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에 없는 소리
김지연 지음 / 문학동네 / 202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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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편하고 어색한 분위기를 바꿀 때 필요한 건 무엇일까. 농담이라고 해도 좋겠다. 심각한 상황을 반전시키는 힘, 유머를 겸비한 농담이 지닌 능력이다. 소설에서도 적재적소에 농담이 필요하다. 김지연의 첫 단편집 『마음에 없는 소리』는 일상을 뒤흔드는 사건과 동시에 그것을 위로하고 안아주는 힘이 균형을 이룬 소설집이라 말하고 싶다. 그러니까 농담이 농담으로의 역할과 동시에 격려와 위안을 준다.


특별할 것 없는 일상에서 사건은 무엇일까. 가늠했을 수도 있겠지만 그건 죽음이다. 가까운 이의 죽음, 나만 모르고 있었던 어떤 사정, 그로 인해 고립된 관계에 놓인 것 같은 절망감은 감당할 수없이 커진다. 김지연의 소설은 읽을 때는 모르고 다 읽고 나서야 전해지는 슬픔과 고독이 있다. 나중에야 그때 그 대화가 마지막이란 걸 알고 절규하고 타이밍을 놓치고 후회하면서도 다시 그때로 돌아갈 수 없음에 절망하는 마음들이라고 할까. 그런데 놀라운 건 김지연은 그 모든 걸 그려내는 방식이다. 가볍게 툭 건드린다고 할까. 아무튼 그렇다.


「우리가 해변에서 주운 쓸모없는 것들」속 ‘나’는 오래전 여자친구 ‘진영’과 한적한 바닷가로 휴가를 떠난다. ‘나’가 나체로 수영하고 싶다는 소망을 이루기 위해서다. 나는 진영에 비해 나이가 많아 건강과 미래에 대한 불안이 깊다. 그것을 진영에게는 알리고 싶지 않다. 주변의 시선을 신경 쓸 필요 없는 작은 바닷가에서도 둘의 사랑에는 어떤 결핍이 느껴진다. 나와 진영이 서로에게 감지했을 것들, 그건 무엇일까. 어쩌면 그건 서로를 향한 사랑의 방식이 다르다는 것인지도 모른다. 나에게 있었던 일을 나중에 듣게 된 진영이 건네는 말에 배인 서운함과 쓸쓸함 같은 것. 결국엔 진영과 헤어지고 다른 연인을 만났지만 지난 사랑은 그 자체로 그리움으로 남는다.


“마음 졸이게 했어야지.”

“뭐하러.“

“같이 졸이게 해줬어야지.” (「우리가 해변에서 주운 쓸모없는 것들」, 30쪽)


등단작 「작정기」에서도 그런 애틋한 그리움이 묻어난다. ‘나’와 ‘원진’은 원진이 남편과의 이혼 소식을 전한 날 충동적으로 여행 계획을 세운다. 비행기표를 끊고 계획을 세우지만 정작 원진이 할아버지가 돌아가셔서 나 혼자 여행을 떠난다. 원진의 계획대로 낯선 도시를 여행하다 그곳에서 ‘유코’를 만나 도움을 받는다. 여행 이야기를 나누다 죽은 유코가 원진을 대신해 여행을 온 것으로 생각하는 걸 알면서도 바로 잡지 않는다. 통역이 어렵기도 하고 유코를 다시 만날 일도 없다고 여겼으니까. 그리고 원진이 사고로 죽었다. 몇 달 후 한국에 업무차 방문한 유코는 여행에서 나눈 대화 속 친구의 죽음을 기억하고 자신이 만든 정원 모형을 선물한다. 나는 끝내 원진을 좋아하면서도 말하지 못했다.


나는 내 좌표가 어디인지 정확하게 찍으려는 사람들 앞에서 늘 애매모호한 사람이 되어 얼버무렸다. 하지만 그 순간만큼은 내가 어디에 서 있는지를 분명히 말했어야 했는지도 모른다. 큰 것을 무화 시키는 작은 이름들. ( 「작정기」, 114쪽)





「우리가 해변에서 주운 쓸모없는 것들」, 「작정기」, 「사랑하는 일」처럼 김지연의 소설에 등장하는 여성 연인은 여전히 사회의 시선에서 안전과 안정을 느끼지 못한다. 「작정기」속 나처럼 자신의 애매모호하거나 「사랑하는 일」의 은호처럼 가족과 갈등을 이어간다. 우리 사회가 겪는 자화상인 것이다. 그럼에도 그들의 사랑은 아름답다. 누군가 사랑하는 일, 그 상대가 누구든 사랑은 소중하고 귀한 일이니까.


가족들을 사랑하는 건 이미 주어진 일 같은 거였는데, 그 사랑을 이어가는 일, 계속해서 사랑하는 일은 쉽지가 않았다. 무조건적인 사랑 같은 건 없으니까. 내가 영지를 계속해서 사랑하는 일이 가능한 것은 우리가 합의한 일종의 공동선을 향해 함께 나아가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우리는 매일 다른 사람이 되고 매일 사랑하는 일을 한다. ( 「사랑하는 일」, 252쪽 )


비단 여성 연인에 대한 시선만 그런 게 아니다. 결혼을 하지 않거나 늦어진 여성에 대한 주변의 편견은 여전하다. 고향에 좋은 직장이 있다고 내려오라는 「굴 드라이브」의 가족이 말하는 직장은 어이없게도 결혼을 위한 선 자리였다. 재래시장에서 할머니가 하던 식당에서 새롭게 김밥 가게를 차리는 「마음에 없는 소리」 속 서른다섯의 주인공을 응원하는 이가 없다. 잘 할 수 있다고 괜찮다는 말이면 충분한데 말이다. 그러나 소설 속 ‘나’는 꿋꿋하게 자신의 삶을 나간다. 다시 일자리를 찾아야 하고 가게는 어떻게 될지 알 수 없지만 그들은 미래를 향해 전진한다.


우리가 불행을 극복하는 방식은 태연해지는 것이었다. 낫는다는 것을 믿고 그 미래에 이미 도래한 것처럼 굴기. 그렇게 하면 반복되는 불행들을 점점 대수롭지 않게 여길 수 있었다. ( 「마음에 없는 소리」, 167쪽)


어쩌면 삶이란 그런 것인지도 모른다. 예측할 수 없기에 불안하면서도 기대할 수 있기에 내일을 기다리고 살아간다. 물론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그렇기에 누군가에게 기대고 그를 사랑하는 건 아닐까. 그 사랑이 이뤄지거나 완벽하지 않더라도 그 자체가 살아 있다는 증거이므로. 그래서 연인처럼 친구처럼 의지했던 선생님의 죽음에 힘들어하는 「그런 나약한 말들」의 ‘나’는 친구로부터 선생님이 자신을 힘들어하고 한심하게 여겼다는 말을 듣고도 그를 향한 마음을 접지 않기로 한다.


누구에게나 열린 휴식의 공간인 공원에서 불미스러운 사건의 당사자가 된 ‘나’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공원에서」도 그 마음을 마주한다. 유부남인 남자친구를 만나러 가는 길에 말다툼 끝에 폭력을 당한 일, 그 관계가 드러날까 오히려 나에게 예민하다 말하는 남자친구. 부당한 폭력이 아니라 어디를 가는 길이냐는 질문으로 모아진다. 안으로 깊게 숨어버리고 싶은 게 당연할 터. 하지만 나는 그만큼 더 삶에 대한 의지를 갖는다.


문득 나는 내가 사는 걸 무척이나 좋아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건 처음에는 너무 뜬금없기 이상한 감정처럼 느껴졌는데 점점 선명해졌다. 뜻대로 된 적은 별로 없지만 나는 사는 게 좋았다. 내가 겪은 모든 모욕들을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극복해 내고 싶을 만큼 좋아졌다. 그렇게 해서라도 사는 건 좋다. 살아가 개 같은 것들을 쓰다듬는 것은 특히나 더 좋다. ( 「공원에서」, 281쪽)


이처럼 김지연의 소설 속 인물은 어떤 마음을 쉽게 포기하지 않는다. 힘들고 아파서 그냥 던져버리고 놓아버리고 싶은 그 작은 마음을 단단히 붙잡는다. 스스로 자신을 다잡는다. 그 모습이 대견하고 아프다. 그들이 나와 우리라는 걸 알기 때문에 그 마음을 응원하고 꽉 안아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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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쟝쟝 2022-06-08 00:2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서른다섯 ㅠㅡㅠ 응원이 필요하다 ㅠㅡㅠ 와 작년에 저도 휴직 상태여서 ㅠㅠㅠ 하…*
전 꿋꿋합니다 ㅠㅠ 아닙니다 꿋꿋합니다 아닙니다 이 소설을 읽어야겟다…

자목련 2022-06-09 08:41   좋아요 1 | URL
그 시간을 잘 지내고 다음의 시간으로 건너온 공쟝쟝 님은 반듯하고 꼿꼿하지요. 김지연의 소설은 유연하게 슬그머니 뭔가를 밀어준다고 할까요.나쁘지 않았어요.

얄라알라 2022-06-08 00:4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불행을 극복하는 방법이 태연한 척 하는, 아니 태연해지는 것이라는 문장을 곱씹어 봅니다. 가능한 걸까... 태연해지기까지 얼마나 애써야할까...

자목련 2022-06-09 08:38   좋아요 1 | URL
그러게요. 얼마만큼 단단해지는 연습을 하면 가능할까요. 그럼에도 이 문장이 눈에 들어오는 건 어쩔 수 없는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