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문
이선영 지음 / 비채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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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의 사건, 두 개의 시선. 두 시선이 바라보는 곳은 하나였다. 같은 곳을 바라본다고 해서 한 편이라고 믿을 수 있을까. 이선영의 장편소설 『지문』에 관한 이야기다. 고유한 나를 증명할 수 있는 것, 지문. 다 읽고 나니 제목이 가장 큰 복선이라는 걸 알았다. 설령 일찍 알았더라도 끝내 그 진의를 알아채지 못했을 것이다.


실족사로 의심되는 여성의 시체. 신원을 파악하기 어려울 정도의 상태다. 사건을 맡은 형사 규민은 주변을 살핀다. 바위에서 떨어진 것 같이 보이지만 단정할 수 없다. 근처에서 구두가 발견되고 유서로 나타났다. 바위에서 떨어진 여자, 이곳까지 등산화가 아닌 하이힐을 신고 올 수 있을까. 타살이 아닐 걸까. 타살이 아니라면 왜 이런 선택을 했을까. 단순 실족사로 처리할 수도 있었지만 규민을 그럴 수 없었다. 신원을 확인하니 오기현, 실종자였다. 언니인 윤의현이 실종 신고를 냈다. 언니와 성의 다른 자매. 그 자체만으로 평범한 삶이 예상되지 않았다.


소설을 쓰며 대학에서 강의를 하는 의현은 기현이 죽음을 전해 듣고 자살이 아닌 타살을 확신한다. 부모님의 이혼 후 자신의 아버지가 키우고 동생은 어머니와 함께 살았다. 어머니의 재혼 후 돌아가시고 나서 동생 기현을 만났다. 기현이 어떤 삶을 살았는지 어떤 고통을 받았는지 알았기에 그녀가 스스로 생을 마감하지 않았을 거라 믿었다. 다행히 규민도 타살에 대한 의심을 놓지 않았다. 부검을 의뢰했고 그 과정에서 기현의 부 오창기와 만났다.


오창기는 지역 유지였고 마을 전체를 화원으로 만들었다. 마을 사람들은 모두 그의 도움을 받고 있었다. 화원 직원을 학대한 정황이 방송으로 다뤄졌지만 어떤 타격도 받지 않았다. 딸이 이혼과 우울증을 앓았다고 했다. 화원에서 일하는 이들과 사람들의 증언에 따르면 딸을 끔찍하게 사랑했다고 했다. 아내가 죽고 그 사랑은 더 커졌다고. 하지만 그들은 알고 있었다. 그 사랑이 얼마나 끔찍하고 잔인한 것인지. 알지만 모른척했다.


소설은 기현을 죽인 범인을 찾는 과정과 의현이 강의하는 대학교에서 일어난 사건에 함께 다룬다. 그것은 문단 내 성폭행이었다. 교수가 자신의 지위를 이용해 수업을 듣는 학생들을 추행하고 성폭행한 일로 학교는 교수를 1년간 휴직하는 것으로 사건을 무마했다. 학생들은 1년 후 다시 그 교수를 대면하고 출판계에서 그가 가진 힘을 알기에 일부는 휴학을 선택하고 일부는 묻기로 했다. 의현은 사건의 당사자를 대신해 강의를 맡았고 당시에는 학교 측에 섰다. 하지만 지금은 학생들의 편에 서서 사건이 방송에 나가 세상에 알리는 데 적극적으로 나섰다. 기현의 죽음이 계기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가장 가까운 곳에서 고통 당하는 이들을 외면할 수 없었던 것일까. 의현의 도움으로 사건의 피해자인 학생은 힘을 얻는다.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인식하는 것만으로도 이전과는 다른 시간일 것이다.


기현에게도 그런 존재가 있었더라면 그녀는 살아갈 수 있었을까. 일상 곳곳에서 독처럼 숨어들어 파고드는 폭력과 범죄를 떠올릴 수밖에 없다. 가면을 쓴 사람들, 우리 현실을 고스란히 옮긴 소설을 읽으면서 화가 나는 건 당연하다. 그럼에도 범인을 밝히는 규민과 의현을 통해 지금보다 조금 더 나은 세상을 기대하게 된다. 가면을 쓴 야수가 완전히 사라지는 세상이 오기를 바라면서.


세상에는 평범한 가면을 쓴 야수가 너무 많다. (16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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