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쓰지 않아도 마음산책 짧은 소설
최은영 지음, 김세희 그림 / 마음산책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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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일들은 시간이 지나야 꺼내볼 수 있다. 끝내 꺼내보지 못하는 일들도 있다. 대개 아픔이거나 상처의 일들과 관계가 그러하다. 당시에는 말하지 못하고 이해하지 못했던 상황이나 묵혀두었던 마음이 한꺼번에 터져 나오기도 한다. 늦더라도 터져 나오는 게 낫다는 생각이다. 최은영의 짧은 단편 『애쓰지 않아도』에서도 그런 일과 마음들이 등장한다. 14편의 짧은 이야기는 어느 시절에 대한 그리움과 추억과 동시에 불가해한 마음에 대한 토로이자 좁힐 수 없는 한계에 대한 인정이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만나는 이들은 가족과 친구라 할지라도 모두 타인이다. 그들과는 수평적 관계가 아니라 수직적 관계가 된다. 어른과 아이라서, 친구를 좋아하는 마음이 더 커서, 나보다 아는 게 더 많아서, 도움을 받아야 해서. 이유는 언제나 차고 넘치고 당연한 것처럼 여겨진다.


좋아하는 마음 때문에 애써서 상대의 감정을 읽으려는 태도는 얼마나 조급하고 피곤한가. 그건 상대가 보여 주지 않는다고 여기기에 상처가 된다. 표제작 「애쓰지 않아도」 속 ‘나’와 ‘유나’의 관계가 그러하다. 십 대 시절 친구라는 존재는 절실하고 누구나 좋아하는 친구와 무리가 된다는 건 일종의 특권이다. 유나에게 털어놓은 비밀을 모두가 아는 사실이 되었다는 걸 알았을 때 ‘나’가 느꼈을 배신감을 이루 말할 수 없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별일 아니라는 게 된다. 감정을 다스리지 못했던 시절이고 성숙하지 못했던 나이였으니까. 돌이켜보면 비밀이라고 할 것도 아닌 일상이 아니던가. 그저 이해의 폭이 좁았을 뿐이다. 특히 친구와의 관계에서 우리가 범하는 실수이자 오해이며 안타까운 마음이다.


그럼에도 한 번쯤은 꼬집어 무척 힘들고 서운했다고 말하고 싶은데 여전히 어려운 건 왜일까. 부모에게는 좋기만 했던 시절의 기억이 정작 ‘나’에게는 아니었던 「호시절」속의 나처럼 말이다. 어려운 일이 있을 때마다 도움을 주던 이웃이 다른 이웃에게 보였던 냉대의 시선이 어린 ‘나’에게는 이상했다. 나중에 다른 나라에서 같은 대우를 받고서야 알게 된다. 특정 지역 출신이라는 이유로 다른 피부색이라는 이유로 피하고 혐오하는 삶의 방식은 어디서 시작되었을까.


최은영은 언제나 그렇듯 이번에도 짧은 이야기를 통해 다름을 그대로 인정하는 받아들이는 마음에 대해 말한다. 거기다 잘못된 건 고쳐야 한다는 부드럽고도 강한 의지를 더하는 게 최은영이다. 성당에 다녔던 ‘해주’의 기억으로 시작하는 「저녁 산책」에서 자기주장이 확실한 딸 ‘유리’를 통해 엄마 ‘해주’가 느끼는 감정은 아마도 최은영이 전하고 싶은 게 아닐까 싶다. 성당에서 신부님이 미사를 진행할 때 보조 역할인 ‘복사’에 대해서 들었지만 ‘대복사’를 여자는 할 수 없다는 걸 몰랐다. ‘유리’가 복사를 하며 기대했던 대복사를 하지 못하게 된 이유를 유리는 이해할 수 없었고 다툼이 일어난다. 신부가 되고 싶었던 유리가 여자는 신부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건 당연하다. 왜 신부는 모두 남자일까. 소설이 아니었다면 한 번도 생각하지 않았을 일이다. 신이 과연 그것을 바랐을까.


짧은 호흡의 글이지만 긴 여운을 남긴다. 특히 좋았던 이런 문장들이다. 「우리가 배울 수 없는 것들」속에서 아버지의 죽음에도 장례식에 참석하지 않는 송문을 향한 유리의 마음. 굳이 이해시키려고 강요하지 않는 마음, 끝내 모르고 배울 수 없는 것들이 우리 삶에는 너무도 많으니까.


송문은 유리의 방식이 좋았다. 유리는 송문이 살아온 방식을 모르며, 앞으로도 영원히 알 수 없으리라고 고백한 것이었지만 그 목록의 제목은 ‘우리가 배울 수 없는 것들’이었다. 어쩌면 송문 또한 송문으로 살아온 송문의 마음을 영영 배울 수 없을지도 몰랐다. 자기 마음을 배울 수 없고, 그렇기에 제대로 알 수 없는 채로 살아간다. 송문은 그 사실을 알았다. (「우리가 배울 수 없는 것들」, 95쪽)


안다고 해서 이해한다고 해서 진짜 아는 것도 아니고 이해하는 것도 아니라는 걸 우리는 알고 있지 않나. 척하고 싶은 마음은 필요하지 않다는 걸 말이다. 모르면 모른다고 말하는 일, 이해가 안 된다고 말하는 일이 중요하다. 그렇다고 해서 어긋날 관계라면 지속할 이유가 없으니까. 그러니 코로나로 인해 오랜만에 친구 ‘현주’의 집에 방문한 「무급휴가」 속 ‘미리’는 지날 시절을 떠올린다. 함께 그림을 그렸고 많은 시간을 공유했지만 ‘미리’가 어머니를 힘들어하는 걸 ‘현주’는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나 미리를 향한 설득이나 강요는 하지 않았고 자신에 집에 머무는 미리에게 일정이나 계획에 대해서도 묻지 않고 그냥 기다려준다. 서로를 인정하는 관계는 아름답고 우아하다.


사랑은 애써 증거를 찾아내야 하는 고통스러운 노동이 아니었다. 누군가의 심연 깊은 곳으로 내려가 네발로 기면서 어둠 속에서 두려워하는 일도 아니었다. 사랑은 자연스럽고 부드러운 것이었다. 그 모든 사실을 알려준 건 현주였다. 현주와 함께 있을 때면 미리는 안전함을 느낀다. 현주는 미리의 존재 이외의 것들을 요구하지 않았다. (「무급휴가」, 220쪽)


나의 관계는 어떠한가. 누군가를 있는 그대로 좋아하고 사랑한다고 말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뭔가 더 알고 싶고 뭔가 더 말해주기를 기대한다. 내게도 꺼내놓고 싶지 않은 마음이 있으면서. 터져 나올 것들은 언제나 터져 나오기 마련이니 추측하고 부축일 필요가 없다는 걸 느낀다. 누군가의 심연에 닿는 일은 그만큼 어렵고 힘든 일이니까. 내 심연을 들여다보는 일도 마찬가지고. 애쓰지 않아도 그곳에 닿으면 좋으면 그건 쉽지 않음을 안다. 그러니 할 수 있는 한 더 많이 사랑하며 살아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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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6-16 12:4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2-06-18 17:50   URL
비밀 댓글입니다.

그레이스 2022-06-16 23:4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전작들과 쭉 이어지는 느낌인듯요

자목련 2022-06-18 17:49   좋아요 1 | URL
네, 비슷한 결이에요. 짧은 이야기라 미완성의 느낌이 매력이겠지만 그게 또 아쉽기도 하고요.