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해지려는 관성 - 딱 그만큼의 긍정과 그만큼의 용기면 충분한 것
김지영 지음 / 필름(Feelm)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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깔끔하게 정돈된 글이다. 읽기 편하고 전달하는 게 무엇인지 명확하게 알 수 있다. 저자가 칼럼을 연재해서 그럴 것이다. 읽기 수월한 적정한 원고로 일상을 이야기하며 긍정의 힘을 보탠다. 딱딱함과 부드러움이 조화롭다고 할까. 『행복해지려는 관성』이란 제목 덕분에 자꾸 행복을 생각하게 된다. 행복을 위한 삶이 아니라 지속 가능한 행복을 생각한다. 현실에 만족하며 하루를 행복하게 마무리하는 이는 얼마나 될까. 자유롭게 친구를 만나고 맛있는 음식을 함께 먹는 일이 너무도 어려운 일상이 돼버린 지금, 아마도 많은 이들은 행복보다는 불행을 택할 것이다.

예전보다 짜증이 늘고 자신도 모르는 표정을 장착하며 살아갈지도 모른다. 하지만 작고 소소한 일상의 리스트를 작성하다 보면 조금 놀라고 만다. 많은 것들이 내게 있고 많은 이들이 나를 걱정하고 염려한다는 걸 알게 될 테니까. 저자가 동생의 생일 전날 아빠의 사고 소식으로 모든 게 달라질 수 있다는 걸 알게 된 것처럼. 우리 삶을 채운 우연과 필연의 조각들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 기억해야 한다.

코로나19시대를 살아가면서 의도치 않게 부여된 방콕의 시간에 발견하는 기쁨들, 어쩔 수 없는 만남의 단절과 관계 속에서 자신의 내면에 깊이 다가갈 수 있다는 걸 우리가 알게 된 것도 코로나가 가져다준 행복은 아닐까. 학창 시절 찾았던 단골 가게가 여전하게 그 자리에 있다는 사실이 감격스러우면서 자영업을 하는 사장님이 걱정하는 저자의 마음은 곧 우리의 그것이기에 더욱 공감할 수 있다.

여행이 자유로웠던 시절, 이제 과거가 된 그 시절을 추억하며 들려주며 소중함을 새기는 글에는 간절한 바람이 담겼다. 스마트폰 하나로 모든 게 다 편리한 여행이 아니라 직접 묻고, 걷고, 찾는 여행의 재미를 전하는 글은 무척 신선하고 놀라웠다. 우리가 잊었던 아날로그의 행복이라고 할까. 그러면서도 여행에서조차 잘 해야 한다는 부담을 갖는다는 글에서는 여행의 즐거움은 무엇일까 질문으로 이어진다. 여행지에서 꼭 가야 하는 곳, 꼭 먹어야 하는 음식, 꼭 체험해야 하는 것, 다 해야 할까. 추천에 휘둘려 진짜 여행을 하지 못하는 우리의 민낯을 마주한 것 같았다.


여행이 삶의 환유라면, 인생 또한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모든 인연은 헤어짐을 전제로 한다. 다만 그 길이와 밀도가 다를 뿐. 때문에 ‘어차피 헤어질 건데’라는 말은 사실 모든 인연에 해당되는 숙명과도 같다. 어차피 헤어질 인연이니 마음을 내어주지 않겠다는 것. 추억으로서의 가치가 없다는 것은 삶 전반에 대한 태도에 다름 아니다. 생의 끝자락에서 바라보는 추억의 가치는 시간의 길이에 비례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87쪽)

익명성에 대해 생각한다. 나를 모르는 타자에 대한 환대로 시작하는 공간이 온라인이다. 닉네임과 글로 시작된 관계는 부서질 듯 위태로우면서도 단단하다. 저자의 말처럼 어차피 알지도 못하는 사이라 생각해서 때로 마음을 공유하면서도 어느 날 갑자기 사라진다. 시절인연도 허락하지 않겠다는 것처럼. SNS의 만난 그 순간의 공감과 댓글이 진심이라면 아름다운 인연이다. 수많은 관계 속에서 우리가 놓쳤던 것들을 잡아두고 싶은 마음을 떠올리고 만다.

행복에 관해 말할 때, 죽음은 그 범주에 속하지 않는 것처럼 여겨진다. 그러나 우리의 곁에 항상 죽음이 존재하는 것처럼 행복한 죽음을 생각할 수 있지 않을까. 죽음을 준비하는 게 아니라 죽음에 대한 사유도 삶에 있어 필요하다는 걸 말이다.

‘삶’이라는 것은 어쩌면 ‘죽음’이라는 엔딩을 위한 하나의 스토리에 불과한지도 모른다. (중략) 생의 순간순간은 죽음의 존재를 부정하지 않고 정면으로 응시하는 것. 그것이면 족하다. (155쪽)

혼자 행복한 삶을 누리는 것도 충분하다. 저자의 표현처럼 내 식대로 행복하면 그만이다. 지금의 상황에서 어떤 일을 할 때, 누구와 있을 때, 무엇을 먹을 때 즐겁고 기쁜지 생각한다. 그러기 위해선 내가 나를 잘 알아야 한다. 나를 발견하는 기쁨이야말로 행복해지려는 관성의 첫걸음일지도 모른다. 나아가 함께 행복을 꿈꾸는 좋은 여행자가 될 수 있다면 그걸로 충분할 것이다.

당신의 이야기를 가장 잘 들어주는 사람은 ‘여행자’라는 말이 있다. 서로에게 잘 보일 필요 없이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드러낼 수 있기 때문이다. 어쩌면 우리들의 이러한 모습은 같은 마음에서 비롯된 것은 아닐까. 서로에게 잘 보일 필요 없이, 그 어떤 속박도 없이, 교감 그 자체를 목적으로 하는 진짜 만남에 대한 갈증 말이다. 앞으로의 숱한 만남에서도, 서로가 서로에게 귀한 여행자이고 싶다. (21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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밝은 밤
최은영 지음 / 문학동네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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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가까운 이를 만난 기분이다. 자주 연락을 하지 않아도 서로의 안부를 마음으로 기도하는 사이, 많은 말을 하지 않아도 눈빛만으로도 그게 무엇이든 알 것 같은 사이 말이다. 그냥 마주만 보아도 든든한 존재. 그들은 누구일까? 최은영의 첫 장편소설 『밝은 밤』에서 그들을 만났다. 서로가 서로에게 기대는 사이, 가만히 어깨를 내어주는 사이. 가족이었고 친구인 그들의 이야기가 어둡고 그늘진 내 마음을 환하게 밝혀주었다.

엄마와 딸은 그런 존재이면서도 상처를 준다. 화자인 서른두 살 ‘지연’에게 엄마가 그랬고, 엄마와 할머니가 그랬다. 남편의 외도로 이혼을 하고 찾아온 도시 희령에서 지연은 할머니와 20년 만에 재회한다. 할머니 집에서 발견한 증조할머니의 사진, 그 사진으로부터 이야기는 시작된다. 할머니가 들려주는 증조모의 삶으로 시작해 자신까지 이어지는 여성의 서사는 우리의 그것이라 더 깊게 공감할 수 있다.

1930년대 백정의 딸이라는 굴레에서 도망치듯 결혼한 증조모 ‘삼천’은 낯선 곳에서 오직 ‘새비’ 할머니에게 의지한다. 이름이 아니라 태어난 곳으로 서로를 부르며 힘든 시대를 견뎌온 두 여성의 우정은 그 시대의 완벽한 자화상이다. 여자라는 이유로 핍박받고 존재조차 부정당했던 그들이 생계를 유지하고 아이를 키우며 살아온 하루하루 살아갈 힘은 어디서 찾을 수 있었을까. 서로가 서로에게였다. 삼천과 새비는 하나였다. 일상을 전하는 편지 하나만으로도 버틸 수 있었다.

소설은 희령에서 직장을 다니며 자신을 찾고자 하는 지연과 할머니의 어린 시절의 이야기가 교차로 전개된다. 운명처럼 대물림된 상처, 엄마와 할머니의 불화, 어쩔 수 없는 시대였다고 치부할 수 있을까. 할머니가 전해주는 증조모 삼천과 새비 할머니의 우정과 상처에서 회복되지 못한 지연의 삶을 통해 우리를 살게 만들고 앞으로 나아게 하는 힘이 무엇인지 알려준다. 마치 모든 잘못이 자신의 탓이라 여겼던 지연에게 삼천과 새미는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고 할까. 할머니가 스스로를 지키며 견디며 살아온 것처럼 지연의 삶에도 천천히 부드러운 온기가 스며든다. 차곡차곡 짙게 쌓인 슬픔이 조금씩 옅어지는 게 느껴진다. 사진 한 장으로 시작된 할머니의 이야기는 현재를 만든 역사였고 지연에게 미래를 제시하는 것이다. 그러니 “과거와 현재와 미래는 동시에 존재한다”(173쪽)는 말은 옳았다. 지연의 얼굴에 담긴 증조모 삼천의 모습처럼.

최은영은 잔인하고 신랄하게 상처를 파헤치는 대신 조용하고 나직한 고유의 언어로 슬픔을 증폭시킨다. 그리하여 다시 회복할 수 있는 작은 씨앗도 슬픔에서 잉태된다. 슬픔을 먹고 자란 씨앗은 더 이상 슬픔이 아니라는 걸 안다. 한층 더 단단해진 잎을 만들고 자란다.

증조모, 할머니, 엄마, 지연까지 이어온 여성 4대의 이야기는 진부할 수도 있다. 하지만 최은영은 굴곡진 인생 전체를 그리기보다는 차가운 인생을 데워준 다정한 말과 기억의 조각들을 보여준다. 오롯이 떠오르는 하나의 기억과 치유의 말이 우리를 살게 한다는 걸 알려준다. 독자인 내가 얼굴도 모르는 삼천과 새비를 기억하는 순간도 그러할 것이다.

“내 어깨에 기댄 여자는 편안한 얼굴로 잠을 자고 있었다. 청명한 오후였다. 어깨에 느껴지는 무게감이 좋았다. 나는 내게 어깨를 빌려준 이름 모를 여자들을 떠올렸다. 그녀들에게도 어깨를 빌려준 여자들이 있었을 거라고 생각했다. 얼마나 피곤했으면 이렇게 정신을 놓고 자나. 조금이라도 편하게 자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마음. 별것 아닌 듯한 그 마음이 때로는 사람을 살게 한다는 생각을 했다. 어깨에 기대는 사람도, 어깨를 빌려주는 사람도. 구름 사이로 햇빛이 한 자락 내려오듯이 내게도 다시 그런 마음이 내려왔다는 생각을 했고, 안도했다.” (299~300쪽)

삼천과 새비처럼 존재만으로 기쁨이 되는 이들이 그리워진다. 내가 지금까지 살아온 날들을 지켜본 소중한 그들. 서로에게 기댈 수 있는 존재라는 게 고맙고 감사하다. 어떤 마음이든 나눌 수 있는 사이가 되어줄 수 있으니, 얼마나 충만한가. 있는 그대로의 감정을 드러낼 수 있도록 이끄는 눈부신 회복의 소설 『밝은 밤』 도 그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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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olcat329 2021-08-27 13:3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자목련님의 리뷰는 저도 천천히 차분한 마음으로 읽게됩니다. 이 책 읽고 싶은 책으로 찜해둔건데 글 잘 읽었습니다.

태어난 곳으로 부른다면 저는 동대문이네요 ㅋㅋㅋㅋㅋ

자목련 2021-08-30 14:48   좋아요 0 | URL
최은영의 분위기는 단편가 크게 다르지 않은데 나쁘지 않았어요. 여성의 삶을 어루만진 손길들을 생각했어요. 동대문을 보고 서울은 지역에 넓고 지명이 많다는 생각이 드네요. 같은 지역에서 태어나고 자랐다는 게 어느 시절에는 큰 위로가 되기도 했구나, 그런 생각도 함께요.
즐겁게 만나시길 바라요^^
 
당신이 나를 죽창으로 찔러 죽이기 전에
이용덕 지음, 김지영 옮김 / 시월이일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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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곳곳에서 수많은 사건들이 발생한다. 어떤 사건은 모두가 알고 기억하는 일이 되고 어떤 사건은 당사자만 알게 된다. 사건의 중요도는 누가 결정하는 것일까? 과장해서 말한다면 권력일지도 모른다. 다양하게 존재하는 채널을 차단할 수 있는 힘을 지닌 이들. 가해자와 피해자가 발생하는 하나의 사건을 생각하면 억울한 피해자를 만들지 말아야 하고 가해자는 그에 준하는 벌을 받아야 마땅하다. 우리가 바라는 사회가 그렇다. 분명하게 죄를 판단하고 억울한 피해지를 만들지 않는 것. 다소 과격하고 잔혹한 이미지를 떠올리는 이용덕의 『당신이 나를 죽창으로 찔러 죽이기 전에』에서도 다르지 않다.


가상의 미래 일본 사회에서 벌어진 일, 그 중심에서 선 이들의 이야기. 재일 한국인 3세가 경험한 것들이 녹아있다고 볼 수 있다. 일본에서 재일 한국인으로 살아가는 어려움을 알지 못한다. 시대가 변하고 많은 시간이 흘렀음에도 여전하게 뭔가 해결할 수 없는 한의 응어리가 남았을지도 모른다. 소설 속 미래의 일본 사회에서 외국인에 대한 생활보호가 불법이고 사회 전반에 한국에 대한 혐오가 가득하다면 더욱. 한국에서 재한 일본인과 다문화가정으로 살아가는 이들과는 다를 것이다. 일본과 한국 사이에는 아픈 역사가 있으니까.


그런 사회에서 혐오의 당사자는 하루하루 슬픔과 고통 속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다. 그러니 같은 아픔을 지닌 이들을 만나 연대의 힘을 키운다. 소설에 등장하는 6명의 청년도 그러했다. 저마다의 사연을 간직한 채 자신만의 방식으로 분노를 표출하고 해결할 방법을 찾다 서로에게 연결되었다. 일본에서 정착하지 못하고 휘둘리며 살아간다. 주인공이라 할 수 있는 한국인 아버지와 일본인 어머니를 둔 가시와기 다이치를 시작으로 청년들을 데리고 일본을 떠나 한국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려는 박이화, 청년회 소속이지만 무기력한 존재로 스스로 죽음을 꿈꾸는 양선명, 다이치의 계획을 몸으로 실행하는 윤신, 극우 보수정당에서 활동하며 다이치의 계획에서 가장 중요 인물인 기지마 나리토시, 한국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살해당한 여동생의 복수를 꿈꾸는 김태수.


다이치가 어떤 계획은 세우고 실해하려 하는지 처음에는 짐작할 수 없다. 일본 국적의 다이치는 경제적으로 부유했고 누가 봐도 차별이나 혐오의 대상이 아니었다. 재일 한국인의 생존권을 위한 투쟁을 지원하는 정도로만 보였다. 동생의 죽음으로 고통의 나날을 보내는 김태수에게 그가 원하는 것을 해결해 주겠다는 다이치. 일본 가해자에게 똑같은 고통을 주려는 게 아닐까 싶었다. 다이치의 계획에 빠진 이는 오직 박이화다. 청년회를 주도적으로 이끌었던 그녀는 한국으로 향했으니까. 


사람이 ‘살아간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스스로에게 질문하기 위한 여정, 마음속 어딘가에서 바라던, 다시 태어나는 것과도 비슷한 완전히 새로운 국면이다. 도피가 아닌 개척, 굴복이 아닌 시작, 슬픔이 아닌 투쟁심, 의지를 관철한 결과로서의, 아직은 위대한 과정일 것이었다. (143~144쪽)


혼자가 아니라 청년들을 데리고 부산에 왔다. 한국에서의 모든 활동을 블로그에 기록하겠다는 그녀의 바람은 너무 부질없고 허망한 것이었을까. 부산에 도착하자 기다렸다는 듯 국정원 직원과 대면하는 부분은 소설 밖 현실에서도 진짜 그럴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다이치의 계획을 떠나서 소설을 읽으면서 가장 안타깝고 가슴 아팠던 건 김태수의 동생 김마야 사건이다. 아무 잘못도 없이 한국인이라는 이유로 피해자가 된 그녀. 그녀의 죽음 이후 새로운 마녀사냥이 시작된다. 그녀가 남긴 논문, 글에 대해 비방하며 폭력을 가한 것이다. 소설에는 그녀의 글을 통해 페미스트, 가부장제도, 비건, 여성문제, 평등 등 다양한 주제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법보다 정의,라는 말에 대해서. 모든 독립운동은 불법이다. 모든 정의는 어디까지나 주관적이고 부정확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우리들은 정의를 행해야 한다. 어떻게? 어디까지? 서프러제트에 의한 폭력 행사가 없었더라면 여성 참정권을 획득할 수 있었을까? 사회운동에 폭력이 일절 없었더라도, 역사가 반드시 좋은 방향으로 향했을까?’ (325쪽, 김마야의 글)


소설을 읽으면서 일본 사회에 국한된 상황이 아닐 수 있다는 생각으로 이어진다. 약자와 소수자를 향한 혐오와 차별, 죽음의 곁에서 살아가는 난민들, 코로나 바이러스로 심해진 양극화 현상, 해결책을 찾을 수 없는 빈부의 격차. 점점 더 다양해지는 사회구성원, 누군가의 슬픔의 쌓이다 못해 폭발한다면 다이치의 계획은 현실에서 나타날지도 모른다. 우리에게 미래는 이처럼 디스토피아일까. 두렵고도 무거운 마음을 지을 수 없다. 제목처럼 강렬하고 뜨거운 여운을 남긴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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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파랑 2021-08-25 15:3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지은이도 한국인 역자도 한국인이어서 놀랐는데 재일교포가 쓴 글이군요. 소수자의 삶은 언제나 힘든거 같아요 ㅜㅜ

자목련 2021-08-26 09:23   좋아요 1 | URL
네, 아무래도 경험이 있으니 더욱 실감나고 아프게 다가오는 것 같아요.
 
패싱 - 백인 행세하기
넬라 라슨 지음, 서숙 옮김 / 민음사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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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는 안과 밖, 이쪽과 저쪽을 분명하게 나눌 수 있다고 믿었다. 그래야 분명할 것 같았고 단순하게 설명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게 무엇이든 그래야 간단하다고 여겼다. 하지만 그런 건 어디에도 없었다. 나의 마음조차도 분명하게 나룰 수 없었다. 누군가 안이라고 주장하는 공간은 누군가에는 밖이었고 안도 밖도 아닌 곳이 존재했다. 그냥 그렇게 모두가 존재하는 게 세상이라는 걸 알아가고 있다고 할까.


1929년 넬라 라슨이 출간한 『패싱』을 읽으면서 우리가 여전히 안과 밖을 구분하며 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큰소리로 경계하는 대신 조용히 밀어내면서 자신의 자리만을 고집하며 살고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1920년대 미국을 배경으로 한 이 소설은 두 명의 흑인 여성의 삶을 들려준다. 하지만 정확하게 따지자면 백인에 가까운 피부색을 지닌 그녀들은 흑인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스스로가 흑인이 아니라고 생각하면 아닐 수 있으니까. 솔직하게 말하자면 나는 흑인이지만 백인 행세를 한다는 제목(패싱)을 쉽게 상상할 수 없었다. 흑인인데 백인처럼 보인다는 걸 잘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이다. 다만 필요에 의해 내가 아닌 다른 나로 살아가는 삶으로 이해하면 좀 쉬웠다.


어린 시절 같은 동네에서 자란 아이린과 클레어는 어른이 된 후 다시 재회한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클레어가 무성한 소문을 남긴 채 떠나고 십이 년 만이다. 그 사이 둘은 결혼을 했고 아이를 낳았다. 아이린을 먼저 알아본 건 클레어였다. 클레어는 여전히 아름다웠다. 누가 봐도 그녀는 백인의 모습이었다. 백인 남편과 행복하게 지내는 것 같았다. 아이린은 클레어와 재회가 반가우면서도 불편했다. 클레어의 연락을 무시하고 피했지만 그녀가 찾아오자 어쩔 수 없었다.


클레어는 백인 행세를 하는 삶을 탈출하고 싶었다. 흑인 혐오주의자인 남편과의 숨 막히는 생활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그러니 아이린과 다른 친구들을 만나 그들과 보내는 시간을 원했다. 남편이 알아서는 안 되는 시간 말이다. 아이린은 그런 클레어를 통해 묘한 감정을 느낀다. 클레어처럼 완벽하게 백인으로 살지는 않지만 아이린 역시 필요에 따라 백인 행세를 하기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백인 행세를 하면서 백인의 세계에서 누릴 수 있는 혜택을 얻었으면서도 흑인만의 문화를 그리워하고 그 세계로 돌아오기를 갈망하는 클레어를 받아들일 수 없다. 그건 단순하게 질투나 시기로 표현할 수 없는 감정이다. 패싱에 대한 아이린의 생각을 말해주는 이런 부분처럼.


“‘패싱’은 정말 알 수 없다니까. 우리는 패싱에 동의하지 않으면서도 결국 용서하잖아요. 경멸하면서도 동시에 감탄하고요. 묘한 혐오감을 느끼면서 패싱을 피하지만 그걸 보호하기도 하죠.” (110쪽)


그에 비해 클레어는 안타까운 생각이 든다. 모두가 원하는 삶을 사는 것처럼 보이지만 숨겨진 진짜 모습이 탄로 날까 전전긍긍하니까. 자신이 진짜로 원하는 삶을 이제야 알았다고 할까. 그러기에 아이린에게 하소연하는 클레어가 비참하기까지 하다.


“네가 어떻게 알겠니? 어떻게? 넌 자유롭잖아. 행복하고, 그리고…….” “안전하고.” (133쪽)


아이린이 만들어놓은 울타리를 넘보며 침범하려는 클레어로 인해 혼란스럽다. 교묘한 고양이처럼 안전한 그녀의 가정을 흔든다. 그렇다. 클레어는 아이린에게 침범자였다. 그동안 백인 사회에서 혼자 얼마나 힘들고 외로웠을까 마음이 기울다가도 고개를 흔들었다.


소설 속 미국 사회를 그려보는 건 어렵지 않았다. 같은 시대 조선의 모습도 비슷하다고 느꼈다. 신분제도가 사라지고 다른 세계의 문화가 유입하는 시기. 아니 그 시대로 거슬러 올라갈 필요도 없다. 100여 년이 지난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을 봐도 충분하다. 모든 갈등과 불화의 시작은 욕망 때문이었다. 인종차별, 편견, 불평등 그것들의 밑바탕에 자리한 욕망들. 다르다는 것을 잘못이나 낙후로 된 것으로 낙인찍는 세상. 누구나 클레어가 되고 아이린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이 무서울 뿐이다. 어쩌면 우리는 모두 경계의 삶을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자유로운 경계를 원하면서 말이다. 


그녀는 다르지만 똑같은, 두 종류의 충성심 사이에서 옴짝달싹 못 했다. 그녀 자신에 대한 것, 그리고 그녀 자신이 속한 인종에 대한 것. 아, 인종이라니! 그것 때문에 아이린은 결박당한 책 질식하고 있었다. 그녀가 어떤 행동을 취하건, 또는 전혀 취하지 않는다 해도, 어차피 무엇 하나는 무너져 내릴 것이다. (19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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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시 - 내 것이 아닌 아이
애슐리 오드레인 지음, 박현주 옮김 / 인플루엔셜(주)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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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이와 오랜 연애를 끝내고 결혼을 한 친구가 말했다. 같이 있고 싶어서 서로 사랑해서 결혼을 했는데 아이를 낳기 위해 결혼한 것 같은 기분이라고. 친구는 아이를 기다리는 양가 부모님의 시선에 대한 부담을 느꼈다. 물론 정확한 기억은 아니다. 친구의 경우 남매를 낳았다. 결혼과 임신, 출산, 육아는 아주 자연스러운 과정으로 생각한다. 그러니까 보통의 삶, 누구나 누릴 수 있는 그런 일상 말이다. 그 가운데 모성애는 신성하고 숭고하게 다뤄진다. 모든 엄마와 모성애는 따로 떼어놓을 수 없는 거라고. 과연 그럴까? 왜 유독 모성애만 강조되는 걸까. 애슐리 오드레인의 장편소설 『푸시 : 내 것이 아닌 아이』를 읽노라면 마음이 복잡해진다. 가슴 깊은 곳에 추가 하나 매달린 기분이다.


소설은 한 가정의 구성원 각자의 이야기다. 소설 속 화자 블라이스는 완벽한 남자 팍스를 만나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는다. 딸 바이올렛은 무척 예민한 아이였다. 블라이스는 그 아이를 온전히 받아들이기가 힘들었다. 단순한 산후우울증이 아니라 바이올렛은 진짜 이상한 아이였다. 모두에게는 기쁨과 행복을 주는 아이였지만 엄마 블라이스에게는 해당되지 않았다. 블라이스만이 감지할 수 있는 바이올렛이 지닌 공포의 기질이 있었다. 처음엔 블라이스가 자신의 경험으로 인해 잘못 판단하는 것이라 여겼다. 블라이스에게는 아픈 과거 있었다. 자신을 두고 떠난 엄마 세실리아로 인해 자신도 그런 엄마가 될까 두려웠다. 그건 세실리아도 마찬가지였다. 블라이스의 엄마, 세실리아, 세실리아의 엄마 에타에겐 무슨 일이 있었을까. 어쩌면 이 모든 건 블라이스의 외할머니 에타로부터 시작해야 할지도 모른다.


에타는 아버지가 반대하는 남자와 결혼했다. 아버지가 시키는 대로 일만 하다 에타의 남편은 죽었고 그 후 딸 세실리아가 태어났다. 에타는 세실리아를 두고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 세실리아에게 엄마는 사랑의 존재와 대상이 아니었다. 방탕하게 지내는 세실리아는 임신으로 인해 원하지 않은 결혼을 했다. 세실리아는 아무런 준비 없이 엄마가 되었고 블라이스를 감당할 수 없었다. 블라이스를 통해 엄마 에타를 발견할 뿐이다. 아이보다 중요한 게 많았다. 블라이스는 제대로 된 돌봄을 받지 못했고 성장하고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았지만 불안에서 달아날 수 없었다. 유전적으로 모성애가 결핍되었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바이올렛과 블라이스의 관계는 대립 그 자체였다. 소설의 다음 이야기를 읽는 게 힘들 정도다. 그렇다. 이 소설은 불편하고 불편하다. 어린 딸 바이올렛의 모든 것을 객관적으로 묘사하고자 하는 블라이스. 감당할 수 없는 감정의 폭발, 복잡한 내면 심리가 탁월하다. 엄마를 거부하며 엄마가 죽었으면 좋겠다는 바이올렛의 말과 표정은 섬뜩 그 자체다. 어린아이가 할 수 있는 행동이라고 생각할 수 없다. 그런 딸을 보며 블라이스가 느끼는 두려움을 남편 팍스는 인정하지 않는다. 블라이스만이 정확하게 바이올렛을 볼 수 있다는 걸 그는 모른다.


블라이스와 세실리아의 이야기를 접하면서 모성애의 본능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강요당하는 모성애, 스스로 나아질 수 있을 거라 버티는 모성애의 안타까움. 세실리아가 어린 블라이스에게 건네는 말은 진심이었을 것이다. 그녀 역시 좋은 엄마까지는 아니더라도 엄마로 존재하기 위해 노력하기도 했을 것이다. 자신이 받지 못한 돌봄, 체감하지 못했던 그것에 대해 최선을 다했을지도 모른다.


“알지, 우리 자신에게는 스스로 바꿀 수 없는 점이 많이 있어. 그냥 그렇게 태어난 거야. 하지만 가끔 어떤 부분은 본 것에 따라 형성이 되기도 해. 다른 사람에게 어떤 대접을 받았는지에 따라. 어떤 느낌을 받게 되었는지에 따라.” (387쪽)


그냥 그렇게 태어난 삶에 대해 잘못되었다고 말해야 할까. 고칠 수 있다고 달라질 수 있다고 주입해야 옳은 걸까. 마음이 어렵다. 그렇다면 왜 모성애에 대해서만 말하는가. 잔혹하게 슬픈 소설이다. 어딘가 현실 속에서 고통스러운 하루하루를 보낼 블라이스가 있을 것만 같아 아프다. 누군가는 공감과 연대의 힘으로 기억될 것이다. 그리하여 여성으로 엄마로 나로 존재하는 이들에게 블라이스의 다짐이 뜨겁게 날아가 안착한다.


나는 내 실수를 넘어 나아갈 수 있어.

나는 내가 일으킨 상처와 고통에서 치유될 수 있어. (40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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