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과 농담 말들의 흐름 7
편혜영 외 지음 / 시간의흐름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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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의 기억을 꺼낸다. 냉동실에 살짝 얼린 컵에 캔맥주를 따른다. 캔맥주처럼 차가운 밤이었다. 혼자라는 게 조금 아쉽지만 괜찮다. 취기가 도는 밤, 그런 밤은 수다스러워진다. 괜히 혼잣말이 늘고 드라마 속 대사에 답을 하기도 한다. 이런 행동은 농담에 속하는 게 아닐까.


스무 살이 되기 전에는 술을 마시면 안 된다고 여겼다. 절대로 마셔서는 안된다고. 우습지 않은가. 술이 뭐라고. 그게 뭐라고. 대학에 입학하고 신입생 환영회에서 마신 맥주는 살짝 시시했다. 긴장을 해서 그랬을 것이다. 맥주의 맛을 즐기는 시간은 곧 도착했으니까. 술에 대한 기억을 떠올리면 학교 앞 골목과 몇몇 이름이 따라온다. 그리고 아버지에 대 한 기억. 아버지는 술을 좋아하셨다. 술을 마시고 퇴근하는 길에는 조금 더 다정한 사람이 되었다. 아버지랑 많은 이야기를 나누지 못했다는 아쉬움. 술 한 잔 같이 마시지 못했다는 아쉬움이 크다.


『술과 농담』이란 제목에서 나는 무엇을 기대했던가. 막연하게 특정 소설가의 산문을 기대했는지도 모른다. 술에 관한 에피소드. 그들만의 술자리에서 무슨 이야기를 나룰까 하는 기대 같은 것. 일정 부분은 나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술에 대한 그들의 생각, 술자리에서 있었던 이야기가 있었으니까. 그러면서 나에게 술은 무엇일까, 나는 왜 술을 마시는 걸까, 한 번도 묻지 않았던 질문을 던진다.


마시지 못하는 것과 별개로 종종 술 마시는 일에 대해 생각을 한다. 그저 마시는 것이 아니라 술을 유일한 위안으로 삼고, 떨리는 손을 감추고 거짓말을 해서라도 조금 더 마시려 애쓰고, 술 마시는 일을 자책하고 숨기려다 남몰래 마시며 불안한 안도감을 느끼는 일에 대해 생각한다.


술 없이 부끄러움에 맞서기 싫을 때, 세계가 짐짝 같은 무게로 업혀올 때, 오래된 관계를 내가 다 망쳤다 싶을 때, 아무리 달리 보려도 해도 내 마음이 하찮을 때, 가까운 사람에 대한 연민과 실망으로 마음이 그을릴 때, 한마디로 제정신인 걸 참을 수 없을 때 그런 생각을 한다. (26쪽, 편혜영「몰(沒)」 중에서)


나를 견디기 힘들었을 때 무작정 술을 마시기도 했다. 좋아하는 맥주가 아닌 소주를 마시고 스스로 너덜너덜해진 나를 원했다. 돌이켜보면 미련하고 부끄럽지만 그땐 그게 나를 다스리는 가장 좋은 방법이었다. 지독했던 미움과 슬픔을 잊을 수 있다고 여겼으니까. 누군가 매일 술에 기댈 수밖에 없다면 그의 상심과 절망이 얼마나 큰가 생각해 보아야 하지 않을까. 어쩔 수 없음에 대해서 말이다. 고통에 대해 말할 수 이는 이가 없었기에 술에게 무언의 대화를 건넸을지도 모른다.


말하자면 술과의 관계는 현재진행형이고 끝을 알 수 없을 정도로 편안하고도 부담 없는 사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타인과 술과의 관계도 그렇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 우리는 이미 항상 술이 있는 삶을 살고, 살고 있고, 때로는 여러 가지 이유를 대며 술의 자리에 저녁이라든가 주말이라든가 취향이라든가 다른 것들을 가져다 놓아보기도 하지만, 술을 대체할 수 있는 것이 과연 없다는 것을 모두 알고 있다.


왜냐하면 우리는 모두 복잡하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술은 술술 넘어가면서 그때의 복잡한 감정과 생각을 함께 이동시킨다. 내 안에서 밖으로, 현재에서 과거로, 과거에서 미래로. 그렇게 이곳을 무겁고 복잡하게 만드는 무엇을 이곳에서 저곳으로 옮기는 단순한 힘으로 술은 우리를 잠시나마 가뿐하게 있을 수 있도록 한다. 울고 싶으면 울고 웃고 싶으면 웃는 아이처럼, 자기가 세상의 중심이 되어서 별 눈치 보지 않고 떠드는 아이처럼 단순해질 수 있게 한다. (76쪽, 김나영 「술과 농담의 시간」 중에서)


나는 술을 마시는 걸 좋아하는 편이다. 좋은 사람과 맛있는 안주를 앞에 두고 수다를 떠는 일은 즐거우니까. 매일 술을 마시는 게 아니니까. 때로 술은 특별한 분위기를 선사하고 술기운을 빌어 속엣말을 꺼낼 수도 있으니까. 그 시간이 지나 쓸어 담고 싶은 말들이라도. 그러니 술에 취한다는 말을 무조건 나쁜 말로 치부할 수 있을까. 김나영의 말처럼 현재진행형인 관계. 끊을 수 없고 처음으로 돌아가고 싶은 순간이 아닌 바로 옆에 있는 관계. 친근하고도 솔직한 표현이다. 그러니 술을 대체할 수 있는 건 없는 것일지도 모른다. 술은, 유일한 존재이자 관계가 된다.


농담은 말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이 그 말에 대해서 거리를 둘 때 발생한다. 거리가 있기 때문에 우리는 농담 속에서 여유와 숨 쉴 공간을 갖게 된다. 웃기도 하고 릴랙스를 할 수도 있다. 농담은 거리감에 의해 발생하지만, 그래서 곧 잊히고 연기처럼 사라져버린다. (189쪽, 이장욱 「술과 농담과 장미의 나날」 중에서)


누군가는 술에 취했을 때 평소와는 전혀 다른 자신을 보여준다. 숨겨둔 자아일 수도 있고 애써 노력해서 꺼낸 모습일 수도 있다. 그럼 점에서 농담은 술과 가장 잘 어울리는 말인지도 모른다. 농담이 주는 어떤 위안, 농담을 건넬 수 있는 사이야말로 술을 마실 수 있는 사이는 아닐는지. 단편소설처럼 느껴지는 이주란과 한유주의 글도 인상적이었다.


술에 대한 사유, 술에 대한 작가들의 경험, 상상, 개인적인 일상에 대한 이야기는 편안했다. 술이 아닌 커피였어도 그랬을까 싶을 정도로. 술이라서 가능한 글은 아니었을까. 치킨과 캔맥주가 생각나는 오후다. 낮술의 맛을 흠뻑 즐기고 싶을 정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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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스 2021-06-21 18:15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취중진담이란 노래가 머릿속에서 맴돌았는데 이런 우연이!^^
술은 마시지 않지만...^^
그들의 이야기가 궁금하네요.

자목련 2021-06-22 11:15   좋아요 3 | URL
와우 정말요?
술에 대한 개인적인 이야기와 함께 사유가 좋았던 책이었어요^^^

mini74 2021-06-21 18:22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프랑스인들이 마시면 어떤 비밀이든 술술 말하는 홍상수영화 속 초록병을 그렇게 궁금해 한다던 생각이 납니다. 저도 술은 잘 못 마시지만 조촐하고 소박한 술자리를 좋아합니다 *^^*

자목련 2021-06-22 11:16   좋아요 3 | URL
주량이란 말을 쓰던 시절은 사라졌지만 여전히 말씀하신 그런 술자리는 참 좋아요^^

새파랑 2021-06-21 21:4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말들의 흐름 시리즈는 항상 관심이 가더라구요~!! 술과 농담 가장 좋아하는건데, 이런 제목이라니 ~! 역시 술은 낮술(해가 떠있을때)이 가장 좋더라구요^^

자목련 2021-06-22 11:16   좋아요 3 | URL
맞아요, 술과 농담!!
제목 때문에 더 읽고 싶었지요. ㅎ 눈이 오는 날의 낮술은 진짜 최고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