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쓰지 않아도 마음산책 짧은 소설
최은영 지음, 김세희 그림 / 마음산책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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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일들은 시간이 지나야 꺼내볼 수 있다. 끝내 꺼내보지 못하는 일들도 있다. 대개 아픔이거나 상처의 일들과 관계가 그러하다. 당시에는 말하지 못하고 이해하지 못했던 상황이나 묵혀두었던 마음이 한꺼번에 터져 나오기도 한다. 늦더라도 터져 나오는 게 낫다는 생각이다. 최은영의 짧은 단편 『애쓰지 않아도』에서도 그런 일과 마음들이 등장한다. 14편의 짧은 이야기는 어느 시절에 대한 그리움과 추억과 동시에 불가해한 마음에 대한 토로이자 좁힐 수 없는 한계에 대한 인정이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만나는 이들은 가족과 친구라 할지라도 모두 타인이다. 그들과는 수평적 관계가 아니라 수직적 관계가 된다. 어른과 아이라서, 친구를 좋아하는 마음이 더 커서, 나보다 아는 게 더 많아서, 도움을 받아야 해서. 이유는 언제나 차고 넘치고 당연한 것처럼 여겨진다.


좋아하는 마음 때문에 애써서 상대의 감정을 읽으려는 태도는 얼마나 조급하고 피곤한가. 그건 상대가 보여 주지 않는다고 여기기에 상처가 된다. 표제작 「애쓰지 않아도」 속 ‘나’와 ‘유나’의 관계가 그러하다. 십 대 시절 친구라는 존재는 절실하고 누구나 좋아하는 친구와 무리가 된다는 건 일종의 특권이다. 유나에게 털어놓은 비밀을 모두가 아는 사실이 되었다는 걸 알았을 때 ‘나’가 느꼈을 배신감을 이루 말할 수 없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별일 아니라는 게 된다. 감정을 다스리지 못했던 시절이고 성숙하지 못했던 나이였으니까. 돌이켜보면 비밀이라고 할 것도 아닌 일상이 아니던가. 그저 이해의 폭이 좁았을 뿐이다. 특히 친구와의 관계에서 우리가 범하는 실수이자 오해이며 안타까운 마음이다.


그럼에도 한 번쯤은 꼬집어 무척 힘들고 서운했다고 말하고 싶은데 여전히 어려운 건 왜일까. 부모에게는 좋기만 했던 시절의 기억이 정작 ‘나’에게는 아니었던 「호시절」속의 나처럼 말이다. 어려운 일이 있을 때마다 도움을 주던 이웃이 다른 이웃에게 보였던 냉대의 시선이 어린 ‘나’에게는 이상했다. 나중에 다른 나라에서 같은 대우를 받고서야 알게 된다. 특정 지역 출신이라는 이유로 다른 피부색이라는 이유로 피하고 혐오하는 삶의 방식은 어디서 시작되었을까.


최은영은 언제나 그렇듯 이번에도 짧은 이야기를 통해 다름을 그대로 인정하는 받아들이는 마음에 대해 말한다. 거기다 잘못된 건 고쳐야 한다는 부드럽고도 강한 의지를 더하는 게 최은영이다. 성당에 다녔던 ‘해주’의 기억으로 시작하는 「저녁 산책」에서 자기주장이 확실한 딸 ‘유리’를 통해 엄마 ‘해주’가 느끼는 감정은 아마도 최은영이 전하고 싶은 게 아닐까 싶다. 성당에서 신부님이 미사를 진행할 때 보조 역할인 ‘복사’에 대해서 들었지만 ‘대복사’를 여자는 할 수 없다는 걸 몰랐다. ‘유리’가 복사를 하며 기대했던 대복사를 하지 못하게 된 이유를 유리는 이해할 수 없었고 다툼이 일어난다. 신부가 되고 싶었던 유리가 여자는 신부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건 당연하다. 왜 신부는 모두 남자일까. 소설이 아니었다면 한 번도 생각하지 않았을 일이다. 신이 과연 그것을 바랐을까.


짧은 호흡의 글이지만 긴 여운을 남긴다. 특히 좋았던 이런 문장들이다. 「우리가 배울 수 없는 것들」속에서 아버지의 죽음에도 장례식에 참석하지 않는 송문을 향한 유리의 마음. 굳이 이해시키려고 강요하지 않는 마음, 끝내 모르고 배울 수 없는 것들이 우리 삶에는 너무도 많으니까.


송문은 유리의 방식이 좋았다. 유리는 송문이 살아온 방식을 모르며, 앞으로도 영원히 알 수 없으리라고 고백한 것이었지만 그 목록의 제목은 ‘우리가 배울 수 없는 것들’이었다. 어쩌면 송문 또한 송문으로 살아온 송문의 마음을 영영 배울 수 없을지도 몰랐다. 자기 마음을 배울 수 없고, 그렇기에 제대로 알 수 없는 채로 살아간다. 송문은 그 사실을 알았다. (「우리가 배울 수 없는 것들」, 95쪽)


안다고 해서 이해한다고 해서 진짜 아는 것도 아니고 이해하는 것도 아니라는 걸 우리는 알고 있지 않나. 척하고 싶은 마음은 필요하지 않다는 걸 말이다. 모르면 모른다고 말하는 일, 이해가 안 된다고 말하는 일이 중요하다. 그렇다고 해서 어긋날 관계라면 지속할 이유가 없으니까. 그러니 코로나로 인해 오랜만에 친구 ‘현주’의 집에 방문한 「무급휴가」 속 ‘미리’는 지날 시절을 떠올린다. 함께 그림을 그렸고 많은 시간을 공유했지만 ‘미리’가 어머니를 힘들어하는 걸 ‘현주’는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나 미리를 향한 설득이나 강요는 하지 않았고 자신에 집에 머무는 미리에게 일정이나 계획에 대해서도 묻지 않고 그냥 기다려준다. 서로를 인정하는 관계는 아름답고 우아하다.


사랑은 애써 증거를 찾아내야 하는 고통스러운 노동이 아니었다. 누군가의 심연 깊은 곳으로 내려가 네발로 기면서 어둠 속에서 두려워하는 일도 아니었다. 사랑은 자연스럽고 부드러운 것이었다. 그 모든 사실을 알려준 건 현주였다. 현주와 함께 있을 때면 미리는 안전함을 느낀다. 현주는 미리의 존재 이외의 것들을 요구하지 않았다. (「무급휴가」, 220쪽)


나의 관계는 어떠한가. 누군가를 있는 그대로 좋아하고 사랑한다고 말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뭔가 더 알고 싶고 뭔가 더 말해주기를 기대한다. 내게도 꺼내놓고 싶지 않은 마음이 있으면서. 터져 나올 것들은 언제나 터져 나오기 마련이니 추측하고 부축일 필요가 없다는 걸 느낀다. 누군가의 심연에 닿는 일은 그만큼 어렵고 힘든 일이니까. 내 심연을 들여다보는 일도 마찬가지고. 애쓰지 않아도 그곳에 닿으면 좋으면 그건 쉽지 않음을 안다. 그러니 할 수 있는 한 더 많이 사랑하며 살아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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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6-16 12:4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2-06-18 17:50   URL
비밀 댓글입니다.

그레이스 2022-06-16 23:4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전작들과 쭉 이어지는 느낌인듯요

자목련 2022-06-18 17:49   좋아요 1 | URL
네, 비슷한 결이에요. 짧은 이야기라 미완성의 느낌이 매력이겠지만 그게 또 아쉽기도 하고요.
 
나인 (양장) 소설Y
천선란 지음 / 창비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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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같은 사람은 나뿐이고 너 같은 사람은 너뿐이다. 그러니 우리는 모두 다르다. 다른 존재라는 사실만 기억해도 다툼이나 충돌이 많이 줄어들 것이다. 손톱 사이에서 새싹이 자라고 푸른빛을 뿜어내는 누군가의 존재에 대해서도 그냥 받아들일 수 있다. 지구가 아닌 다른 행성에서 지구로 온 외계인이라는 사실이 문제가 될 필요가 없었다. 천선란 장편소설 『나인』 속 세 아이들처럼 말이다. 열일 곱의 ‘나인’, ‘현재’, ‘미래’는 서로에게 그런 존재였다. 어떤 일이 있어도 믿어주고 지지해 주는 친구. 설령 비밀이 생겨도 그 비밀에 대해 기다릴 줄 아는 사이였다.


소설은 이모와 함께 사는 평범한 고등학생 ‘나인’이 식물의 소리를 들으면서 시작한다. 식물의 소리를 듣다니, 그게 가능한가. 거기다 손톱 사시에서 새싹이 자란다니, 수상하고 기묘하다. 나인의 변화를 알게 된 이모는 모든 걸 말해준다. 식물의 소리를 들을 수 있는 나인은 피어난 존재였다. 쉽게 말하면 인간이 아닌 외계인 ‘누브족『이었다. 나인에게는 척박하고 메마른 땅에서 생명을 불어넣을 수 있는 막강한 힘을 가진 존재였다. 그건 지구에 있는 다른 누브족이 알아서는 안 될 능력이었다. 이모는 지금처럼 보통의 고등학생으로 지내기를 바랐다.


하지만 나인은 이미 나무와 숲이 들려주는 이야기를 들었다. 나인이 들은 건 2년 전 실종된 같은 학교 선배 ‘박원우’의 죽음에 대한 진실이었다. 단순 가출로 끝났지만 선배의 아버지는 여전히 아들을 찾고 있었다. 박원우를 죽이고 사건을 무마시킨 이들은 선배 ‘권도현’과 함께 다니는 이들이었다. 권도현에게 슬쩍 박원우에 대해 말했다가 멱살을 잡혔다. 그 과정을 목격한 현재는 나인에게 비밀이 생겼음을 감지했다. 미래와 현재와 함께 주말에 영화를 보기로 한 약속을 깰 때부터 느꼈지만 기다리기로 했다.


나인도 미래와 현재가 자신을 불편해하는 걸 알았다. 자신과 같은 누브족인 승택을 만나 인간이 아닌 외계인이라는 사실을 안 것도 그러했으니까. 하지만 진실을 밝혀야 했다. 권도현도 자신의 잘못 때문에 괴로워하고 있었다. 친하게 지냈던 박원우가 외계인을 본다고 말하고 다니지만 않았어도 학원장인 엄마가 싫어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딴 소리 그만하라고, 그냥 밀었을 뿐이다. 사고였는데 목사인 아버지는 박원우를 살리려 하지 않고 돈으로 사건을 은폐했다.


나인은 경찰서에 가서 아무도 믿지 않을 이야기를 말하고 싶었다. 어떻게 해야 진실을 세상에 알려줄 수 있을까. 혼자서는 무리였다. 미래와 현재는 나인의 모든 걸 믿었다. 나인, 미래, 현재, 승택, 네 명의 아이들은 권도현의 자백만이 가장 확실한 방법이라는 걸 알았다. 경찰인 엄마에게 미래도 도움을 청했다. 정말 단순 가출이 맞냐고 물었다. 미래는 박원우가 실종되던 날 우연히 만났다. 울고 있는 미래에게 손수건을 건네주며 했던 말이 떠올랐다. 어린 시절 엄마가 돌아가시고 외계인을 봤다고 말하는 선배의 말은 미래가 아닌 자신에게 하는 말 같았다.


이 세계가 나를 위해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는 일은 괴로운 거 같아. 누군가가 내 세상을 떠나면 그 사람이 찢고 나간 틈으로 또 다른 세상이 보여. (178쪽)


박원우가 본 외계인은 나인과 같은 누브족이었다. 박원우는 진실을 말했지만 아무도 그를 믿어주지 않았다. 나인은 그게 너무 아팠다. 박원우의 죽음에 자신의 책임도 있는 것 같았다. 나인은 권도현에게 자신의 존재를 알리기로 결심한다. 그래야만 자백을 할 것이다. 사건이 일어난 곳, 박원우가 묻힌 곳, 아무것도 자라지 못하는 그 곳, 권도현 앞에서 나인은 누브족이라는 걸 밝힌다. 나인으로 인해 변하는 숲의 모습을 말이다.


물줄기가 뻗어 나가듯 나인의 발끝에서부터 파란빛이 사방으로 퍼졌다. 닿을 수 있는 곳까지 멀리 퍼져 흘러 어둠이 내려앉은 산에 빛을 밝혔다. 풀잎과 잎사귀에, 얇은 가지에도 푸른 혈관이 생기고 입을 오므렸던 꽃잎이 활짝 피었다. (396쪽)


땅에서 피어난 존재, 죽어가는 식물을 살리는 외계인이라는 설정과 그 능력으로 감춰진 비밀의 진실을 파헤치는 과정은 그 자체로 흥미진진하고 멋진 소설이다. 하지만 나인을 믿고 있는 그대로 받아주고 어른들이 저지른 잘못을 바로잡으려는 아이들의 마음이 훨씬 대단하고 아름답다. 선한 마음을 지키려고 애쓰는 모습이 정말 예쁘다. 그러니 누군가에게는 신비로운 SF 소설이겠지만 나에게는 푸른빛을 발하는 성장소설이다. 편을 가르고 나와 다른 이들을 배척하고 진실과 희망을 밀어내는 어두운 세상을 밝고 따뜻하게 변화시킬 기적의 싹을 품은 아이들의 귀한 성장 이야기다.


“나는, 나인이야. 아홉 개의 새싹 중에 가장 늦게 핀 마지막 싹이라 나인이 됐어. 더는 생명이 태어날 수 없는 척박한 땅에서 나는 가장 마지막에 눈을 떴어.” 그러니까, 나인은 기적이라는 뜻이야. (41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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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섬 사비의 기묘한 탄도학 Untold Originals (언톨드 오리지널스)
배명훈 지음 / 자이언트북스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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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을 이해하려고 하면 끝도 없이 어려워진다. 단순하게 재밌다 하고 여기는 게 중요할 때도 있다. 나에게는 SF 장르의 소설이 그러하다. 도무지 가상세계를 상상할 수도 없고 등장하는 용어도 모르겠지만 소설 속 인물이 가고자 하는게 어딘지 안다면 그걸로 충분하다. 배명훈의 SF 소설 『우주섬 사비의 기묘한 탄도학』도 얼핏 제목만으로도 우주와 탄도학이라는 단어때문에 무슨 말일까 싶을 거다. 그러나 걱정할 필요는 없다. 그냥 우리가 사는 세상과 비슷한 이야기로 지구가 아닌 우주섬 사비일 뿐. 화성 이주가 활발하지만 모두 화성에 정착할 수 없는 이들은 스페이스 콜로니에 산다는 정도다.


스페이스 콜로니 사비는 작은 도시였다. 우주선치고는 어마어마하게 거대한 구조물이지만 도시라고 생각하면 그냥 시골에 있는 중소 도시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14쪽)


소설의 배경인 사비엔 시대가 바뀌어도 존재하는 금수저 ‘이초록’의 고모가 있다. 초록이 가려고 했던 곳은 사비가 아니지만 어쨌든 그곳에서 정착한 고모 덕에 초록은 주소국의 국장으로 발령을 받는다. 하는 일이라곤 없는데 고모 ‘이강녕’이 초록을 그곳에 보낸 건 정보를 얻기 위함이다. 주소국에서 유일하게 일을 하는 ‘수미야’를 통해 들은 동심원의 흔적. 어느 날 갑자기 사비 곳곳에 동심원과 근처에서 발견된 총알의 흔적. 누군가 동심원을 과녁 삼아 연습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강녕이 기다렸던 정보도 바로 그것이다.


그러니까 스나이퍼의 등장 말이다. 이강녕은 사비의 주요 인물 ‘장고요’를 돕는데 그가 킬러의 목표라는 걸 알았다. 스나이퍼의 존재를 알았으니 그가 실패하도록 계획을 세우면 된다. 사비는 지구와 다르게 그들만의 물리학이 있으니 어느 지점에서 스나이퍼가 공격을 할지 찾아내 인공 중력의 속도를 변경하면 총알이 목표점이 아닌 휘어지고 장고요를 지킬 수 있다. 현재 사비의 평화를 유지하는 데 장고요가 반드시 필요했다.


초록의 관심은 고모와 다르게 스나이퍼였다. 수미야와 인공지능 ‘윤수정’을 도움을 받아 스나이퍼 ‘한먼지’의 집을 찾아간다. 한먼지는 이미 그곳을 떠났고 초록은 그녀가 남긴 수첩을 살핀다. 사비 곳곳을 다니며 연습을 한 한먼지만큼 사비를 잘 아는 이도 없었다. 그러니 어느 장소에서 장고요를 습격할지 모두 알게 되었다. 장고요가 이동할 때, 중대 선언을 발표할 연단을 놀릴 것이다. 사비의 탄도학을 이길 수 없었지만 한먼지의 실력은 대단했다. 모든 걸 곁에서 지켜본 수미야의 감탄은 당연했다. 사실, 나는 이 부분에서 후련하고 시원한 기분을 느꼈다. 수미야처럼 한먼지를 응원하고 있었다고 할까.


‘먼지 님, 계속해요! 쓸데없는 고민은 제발 그만두시고요! 임무니 꿈이니 그게 뭐가 중요해요? 보이지도 않는 데서 춤추며 날아온 총알이 저렇게 정확하게 한군데에 꽂히는데!’ (166쪽)


장고요는 살아서 사비의 모든 종류의 시민을 위한 통일정부를 선언했고 한먼지는 자신의 역할을 수행했다. 어린 시절부터 마지막 한 발은 악마의 몫이라는 엄마의 말에 갇혀 있던 한먼지를 구한 건 초록이었다. 그는 먼지에게 마지막 한 발도 쏴 버리고 악마가 되라고. 악마의 두려움에 떨지 말고 스스로 악마가 되면 어떠냐고 말이다. 한먼지는 나를 지배하는 악마가 되기로 한다.


한먼지의 개획이 성공했다면 사비는 혼란에 빠졌을 것이다. 장고요를 대신해 사비를 지배하려고 다툼이 일어나고 평화는 사라졌을 것이다. 어쩌면 그런 결말이 SF 적으로 흥미로웠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배명훈은 심각하고 무거움보다는 가볍고 유쾌한 쪽을 택했다. 시대와 공간이 변해도 삶은 이어지고 아름다운 연대로 모두가 공존하는 세상을 바랐다고 할까.


잘 익은 웃음은 금방 번져나가서 누가 먼저 시작했는지도 알 수 없게 옥상을 가득 채워버렸다. 그때 갑자기 해가 졌다. 웃음이 뚝 끊어지고, 침묵이 커튼처럼 옥상을 감쌌다. 옆 건물에서 뭐라는 건지 알 수 없는 욕설이 울려 퍼진 뒤에야 넷은 키득키득 웃음을 되찾았다. (174쪽)


수미야, 한먼지, 이초록, 윤수정이 모인 옥상을 상상하는 일은 어렵지 않았다. 지구와 다르게 하늘을 볼 수 없는 사비지만 왠지 그곳에서는 멋진 하늘을 볼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다음 세대가 꿈꾸고 살아갈 미래의 어느 날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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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에 없는 소리
김지연 지음 / 문학동네 / 202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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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편하고 어색한 분위기를 바꿀 때 필요한 건 무엇일까. 농담이라고 해도 좋겠다. 심각한 상황을 반전시키는 힘, 유머를 겸비한 농담이 지닌 능력이다. 소설에서도 적재적소에 농담이 필요하다. 김지연의 첫 단편집 『마음에 없는 소리』는 일상을 뒤흔드는 사건과 동시에 그것을 위로하고 안아주는 힘이 균형을 이룬 소설집이라 말하고 싶다. 그러니까 농담이 농담으로의 역할과 동시에 격려와 위안을 준다.


특별할 것 없는 일상에서 사건은 무엇일까. 가늠했을 수도 있겠지만 그건 죽음이다. 가까운 이의 죽음, 나만 모르고 있었던 어떤 사정, 그로 인해 고립된 관계에 놓인 것 같은 절망감은 감당할 수없이 커진다. 김지연의 소설은 읽을 때는 모르고 다 읽고 나서야 전해지는 슬픔과 고독이 있다. 나중에야 그때 그 대화가 마지막이란 걸 알고 절규하고 타이밍을 놓치고 후회하면서도 다시 그때로 돌아갈 수 없음에 절망하는 마음들이라고 할까. 그런데 놀라운 건 김지연은 그 모든 걸 그려내는 방식이다. 가볍게 툭 건드린다고 할까. 아무튼 그렇다.


「우리가 해변에서 주운 쓸모없는 것들」속 ‘나’는 오래전 여자친구 ‘진영’과 한적한 바닷가로 휴가를 떠난다. ‘나’가 나체로 수영하고 싶다는 소망을 이루기 위해서다. 나는 진영에 비해 나이가 많아 건강과 미래에 대한 불안이 깊다. 그것을 진영에게는 알리고 싶지 않다. 주변의 시선을 신경 쓸 필요 없는 작은 바닷가에서도 둘의 사랑에는 어떤 결핍이 느껴진다. 나와 진영이 서로에게 감지했을 것들, 그건 무엇일까. 어쩌면 그건 서로를 향한 사랑의 방식이 다르다는 것인지도 모른다. 나에게 있었던 일을 나중에 듣게 된 진영이 건네는 말에 배인 서운함과 쓸쓸함 같은 것. 결국엔 진영과 헤어지고 다른 연인을 만났지만 지난 사랑은 그 자체로 그리움으로 남는다.


“마음 졸이게 했어야지.”

“뭐하러.“

“같이 졸이게 해줬어야지.” (「우리가 해변에서 주운 쓸모없는 것들」, 30쪽)


등단작 「작정기」에서도 그런 애틋한 그리움이 묻어난다. ‘나’와 ‘원진’은 원진이 남편과의 이혼 소식을 전한 날 충동적으로 여행 계획을 세운다. 비행기표를 끊고 계획을 세우지만 정작 원진이 할아버지가 돌아가셔서 나 혼자 여행을 떠난다. 원진의 계획대로 낯선 도시를 여행하다 그곳에서 ‘유코’를 만나 도움을 받는다. 여행 이야기를 나누다 죽은 유코가 원진을 대신해 여행을 온 것으로 생각하는 걸 알면서도 바로 잡지 않는다. 통역이 어렵기도 하고 유코를 다시 만날 일도 없다고 여겼으니까. 그리고 원진이 사고로 죽었다. 몇 달 후 한국에 업무차 방문한 유코는 여행에서 나눈 대화 속 친구의 죽음을 기억하고 자신이 만든 정원 모형을 선물한다. 나는 끝내 원진을 좋아하면서도 말하지 못했다.


나는 내 좌표가 어디인지 정확하게 찍으려는 사람들 앞에서 늘 애매모호한 사람이 되어 얼버무렸다. 하지만 그 순간만큼은 내가 어디에 서 있는지를 분명히 말했어야 했는지도 모른다. 큰 것을 무화 시키는 작은 이름들. ( 「작정기」, 114쪽)





「우리가 해변에서 주운 쓸모없는 것들」, 「작정기」, 「사랑하는 일」처럼 김지연의 소설에 등장하는 여성 연인은 여전히 사회의 시선에서 안전과 안정을 느끼지 못한다. 「작정기」속 나처럼 자신의 애매모호하거나 「사랑하는 일」의 은호처럼 가족과 갈등을 이어간다. 우리 사회가 겪는 자화상인 것이다. 그럼에도 그들의 사랑은 아름답다. 누군가 사랑하는 일, 그 상대가 누구든 사랑은 소중하고 귀한 일이니까.


가족들을 사랑하는 건 이미 주어진 일 같은 거였는데, 그 사랑을 이어가는 일, 계속해서 사랑하는 일은 쉽지가 않았다. 무조건적인 사랑 같은 건 없으니까. 내가 영지를 계속해서 사랑하는 일이 가능한 것은 우리가 합의한 일종의 공동선을 향해 함께 나아가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우리는 매일 다른 사람이 되고 매일 사랑하는 일을 한다. ( 「사랑하는 일」, 252쪽 )


비단 여성 연인에 대한 시선만 그런 게 아니다. 결혼을 하지 않거나 늦어진 여성에 대한 주변의 편견은 여전하다. 고향에 좋은 직장이 있다고 내려오라는 「굴 드라이브」의 가족이 말하는 직장은 어이없게도 결혼을 위한 선 자리였다. 재래시장에서 할머니가 하던 식당에서 새롭게 김밥 가게를 차리는 「마음에 없는 소리」 속 서른다섯의 주인공을 응원하는 이가 없다. 잘 할 수 있다고 괜찮다는 말이면 충분한데 말이다. 그러나 소설 속 ‘나’는 꿋꿋하게 자신의 삶을 나간다. 다시 일자리를 찾아야 하고 가게는 어떻게 될지 알 수 없지만 그들은 미래를 향해 전진한다.


우리가 불행을 극복하는 방식은 태연해지는 것이었다. 낫는다는 것을 믿고 그 미래에 이미 도래한 것처럼 굴기. 그렇게 하면 반복되는 불행들을 점점 대수롭지 않게 여길 수 있었다. ( 「마음에 없는 소리」, 167쪽)


어쩌면 삶이란 그런 것인지도 모른다. 예측할 수 없기에 불안하면서도 기대할 수 있기에 내일을 기다리고 살아간다. 물론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그렇기에 누군가에게 기대고 그를 사랑하는 건 아닐까. 그 사랑이 이뤄지거나 완벽하지 않더라도 그 자체가 살아 있다는 증거이므로. 그래서 연인처럼 친구처럼 의지했던 선생님의 죽음에 힘들어하는 「그런 나약한 말들」의 ‘나’는 친구로부터 선생님이 자신을 힘들어하고 한심하게 여겼다는 말을 듣고도 그를 향한 마음을 접지 않기로 한다.


누구에게나 열린 휴식의 공간인 공원에서 불미스러운 사건의 당사자가 된 ‘나’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공원에서」도 그 마음을 마주한다. 유부남인 남자친구를 만나러 가는 길에 말다툼 끝에 폭력을 당한 일, 그 관계가 드러날까 오히려 나에게 예민하다 말하는 남자친구. 부당한 폭력이 아니라 어디를 가는 길이냐는 질문으로 모아진다. 안으로 깊게 숨어버리고 싶은 게 당연할 터. 하지만 나는 그만큼 더 삶에 대한 의지를 갖는다.


문득 나는 내가 사는 걸 무척이나 좋아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건 처음에는 너무 뜬금없기 이상한 감정처럼 느껴졌는데 점점 선명해졌다. 뜻대로 된 적은 별로 없지만 나는 사는 게 좋았다. 내가 겪은 모든 모욕들을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극복해 내고 싶을 만큼 좋아졌다. 그렇게 해서라도 사는 건 좋다. 살아가 개 같은 것들을 쓰다듬는 것은 특히나 더 좋다. ( 「공원에서」, 281쪽)


이처럼 김지연의 소설 속 인물은 어떤 마음을 쉽게 포기하지 않는다. 힘들고 아파서 그냥 던져버리고 놓아버리고 싶은 그 작은 마음을 단단히 붙잡는다. 스스로 자신을 다잡는다. 그 모습이 대견하고 아프다. 그들이 나와 우리라는 걸 알기 때문에 그 마음을 응원하고 꽉 안아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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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쟝쟝 2022-06-08 00:2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서른다섯 ㅠㅡㅠ 응원이 필요하다 ㅠㅡㅠ 와 작년에 저도 휴직 상태여서 ㅠㅠㅠ 하…*
전 꿋꿋합니다 ㅠㅠ 아닙니다 꿋꿋합니다 아닙니다 이 소설을 읽어야겟다…

자목련 2022-06-09 08:41   좋아요 1 | URL
그 시간을 잘 지내고 다음의 시간으로 건너온 공쟝쟝 님은 반듯하고 꼿꼿하지요. 김지연의 소설은 유연하게 슬그머니 뭔가를 밀어준다고 할까요.나쁘지 않았어요.

얄라알라 2022-06-08 00:4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불행을 극복하는 방법이 태연한 척 하는, 아니 태연해지는 것이라는 문장을 곱씹어 봅니다. 가능한 걸까... 태연해지기까지 얼마나 애써야할까...

자목련 2022-06-09 08:38   좋아요 1 | URL
그러게요. 얼마만큼 단단해지는 연습을 하면 가능할까요. 그럼에도 이 문장이 눈에 들어오는 건 어쩔 수 없는 것 같아요.
 
가장 질긴 족쇄, 가장 지긋지긋한 족속, 가족 새소설 11
류현재 지음 / 자음과모음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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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대 간의 갈등은 봉합하기 어려운 지경이다. 사회 어디에서나 가장 힘든 문제가 되었다. 경험을 토대로 건네는 조언은 잔소리가 되었고 자신의 상황이 제일 어렵고 중요할 뿐이다. 그건 가족 간에도 마찬가지다. 가족은 세상에서 가장 극복하기 힘든 관계 일지도 모른다. 어디서 잘못되었는지 알 수 없다. 가족이라서 그렇다는 근본적인 대답만 돌아올 뿐이다. 『가장 질긴 족쇄, 가장 지긋지긋한 족속, 가족』란 제목만으로도 충분히 내용을 예상하게 만드는 류현재의 소설 속 가족도 그러하다.


거동이 불편한 어머니는 입에 든 찹쌀떡 때문에 숨이 막혀 죽어간다. 그 곁에 아버지도 칼에 찔려 죽음을 맞는다. 부부는 한날한시에 세상을 떠난다. 부족할 것 없는 부부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과연 이런 참혹한 사건의 범인은 누구일까. 뉴스에 등장하는 존속살해인 것일까. 제목을 떠올리면 그게 정답일 것 같은데. 이 비극의 시작은 어디서 시작된 것일까?


아버지가 모임에 나가고 어머니 혼자 산에 오르다 쓰러지는 사건이 발생하다. 요양원이 아닌 집에서 지내기를 원하는 엄마. 아버지 혼자 엄마를 감당하기는 어렵고 누군가의 도움이 절실하다. 부부에게는 아들 둘 딸 둘 자녀가 있다. 큰 아들은 의사, 큰 딸은 선생님, 이혼해 아들을 키우며 어린이집 교사를 하는 둘째 딸, 부모와 함께 살면서 공무원 공부를 하는 막내. 이미 익숙한 전개로 느껴지는 건 나뿐일까. 둘째 딸이 아들과 함께 집으로 들어와 부모를 모신다.


돌봄은 어렵고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다. 자신의 입장과 처지만 생각할 뿐이다. 돌봄을 받는 부모는 둘째 딸이 마음에 차지 않고 딸은 그런 부모가 서운하다. 모든 걸 자신에 맡긴 형제에게도 마찬가지다. 소설은 둘째 딸을 시작으로 가족 가족 저마다의 속마음을 보여준다. 그들에게 어떤 사정이 있는지 가족에게 솔직하게 터놓고 말하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인지 말이다.


둘째 김은희는 일을 그만두고 엄마를 간호하는 게 당연하다고 여겼다. 잘한 선택이라고 말이다. 하지만 부모님의 요구 조건과 잔소리는 혼자 감당하기 어려웠다. 뭔가 탈출구가 필요했고 그건 술과 동생 친구인 세탁소 아들 광수였다. 의사로 성공한 큰아들 김현창은 부모가 환자처럼 여겨진다. 어머니가 위급할 때마다 자신을 찾는 아버지와 가족들이 부담스럽고 힘들다. 가족으로부터 도피처로 결혼을 선택한 큰 딸 김인경은 일을 하면서 시부모를 모시고 살았다. 겨우 끝났다고 여겼는데 엄마가 쓰러진 것이다. 둘째가 모시기로 했으니 경제적으로 보태면 된다고 여겼다. 막내 김현기는 자신을 향한 기대와 염려가 불편하다.


어쩌면 부모의 죽음은 소설 속 모두가 바라는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이제는 말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어머니는 가족의 짐이 되기 싫었고 아들의 교통사고로 인해 막대한 합의금이 필요했던 큰 딸은 부모의 집을 둘째에게 줄 수만은 없었다. 자신을 무시하는 언니와 싸우고 집을 뛰쳐나간 둘째 딸은 가족이라면 지긋지긋했다. 시도 때도 없이 전화를 걸어오는 아버지와 형제들 때문에 막내는 일터에서 집중할 수 없었다. 둘째 딸의 말을 한 번쯤 들어보고 한 번쯤 해 본 이들이 많을 것이다.


“나한텐 세상에서 가장 끔찍한 게 가족이에요. 가장 질진 족쇄, 가장 지긋지긋한 족속이 가족이라고요!” (194쪽)


범인이 누구일까 찾아가는 과정은 흥미롭지만 헛헛함과 쓸쓸함을 감출 수 없다. 가족이라는 게 무엇일까. 부모는 무엇이며 자식은 무엇인가. 누구도 막을 수 없는 늙음은 어떻게 받아들이고 대처해야 할까. 오랜만에 가족이 모여 앉은 명절이나 가족 행사에서 말다툼이 싸움으로 이어지는 건 그만큼 소통이 없었던 때문일까. 사느라 자주 만나지 못한 탓일까. 여전히 모르겠다. 그러니 막내 김현기의 말처럼 핏줄이라는 게 과연 의미가 있을까 싶은 마음이 든다.


핏줄이라는 말은 사기다. 진짜 피로 연결되어 있지도 않은데, 연결된 것 같은 착각을 하게 하니까. 혹시라도, 눈에 보이지 않아도 핏줄이 연결돼 있다면 그건 아래로만 향해 있을 것이다. 부모는 자식에게 핏줄이 이어져 있는데, 자식의 핏줄은 부모가 아니라 자신의 자식을 향해서만 뻗어있을 테니까. 그리고 자식을 향한 핏줄이 연결되는 순간, 부모 쪽에서 온 핏줄은 막혀버린다. 거추장스러운 넝쿨 취급을 받게 되는 것이다. (161쪽)


부모 없이 존재하는 이는 없다. 설령 그 부모가 누구인지 알 수 없을지라도. 끝까지 참담함을 걷어내지 못하는 소설의 마지막 작가의 말에서 순간 울컥하게 된다. 이제 내게 부모가 없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앞서 떠난 형제의 얼굴이 떠오르는 건 앞으로 고아로 살아갈 내 삶이 서글퍼서 그런지도 모른다.


부모가 늙고 병들게 되면 어느 가족이나 거처야 하는 고민과 선택의 순간들, 길고 긴 간병의 세월 동안 겪게 되는 고립감과 외로움. 다른 형제, 자식들에 대한 서운함과 원망, 죄책감, 분노, 가족들이란 말만 들어도 치밀어 오르는 피곤과 싫증에 대하여. 당신만 이기적이어서 그런 게 아니라고, 당신네 가족만 이상해서 그런 게 아니라고 따듯한 위로의 말을 전하고 싶다. (작가의 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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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어리랏다 2022-07-18 13: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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