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싱 - 백인 행세하기
넬라 라슨 지음, 서숙 옮김 / 민음사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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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는 안과 밖, 이쪽과 저쪽을 분명하게 나눌 수 있다고 믿었다. 그래야 분명할 것 같았고 단순하게 설명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게 무엇이든 그래야 간단하다고 여겼다. 하지만 그런 건 어디에도 없었다. 나의 마음조차도 분명하게 나룰 수 없었다. 누군가 안이라고 주장하는 공간은 누군가에는 밖이었고 안도 밖도 아닌 곳이 존재했다. 그냥 그렇게 모두가 존재하는 게 세상이라는 걸 알아가고 있다고 할까.


1929년 넬라 라슨이 출간한 『패싱』을 읽으면서 우리가 여전히 안과 밖을 구분하며 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큰소리로 경계하는 대신 조용히 밀어내면서 자신의 자리만을 고집하며 살고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1920년대 미국을 배경으로 한 이 소설은 두 명의 흑인 여성의 삶을 들려준다. 하지만 정확하게 따지자면 백인에 가까운 피부색을 지닌 그녀들은 흑인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스스로가 흑인이 아니라고 생각하면 아닐 수 있으니까. 솔직하게 말하자면 나는 흑인이지만 백인 행세를 한다는 제목(패싱)을 쉽게 상상할 수 없었다. 흑인인데 백인처럼 보인다는 걸 잘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이다. 다만 필요에 의해 내가 아닌 다른 나로 살아가는 삶으로 이해하면 좀 쉬웠다.


어린 시절 같은 동네에서 자란 아이린과 클레어는 어른이 된 후 다시 재회한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클레어가 무성한 소문을 남긴 채 떠나고 십이 년 만이다. 그 사이 둘은 결혼을 했고 아이를 낳았다. 아이린을 먼저 알아본 건 클레어였다. 클레어는 여전히 아름다웠다. 누가 봐도 그녀는 백인의 모습이었다. 백인 남편과 행복하게 지내는 것 같았다. 아이린은 클레어와 재회가 반가우면서도 불편했다. 클레어의 연락을 무시하고 피했지만 그녀가 찾아오자 어쩔 수 없었다.


클레어는 백인 행세를 하는 삶을 탈출하고 싶었다. 흑인 혐오주의자인 남편과의 숨 막히는 생활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그러니 아이린과 다른 친구들을 만나 그들과 보내는 시간을 원했다. 남편이 알아서는 안 되는 시간 말이다. 아이린은 그런 클레어를 통해 묘한 감정을 느낀다. 클레어처럼 완벽하게 백인으로 살지는 않지만 아이린 역시 필요에 따라 백인 행세를 하기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백인 행세를 하면서 백인의 세계에서 누릴 수 있는 혜택을 얻었으면서도 흑인만의 문화를 그리워하고 그 세계로 돌아오기를 갈망하는 클레어를 받아들일 수 없다. 그건 단순하게 질투나 시기로 표현할 수 없는 감정이다. 패싱에 대한 아이린의 생각을 말해주는 이런 부분처럼.


“‘패싱’은 정말 알 수 없다니까. 우리는 패싱에 동의하지 않으면서도 결국 용서하잖아요. 경멸하면서도 동시에 감탄하고요. 묘한 혐오감을 느끼면서 패싱을 피하지만 그걸 보호하기도 하죠.” (110쪽)


그에 비해 클레어는 안타까운 생각이 든다. 모두가 원하는 삶을 사는 것처럼 보이지만 숨겨진 진짜 모습이 탄로 날까 전전긍긍하니까. 자신이 진짜로 원하는 삶을 이제야 알았다고 할까. 그러기에 아이린에게 하소연하는 클레어가 비참하기까지 하다.


“네가 어떻게 알겠니? 어떻게? 넌 자유롭잖아. 행복하고, 그리고…….” “안전하고.” (133쪽)


아이린이 만들어놓은 울타리를 넘보며 침범하려는 클레어로 인해 혼란스럽다. 교묘한 고양이처럼 안전한 그녀의 가정을 흔든다. 그렇다. 클레어는 아이린에게 침범자였다. 그동안 백인 사회에서 혼자 얼마나 힘들고 외로웠을까 마음이 기울다가도 고개를 흔들었다.


소설 속 미국 사회를 그려보는 건 어렵지 않았다. 같은 시대 조선의 모습도 비슷하다고 느꼈다. 신분제도가 사라지고 다른 세계의 문화가 유입하는 시기. 아니 그 시대로 거슬러 올라갈 필요도 없다. 100여 년이 지난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을 봐도 충분하다. 모든 갈등과 불화의 시작은 욕망 때문이었다. 인종차별, 편견, 불평등 그것들의 밑바탕에 자리한 욕망들. 다르다는 것을 잘못이나 낙후로 된 것으로 낙인찍는 세상. 누구나 클레어가 되고 아이린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이 무서울 뿐이다. 어쩌면 우리는 모두 경계의 삶을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자유로운 경계를 원하면서 말이다. 


그녀는 다르지만 똑같은, 두 종류의 충성심 사이에서 옴짝달싹 못 했다. 그녀 자신에 대한 것, 그리고 그녀 자신이 속한 인종에 대한 것. 아, 인종이라니! 그것 때문에 아이린은 결박당한 책 질식하고 있었다. 그녀가 어떤 행동을 취하건, 또는 전혀 취하지 않는다 해도, 어차피 무엇 하나는 무너져 내릴 것이다. (19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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