거웠고 나만의 상상의 나래를 펼칠 수 있었으니 충분하다. 어쩌면 박상 작가의 바람이 그럴지도 모르니까. 시인이 되고 싶었던 요리사 이원식은 이탈리아 옆 삼탈리아에 도착했다. 한국의 떠나 낯선 섬에 그가 온 이유는 단 하나 조반니의 레시피 때문이다. 아니 그건 핑계일지도 모른다. 번아웃의 현실이 아닌 낯선 곳으로의 도피를 원했는지도 모른다. 헌책방에서 유연히 발견했던 요리책, 주인이 시집이라고 말했던 책. 그 책이 과연 존재하는 책은 맞을까, 나의 의심은 시작되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책을 찾는 여정에 동참하고 동행하는 과정은 즐거웠다.


이원식은 한국에서 유명한 요리 경연 대회까지 참가한 요리사였다. 마지막 결승까지 올라간 실력이었다. 요리사와 레시피는 잘 어울리는 조합이지만 시라면 달라진다. 김밥 집을 하는 엄마의 영향이었을까. 화자인 나는 요리를 배우고 여러 스승을 만나고 요리사가 된 것이다. 과거와 현재를 오가듯 소설은 두 공간을 이어간다. 조반니의 레시피를 찾아 떠나는 삼탈리아의 공간과 요리사로 보낸 한국의 공간이다. 전혀 다를 것 같지만 사람 사는 건 거기서 거긴가 보다. 사람들에게 치여 한국을 떠난 화자에게 결국 위로가 되는 존재 역시 사람이며 그가 사랑한 시라는 걸 보면 말이다.


소설에서 가장 독특한 건 삼탈리아 사람들, 그러니까 이원식이 조반니에 대해 알기 위해 만난 사람들이 모두 시를 좋아한다는 거다. 그것도 죄다 한국시. 아, 우리의 문학이 세계를 지배하는 상상으로 이어진다. 심보선, 최승자, 진은영, 신영배의 시를 좋아하는 외국인들이라니. 그러다 풀이 죽는다. 내가 모르는 시인의 시를 소설 속 그들이 너무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최규승 시인의 『끝』이라는 시집이 나는 너무 궁금해졌다. 그 끝이 알고 싶어졌다.


이것은 끝 이곳은 끝 태어날 때 이미 끝 세상은 그날 이후 끝 끝이

계속되는 끝 나는 끝 시작도 끝 끝없이 끝나지 않는 끝 (최규승「#297」, 『끝』, 244쪽)


화자가 찾아낸 조반니의 레시피를 마주하는 순간에도 그랬다. 그것이 끝일까, 아니면 다시 시작일까. 혼자 생각했다. 누군가 이 소설에 대해 묻는다면 나는 소설이 아닌 시에 대한 이야기를 더 많이 할 것 같다. 우리의 곁에 있는 시에 대해서. 알려진 시, 유명한 시가 아니라 우리가 몰라서 그 참된 진가에 대해 알려지지 않은 시들에 대해서 말하고 싶은 것이다.


“인생은 찰나 같은 점들의 연속선이에요. 시공간의 흐름 속에서 인간이라는 미약한 존재는 그 소스 코드에 가끔 인식되고 가끔 연결될 뿐이잖아요. 만약 그 가끔 오는 순간들은 우리가 놓친다면 인생은 정말 찰나가 되어버리죠. 훅 가는 게 아니라 사라지고 마는 거예요. 나머지 모든 것에 드문드문하더라도 그 가끔 오는 연결에는 항상 간절해야만 해요.” (287쪽)


사람들이 칭송해마지않는 고수의 삶도 마찬가지다. 원식의 스승이 전하는 말처럼 인생은 찰나 같은 점들의 연속선이다. 아, 이런 통찰은 언제쯤 가능할까. 살면서 수많은 위기와 고비를 유연하게 대처하는 사람들. 숨은 고수는 우리 곁에 있다. 이원식의 스승이나 엄마가 그런 것처럼. 자신의 삶을 성실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은 우리 주변에 많다. 그들을 향한 애정과 시를 흠모하는 작가 박상의 마음이 전해진다. 어딘가 현실을 벗어날 수 있는 통로가 있다면 박상이 그려낸 삼탈리아는 아닐까. 모든 걸 잊고 싶은 그대여 유머와 시심(詩心) 충만한 삼탈리아가 궁금한가. 그렇다면 지금 당장 『복고풍 요리사의 서정』를 펼치길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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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과 농담 말들의 흐름 7
편혜영 외 지음 / 시간의흐름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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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의 기억을 꺼낸다. 냉동실에 살짝 얼린 컵에 캔맥주를 따른다. 캔맥주처럼 차가운 밤이었다. 혼자라는 게 조금 아쉽지만 괜찮다. 취기가 도는 밤, 그런 밤은 수다스러워진다. 괜히 혼잣말이 늘고 드라마 속 대사에 답을 하기도 한다. 이런 행동은 농담에 속하는 게 아닐까.


스무 살이 되기 전에는 술을 마시면 안 된다고 여겼다. 절대로 마셔서는 안된다고. 우습지 않은가. 술이 뭐라고. 그게 뭐라고. 대학에 입학하고 신입생 환영회에서 마신 맥주는 살짝 시시했다. 긴장을 해서 그랬을 것이다. 맥주의 맛을 즐기는 시간은 곧 도착했으니까. 술에 대한 기억을 떠올리면 학교 앞 골목과 몇몇 이름이 따라온다. 그리고 아버지에 대 한 기억. 아버지는 술을 좋아하셨다. 술을 마시고 퇴근하는 길에는 조금 더 다정한 사람이 되었다. 아버지랑 많은 이야기를 나누지 못했다는 아쉬움. 술 한 잔 같이 마시지 못했다는 아쉬움이 크다.


『술과 농담』이란 제목에서 나는 무엇을 기대했던가. 막연하게 특정 소설가의 산문을 기대했는지도 모른다. 술에 관한 에피소드. 그들만의 술자리에서 무슨 이야기를 나룰까 하는 기대 같은 것. 일정 부분은 나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술에 대한 그들의 생각, 술자리에서 있었던 이야기가 있었으니까. 그러면서 나에게 술은 무엇일까, 나는 왜 술을 마시는 걸까, 한 번도 묻지 않았던 질문을 던진다.


마시지 못하는 것과 별개로 종종 술 마시는 일에 대해 생각을 한다. 그저 마시는 것이 아니라 술을 유일한 위안으로 삼고, 떨리는 손을 감추고 거짓말을 해서라도 조금 더 마시려 애쓰고, 술 마시는 일을 자책하고 숨기려다 남몰래 마시며 불안한 안도감을 느끼는 일에 대해 생각한다.


술 없이 부끄러움에 맞서기 싫을 때, 세계가 짐짝 같은 무게로 업혀올 때, 오래된 관계를 내가 다 망쳤다 싶을 때, 아무리 달리 보려도 해도 내 마음이 하찮을 때, 가까운 사람에 대한 연민과 실망으로 마음이 그을릴 때, 한마디로 제정신인 걸 참을 수 없을 때 그런 생각을 한다. (26쪽, 편혜영「몰(沒)」 중에서)


나를 견디기 힘들었을 때 무작정 술을 마시기도 했다. 좋아하는 맥주가 아닌 소주를 마시고 스스로 너덜너덜해진 나를 원했다. 돌이켜보면 미련하고 부끄럽지만 그땐 그게 나를 다스리는 가장 좋은 방법이었다. 지독했던 미움과 슬픔을 잊을 수 있다고 여겼으니까. 누군가 매일 술에 기댈 수밖에 없다면 그의 상심과 절망이 얼마나 큰가 생각해 보아야 하지 않을까. 어쩔 수 없음에 대해서 말이다. 고통에 대해 말할 수 이는 이가 없었기에 술에게 무언의 대화를 건넸을지도 모른다.


말하자면 술과의 관계는 현재진행형이고 끝을 알 수 없을 정도로 편안하고도 부담 없는 사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타인과 술과의 관계도 그렇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 우리는 이미 항상 술이 있는 삶을 살고, 살고 있고, 때로는 여러 가지 이유를 대며 술의 자리에 저녁이라든가 주말이라든가 취향이라든가 다른 것들을 가져다 놓아보기도 하지만, 술을 대체할 수 있는 것이 과연 없다는 것을 모두 알고 있다.


왜냐하면 우리는 모두 복잡하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술은 술술 넘어가면서 그때의 복잡한 감정과 생각을 함께 이동시킨다. 내 안에서 밖으로, 현재에서 과거로, 과거에서 미래로. 그렇게 이곳을 무겁고 복잡하게 만드는 무엇을 이곳에서 저곳으로 옮기는 단순한 힘으로 술은 우리를 잠시나마 가뿐하게 있을 수 있도록 한다. 울고 싶으면 울고 웃고 싶으면 웃는 아이처럼, 자기가 세상의 중심이 되어서 별 눈치 보지 않고 떠드는 아이처럼 단순해질 수 있게 한다. (76쪽, 김나영 「술과 농담의 시간」 중에서)


나는 술을 마시는 걸 좋아하는 편이다. 좋은 사람과 맛있는 안주를 앞에 두고 수다를 떠는 일은 즐거우니까. 매일 술을 마시는 게 아니니까. 때로 술은 특별한 분위기를 선사하고 술기운을 빌어 속엣말을 꺼낼 수도 있으니까. 그 시간이 지나 쓸어 담고 싶은 말들이라도. 그러니 술에 취한다는 말을 무조건 나쁜 말로 치부할 수 있을까. 김나영의 말처럼 현재진행형인 관계. 끊을 수 없고 처음으로 돌아가고 싶은 순간이 아닌 바로 옆에 있는 관계. 친근하고도 솔직한 표현이다. 그러니 술을 대체할 수 있는 건 없는 것일지도 모른다. 술은, 유일한 존재이자 관계가 된다.


농담은 말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이 그 말에 대해서 거리를 둘 때 발생한다. 거리가 있기 때문에 우리는 농담 속에서 여유와 숨 쉴 공간을 갖게 된다. 웃기도 하고 릴랙스를 할 수도 있다. 농담은 거리감에 의해 발생하지만, 그래서 곧 잊히고 연기처럼 사라져버린다. (189쪽, 이장욱 「술과 농담과 장미의 나날」 중에서)


누군가는 술에 취했을 때 평소와는 전혀 다른 자신을 보여준다. 숨겨둔 자아일 수도 있고 애써 노력해서 꺼낸 모습일 수도 있다. 그럼 점에서 농담은 술과 가장 잘 어울리는 말인지도 모른다. 농담이 주는 어떤 위안, 농담을 건넬 수 있는 사이야말로 술을 마실 수 있는 사이는 아닐는지. 단편소설처럼 느껴지는 이주란과 한유주의 글도 인상적이었다.


술에 대한 사유, 술에 대한 작가들의 경험, 상상, 개인적인 일상에 대한 이야기는 편안했다. 술이 아닌 커피였어도 그랬을까 싶을 정도로. 술이라서 가능한 글은 아니었을까. 치킨과 캔맥주가 생각나는 오후다. 낮술의 맛을 흠뻑 즐기고 싶을 정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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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스 2021-06-21 18:15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취중진담이란 노래가 머릿속에서 맴돌았는데 이런 우연이!^^
술은 마시지 않지만...^^
그들의 이야기가 궁금하네요.

자목련 2021-06-22 11:15   좋아요 3 | URL
와우 정말요?
술에 대한 개인적인 이야기와 함께 사유가 좋았던 책이었어요^^^

mini74 2021-06-21 18:22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프랑스인들이 마시면 어떤 비밀이든 술술 말하는 홍상수영화 속 초록병을 그렇게 궁금해 한다던 생각이 납니다. 저도 술은 잘 못 마시지만 조촐하고 소박한 술자리를 좋아합니다 *^^*

자목련 2021-06-22 11:16   좋아요 3 | URL
주량이란 말을 쓰던 시절은 사라졌지만 여전히 말씀하신 그런 술자리는 참 좋아요^^

새파랑 2021-06-21 21:4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말들의 흐름 시리즈는 항상 관심이 가더라구요~!! 술과 농담 가장 좋아하는건데, 이런 제목이라니 ~! 역시 술은 낮술(해가 떠있을때)이 가장 좋더라구요^^

자목련 2021-06-22 11:16   좋아요 3 | URL
맞아요, 술과 농담!!
제목 때문에 더 읽고 싶었지요. ㅎ 눈이 오는 날의 낮술은 진짜 최고에요!
 
지문
이선영 지음 / 비채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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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의 사건, 두 개의 시선. 두 시선이 바라보는 곳은 하나였다. 같은 곳을 바라본다고 해서 한 편이라고 믿을 수 있을까. 이선영의 장편소설 『지문』에 관한 이야기다. 고유한 나를 증명할 수 있는 것, 지문. 다 읽고 나니 제목이 가장 큰 복선이라는 걸 알았다. 설령 일찍 알았더라도 끝내 그 진의를 알아채지 못했을 것이다.


실족사로 의심되는 여성의 시체. 신원을 파악하기 어려울 정도의 상태다. 사건을 맡은 형사 규민은 주변을 살핀다. 바위에서 떨어진 것 같이 보이지만 단정할 수 없다. 근처에서 구두가 발견되고 유서로 나타났다. 바위에서 떨어진 여자, 이곳까지 등산화가 아닌 하이힐을 신고 올 수 있을까. 타살이 아닐 걸까. 타살이 아니라면 왜 이런 선택을 했을까. 단순 실족사로 처리할 수도 있었지만 규민을 그럴 수 없었다. 신원을 확인하니 오기현, 실종자였다. 언니인 윤의현이 실종 신고를 냈다. 언니와 성의 다른 자매. 그 자체만으로 평범한 삶이 예상되지 않았다.


소설을 쓰며 대학에서 강의를 하는 의현은 기현이 죽음을 전해 듣고 자살이 아닌 타살을 확신한다. 부모님의 이혼 후 자신의 아버지가 키우고 동생은 어머니와 함께 살았다. 어머니의 재혼 후 돌아가시고 나서 동생 기현을 만났다. 기현이 어떤 삶을 살았는지 어떤 고통을 받았는지 알았기에 그녀가 스스로 생을 마감하지 않았을 거라 믿었다. 다행히 규민도 타살에 대한 의심을 놓지 않았다. 부검을 의뢰했고 그 과정에서 기현의 부 오창기와 만났다.


오창기는 지역 유지였고 마을 전체를 화원으로 만들었다. 마을 사람들은 모두 그의 도움을 받고 있었다. 화원 직원을 학대한 정황이 방송으로 다뤄졌지만 어떤 타격도 받지 않았다. 딸이 이혼과 우울증을 앓았다고 했다. 화원에서 일하는 이들과 사람들의 증언에 따르면 딸을 끔찍하게 사랑했다고 했다. 아내가 죽고 그 사랑은 더 커졌다고. 하지만 그들은 알고 있었다. 그 사랑이 얼마나 끔찍하고 잔인한 것인지. 알지만 모른척했다.


소설은 기현을 죽인 범인을 찾는 과정과 의현이 강의하는 대학교에서 일어난 사건에 함께 다룬다. 그것은 문단 내 성폭행이었다. 교수가 자신의 지위를 이용해 수업을 듣는 학생들을 추행하고 성폭행한 일로 학교는 교수를 1년간 휴직하는 것으로 사건을 무마했다. 학생들은 1년 후 다시 그 교수를 대면하고 출판계에서 그가 가진 힘을 알기에 일부는 휴학을 선택하고 일부는 묻기로 했다. 의현은 사건의 당사자를 대신해 강의를 맡았고 당시에는 학교 측에 섰다. 하지만 지금은 학생들의 편에 서서 사건이 방송에 나가 세상에 알리는 데 적극적으로 나섰다. 기현의 죽음이 계기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가장 가까운 곳에서 고통 당하는 이들을 외면할 수 없었던 것일까. 의현의 도움으로 사건의 피해자인 학생은 힘을 얻는다.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인식하는 것만으로도 이전과는 다른 시간일 것이다.


기현에게도 그런 존재가 있었더라면 그녀는 살아갈 수 있었을까. 일상 곳곳에서 독처럼 숨어들어 파고드는 폭력과 범죄를 떠올릴 수밖에 없다. 가면을 쓴 사람들, 우리 현실을 고스란히 옮긴 소설을 읽으면서 화가 나는 건 당연하다. 그럼에도 범인을 밝히는 규민과 의현을 통해 지금보다 조금 더 나은 세상을 기대하게 된다. 가면을 쓴 야수가 완전히 사라지는 세상이 오기를 바라면서.


세상에는 평범한 가면을 쓴 야수가 너무 많다. (16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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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의 실루엣
미야모토 테루 지음, 이지수 옮김 / 봄날의책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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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울한 이야기를 만날 것 같은 기분이 든다. 그럼에도 그 우울이 빚어낸 모든 것들이 아름다울 것 같은 기대는 어디서 시작된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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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비밀에는 이름이 있다
서미애 지음 / 엘릭시르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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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짓말은 또 다른 거짓말을 낳는다. 표정을 숨기고 아무렇지 않게 말해도 어떤 틈이 보인다. 조카가 아주 어렸을 때 나는 그 거짓말이 귀여워서 했다. 나중에는 다 들통이 나는 말이라서. 시간을 두고 내가 그때 일을 꺼내면 조카는 어떻게 아냐고 물었었다. 이모는 모르는 게 없어, 라고 답했지만 실은 그냥 던져본 말도 많았다. 비밀과 거짓말은 같은 뜻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서미애의 『모든 비밀에는 이름이 있다』 속 열여섯 하영에게는 말이다.


가출을 감행하는 유리 앞에 나타난 아이들. 유리를 따돌리고 폭력을 가했던 그들은 결국 유리를 죽음으로 몰고간다. 열여섯 아이들의 행동, 단순하게 벌어진 사건이라고 할 수 있을까. 소설은 한 소녀의 죽음으로 시작하지만 사건에 대한 수사가 아닌 전혀 다른 하영의 이야기로 이어간다. 과거의 끔찍한 사건으로 심리상담을 받았던 하영이 5년만에 희주에게 연락을 해온다. 하영은 희주의 친구 선경의 의붓딸이다. 과거의 일에 대해 자세한 이야기를 하지 않는 채로 상담은 끝이 났다. 상담실에서 어떻게 해야 하는지 다 알고 있는 듯 하영은 희주와 줄다리기를 할 뿐 자신의 속내를 감춘다.


유리의 사건과 하영은 어떤 관계가 있을까? 그리고 과거 하영에게 벌어진 사건의 진실은 무엇일까. 독자의 궁금증은 더 커진다. 하영에게 이사를 간다는 소식을 들은 희주는 선경에게 연락을 취하고 선경의 임신 소식을 듣는다. 선경의 건강을 위해 서울을 떠나 강릉으로 이사를 결정한 남편. 아내를 배려한 행동처럼 보이지만 선경과 희주의 의견은 반영되지 않았다. 자신의 속마음은 숨기고 서로를 두려워하는 이상한 가족의 모습이다. 모두가 비밀을 가졌다.


이사온 강릉에서 선경은 하영과의 거리를 좁히려 노력한다. 하영도 그런 선경의 마음을 알지만 쉽게 다가가지 못한다. 하영은 혼자 주변을 산책하다 숲 속에서 유리의 가방을 발견한다. 유리가 남긴 일기를 통해 학교생활을 짐작한다. 하영은 유리의 죽음을 밝힐 수 있을까.


선경의 모호한 기억속에 가려진 그날의 진실과 유리를 죽인 범인을 찾아내는 하영의 계획이 소설의 축을 이룬다. 잠시도 눈을 뗄 수 없는 빠른 전개와하영과 선경의 복잡한 내면에 대한 심리묘사가 압권이다. 하영의 불안하고 날카로운 마음을 읽다보면 뭔가 사건이 벌어지는 게 아닐까 두렵다. 첫 장을 넘기면서 끝까지 단숨에 읽을 수 있는 소설이다. 날로 심각해지는 학교폭력과 점점 늘어나는 십대 범죄에 대한 경각심을 불러일으킨다. 곧 영화나 드라마로 만날 수 있을 것 같은 예감이 든다.


아무리 숨기려고 해도 비밀은 드러나게 되어 있다. 어떤 비밀을 감추고 있든, 아무리 깊게 묻어두어도 비밀은 기어코 모습을 드러내고 잔인한 미소를 짓는다. (30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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